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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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사를 하고 나서

오늘 하루 종일 몸이 개운치 않았다.


만성적인 좌골 신경통 때문에

밤새 잠을 뒤척여서인지 하루 종일 몽롱했다.

한의사가 커피는 내 체질에 독약이라 했지만

쓸쓸한 날씨를 핑계로 두 잔이나 마셨더니

끝내 오후에는 잠시 자리에 누울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한강이 보이는 좋은 집에 이사왔는데

기쁨도 잠시,

오른쪽 발목에서 무릎으로 이어지는 기분 나쁜 통증과

왼쪽 엉치서부터 퍼져나가는 불안한 관절 조합은

의식을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평생 앉아서 일한 대가일까.

조금만 틈이 나도 앉아서 읽은 탓일까.

앉아서 세상을 보려고 했던 죄일까.


온몸을 떠돌아다니는 통증을 감지하며

잠깐 잠깐씩 앉아 황정은을 읽었다.


황정은이 그런 삶을 살았구나.


황정은의 책을 거진 다 읽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어 그랬는지

그녀가 쓴 자기 이야기에 나도 덩달아 아팠다.


그랬구나.

많이 아팠겠구나.

...



어제 이삿짐을 옮기러 온 사람들은

모두 중국에서 온 분들이었다.

세 명 중 팀장 격이 그나마 가장 한국말을 잘했고, 

나머지 두 명은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세 명이 온 줄 알고 본사에 전화했더니

한 명이 더 있었다.

그 사람만 한국인.

그는 운전 담당이었던 모양인 듯

신발을 신고 들어와 말없이 화장실만 한 번 쓰고는 사라졌다.


이삿짐 옮기는 날 이른 아침부터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지하주차장으로 짐을 옮기면 그나마 비를 맞지 않으련만

입주민 편의를 보호하는 생활지원센터에서는 끝내

지하주차장 to 지하주차장 이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짐을 옮기시는 분들은 짐이 젖지 않게 조심하며 

비를 쫄딱 맞아가며 짐을 날라야 했다.


팀장격인 사내는 운동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은 내 발을 보며

춥지 않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운동화를 갈아신을 요량이었지만 이미 신발이 모두 실려나간 뒤라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비를 안 맞으니까 별로 안춥다고 대답했다.


부엌짐을 담당한 중국출신 여성은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셋 중 가장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나는 하마터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었는지 물을 뻔했다.

간단한 의사소통도 정확성이 떨어지는 걸 알아차린 후에

나는 아주 천천히 일부러 단어 하나씩 끊어서 이야기했다.

말은 어색했지만 미소가 분홍색 스웨터마냥 부드러웠다.

한 번도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부엌이었지만

요리조리 궁리해 가장 손이 잘 닿을 곳에 먼저 있던 짐들의 배열을 최대한 고려해

잡다하고 일관성 없는 살림도구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주었다.


이사할 때면 그릇들은 내가 정리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가지런히 놓아준대로 쓰기로 했다.

그녀의 수고로움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차가운 음료수 대신 따뜻한 커피를 내밀자

오전 내내 비바람 추위에 덜덜거리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화난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추워서 그랬던 거다.


무거운 짐 같이 들자는 말도 없이 

작은 체구로 올리고 담고 나르고

힘으로 도와줄 길이 없는 나는

그들의 동선이 중복되지 않게 짐들의 행선지를 정확히 일러주며

연신 나뒹구는 박스테잎을 주워담았다.


하루만 이렇게 분주히 몸을 놀려도 몸이 아픈데

오로지 몸뚱아리 하나에 의지해서 사는 삶에서 고통은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할까.


어릴 적 엄마는 너무 지친 나머지

뜨거운 방바닥에 복숭아뼈가 까맣게 익는지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

쇠뭉치도 아닌데 쇠뭉치처럼 몸을 쓰다가

겨우겨우 찜질방 같은 데서 몸을 풀고 다시 일을 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일하다가 결국 몸에 탈이 나 7년 반을 

침대에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


뇌를 다쳐 말도 못하고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가

너무 속상해 눈물을 흘릴 적에 누군가 그랬다.


평생 일하시다가 그나마 아프셔서 누워 계실 수 있는 거예요.


