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 바디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8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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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오 바디스 (Quo Vadis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참 많이 들어본 말이죠. 종교인이던 비종교인던간에 말입니다.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 는 고전 중에 고전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여러차례 영화로도 선을 보였고 연극으로도 리메이커된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고전이라는 작품들이 대게 그렇듯이 정작 원작인 <쿠오 바디스> 보다 영화와 연극으로 리메이크된 <쿠오 바디스> 에 길들여저 있어 정작 원작이 가지고 있는 맛은 음미할 틈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레 미제라블』이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 라는 작품 역시 원작보다는 축약본이나 엔터테이먼트가 강하게 비쥬얼화된 영상작품이 더 인기를 끌고 사랑을 받았다는 점인데요. 뭐 부인할 수 없지만 이상하리만큼 원작은 묻혀 버리고 말았죠. 그렇다고 원작의 격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원작의 격이 뒷받침 되었기에 후대의 그런 작업들이 가능하지 않았게나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리메이크된『레 미제라블』에 익수한 독자들이 원작을 대할때의 느낌과 충격이 다르듯이 <쿠오 바디스> 의 느낌도 일맥상통하게 다가오리라 여겨 지네요. 워낙 악동인 네로황제 시대의 기독교인과 이를 박해하는 세력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감초 역활을 하는 사랑이야기라는 대강의 써머리를 머리속에 자연스럽게 저장하고 있는 상태에서 대하는 원전의 맛은 과연 어떠한 느낌을 자아낼지도 비교대상이 되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이교도의 상징이자 악의 화신으로 대변되는 가수이자 시인이면서 전차경기 선수이기도 한 네로를 서사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작품 초반부에서 네로의 이미지 중 특히 리기아가 궁중연회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네로와 포페아의 이미지를 서사하는 장면은 왠지 그 동안 영화나 구전으로 듣고 보아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죠. 특히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더 묘한 서사이기도 합니다. 이부분이 작가의 의도된 설정으로 보여지는데요 리기아 (즉 기독교에서 성모마리아와 같은 신성한 종교적 상징) 의 시각이 과연 어느쪽의 시각일까라는 부분과 네로와 포페아의 진실은 어쩌면 듣고 보아왔던 전설과 다를수있다는 뉘양스 아닌 뉘양스를 줍니다. 물론 작품의 결말쪽으로 다가가 되면 일방적인 리기아의 이미지로 승화되지만 초반부의 이미지로만 보게 되면 아리송한 면도 함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사의 복선은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상반되는 가치관의 충돌을 통하지만 상대방의 가치관을 이분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작품 전반을 통해서 페트로니우스의 말들을 인용함으로써 작가는 더욱 더 이분법적인 사고로 점철될 수 있는 사고의 경계와 균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죠.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제우스를 비롯한 당시 로마제국이 숭배했던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자신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찾아 기도하는 모습을 매치함으로써 작품을 두 가지 힘의 충돌로 설정하고 있죠 (네로 황제와 포페아 황후 그리고 검투사 크로톤으로 대표되는 정형적인 로마 가치관과 사도 베드로와 리기아 또 우르수스로 대변되는 기독교 가치관의 충돌을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죠). 그런데 말이죠. 단순하게 두 가지의 가치관 충돌을 작품의 주 메뉴로 설정했다면 작품의 내러티브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독자들 입장에서도 정말 뻔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지만, 여기서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절묘한 신의 한수가 등장 합니다. 다름 아닌 그 신의 한수는 '고상한 판관'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페트로니우스의 등장입니다. 어찌 보면 페트르니우스의 역활은 이번 작품에서 굉장한 의미와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데요. 