12월14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욜 열리는 수요 집회가 1000회를 맞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한 평화비도 세워졌고.

 

20년이다. 20년.    

1992년1월8일 수요일, 당시 일본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집회의 나이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 만20년이 된다.

 

그래, 20년, 1000회.

연 인원 5만 명 규모로 커지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사실 자랑스러운 기록은 아니다. 되레 서글프고 억울하다. 

20년, 1000회를 바꿔말하면,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생존해 계시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도 234명에서 63명으로 줄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눈치 보시느라 그런지, 사과나 배상 요구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었거나 말거나, 그런 피해 국민이 집회를 하거나 말거나. 대한민국 정부의 초지일관.

 

다만 위안이라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희망 승합차'를 마련했다는 것.

낡고 잔고장 많은 승합차를 새로 바꿨단다. 시민들이 푼돈을 모아 그리 했다.

실은 협의회에서 자동차회사들에 후원을 요청했다. 

올해 돈 엄청 긁어모았다는 현대차가 0순위였겠지. 

그런데 '회사 이미지와 맞지 않다'면서 후원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건 어떤 맥락인가!

보다 못한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서 한두푼씩 모아 할머니들의 승합차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국가나 대부분 기업은 '사회'와 동떨어져 따로국밥처럼 노는 잡놈들 같다.

 

수요집회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수요일마다 할머니들과 인민들이 집회를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더구나 이런 추운 겨울날에!

그냥 집회 말고 잔치나 축제 같은 거나 한다면 모를까.

집회가 없어지는 날은 바로,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 이뤄졌단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평화는 이토록 모질고 슬픈 과정을 거쳐야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63명의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그 과거는 씻은 듯이 없어지는 것인가. 개새끼들.

 

세상은 절망이 아닌 적이 없다만, 절망을 삶의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오늘 또한 허그데이니까, 마음으로라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꼬옥 안아주시압.

  

평화롭고 착한 멜로디를 지닌 모차르트의 '아다지오 E장조 K.261' 들으시면서, 

편안한 겨울밤. 굿럭,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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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말부로, 지구는 70억 명을 품었다.

60억 명을 넘어선 지 12년.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10억에서 20억까지는 10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20억에서 30억은 32년이 걸렸다. 1987년부터는 매 12년마다 10억 명씩 증가한다. 지금,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기 위해 응애~하고 태어나는 아이는 1초에 2.5명, 1분에 150명이다. 그리 보면, 100억 명도 멀지 않다. 2050년경이면 그리 된다는 전망이다. 

 

그것으로써, 나는 내가 가끔 꺼내던 말을 바꿔야했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진실이 있다. 전 세계에는 60억 개의 진실이 있다는 말을 70억 개의 진실로. 내가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삶의 실체는 더 늘었다. 구체적인 존엄의 수도 늘었다. 그러나 과연 지구는 그렇게 생각할까? 아닌 것 같다. 그 전에도 세계의 절반은 굶주렸다. 아마도, 늘어난 인구만큼 굶주림의 숫자도 비례해서 늘었을 것이다. 이른바 문명은, 애 낳기의 혹독함을 안다.

 

지구상 30억 명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산다. 

10억 명은 깨끗한 물조차 마실 수 없는 환경에 노출돼 있다. 하루 1.24달러 이하의 빈곤선 아래 10억 명 이상이 있다. 그 때문에 5초에 1명, 하루에 1만8000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하루 8달러, 우리 돈 1만원 안팎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2/3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와 닿는가? 

주로 수치로만 언급되는 이 비극 앞에,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많은 사람들, 그렇지 않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다를 것이다. 많은 구호NGO와 개인의 노력에 현금 연대 등을 통해 동참하거나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며, 공정무역 초콜릿을 먹지? 그렇지? 

 

그러나 그들, 허구헌 날 뺑이를 쳐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살 수 없다.
경제적 수준으로 층위를 나누자면, BOP(Bottom of Pyramid). 하루 8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 생존이 모든 문제에 앞서는. 많은 우리를 속박하는 `먹고사니즘`과는 차원이 다른.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2015년까지 전 세계 빈곤인구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UN 새천년 개발목표(MDG)` 달성을 위한 협조를 제안했다. 국제공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지만,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채무위기)때문에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넥스트 마켓》은 BOP시장의 비즈니스 기회에 대해 언급하는 책이다.

