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리더십 - 합의에 이르는 힘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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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2의 성>을 열독하고 있다. 

이걸 왜 지금 읽게 되었나 싶을 정도로 단박에 인생책 1위로 뛰어올랐다.

(미안해, 나의 애장서들아 … 나의 기억은 늘 최신순이라…)

작년 한 해 내 마음속으로 정한 목표가 <A quest for my lost femininity>였다.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진정한 자아찾기 와중에 ‘페미니즘’, 

아니 내 안의 ‘여성성’을 직시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왜 갑자기 페미니즘이냐?

내 안의 여성성을 들여다보기로 했다는 말에 

이대남 조카는 ‘아, 요즘 그런 거 공부하세요?’ 하면서 묘한 비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다.

오래도록 내가 피하고자 했던 표정이다.


맞다. 나는 내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말해 본 적이 없다.

페미니스트라고 물어보면 아니, ‘인간의 평등에 관심이 있는 한 사람이지’, 하고 얼버무렸다.


아마 첫 직장에서 만난 풍경이 너무 내게 세게 각인된 탓일 테다.

마초 사장은 이상한 성고정관념을 시도 때도 없이 나불거렸고,

나는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항변했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여자라서’ ‘여자니까’ ‘역시 여자란’ 말을 들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남자들보다 세 배로 일을 했던 것 같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험한 일을 자원했고(덕분에 내 무릎은 작살이 났었지),

밤새는 것 따위는 정말 ‘두주불사’의 자세로 임했다.

절대로 ‘여자라서’ ‘여자니까’ 이런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그 마초 사장은 내가 퇴사한 이후에도 몇 년 동안 월요조회 시간마다 내 이름을 들먹였다고 한다.

“00씨는 말이야, 그렇게 일했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못해? 열정을 가져, 열정을!”

옛 직장 동료들은 나의 망령이 아직도 사무실을 떠돌고 있다며 OB모임에서 불평을 쏟아냈다.


진심, 새로 온 남자 상사는 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00씨, 그렇게 일하는 거 아니야. 그거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야.”


믿을 건 내 몸뚱아리 하나, 착취할 수 있는 건 내 노동력밖에 없던 내게

유일했던 ‘자기 착취’는 그렇게 시작해 몇몇 회사를 거쳐 그만둘 때까지 고착되었다.


메르켈은 재임 시 “페미니스트냐?”라는 질문에 얼버무린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했다.

직장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요’라고 선언하는 것은 낙인효과를 자처하는 일이었다.


대신 그녀는 누구보다 많은 여성들로 내각을 구성했고,

이른바 Girls Club이라고 불리는 참모진을 이끌었다.

누구보다 학구적이고, 누구보다 전문적인 인력들로 말이다.


그녀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페미니즘을 실현했다.

그리고 퇴임을 얼마 앞두지 않고 ‘페미니스트’임을 인정했다.


나는 많은 남성들이 일이 아닌 ‘사내정치’로 입신양명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서

‘일의 본질’에 충실했다. 

회의시간에 정성들여 경청하고, 다른 의견들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고,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합심하는 것.

그동안 눈 앞에서 연줄을 동원해 세를 불리던 무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일이라는 것 역시 무수한 Stakeholder(이해관계자)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메르켈 리더십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서둘러 읽어보았다.


정말 리더십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헝가리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자신의 부모가 역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저널리스트 부부였던 작가는 이미 전기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덕분에 지루함 1도 없는 인물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죽은 전 남편이 독일주재대사였고, 본인은 서독 특파원이었던 데다가, 최근 4년간은 메르켈 집무실을 드나들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받아 메르켈 주변의 인물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한 결과가 진땀나는 메르켈 다큐의 성공 요인인 듯. 


인물 이야기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는 배움까지. 


기후회의에서 땡깡 부리던 트럼프가 ‘나한테 얻을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은 하지 마쇼’ 하며 툭 던진 막대사탕, 개 무서워하는 거 알면서도 송아지만 한 자기 개를 풀어놓은 푸틴, 말 하나는 정말 청산유수지만 결국 메르켈을 도청하다 딱 걸린 오바마.


메르켈 언니는 참 상대하기 힘든 남자들을 거느리고 무려 16년을 총리직을 수행했다.

신문이나 단편적인 이야기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메르켈의 내면을 들여다 본 것 같아 너무도 뿌듯한 책.

어려울 때마다 묻고 의지하고 싶은 멘토를 얻은 것처럼 심장이 꽉 찬 기분이 든다.



메르켈, 리더십, 인생책, 페미니즘, 제2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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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0-12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도 이 책 읽어보겠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0-12 17:24   좋아요 1 | URL
최근 읽었던 인물 이야기 중에 가장 잼났던 거 같아요. 누구를 다루느냐 못지 않게 누가 쓰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저렇게 쓰려면 색인 프로그램 뭐 썼는지 저자한테 묻고 싶어지더라구요. ㅎㅎ 저런 게 이론서와 또 다른 실제 이야기가 갖는 힘이 아닌가 싶어요. 현실의 파고와 장벽 앞에서 인물은 어떻게 돌파했나? 하는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준달까.. 암튼 다락방님 덕분에 잃어버린 ‘서재‘ 열정을 불지피게 되어서 다시 한 번 감사올립니다. (-.-)(_._) ‘쓰는 게 남는 거다‘란 심정으로! 함 해볼라구요. (또 얼마나 갈진 몰겠지만 ㅋㅋ) 보 언니, 메 언니에 이어 또 어떤 언니를 영접하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