역사적인 평판으로도 '현명한 판관' 이라는 평가를 받은 실존인물을 거의 주인공격으로 캐스팅함으로써 로마와 기독교라는 두 가치관의 충돌을 어느 일방적인 승리로 이끌어 가지 않는다는 암시를 깔아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헨릭 시엔키에비츠는 자신의 조국인 폴란드를 상징하는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포장은 했지만) 리기아와 우르수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서 폴란드의 저항과 독립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지만 자칫 뻔한 스토리와 결말을 나름의 공정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이끌고 있다는 모습을 페트로니우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작품의 또 다른 묘미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뻔한 스토리라고 단정짓게 되고 그리고 막상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보면 그 뻔함을 재확인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고전이라는 색다른 묘한 매력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전형적인 고전의 스토리와 서사방식 그리고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엿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대목이 리기아를 빼앗긴 이후 화풀이를 하는 비니키우스의 서사와 리기아가 해가 떠오르는 궁전뜰에서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기도장면을 서사한 씬은 가히 압권의 경지라고 할 수 있죠. 전형적인 고전의 덕목을 갖추고 있으면서 여기에 기독교라는 종교의 향신료까지 더해져서 정말이지 매끈하게 단어들을 주무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들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죠. 독자개인의 취향에 따라선 유치하게 보일 수 도 있지만 다름아닌 바로 이런 부분들이 고전의 참 맛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일종의 오아시스같은 청량감을 제공해 주고 있기에 고전이란 언제 어느시기에 읽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휴식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기에 기독교 가치관 (혹은 폴란드의 저항과 독립이라는 복선적 의미) 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맺을 수 있는 스토리를 페트로니우스라는 인물로 인해 독자들의 균형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절묘한 설정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의 가치관에 일방적으로 손을 들지 않고 (물론 손을 들어준 것 처럼 보이지만요) 슬그머니 로마 가치관에 대한 묘한 뉘양스를 남겨둠으로써 일종의 면피 아닌 면피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았라나는 생각이 들고요. 무엇보다 당시 로마시대를 역사적으로 고증하고 원형을 최대한 반영해서 당시 로마 시내를 재현했다는 점은 당시의 고고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는 겁니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디테일한 서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 로마 시내를 들여다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정형적인 권선징악의 결말을 담고 있는 작품이고 결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만큼의 무슨 거대한 반전의 임펙트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융합하고 실재적인 고증을 통한 디테일한 서사를 통해 역사소설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쿠오 바디스> 는 명작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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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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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작품 (사실 문학작품도 유명 작가의 작품이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을 제외한다면 주목받지 못하고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는 않죠) 을 제외하고는 왠만한 인문도서나 과학계열의 도서들이 독자들에게 큰 임팩트를 던져주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고 봐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진화 관련 부분이 가미된 경우에는 가뭄에 콩나듯이 특수한 계층의 독자들외에는 외면 받는 것이 지금의 우리 독서 풍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유발 하라리 (정말 생소하죠 영미권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도 아니고 변방 정도로 여겨지는 이스라엘 학자인데요) 는 지난해부터 국내 독자들에게 상당히 주목받고 있는 학자 겸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작인『사피엔스』를 통해서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다양하고 신선한 가설과 논거로 딱딱하기 그지없는 진화 역사론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했습니다. 이미 전작에서 확인했듯이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어떻게 수 많은 종 중에서도 지구상의 최고의 정점에 올라설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공감대 형성할 수 있는 가설을 제공하여 상당한 설득력 있는 논거를 펼치고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즉 인류는 사실상 지구를 접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존 지구상에서 생멸했던 그 어떠한 종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를 독점하고 있는 중이고 향후 별다른 외부적인 요인이 없다는 전제하에 이러한 속도는 점점 더 가속을 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전작에서 유발 하라리는 이런한 유래없는 점령 속도를 발휘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몇가지의 요인들을 심도 깊은면서 일반 독자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자연스럽게 풀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호모 사피엔스에 대적한 그 어떠한 종도 없다는 자부심아닌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류는 이제 지구를 뛰어 넘어 광활한 우주로 그 시선을 돌리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요. 