지구를, 삶의 구체적인 실체를 살리는 일과 비즈니스의 결합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돈이 안 된다고 무시했던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려준다. 적정기술도 그것이다. 당장 싸다는 것만 강조하고선, `통큰` 혹은 `착한` 등을 붙이고선, 또 다른 착취와 훼손을 교묘하게 감춘 자본들의 행태와는 다른 무엇.

 

그것 아나? 첨단기술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지 못한다.  

많은 우리는 첨단기술에 열광하고 환호하지만, 그것이 지구의 이상과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인류의 미래? 도그보이스다. 생각해보라. BOP에게 필요한 것은 첨단기술이 아니다. 딱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딱 한뼘만큼만 삶을 향상시킬 수만 있어도 좋은. 그렇다. 적정기술이다. 스마트폰은 그렇다면 적정기술일까? 그건 당신의 몫으로 남기고. 

 

나는 여전히, 적정기술로 만든 커피를 꿈꾼다.

그리하여, 적정커피. 적정기술로 로스팅한 당신만을 위한 커피. 나는 내 커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생각은 없다. 적정하게 당신만 만족해주면 된다. 그곳으로 나는 충분하다. 나는 커피에 목숨을 걸진 않는다. 그러니, 기다려줄 거지? 모처럼, 적정기술을 다시 떠올리게 한 시간이었다. 그때, 나를 비롯해 적정인간인 우리가 힘들게 만든 자전거발전기는 잘 있을까?

  

 
 

생명을 구하고, 삶을 향상시키는 기술, 적정기술

『넥스트 마켓』 적정기술포럼

 

2년하고도 반년 전, 경남 산청. 버려진 자전거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뚝딱뚝딱 공구 두드리고 박는 소리가 퍼졌다. 자전거발전기의 탄생. 나를 비롯한 문래예술공단 랩39의 몇몇 멤버들이 자전거를 옆에 끼고 낑낑대고 있었다. 나로선 처음 만난 적정기술.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전거에 에너지를 발생할 수 있는 장치만 부착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나이브한 것이었는지 확인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페달을 밟아 전력을 발생하는 자전거라니,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나를 적정기술의 노동현장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게 적정기술로 제작된 자전거발전기는, 문래예술공단에 자리했던 내 첫 번째 인디커피하우스 ‘골목길 다락방’과 함께 숨을 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사람이 페달을 밟았고, 나는 그 전력을 활용해 공정무역 생두를 로스팅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진 못했다.


다만 언젠가, 자전거발전기로 내 커피콩을 지지고 볶는 꿈을 꾸고 있다. 물론 그 적정기술로 커피의 맛과 향을 잡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또 어떤가. 적정기술이 돋아낼 원두의 향과 맛 또한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AT)이란 무엇일까. 위키백과의 정리다.


 

 

 

지난 11월15일, 서울대 신양학술정보관, ‘적정기술포럼’이 열렸다. 소외된 90%의 삶을 향상시키는 기술, 보편화된 기술과 실용적인 디자인의 융합으로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삶을 질을 향상시키는 적정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 시간. 적정기술과 BOP(Bottom of Pyramid, 피라미드의 밑바닥인 최하 소득계층을 뜻하는 말)시장을 다룬 책 『넥스트 마켓』의 이야기와 맞물린 포럼이었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적정기술 개념 소개 및 기술개발’을 주제로 유영제 교수(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 회장)가 첫 번째 강연자로 등장했다.


그는 지난 3년 간 경험한 이야기를 통해, 과학자로서 과학기술의 사회실천적 고민을 털어놨다. 과학기술이 과학이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사유. 가난하거나 나이가 많은, 혹은 장애를 가진 사람 등에게 과학기술이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을 찾고 있는 여정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는 2008년 1월 필리핀에 갔다. 하루는 시간을 내서 필리핀의 농촌을 찾았다. 한국인 안내자는 필리핀 농촌 사람들의 피부가 나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병원은 비싸서 쉬이 갈 엄두를 못낸다. 그래서 한국의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주면 쉬이 낫는단다.