나는 평생 일하셨으니 이제 호강하며 사실 때 누워계셔서 속상한 거라고 외쳤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누워계셨던 게 과연 좋았던 걸까 가끔씩 생각해보곤 했다.


눕지 않았으면 계속 일했을 게 뻔하므로.


엄마를 산소에 모시고 돌아온 날,

이모부는 차라리 잘 되었다며 방금 엄마를 태워 묻고 온 남매를 위로했다.

병 구완 하는 남매가 안쓰러워 그랬는지,

답답한 침대에 누워 식물인간처럼 누워지내던 엄마가 불쌍해 그랬는지,

'차라리 잘 됐다'고 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서러워 나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런 이모부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 선고를 받고 몇 년을 투병하셨는데

일년 내내 고추며 마늘이며 배추와 무를 키워 수백 포기 김장을 담그는 게 

이모와 이모부의 유일한 낙이었다.


올해가 마지막 김장이 될 거 같다는 말에 

절인 김치를 몇 포기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도우러 가겠다고 했다.


김장 담그는 날이면 유난히 예민해져서 소리도 버럭버럭 지르고

자기 식구들 서로 챙기느라 우당탕 거리는 이모와 이모부가 

마지막 김장 담글 때는 어떠실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한다.


한강이 보이는 멋진 아파트로 이사갔다는 자랑은 하지 말아야지.

삼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은근히 자기자랑을 늘어놓을텐데.

명절 때마다 식구들이 모여 한다는 건 

책망 아니면 자기자랑.


엄마에게 유일했던 자기자랑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 자식.


더운데 밖에서 일하지 않고

추운데 떨면서 일하지 않는 자식.


그 자식은 평생 앉아서 일한 탓에

허리병과 속병을 안고 산다.


내일은 책을 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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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09 23: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ㅜㅜ 몸이 안좋으신거 같은데 잘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나뭇잎처럼님의 따뜻한 배려에 이삿짐분들도 기분이 좋았을거 같아요. 그래도 멋진곳으로 이사하신거 축하드려요 ^^

나뭇잎처럼 2021-11-10 11:03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저는 뭐 한 것도 없는데요...;; 무거운 이삿짐 남한테 맡겨놓고 빈손으로 왔다 갔다 하는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나마도 이제 이삿짐 옮기시는 분들은 동남아시아나 중국분들이 많으시고요. 한국인들도 서구에 가면 힘쓰는 일 하면서 원치 않는 혐오나 무시 같은 거 당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죠? 한강 전망은 평생 모멸을 감수한 값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도 드네요.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던 하루였어요. 그래서 아팠나봐요..

책읽는나무 2021-11-10 0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사는 정말 힘든 일인데 몸 상하지 않게 쉬엄 쉬엄 정리하세요.
좋은 집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모님댁 김장 도움도 탈 나지 않게 잘 도와드리고 오시길요...마음이 무거우시겠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1-10 11:06   좋아요 3 | URL
이모가 손이 커서 처음엔 200포기로 시작하시더니 급기야 작년에는 500포기를 담으셨어요. 온동네 분들이 다 도와주러 오시긴 했지만 덕분에 저도 며칠 앓았거든요. 이번엔 절인 김치 샀다는 핑계로 안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이라고 하시니 안갈수가 없네요. 가서 기쁨조를 담당해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다들 막판엔 눈물바람일 거 같아 묘책을 강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면 웃겨드릴까! ㅜㅜ

다락방 2021-11-10 0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시사인에서 황정은 인터뷰를 보고 이 책을 사야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뭇잎처럼 님의 글로 또 만나게 되네요.

이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나뭇잎처럼 님. 한강이 보이는 멋진 아파트라니, 너무 좋네요. 저는 영화속에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나올 때면 와 언제 저런 아파트에 살아보나, 생각하곤 했거든요. 멋진 아파트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셔요, 나뭇잎처럼 님. 지금 당장은 몸도 마음도 좀 추스르시고요.