이 시점에서 유발 하라리는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가 향후 미래를 어떻게 개척하고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는데요. 이번에 선보이는 <호모 데우스 ; Homo Deus> 는 바로 우리 인류의 미래와 그리고 그 미래를 어떻게 개척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거리를 공유할때가 되었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미 정상에 올라선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분야 그리고 자신이 지구를 정복했다고 선언한 인류의 현 주소에 대해서 신랄한 자기 비판과 검증을 보여 주고 있죠. 과연 지금 21세기 우리 인류는 진화 생물학적으로는 여전히 호모로 분류되지만 왠지 지금의 인류는 호모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다양한 패턴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유발 하라리는 지금 현생 인류의 정체성은 과연 어느 시점에 도달하여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과연 인류는 어떠한 방향으로 진화할 것인가? 이 두가지 논제를 과학혁명 이후의 시대의 요청사안들을 추론하면서 독자들을 쉼 없이 끌어 가고 있는데요. 냉철하게 아니 약간은 억지 주장 같기도 하지만 이미 인류는 자신들이 창조해 내 '신' 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신' 의 자리에 등극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죠. 바로 '호모 데우스' 라는 새로운 개념의 인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개념의 근간은 종교와 과학 그리고 나아가 여러가지 사회적인 분야의 다양한 논거들을 추론하여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주제들이 어찌보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부분들이기도 한데요. 그 동안 인류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의 기간동안 종교와 과학은 인류를 최정상으로 이끄는 쌍두마차의 역활을 수행했죠. 그런데 이러한 기류가 과학혁명이라는 패러다임을 마주하면서 사실상 한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고, 급기야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상에서는 과학이 종교를 대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 이러한 현상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부지불식간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 역시 이런 부분을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인류는 현재의 시스템을 창조하기 위해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의 패러다임을 창출했고 이를 기반으로 지금의 시스템을 구축했죠. 그런데 향후 미래의 모습은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그 동안 인류가 살아왔던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의 빅브라더라는 존재 처럼 또 하나의 신이 등장할 것이고 그 교리는 "데이터" 가 될 것이며 인류는 자신들이 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데이터교의 일원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논거인데요. 상당히 암울한 디스토피아계열의 소설 작품을 음미하는 느낌을 던져주고 있는 기제들입니다.    


          지구상에 명멸했던 수 많은 종 중에서 유일하게 가장 빠른속도로 지구를 차지한 종은 호모족이 유일무이할 것입니다. 인류는 그런 점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 한편으로 당위성를 맘껏 발현하고 있죠. 인류외의 그 어떠한 생명체는 오직 인류를 위한 조연의 역활과 하나의 부속물 밖에 안된다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면서요. 인류 나름의 논리대로 인지혁명이니 농업혁명이니 과학혁명을 운운하고 있지만 이 또한 범죄자들의 자기합리화의 일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본 이들은 과연 몇몇이나 있을까요? 그나마 인류는 이러한 면피를 "신" 이라는 존재 (일체의 종교를 포함해서요) 를 창출하면서 자기 반성적인 면모를 보였주었죠. 하지만 이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마지막 보류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스스로 "신" 를 끌어내리고 선수 교체를 단행하는 경지에 까지 도달했죠. 그런데 말이죠. 신을 대신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왠지 만루상황에서 대타로 들어선 선수가 더블플레이로 게임을 종결하는 그림이 자꾸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런 기시감이 이번 저서에서 큰 그림으로 보입니다. 인류가 창출해낸 시스템속에서 인류는 주연이 아닌 일개 조연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현실들과 이를 반증해나가는 사례들이 속속 목격되고 있습니다. 어슬픈 "신" 놀이로 인해 그나마 쌓아온 명성을 잃지 않으려면 차라리 창조해낸 신 속에 일환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더 타당할 수 도 있다는 말이겠죠. 