유 교수는 왜 피부병이 생기냐고 물었다. 더러운 물 때문이었다. 과학자인 유 교수의 생각에는 스테로이드 연고를 제공하는 것보다 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없는 과학자회의 탄생이 꿈틀댄 계기였다. 


“동료 교수에게 이 얘길 했더니,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수소문을 해서 이야길 나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닥친 문제 중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물이라고 하더라. 물에 대한 심포지엄을 했다. 혼자 할 것이 아니라 여럿이 협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년 전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를 만들었다. ‘국경없는 의사회’를 본떴다.”

 

 

적정기술은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물을 예로 들자. 우선 물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따져야 한다는 것. 적정기술로 만들어진 ‘큐 드럼(Q-Drum)’이 그렇다.


아프리카의 만성적인 물 부족 때문에 아이들이 혹사당하는 일이 많다. 수차례 물을 길러 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퀴 달린 Q-Drum은, 한 명이 하루 50ℓ의 물을 단 한 번 왕복으로 길어 올 수 있다. 울퉁불퉁한 곳에선 이도 무용지물이라고 하자, 다른 누군가가 이를 개선한 제품도 만들었다. 적정기술의 진화다.


“캄보디아에 우물을 파러 가는 이야길 들었는데, 비용이 많이 들진 않는다더라. 그런데 캄보디아는 우물을 파면 반은 비소가 섞여서 마시지 못한다더라. 그래서 요즘은 수질 검사를 하고, 비소 없는 우물을 파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빗물이 안전하다고 그것을 받아주는 활동, ‘비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단순히 빗물을 받아주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A/S를 하고, 주민이 함께 하고, 예술가를 참여시키면서 진화하고 있다.”


“비즈니스와 시장으로의 접근만으로는 가난을 멈추게 할 수 없다. 빈곤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어, 각각의 사례에 맞는 유연한 해결책이 필요하다.”(p.12)


유 교수가 강조하는 지점은 교육이다. 물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선 주민들이 수자원을 아끼는 마음을 갖도록 교육을 해야한다는 것. 또 비소를 제거할 수 있는 값싼 기술을 개발하고, 근본적으로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농업이나 화장실 시스템을 바꿔주는 것도 중요하다.


적정기술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들에 아주 효용이 있다. 고가의 첨단기술은 필요하지 않다. 외려 그런 것은 효용이 떨어진다. 태양열을 이용한 오븐이나 항아리를 저장고로 활용하는 적정기술도 있다. 다만 항아리 저장고의 저장이 하루 정도밖에 안 되는 건 단점이다.


“과학기술사를 보면 물을 깨끗이 하고 상하수도 시스템을 갖추고 냉장고가 발명된 이후 인간 수명이 20년 늘었다. 깨끗한 물과 냉장고가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냉장고를 갖다 줄 순 없지만, 3~4일 혹은 일주일 정도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전기가 필요 없는 냉장고가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네트워킹을 만든다는 것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부작용이 있다. 가령, 비료를 원조 받아서 농사를 지으면 안 된다. 비료가 끊어질 경우, 농사는 막히고, 땅에도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연친화적 농업 등을 전수해야 한다.


“빵과 돈을 갖다 주면 끝없이 가져다 줘야 하기 때문에 자립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게 교육이고 기술을 가르쳐줘야 한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가보니 망고가 많았다. 건조시키는 것만 알려줘도 경제적 수익이 생기고 배울 수 있는 돈도 생기더라. 굿네이버스 등에서는 돈과 빵이 아닌 지역사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컴퓨터나 인터넷의 혜택을 보게 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값싼 보청기를 보급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적정기술은 20~30년 전에도 붐을 탔던 바 있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붐을 타고 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기술이 누적되고 태양에너지의 상업화 등 좀 더 현실화된 기술이 많아졌다.