나뭇잎처럼 2021-11-10 11:11   좋아요 2 | URL
마자요! 저도 시사인 보고 냉큼 결제했어요. 여기저기 황정은 에세이 나왔다고 광고가 뜨는데 뭐 에세이까지 사봐야 될까 싶었지만 시사인 기사를 보고 마음을 바꿨죠. 복직근, 복횡근, 기립근, 둔근 같은 걸 키운다는 말에 진짜 살려고 애쓰는구나, 싶었어요. 얼마나 아팠으면. 덕분에 저도 내밀한 이야기 쓸 수 있었습니다. 쓰고 나니까 좀 낫네요. 아직 더 꺼내놓을 게 많지만 아직은 용기가... 운좋게 서울 한 자락 제 집이 아닌 곳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세입자일 뿐입니다. 언젠가 작별하게 될 멋진 뷰를 날마다 감사하게 잘 누리려고요. 언제고 인연이 닿으면 이곳에서 다락방님께 직접 내린 커피를 한 잔 대접하고 싶네요. 강건하시길!

그레이스 2021-11-10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사하셨군요
앞뒤로 일주일이 비정상이죠
몸 잘 챙기세요
이사하신 곳에서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래요

나뭇잎처럼 2021-11-10 11:21   좋아요 1 | URL
마자요. 이사 하기 전에 또 엄청 신경쓰느라 늘 고생이죠. 이번엔 살살하자 다짐했는데 이사 당일 비바람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생활지원센터분들과 실갱이 하느라 진을 뺐네요. 입주민한테는 너무 친절하신데 택배, 이삿짐 옮기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낯뜨거울 정도로 대하시는 게 영 불편하더라구요. 들어오는 입주민은 환대해도 나가는 입주민에게는 또한 냉정한 게 현실... 도시에서 자주 이사를 다니다보니 이사 또한 누군가의 고된 애씀에 기대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고 남아요. 결국 더 싼 업체 찾아 경쟁 시킨 꼴이 되었던 것도.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맑음 2021-11-1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이모부님의 올해가 마지막 김장일 것 같다는 말씀에 눈물이 그렁그렁ㅠㅠ
사는게 뭔지............
저는 책 내용보다 북친 분들의 리뷰와 이야기가 더 좋아지는 요즘입니다.
나뭇잎처럼님의 삶이 지금은 그 어느때 보다 따뜻한 시간을 지나나 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지금이 그러한것 같습니다. 자꾸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지는 걸 보면.....
급하게 제 마음을 전하느라 두서없는 글 이해해주시길 바래요.
나뭇잎처럼님 덕분에 저의 오늘은 따뜻함입니다.
이사 정말 축하드리구요, 타인에 대한 배려에 또 한번 감동하고 이만 물러갑니다.
늘 나뭇잎처럼 찬란하실 거에요~!!!

나뭇잎처럼 2021-11-11 10:15   좋아요 1 | URL
책 읽는 사람들이 점점 귀해지고, 책 읽는 능력이 희귀한 기술이 되는 때 이곳에는 아직도 책을 진심으로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죠. 저 또한 이곳에서 세상 드문 분들을 뵙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책을 읽는 것이 활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기에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새로운 독서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 같고요. 그래서 혼자 읽기 못지 않게 같이 읽는 것도 독서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 같아요. 늘 우물 밑바닥에서 저멀리 끝에 있는 손바닥만 한 하늘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하늘이 넓어졌어요. 이제 제 인생을 제 손으로 써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는 한 계속 그 과거라는 감옥에서 못벗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황정은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내보았어요. 황정은이 록산 게이에 도움을 받은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꺼내 놓아야 자유로워질 것 같아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르켈 리더십 - 합의에 이르는 힘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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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2의 성>을 열독하고 있다. 

이걸 왜 지금 읽게 되었나 싶을 정도로 단박에 인생책 1위로 뛰어올랐다.

(미안해, 나의 애장서들아 … 나의 기억은 늘 최신순이라…)

작년 한 해 내 마음속으로 정한 목표가 <A quest for my lost femininity>였다.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진정한 자아찾기 와중에 ‘페미니즘’, 

아니 내 안의 ‘여성성’을 직시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왜 갑자기 페미니즘이냐?

내 안의 여성성을 들여다보기로 했다는 말에 

이대남 조카는 ‘아, 요즘 그런 거 공부하세요?’ 하면서 묘한 비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다.

오래도록 내가 피하고자 했던 표정이다.


맞다. 나는 내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말해 본 적이 없다.

페미니스트라고 물어보면 아니, ‘인간의 평등에 관심이 있는 한 사람이지’, 하고 얼버무렸다.