물론 이번 저서가 인류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개연성이 짙어가고 있다는 점 이제는 더 이상 쉬쉬할 수 없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모든 인류가 한번쯤 고민해봐야할 시기가 아닐까 싶네요. 이번에도 유발 하라리 특유의 소설 같은 스토리텔링은 딱딱한 논거들을 아주 재미있게 그러면서 아주 설득력 높게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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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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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넘어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유명새를 타고 있는 작가, 최근 들어 매해마다 노벨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작가, 신작이 나올때 마다 출판계와 서점가를 둘러싼 마치 전쟁이라도 한판 치를듯한 부산함속에 독자들의 애잔한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작가... 그는 다름아닌 바로 일본를 대표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이미 국내에서도 매니아층을 갖고 있을 정도로 초판 예약분만 보더라도 까무러칠 정도로 (정말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도 30만부 초판본이 거덜날 정도였다니. 국내에 이렇게 많은 책읽는 사람들이 있기나 하는가에 의구심이 들기도 하죠. 그 만큼 하루키의 열풍은 매번 신작이 나올때 마다 국내 출판계를 들었다놨다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이죠. 그의 대표작이었던『1Q84』이후 제대로된 장편을 접하지 못했던 참에 이번에 세상밖으로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 는 상당한 힘으로 독자들을 밀어붙일 것 같은 예감이 먼저 들게 합니다. 왠지『1Q84』 의 마무리가 석연찮았다는 점 그리고 또 왠지 그 후속 이야기가 존재할거라는 강한 믿음 아닌 믿음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 를 통해서 일말의 보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의견도 개진해보게 됩니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그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짙은 필체와 메타포가 담겨져 있는 작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교묘한 경계선상 (이미 『1Q84』에서 보왔듯이 그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전혀 어색함이나 인공적인 터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도 절묘하게 그 경계선상에서 아리아를 연주하듯이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것이죠) 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꽁꽁 매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루키만의 특색 있고 냄새가 짙은 서사적인 표현들은 가히 절정에 다다른 예술인의 풍미마져 느끼게 하네요. 그림속의 등장인물들이 방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현실세계로 뿅하고 나타난다는 다소 황당스러운 컨셉트를 가지고 있지만 왠지 이런 황당스러운 면이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전혀 황당스럽게 다가온다거나 머리속에 각인되지 않는다는 점, 이 역시 하루키만이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모짜르트의 <돈 조바니> 오페라와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가상의 그림을 절묘하게 연결하여 내러티브 전반을 감싸는 판타스틱한 배경을 선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연결매체는 다름 아닌 주인공 '나' (사실 작품의 결말 부분까지 단 한번도 정확한 주인공의 이름을 모르고 막을 내린다는 점이 다소 아쉽기는 하죠) 라는 점을 확실하게 밝혀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그 자체를 망각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하루키의 다양한 설정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이라는 두 영역을 마음 껏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동력원으로 자리잡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하루키의 전매 특허이기도 한 다양한 음악원들이 맛깔스럽게 군데 군데 양념을 쳐대고 있죠.『1Q84』에서 우리는 야냐체크의 '신포니에타' 라는 장중하면서도 딱 작품에 어울리는 음악원을 선물받았다면 이번 작품속에는 그야말로 하루키의 뮤직룸을 통채로 접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1980년대 유행했던 팝에서도 부터 재즈, 클래식,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장르의 음악원들을 접하게 되고 동시에 필히 한번은 들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하죠.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고 일일이 메모해 두었던 음악원들을 들어보면 또 다른 느낌이 와닿는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음악원들이 등장하는 배경 배경 그 하나 하나가 자연스럽게 머리속에 그려지면서 정말 적재적소에 딱 맞는 음악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죠. 아마도 이번 작품을 더 돋보이기에 하는 설정들로 가히 하루키일 수 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네요.