유 교수는 과학기술, 과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한국NGO가 현지 NGO와 연결돼 도움을 줬으나, 기술이 없었다. 이에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들이 현지와 네트워크를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과학기술(자) 네트워크의 확산이 중요한 이유다.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이 있다. 이런 것은 과학기술만 하는 사람뿐 아니라 경영경제, 디자인, 그밖에 관심 있는 지식인 등이 협력해야 시너지가 생긴다. 요즘은 디자인 공부하는 사람도 조인하기를 희망하더라. 글로벌 이슈를 생각해볼 수 있고,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도 할 수 있고, 창의성과 협동성도 길러져서 교육적이다. 이런 것이 진짜 공부다.”


그는 동아일보 9월30일자에 나온 <“캄캄한 네팔 오지에 희망의 빛 선물”>을 하나의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관심이 커지고 있는 사회적기업. 공학하는 사람만 모일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협력과 네트워킹을 통해 세계를 좀 더 고민하면서 나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정기술은 어떻게 개도국과 만나는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많은 여성과 아이는 물을 긷기 위해 10리터에 달하는 물통을 들고, 왕복 네 차례 여정을 한다. 어떤 지역에선 하루 평균 4000명의 아이들이 깨끗한 식수를 구할 수 없어 죽어간다. 개발도상국의 80%는 전기를 공급받지 못한다. 그래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등유는 가스과대 흡입 혹은 화재로 연간 1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개발도상국에는 안경도, 안경을 맞출 검안사의 수도 턱도 없이 부족하다.

 

앞서 말한 Q-Drum은 여성이나 아이들의 수고를 덜고, 휴대가능한 정수기인 LifeStraw은 효과적으로 수질 속 박테리아를 제거해, 물이 부족한 아이들의 생명을 구한다. 간단한 태양광 램프를 이용한 제품은 가스흡입으로 인한 죽음을 줄이고, 해가 진 뒤에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든다. Ad-specs는 검안사 없이 자동으로 초점을 조절할 수 있는 맞춤 안경이다.


적정기술이란, 이렇게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삶의 질을 저비용으로, 혁신적으로, 지속가능하게 향상시킨다. 그렇다면 적정기술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세계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적정기술 플랫폼 ‘코페르닉(Kopernik, http://kopernik.info)’을 운영하는 토시 나카무라 대표가 다음 강사로 나왔다. 그가 CEO로 있는, 코페르닉은 ‘소외된 90%를 위한’ 기술을 소개하고, 이를 보급하는 사업가, NGO, 기부자를 연계하는 사이트다. 코페르닉은 적정기술의 보급에 집중한다.


코페르닉을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었다. “많은 훌륭한 기술들이 있지만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사용자는 기술을 부담할 여력이 없고, 제작자는 먼 지역 사용자에 대한 접근이 어렵다. 결국 기술을 소개하고 도입을 조성할 방법이 없다.”


이에 훌륭한 기술이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취지로 코페르닉은 2010년에 설립됐다. 쉽게 말해, 코페르닉은 온라인 기술거래소다. ‘링크’역할을 하는 것이다. 초점도 명확하다.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의 연결.


그렇다고 코페르닉이 중간에서 마진을 챙기진 않는다. 지역NGO와 직접적인 연계로 더 많은 후원금이 최전선에 닿도록 한다. 특히 절대 빈곤의 사람들이 실제로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을 선택해서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후원 품목의 선택도 가능하다.


“우리는 런칭 이후 11개국 6만3000명의 사람들에게 기술을 보급했다. 솔라 라이트 프로젝트의 하나로 동티모르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인데, 기술이 가장 닿기 힘든 지역이기도 하다. 솔라 라이트 보급으로 동티모르 사람들이 수입을 좀 더 늘일 수 있었고, 안전한 생활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도 쿡스토브를 보급해서 기존보다 비용을 50% 이상 절감했다. 그곳에선 한 달에 9달러나 되는 ‘큰돈’이었다. 