아마 첫 직장에서 만난 풍경이 너무 내게 세게 각인된 탓일 테다.

마초 사장은 이상한 성고정관념을 시도 때도 없이 나불거렸고,

나는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항변했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여자라서’ ‘여자니까’ ‘역시 여자란’ 말을 들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남자들보다 세 배로 일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험한 일을 자원했고(덕분에 내 무릎은 작살이 났었지),

밤새는 것 따위는 정말 ‘두주불사’의 자세로 임했다.

절대로 ‘여자라서’ ‘여자니까’ 이런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그 마초 사장은 내가 퇴사한 이후에도 몇 년 동안 월요조회 시간마다 내 이름을 들먹였다고 한다.

“00씨는 말이야, 그렇게 일했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못해? 열정을 가져, 열정을!”

옛 직장 동료들은 나의 망령이 아직도 사무실을 떠돌고 있다며 OB모임에서 불평을 쏟아냈다.


진심, 새로 온 남자 상사는 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00씨, 그렇게 일하는 거 아니야. 그거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야.”


믿을 건 내 몸뚱아리 하나, 착취할 수 있는 건 내 노동력밖에 없던 내게

유일했던 ‘자기 착취’는 그렇게 시작해 몇몇 회사를 거쳐 그만둘 때까지 고착되었다.


메르켈은 재임 시 “페미니스트냐?”라는 질문에 얼버무린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했다.

직장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요’라고 선언하는 것은 낙인효과를 자처하는 일이었다.


대신 그녀는 누구보다 많은 여성들로 내각을 구성했고,

이른바 Girls Club이라고 불리는 참모진을 이끌었다.

누구보다 학구적이고, 누구보다 전문적인 인력들로 말이다.


그녀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페미니즘을 실현했다.

그리고 퇴임을 얼마 앞두지 않고 ‘페미니스트’임을 인정했다.


나는 많은 남성들이 일이 아닌 ‘사내정치’로 입신양명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서

‘일의 본질’에 충실했다. 

회의시간에 정성들여 경청하고, 다른 의견들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고,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합심하는 것.

그동안 눈 앞에서 연줄을 동원해 세를 불리던 무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일이라는 것 역시 무수한 Stakeholder(이해관계자)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메르켈 리더십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서둘러 읽어보았다.


정말 리더십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헝가리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자신의 부모가 역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저널리스트 부부였던 작가는 이미 전기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덕분에 지루함 1도 없는 인물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죽은 전 남편이 독일주재대사였고, 본인은 서독 특파원이었던 데다가, 최근 4년간은 메르켈 집무실을 드나들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받아 메르켈 주변의 인물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한 결과가 진땀나는 메르켈 다큐의 성공 요인인 듯. 


인물 이야기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는 배움까지. 


기후회의에서 땡깡 부리던 트럼프가 ‘나한테 얻을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은 하지 마쇼’ 하며 툭 던진 막대사탕, 개 무서워하는 거 알면서도 송아지만 한 자기 개를 풀어놓은 푸틴, 말 하나는 정말 청산유수지만 결국 메르켈을 도청하다 딱 걸린 오바마.


메르켈 언니는 참 상대하기 힘든 남자들을 거느리고 무려 16년을 총리직을 수행했다.

신문이나 단편적인 이야기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메르켈의 내면을 들여다 본 것 같아 너무도 뿌듯한 책.

어려울 때마다 묻고 의지하고 싶은 멘토를 얻은 것처럼 심장이 꽉 찬 기분이 든다.



메르켈, 리더십, 인생책, 페미니즘, 제2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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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0-12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도 이 책 읽어보겠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0-12 17:24   좋아요 1 | URL
최근 읽었던 인물 이야기 중에 가장 잼났던 거 같아요. 누구를 다루느냐 못지 않게 누가 쓰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저렇게 쓰려면 색인 프로그램 뭐 썼는지 저자한테 묻고 싶어지더라구요. ㅎㅎ 저런 게 이론서와 또 다른 실제 이야기가 갖는 힘이 아닌가 싶어요. 현실의 파고와 장벽 앞에서 인물은 어떻게 돌파했나? 하는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준달까.. 암튼 다락방님 덕분에 잃어버린 ‘서재‘ 열정을 불지피게 되어서 다시 한 번 감사올립니다. (-.-)(_._) ‘쓰는 게 남는 거다‘란 심정으로! 함 해볼라구요. (또 얼마나 갈진 몰겠지만 ㅋㅋ) 보 언니, 메 언니에 이어 또 어떤 언니를 영접하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ㅎㅎㅎ
 