          이번 작품이 뮤직룸이라는 소품 하나로 끝난다면 왠지 서운한 감정이 남는걸, 걱정이라도 했듯이 하루키는 또 하나의 맛깔스러운 양념을 뿌려대고 있습니다. 발랄라이카 칵테일을 비롯한 소소하지만 다양한 음식의 세계와 더불어 재규어로 대표되는 자동차에 대한 듬뿍어린 애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죠. 여기에 등장인물들이 걸치고 있는 의상, 신발, 악세사리등등 정말 다양한 세계 맛집의 양념들은 한번에 다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디테일과 리얼함이 어쩌면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의 경계선에 있는 자체를 망각시키는 교묘한 설정으로 비쳐질 수 도 있지만 또 하나 이번 작품을 대하는 작은 재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림에 대한 부분을 빼놓을 수 가 없죠. 아마다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 이라는 그림에서 시작되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마치 그 그림을 현장에서 리얼타임으로 보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이 들 정도로 하루키의 서사들은 가히 압도적일 만큼 디테일하고 리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복적인 암시들이 그런 착시를 보여줄 수 도 있겠지만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인 독자들이라도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그림을 금새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강인한 느낌을 받게 하는 서사들이 참 가슴에 와닿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로 화폭에 옮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정도니까요. 이렇듯 이번 작품속에는 하루키 자신이 현현한 이데아 (작품속 주인공 '나' 라고 봐야할 듯 한데요. 물론 '멘시키'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 듯 합니다) 같은 설정들이 실생활과 더불어 흩어져 있기도 합니다. 난징학살에 대한 사유와 그에 대한 반성과 사죄라는 어두운 역사적인 담론도 담겨져 있고 '긴얼굴'의 메타포와 나누는 소소하면서도 유머스러운 장면들고 포착되고 있죠. 이러한 모든 설정들과 사유들이 하루키 자신의 이데아와 메타포를 담고 있다고 보면 너무 나간 주장일수도 있겠지만 왠지 자꾸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꾸 전작인『1Q84』를 떠올리면서 비교되는 부분이 생기는데요. (당연히 그럼 느낌을 받게 됩니다.『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대하면서 자연스럽게『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리듯 말이죠)『1Q84』가 현실과 가상이라는 경계선에서 다소 가상쪽으로 옮겨간 몽환적인 분위기였다면 이번 작품은 적확하게 그 경계선상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황당한 소재와 컨셉트를 가지고 있지만 왠지 그게 가상의 세계가 아님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현실의 세계임도 증명할 수 없는 그런 묘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환상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는 현실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가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어느쪽으로 기울어지면 안되는 그 균형점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그 균형점속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또 다른 도피처 (이것이 이데아일 도 있고 메타포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다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입니다) 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가져보게 합니다. 정말 오랬만에 하루키다운 작품을 대면하게 되었고 다시한번 잊혀지지 않는 작품을 하나 더 간직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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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7-19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고 싶은데 혹시 스포는 없나요ㅎ?
 
정글만리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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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서야 그 유명한 조정래 선생의 <정글만리> 를 읽어봤네요... 지금도 여전히 서점가에서 스테디 셀러 한켠을 장식하고 있을만큼 세월의 흐름에도 꾸준히 독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작가이자 작품이기도 합니다. 정말 사전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독자들이라면 책 제목만 보고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듯 떠올리기가 막막한데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서 고분분투하는 종합상사 영업직원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으로 중국이라는 대륙자체가 다름아닌 정글처럼 거대하고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하여튼 이번 작품은 중국에 대해서 막연하게 정말 어렴풋하게 갖고 있던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역활도 하네요. 문학작품이라기보다 일종의 중국 길라잡이 같은 느낌을 강하게 전달해주죠. 그 만큼 현실성이 픽션에 절묘하게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라는 반증이기도 하겠구요.