코페르닉은 멀리 떨어진 가난한 커뮤니티를 타깃으로 즉시 시장성이 없는 지역에 시장을 창조한다. 사업자에게도, 사용자에게도 모두 필요로 하는 기술. 생명을 살리고, 교육을 가능하게 만들고, 수고와 착취를 덜어주는 기술이 시장을 형성함으로써 모두에게 이롭게 되는 기술. 그것이 적정기술이다. 지역에 맞고 형편에 맞는 맞춤형 기술. 그것이 또한 적정기술이다. 첨단기술이 아닌 적정기술에 한 번 눈을 돌려보라. 당신의 삶이 좀 더 풍부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찾아오시라. 적정기술로 로스팅한 원두로 당신만을 위한 커피를 건넬 테니.

적정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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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과디아'는 미국 뉴욕 주 퀸즈에 있는 공항이름(LaGuardia International Airport, 약어 LGA)이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JFK공항처럼 사람의 이름을 땄다.

 

피오렐로 라과디아, 그는 뉴욕시장을 역임했다. 그것도 무려 세 번(1934~1945). 잘은 모르지만, 진보적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을 하면서 뉴욕 시민의 사랑을 뜸뿍 혹은 왕창 받았나보다. 예술인이나 대통령이 아닌 일개(?) 시장 출신으로 공항의 이름을 차지할 정도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시장 이전에 판사 출신이다. (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초큼 낫지만) 판사들의 수준이 영 탐탁치 않은 한국 사람으로선, 그런 사랑,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디 집권여당에 들어가서 여당 텃밭에서 공천을 받아, 유세 때 평소에 잘 가지 않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할머니들과 악수하고, 평소 안 먹던 국밥 한 번 먹어주며, 다리를 놔준다든가 지하철 개통을 해준다든가 말로만 떠드는 한편, 사촌에 팔촌까지 뒤져서 상대 후보 진영 약점만 밝히면, 시장이야 어떻게든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라과디아가 치안판사 시절, 한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잡혀와 재판장에 섰다. 라과디아가 말했다. "나이도 드신 분이 염치 없이 빵을 훔쳐 먹습니까?" 노인은,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라과디아, 이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벌금 10달러의 처분과 함께 방망이를 땅땅땅 내리쳤다. 빵을 훔친 절도 행위에 대한 판결이라며. 

 

그런데, 이내 그는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고 이 한 마디. "그 벌금, 내가 내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나 스스로의 벌금입니다." 아마도 재판장은 웅성웅성댔을 것이다. 판사가 피고의 벌금을 대신 내줬다? 

 

그걸로 끝, 아니었다. 방청객들을 향한 또 한 마디. "이 노인은 재판장을 나가면 또다시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방청객 중에서도 그동안 좋은 음식 드신 분은 조금씩이라도 돈을 기부해주십시오." 

 

방청객들 '삘' 받았다. 주머니를 열었다. 모금액이 47달러. 1920년대임을 감안하면 꽤 큰 돈이 아녔을까.

 

방점은 그가 내세운 명분, 즉 언어 사용이다. 그는 '불우이웃'이나 '가난한 노인 돕기'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 앞선 표현을 썼다면, 노인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방청객들도 그저 그런 상투적인 모금이구나 싶어서, 감동과 공감은 분명 떨어졌을 것이다. 

 

선의도 좋지만, 더 나아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기. 그 딱딱하고 냉정한 재판장에서 사람을 움직인 판사라면 충분히 시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진보시장이라고 섣불리 말할 순 없지만, 그는 11월, 한 노숙인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숨졌다는 보고를 받고,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선 말했다. "연고도 없는 한 사람이 가는 길에 누군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왔다." 

 

라과디아만큼 시민들 사랑을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저 정도 시장이라면 약간 안심이 된다. 5세 정도는 아니니까! 5세 훈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노숙자들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죽지 않도록 지하철 화장실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 이 정도 발언이 나오지 않았을까.ㅋ

 

언어의 한계는, 곧 복지의 한계를 만든다. 또한 공동체의 한계를 조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아울러, 지금 세상에 있지도 않은 희망과 꿈을 관성처럼 들먹이는 기성 세대의 위로 타령은 좀 역겹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위로가 아니라, 젊은 세대에 대한 사과, 그리고 반성과 성찰이다. 젊은이들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그 위로(타령)에 질식돼 죽을 것이다. 