서문만 읽고 달아오르는 일은 별로 흔치 않은데, 요즘 너무 많은 책들의 서문이 나에게 달려든다. 서문을 읽으면 안 읽고는 못배긴다. 서문에서 제시한 문제와 어떻게 풀어나가겠다는 지도가 쫙 펼쳐지면서 아주 진땀나는 트레일러를 본 것 같아서. 멍뭉이와 가벼운 마음으로 애견카페를 찾아 여유롭게 킨들을 펼쳤는데, 그만 한 손으로는 연신 장난감을 던져주며 한 손으로는 킨들을 붙잡고 순식간에 서문을 읽어버렸다. (킨들의 장점은 word wise 기능 덕분에 사전을 찾지 않고도 술술 읽힌다는 점. 현란한 광고창이 없으니 몰입형 독서에는 때로 아이패드보다 낫다. 물론 밑줄 쫙쫙 그어가며 적극적 인터랙션을 일으키는 PDF 독서에는 패드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정신분석학, 신경과학 할 것 없이 인간의 의식 밑에 도도히 흐르는 어떤 강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 최근 몇십 년 간, 특히 최근 몇년 간 부단히도 노력해왔다. 도대체 인간이 그런 행위를 하는 데는 무슨 동기가 있는가! 그걸 밝히느라 꿈을 분석하고, 트라우마에 접근하고, fMRI에 뇌를 집어넣고, 유전자를 분석하고 등등. 


Psychiatrists and neuroscientists have long debated how best to plumb the deep waters of human motivation. Whatever the method, the objective is clear: to discover the feelings, motives and beliefs that lurk below the mental ‘surface’ of conscious awareness - to chart, in short, our hidden depths.


하지만 ‘hidden depth’ 따위는 없다고 일찌감치 단언한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으면 어떤 캐릭터에 대한 해석을 가공해내듯 우리 경험 속에서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해석을 지어낼 뿐이다. 

We invent interpretations of ourselves and other people in the flow of experience, just as we conjure up interpretations of fictional characters from a flow of written text.


삶을 살아간다는 건 소설의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우리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건 자기성찰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게 되는데, 저자는 성찰이란 이해(perception)의 과정이 아니라 이야기를 고안(invention)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내적 세계란 신기루에 지나지 않다고.

The very idea of ‘looking’ into our own minds embodies the mistake: we talk as if we have a faculty of introspection, to scrutinize the contents of our inner world, just as we have faculties of perception, to inform us about the external world. But introspection is a process not of perception but of invention: the real-gime generation of interpretations and explanations to make sense of our own words and actions. 


The inner world is a mirage.


The truth is not the the depths are empty, or even shallow, but that the surface is all there is.

많은 종교 또는 철학에서 인간의 의식 단계를 규정한다. 즉자적인 상태에서 의식이 고양될수록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설파하는데. 이건 뭐 그냥 그런 거 따위는 없다고 대놓고 부정해버리니 누군가 잔뜩 쌓아올린 탑을 와르르 부수며 ‘이번 판은 나가리’하고 외치는 격이랄까.


믿음, 동기 이런 것들은 상상력의 산물이자 우리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얘기다. 마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Our mind is continually interpreting, justifying and making sense of our own behaviour, just as we make sense of the behaviour of the people around us, or characters in fiction.


하지만 우리 뇌는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전의 생각이나 행동하고도 얼라인이 맞아야 스스로 붕괴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의 비밀은 hidden depth가 아니라 과거에 맞게 우리의 현재를 창의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에 있다는 것. 


So the secret of our minds lies not in supposed hidden depths, but in our remarkable ability to creatively improvise our present, on the theme of our past.


그리고 다시 한 번 벼른다.

We’ll find that almost everything we think we know about our minds is false.


상식적인 이야기는 고쳐 쓰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게 상책이라나?

The common-sense story needs to be abandoned, not patched up.