          우선 우리 국내 독자들에게 중국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죠. 그 숫자를 가늠하긴 힘들 만큼의 인구수 (작가는 작중에 이런 엄청난 인구를 '사람멀미' 라는 표현으로 서사했죠), 만만디 정신, 짝퉁, 꽌시, 동북공정 그리고 요즘들어 한류 바람과 싸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뭐 이런 종류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죠. 중국이라는 나라와 우리는 오랜 역사와 세월을 사이에 두고 수 없이 많은 관계성을 갖고 있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경우이기도 합니다. 중화 문화권이라는 미명하에 도매값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이래 저래 중국과의 관계는 불과 백년의 세월도 안되는 한미간의 관계보다 오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실상 중국에 대해한 우리의 인지범위는 그 세월만큼 견고하지 못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근대와 현대에 들어 상반된 정치 체제하에서 단절되고 많은 왜곡된 정보들로 인해 오천년이라는 세월의 깊이보다 더 멀리 있는 느낌을 받게 하는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번 조정래작가의 <정글만리> 는 바로 중국의 현재와 그리고 미래를 엿 볼 수 있는 견인차 역활을 한다는 점에서 독자들로 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겠네요. 문학작품을 통해서 은근한 흥미와 더불어 중국을 보는 시각과 중국과 우리의 관계 정립에 대한 사유를 재정립해 볼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실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고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무시할려고 했던) 중국이라는 대륙과 그 구성원들이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부상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축이라는 미국을 뛰어넘을 기세로 빠르고 강한 임펙트를 드리우면서 부각되고 있죠. 그 동안 중국의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 상존하다 보니 자본주의와 다른 이미지 정확하게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명사로 인지되었죠. 여기에 문맹률이 높고 자국의 인구가 얼마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능한 정부에 그 국민 그리고 짝퉁과 부정부패, 불량품의 천국이라는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면모를 다 갖춘 그저 그런 나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죠. 그러다보니 지금 G2을 넘어 G1 으로 생각해도 될만한데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인정하지 않을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 더 그런 생각들이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죠. 그런데 말이죠. 지금의 중국은 그야말로 세계 경제의 동력원이자 세계 소비의 중심이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죠. 이번 작품은 바로 이런 우리의 무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새롭게 눈을 뜨게 한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 중국과 중국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라는 문제에 정답까지는 아니지만 일종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중에는 송재형과 리예링의 해피엔딩으로 두 문명권의 화합을 그려내고 있는 설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가 주장하고픈 사유의 총합이라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남녀간의 결혼은 같은 민족이나 국가간에도 수 많은 장벽과 더불어 서로 양측의 합의가 있어야 원만한 결혼이 가능하듯이 한국과 중국의 관계성 또한 이런것은 아닐까라는 일종의 암시로 보여집니다.


          그 동안 조정래 작가의 역사대하소설에 입맛이 길들여진 독자들에겐 사뭇 다른 느낌의 맛을 제공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색다른 느낌으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작가 나름의 또 다른 작품세계의 시도였고 개인적으로도 이번의 시도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다만, 현실성이 너무 큰 비중을 (작품의 전개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죠) 차지하다보니 왠지 르포나 드라마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 참 여기서 작가만의 역사적 견해를 다시한번 엿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설정들이 있죠. 우리와 경쟁하는 일본의 종합상사 직원들중에 '이토' 와 '토요토미' 라는 인물이 출연하죠. 뭔가 퍼뜩 뇌리를 스치는 연쇄작용이 발현됩니다. 두 인간은 다름아닌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할려고 했던 그러니까 역사적 시간대만 다르지만 공통적인 분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로서 중국이나 우리에겐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이죠. 이번 작품속에서도 왠지 밉상으로 설정되는 이 두 인물로 인해서 조정래작가는 특유의 민족적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난징학살등 일제의 만행과 고구려 역사등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의 범위 (전대광의 조카가 전공을 경영학에서 중국사로 변경하는 설정) 등에 대한 담론을 깔고 있다는 것인데요. 상당히 의미심장한 테제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조정래작가의 변신은 무죄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네요. 여하튼 이번 작품을 계기로 우리의 중국에 대한 시각과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한 때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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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번 강조하더라도 자꾸만 되새기게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입니다. 오죽하면 풀꽃도 꽃이라는 작품이 나올정도니까요. 성적우선주의,학벌지상주의 그야말로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늪속에서 자식세대를 질식시키고 있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으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줍니다.무엇보다 조정래라는 거장이 표출하는 사유는 많은 공감을 불러오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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