 

현실을 말해야 한다. 희망 없음을 얘기해줘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아야 이 미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뻐꾸기처럼 날리는가 말이다. 역시 언어의 한계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싶은, 부끄럼쟁이 혹은 염치실종자들의 언어유희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 하찮은 위로에 침을 뱉아라.

 

니기미, 조까라 마이싱! 퉤!!

 

좋은 음식 니들만 처먹어대고, 미안하단 소리는커녕 거짓 위로만 지껄여대는 돼지들아,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 벌금 얼마나 낼 테냐! 아니, 돼지들이 그것을 뱉아내도록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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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사랑, AIDS도 막을 수 없는 그 무엇!

17~18세기에 걸쳐 커피하우스는
문학가들의 생활의 중심을 점유하는 동시에,
근대시민사회의 주민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대중'으로 끌어올리는 데 한몫을 한 '독자층'을 만드는 거점이 되었다.
- 우스이 류이치로,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중에서

 

이 남자, 어제도 라이터를 놓고 갔다. 버릇이다. 자주 오는 건 아닌데, 어째 오늘도 왔다.

꼭 자기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행위같기도 하다. 내가 여기 왔다 갔음. 라이터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남자, 아우라는 딱 예술가다. 어째 보면 예수를 닮은, 오다기리 죠와 살짝 엇비슷한, 그러고 보면 히피풍이다. 동그란 안경은 존 레논의 것이다.

자주 오는 건 아니다. 커피 취향도 남다르진 않다. 드립커피를 즐겨한다는 것 외에. 그냥 하우스 블렌딩만 마신다. 담배를 많이 피우긴 한다. 라이터는 그래서 필수품인데, 올 때마다 놓고 가는 걸 보면 라이터는 꽤 많은 것 같다. 나는 이 남자 라이터만 따로 모아놓고 있다.

근데, 그 라이터들이 여느 라이터와는 조금 다른데, 예쁘게 생겼다.

"아저씨, 예술가들에게 상처나 고통 같은 건, 하나의 액세사리 같지 않아요? 꼭 뭔가 그렇게 있더라고. 그거 없으면 예술가 못해요? 그런 게 있어야 예술이 빛나보이나? 고통을 예술로 승화했니 뭐니. 한 법의학자는 그걸 창작병인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런 유전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예술해요?"

"아뇨, 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 영화 한 편 봤는데, 아저씨 <노웨어보이>라고 봤어요?" 

"존 레논?" 

"예. 존 레논도 그렇더라고요. '엄마'라는 트라우마가 있잖아요. 다섯 살때 엄마가 존을 버리고 이모에게 맡기고 떠나고, 나중에 기껏 만났더니 열일곱에 교통사고로 죽어버리고. 엄마를 두 번 잃은 거에요, 그 남자. 전 그게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오노 요코한테서 엄마를 본 거죠. 물론 전 부인이었던 신시아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노웨어보이>는 그러니까,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고 음악에 빠진 한 평범한 소년이 어떻게 존 레논이 되고, 비틀즈에 이르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정확하게는 비틀즈 직전까지. 엄마를 두 번 잃고, 17파운드 기타로 출발해 폴 매카트니를 만나 비틀즈의 전신 '쿼리 멘'을 만든 존 레논. 

흥미롭게 봤다. 엘비스라면 모를까, 존 레논이 지나치게 미끈거리긴 해도, 엘비스를 좋아해서 그랬겠거니 했다. 폴 매카트니를 만난 운명적인 날도 그려져 있고. 하긴 그날이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된 날이었다. 존과 폴이 만났던 그날. 비틀즈의 위대한 탄생!

이 남자, 라이터를 들더니 불을 붙인다. 하얀 담배 연기에 존과 폴의 만남이 묻어난다.  