우리 뇌는 소설을 쓰는 것처럼, 어떤 세계를 전적으로 창조하기 보다는 한 문장 한 문장 개연성 있는 문장들을 이어붙이면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이으면서, 그 순간의 의식적인 해석을 창조해내는 엔진이라는 거다.

Our brain is an engine that creates momentary conscious interpretations not by drawing on hidden inner depths, but by linking the present with the past, just as writing a novel involves linking its sentences together coherently, rather than creating an entire world.


이름하야 extension of perception!!


몇 년 전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라는 호기심 당기는 제목에 이끌려 샀다가 고만고만한 이야기에 책을 덮었던 것과는 좀 다를 것 같은 느낌이 확.


하지만 내 책상에는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가 딱 노려보고 있는데!


Our freedom consists not in the ability magically to transform ourselves in a single jump, but to reshape our thoughts and behaviours, one step at a time: our current thoughts and actions are continually, if slowly, reprograming our minds.

매순간 우리는 우리 생각을 다시 프로그래밍하는 거라고. 여기서 실존주의 철학과 만난다.


I have now, somewhat reluctantly, come to the conclusion that almost everything we think we know about our own minds is a hoax, played on us by our own brains. We will see later how the hoax is done, and why it is so compelling.

다소 스포일러 같지만 그렇게 하실 거라고.


This requires a systematic rethink of large parts of psychology, neuroscience and the social sciences, but it also requires a radical shake-up of how each of us thinks about ourselves and those around us.

새로운 시각, 낯선 접근, shake-up은 늘 반갑지만 제발 허세로 끝나지 않길 바래본다.




뇌과학, 마음, 철학, 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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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프랑켄슈타인 - 181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메리 셸리 지음, 구자언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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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신을 낳다가 죽은 엄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버린 사람의 자살, 그리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걸 보며, 메리 셸리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해냈다.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창조한 이로부터 버림 받았으며, 혐오로 인해 악마가 되고, 창조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희생시킨다. 마지막 소원이었던 자신의 동반자마저 완성 전에 잃고 나서는 창조자에 대한 복수로 불타오르나 결국 창조자의 죽음 앞에서 가장 커다란 슬픔을 맞닥뜨린다.


북극을 탐험하는 왈튼 선장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기이한 이야기를 들으며 누이에게 전하는 편지, 빅터가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그의 독백, 다시 왈튼의 편지로 이어지는 상자 속의 상자 이야기. 아마 레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서 메리 셸리를 알지 못했다면 머리에 이상한 나사를 꼽고 퀭한 눈으로 어기적 걸어다니는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고전은 뭔가 의도치 않게 넉넉한 시간이 확보되었을 때(언젠가 복사뼈가 부러져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을 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악령> 총 6권을 완독했더랬지)나 읽는 것이 아니었던가. 열여덟 살에 쓰기 시작해 스무 살이 안되었을 때 완성한 소설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유명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라는 사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남편이 죽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 하나만 남고 모두 죽은 메리 셸리라는 인물에 이끌려 <프랑켄슈타인>은 읽기도 전에 내 안에 강력하게 자리잡았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은 자신을 바라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더구나 그 엄마가 <여성의 권리옹호>라는 글을 쓴 진보적 지식인이자 페미니스트였다면. 그리고 그런 엄마와 달리 역시나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아빠 윌리엄 고드윈이 새로 결혼한 여자가 자신을 핍박하는 여자라면. 아버지에 서재에 드나들던 제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 아버지로부터 의절을 당하고, 결혼을 앞두고서는 그의 전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첫딸이 2주도 안 되어 죽고, 이후로 낳은 아이들이 차례로 죽어나간다면.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은 금지되어있고, 설령 쓴다해도 조롱과 비난이 가득한 시대에 그가 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을 창조해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프랑켄슈타인은 사지를 이어붙여 흉측하게 태어났다.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 빅터는 창조하자마자 그에 대한 혐오로 가득하다.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혐오를 먹고 자라며 악마가 된다. 우연히 만난 선한 가족에게 친밀감을 느껴 그들을 위해 남몰래 도움을 주며 그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그들은 혐오에 치를 떨며 그를 때리고 그곳을 떠난다. 


“치명적인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려 인정 많고 착한 천국의 모습 대신 혐오스러운 괴물의 모습을 볼 뿐입니다.”