"이런 만남은 누가 성사시킬까요? 엄마가 느닷없이 당하는 교통사고도 신이 정교하게 짜놓은 시나리오 같고. 뭔가 딱딱 맞물리잖아요. 비틀즈의 탄생설화 같은 거."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관계도, 비틀즈의 탄생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대신 엄마가 대신한다. 존 레논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요충분조건. 아, 빠트릴 수 없겠다. 아빠처럼 존을 지켜주던 이모부의 죽음 또한. 그 모든 것이 존 레논 비긴즈를 위한 초석이자 디딤돌.

"존 레논이 라이터를 놓고 온 커피하우스가 있어요. 레논이 무척 좋아하던 라이터래요. 그것도 바로 전날에 샀던." 

그는 라이터 사연을 오늘에서야 털어놓는다. 하긴 나도 그 전에 묻지 않았다. 차곡차곡 모아놓고만 있다. 이 남자의 얼굴은 딱히 라이터의 행방이 궁금한 얼굴과 몸짓이 아녔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오노 요코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다가 라이터를 깜빡 잊고 안 가져온 걸 알고, 아차차했대요. 오노가 돌아가서 가져오자고 했는데, 그러자고 했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요. 내일 또 올거니까 그냥 가자고." 

 

 

 

그 커피하우스가 있는 일본 가루이자와 지역은 여름 리조트였다. 뉴욕의 햄튼과 비슷한. 가루이자와 타운에서 자전거로 30분 떨어진 소나무 숲에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존과 오노는 션을 데리고 매일 갈 정도로 그곳을 좋아했다.

그들은 커피하우스 뒷마당의 그물침대에 누워 웃고 노래 부르며 하늘을 바라보며 오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단다. 피스~

그들이 바란 평화. 그 평화의 전 세계적인 전염.

그러나, 존이 말한 '내일'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장마가 시작됐고, 그들은 (호텔)방콕이었다. 그러다 재미가 없어져 뉴욕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평화 없는 세상에서, 그들의 뉴욕은 바빴다. 결국 그들은 가루이자와에 다시 가지 못했다. 라이터는 '영영' 이별인가보다 했다.

"1985년인가, 1986년인가, 존이 죽고 5년 후라고 했으니 그쯤 될 거예요. 오노가 거기로 가요. 아마 존과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함이었겠죠.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커피하우스는 변함이 없었대요. 커피 한 잔을 마셨고, 떠나려는데, 주인이 와서는..." 

그 라이터를 건네줬다. 5년 전, 커피하우스에 놓고 간 라이터. 주인장은 이리 말했단다. 

"당신 남편이 지난 번 여기에 와서 두고 간 라이터를 돌려주고 싶네요." (Your husband left this the last time he was here, I’d like to return this to you.)

오노가 라이터를 켰다. 불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5년 전, 라이터를 두고 간 그 날이 불꽃속에 떠올랐다.

 

인생이란 네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 다 지나가버리는거야(Life is what happens to you while you’re busy making other plans).  - 존 레논

 

"이 일상적인 평범한 일도 예술가들이 했대니, 뭔가 메타포 같지 않아요? 우리도 어쩌면 평화를 그렇게 깜빡 두고 온 채 떠나온 거 아닐까요? 그래서 내일로 미뤘다가 다시 찾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제가 라이터를 놓고 가는 거예요. 존 레논이 와서 다시 찾아가라고. 하하."

그럴 듯했다.

평화는 존 레논이 깜빡 두고 온 라이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남자, 평화를 바라는 히피였군. 나도 평화가 간절할 때는 그 가루이자와의 커피하우스를 찾고 싶다. 그물침대에 누워 어느 날의 오후를 만끽하고 싶다.


그리곤, 긴자를 찾아가는 거지. 백화점길을 따라 가부키 극장 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카페 파우리스타'. 존과 오노가 역시 자주 왔다는 이 곳. 올드한 느낌의 커피하우스. 어느 날, 이곳에서 나는 'War is over'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오늘. 아침부터 나는 주야장천 존 레논만 틀어놓고 있다. 1980년, 12월8일. 총성이 울렸다. 한 시대가 접혔다. 존 레논이 죽었다. 31년. 평화는 아직 오지 않고 있지만, 염원은 여전하다.

맞다. 오늘의 커피 메뉴는, War is over(Happy Christmas). 평화를 담아서 내린 커피.  

밤9시의 커피에 울려 퍼진 존 레논을 듣곤, 일곱 명이 말을 건넸다. 그 중 한 여자의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고맙다며, 굳이 1000원을 더 꺼냈다. 음악 값이라며. 존 레논이 준 선물이로다. 민중에게 권력을. 전쟁이 끝난 자리엔 민중이 우뚝 서 있길.

그러니까, 나와 당신 민중들 모두에게, Happy Christmas!!!

(아울러, 큰별 생일 축하해! Happy Birthday To U~)

 

"민중에게 권력을! 즉각 민중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란다...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도 못 받고 노동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달라.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다..."
 'Power To The People' 중에서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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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의도한 바는 아니나, 12월이 주는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나이 얘기가 꼭 들이민다. 그저께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누군가는 오십이라서, 누군가는 사십이라서. 이십대 중반부터였나. 얼른 나이를 잡숫고 싶던 나는, 

아직 여전히 그렇다. 이십대 중반 무렵, 나이듦은 뭔가 감투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이듦을 꿈꾼다. 물론, '제대로' 나이듦. 사십,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에, 나는 어느덧 사십줄을 바라보는 나와 내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그 나이를 이야기한 내 오래된 친구들에게. 우리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슬픈 것이다.

   
  한 사람의 나이-누군가가 내게 가장 슬픈 단어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죽음이니 가난이니를 다 제쳐두고 나이라고 말하겠다. 그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어쩐지 스무 살이라는 말도 슬프고 서른 살이라는 말도 그것대로 슬프다. 쉰 살은 쉰 살이어서 여든은 여든이어서 슬프다.
 
어떤 세상 없는 부모 형제나 친구 혹은 사랑하는 이까지도 모두,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우치는 데에 어떤 사람은 이십 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사십 년이 걸린다. 또는 영영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너무 일찍 깨우치는 사람들은 그래서 슬프고, 끝내 깨닫지 못하고 삶을 마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또 그래서 슬프다...                                   
                                                   - 김한길, 《눈뜨면 없어라》중에서

 
   

요리
오래된 친구들과의 식사. 하하호호. 웃고 떠든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건, 때론 그렇다. 서로를 신뢰하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연놈들, 결혼 연식도 좀 됐고, 아이들도 숭숭 큰다. 인생이 그렇듯, 결혼도 언제든 업다운이 있는 법이지만, 그 결혼이란 게, 그냥 안주하고 있는 느낌.

그들에게도, 여느 부부가 그렇듯, 결혼이 감정을 죽이고 사랑보다 일상이 강해진 그런 것이 됐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고 대신 정이 둥지를 텄다고 하겠지만, 좀 안타까운 면도 있다. 그 빛나던 사랑이 으스러진 것. 다시는 빛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은 그저 오래된 기억일까? 지금, 사랑하냐고 물으면, 웃으며 툭 던진다. 에이, 그냥 가족이야, 하하호호. 그 웃음이 왠지, 나는 아쉽다. 사랑의 지지고볶기 보다는, 그저 일상이 강해진 풍경.

그러다 그들, 으레 결혼얘길 스윽~ 꺼낸다. 결혼, 어떡할거야? 떼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누. 허나 분명한 것은, 나는 꼭 커피를 포함해서 요리를 해주겠다고 다짐한다. 《요리 본능》에선, 화식, 즉 요리가 성별 분업을 가져오고, 요리는 여자의 것으로 규범처럼 굳어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더 자주 부엌에서 요리하리라. 장석주의 詩가 아니더라도,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하는 남자만큼 멋있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하긴, 내 친구도 결혼 전에는 그랬다. 하하.  

그러니까, 요리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마구마구 불러 일으키는 여자, 그런 여자라면 나는 첫사랑을 할 것이다. 사랑은 늘 첫사랑, 모두 첫사랑. 일상보다 강한 사랑을 위해, 나는 당신을 위해 요리하는 남자! 자, 오늘은 어떤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요리할까요? *^.~*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으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 장석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중에서
 
   

 * 아, 12월5일, 리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1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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