우리가 괴물을 괴물로 바라보는 건 결국 우리의 눈이다.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눈에 달려있듯이(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괴물이 되도록 만드는 먹이는 지극한 혐오. 자신을 혐오하는 이는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혐오할 수밖에 없다. 혐오는 혐오를 낳고, 키우고, 자라게 만든다. 혐오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프랑켄슈타인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만이 모든 비극을 마무리할 수 있는 처사라고 여긴 것이다. 


처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이 책에 대해서 여전히 많은 해석이 분분하다고 한다. 과연 프랑켄슈타인을 어떻게 읽을지는 각자의 눈에 달려있는 일이겠지만. 나는 자신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여긴 한 창조자의 비극적 심상에 연민이 들었다. 종종 내 안의 괴물을 바라보면서 측은함과 안도감,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맛보듯이. 괴물이 더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괴물의 성난 갈기를 가만히 쓸어주는 것, 괴물에게 먹이를 주는 혐오를 거두고 괴물이 괴물이 된 사연에 깊이 공감하고 위안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메리 셸리 못지 않게 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의 엄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독자가 읽고 나서 저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책”이라고 극찬하며 실제 메리의 엄마와 사랑에 빠지고 메리의 아버지가 된 고드윈. 고드윈이 작가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책이 바로 <Letters Written During a Short Residence in Sweden, Norway, and Denmark>. 프랑켄슈타인을 쫓던 빅터가 왈터 선장에게 발견되는 극지방의 풍경은 메리 셸리의 엄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사랑하는 사람 임레이에게 버림 받고 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향한 스칸디나비아 여행길에 쓴 글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여동생의 비극적 결혼으로 말미암아 고아나 다름 없게 된 조카들을 보살피고,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업도 내팽개치고 병구완을 했던,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사생아를 낳고 결혼에 회의적이었던 페미니스트가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혼했던 고드윈과의 짧은 결혼 생활을 마감하고 메리 셸리를 낳다가 죽은 바로 그녀.


물고 물리는 이야기의 인연들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불멸의 작품에서 만난다. 


그리고 나는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북극 이야기에 매료되어 다시 자유롭게 오를 그 여행길을 상상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오로라를 매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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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호프 메소드 - 당신의 건강 본능을 리부팅하라
빔 호프 지음, 이혜경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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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나. 지금처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디 가서 맘껏 운동할 수 있는 편도 안 되고, 고작 할 수 있는 건 집에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공원을 걷는 정도. 요즘은 조금만 일하면 머리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얕아지고, 앉아있다 보면 고관절부터 엉치뼈까지 온몸 구석구석이 아프다. 나이 탓인가. 왠지 서글퍼진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몸이 퇴화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길 거부한 사람이 있다. 바로 빔 호프(Wim Hof. 영어로 읽으면 빔 호프지만 네덜란드 사람을 네덜란드 발음으로 읽는 게 맞는 듯) 그는 61세가 넘은 나이에 아기 같은 피부를 자랑하고, 여전히 한 손으로 자기 몸을 지탱하고, 날마다 찬물에 몸을 담근다. 인간이 쇠락하고 쪼그라드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진리 안에 사람이 머물 때 빛이 나듯 어떻게 하면 자기 몸 안의 잠재력을 최상으로 끌어낼 수 있는지 자신의 몸을 이용해 적극 실험에 나선 사람이다. 


그는 차가운 얼음 수조에 자신의 몸을 담그고 체온과 신체지수가 어떻게 되는지 측정했다. 중심체온은 일정하게 유지되었고, 신체지수는 오히려 더 좋아졌다. 보수적인 과학계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다시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쳤다. 유수의 대학에서 실험적인 생각을 가진 과학자들이 그의 몸의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심지어 스콧 카니라는 기자는 빔 호프가 사기꾼이라는 걸 밝힐 의도로 폴란드에 있는 빔 호프의 훈련 캠프를 찾았지만 결국 그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함께 킬리만자로를 오르고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What Doesn’t Kill Us)>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그가 주장하는 빔 호프 메소드(WHM)의 요체는 간단하다. 찬물 샤워, 의식적인 호흡, 그리고 마음가짐. 너무 간단해서 이런 걸로 정말 드라마틱하게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단 10분이 걸리는 빔 호프 호흡을 3라운드 해보면서 그동안 한 20년 동안 틈날 때마다 앉아서 시도했던 복식호흡과 프라나야마, 뇌호흡 등 온갖 호흡법들을 뛰어넘는 ‘효과’가 났다. 단 10분 만의 호흡으로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안정되고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 많은 전문가들이 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빔 호프 메소드에 열광하는 것 같다. 오랜 수련 없이도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다는 것. 


본격적으로 빔 호프 메소드를 따라 하기 위해 앱을 다운받고 호흡을 해보았다. 리텐션(숨을 참는 시간) 시간이 처음에는 40초에서 조금씩 늘더니 어제는 2분 10초까지 늘었다. 빔 호프가 앱에 적어놓은 대로 숨을 참는 건 기록을 달성하거나 억지로 견디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Listen to your body, not. your ego), 여하튼 하루하루 폐의 기능이 좋아지는 게 보여서 나름 뿌듯하다. 폐 기능이 좋아질수록 심신도 안정되는 느낌이 든달까. 건강의 척도는 폐의 크기에 달려있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아이 때 온몸으로 호흡하다가 그 숨이 점점 얕아지면서 턱에 찬 숨을 거두는 아닌가. 


요가에서의 호흡도 숨을 참는 것이 핵심이다. 숨을 참은 만큼 생명이 늘어난다고 했다. 요기들이 프라나야마를 통해 수련하는 것도 결국 그 리텐션 기간을 점점 늘려가는 것이다. 왜? 숨을 쉬지 않는 동안 우리 몸이 자율적으로 활성화되고 혈액 속에 있던 산소와 영양분이 세포 조직으로 강력히 침투하면서 호르몬이 방출되고 염증반응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과호흡 사이에 리텐션을 두는 빔 호프 호흡법은 좀 더 효과적으로 리텐션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된다. 과호흡을 통해 몸은 일시적으로 알칼리 상태가 되고, 그러면서 운동능력이 향상되어 킬리만자로도 오르고,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팔굽혀펴기를 몇십 개씩 하게 되는 거다.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빔 호프 메소드의 신비가 민간요법이나 자가치료법 같은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더 신뢰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빔 호프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건강법을 전 세계에 알리는 건 그가 지나온 삶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네 아이의 엄마이자 사랑하는 부인이 8층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는 우울증을 비롯한 온갖 질병이 정신과 신체가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을 얻었고, 정신과 육체가 모두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현대 의학에 의존해 값비싼 약을 먹고, 의료기술에 의지하여 자신이 가진 건강 능력을 오히려 퇴화시키고 있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던 것 같다. 


나는 오히려 빔 호프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 과학이라는 것은 지금 당대 우리가 가진 지식이다. 그 지식은 언제든 새로운 지식에 의해서 부서지고 보완된다. 인간의 몸을 부분으로 해체해 보는 것이 아니라 홀리스틱하게 바라보는 것이 지식을 앞선 지혜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지혜는 사실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호흡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 우리를 극한적인 찬물에 가만히 두어볼 때,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면 지식이나 지혜를 능가하는 깨달음 또는 영성이 느껴진다. 우리 모두가 원래 갖고 있는 힘. 그 위대한 힘을 내가 편안한 온도, 편안한 상황에 꼭꼭 가둬둔 건 아닌지.


아마 그래서 도인들은 찬물 아래서 수련을 했는지도(그걸 이어온 할아버지의 냉수마찰이 이제사 납득?). 북쪽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아프면 차가운 얼음물에 담갔는지도. 숨을 멈출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발견한 건 요기들만이 아니다. 전 세계 종교에서 오랜 호흡이 필요로 하는 만트라나 기도문이 생겨난 건 우연이 아니다. 오랜 철학과 종교에 담긴 지혜를 오늘날의 과학으로 풀어냈을 때 비로소 의심의 빗장을 내려놓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건 우리의 몸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는지 성찰하는 것. 나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과연 어디서 오는지 바라보는 것. 내 몸의 건강을 이루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 내가 건강하다라고 느낄 때는 언제이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것. 


빔 호프 메소드는 단순히 건강해지기 위한 000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야 건강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빛과 혜안을 던져준다. 지금처럼 코로나로 제대로 숨 쉬지 못하고, 건강해지기 어려울 때, 그 어느 때보다 건강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지금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인 것 같다. 진정으로 건강해지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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