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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평점 :
중3때 친한 친구가 나를 전시회에 데려간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미술을 전공하려는 친구였고 실제로 나중에 일류대 미대를 갔다. 나는 그 친구와 같이 다니면 내가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상당히 느끼곤 했는데 그 전시회에 간 날도 그래서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 친구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확실치 않다. 지금 찾아보니 다비드상은 순백의 대리석 조각인데 그때 본 건 거무스름한 금속 느낌이었다. 만일 그게 다비드상이었다면 모조품이었을 듯.그리고 그렇게 유명작품을 그런 작은 미술관에서 경비도 없이 싼 입장료를 받고 전시하지는 않았을 듯)을 보면서 무척이나 감동받고 감탄한 얼굴이었는데, 난 웬 벌거벗은 남자의 전신상을 마주하고 불편한 느낌 뿐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난 붉은 얼굴의 자그마한 얼굴조각상에 마음이 팔려 한참을 들여다 보다 나왔다. 그 얼굴이 상당히 괴롭고 슬퍼 보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난 일부러는 아니지만 미술작품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마음 속엔 항상 의문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뭘보고 잘 그린 그림이라는 걸까? 미술작품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는 건 뭘까? 뭘 알아야 좀 보이는 걸까? 그래야 감동도 느낄 수 있는 걸까?
이 책은 제목부터 그런 질문에 친절한 대답을 해 줄 것처럼 생겼다. <천.천.히 그림읽기>라잖은가. 거기다 진중권이라는 이름이 어느 정도 품질을 보장해 줄 것도 같고.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친절하다. 그림의 표현양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하는지, 도상학적으로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는 방법, 그림에 숨어있는 화가 개인의 무의식 혹은 의식의 발현, 도대체 알 수 없는 현대미술을 어떤 시각으로 감상해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 나같이 무지한 사람도 어려워하지 않을만큼 쉽게 풀어 써 놓았다. 물론 쉽고 짧은 책이다보니 설명이 자세하거나 예가 많지는 않다. 그런 걸 원하면 좀 더 비싼 책을 사야할 듯.
그리고 진중권씨가 아니어도 이 책은 괜찮다. 진중권은 전체 7장인 이 책의 제6장만을 집필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 책은 차라리 조이한씨 혼자서 쓰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조이한씨의 설명을 읽다가 갑자기 진중권씨의 툭툭 내뱉는 무뚝뚝한 말투는 적응이 쉽게 되지 않는다.(물론 그것도 나름대로의 매력은 있다만) 내 생각엔 아마도 진중권씨의 유명세 때문에 이 책을 공저로 한 게 아닐까 싶은데, 뭐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이 책을 사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출판사에게 뭐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5장 <여성 화가들이 느끼는 육체의 미학>이 가장 좋았다. 거기 나온 그림들도. 수잔 발라동과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자화상들은 참, 뭐랄까 생전 처음 만나는 이와 무언의 동지감을 느끼게 해준다고나 할까. 그녀들의 무표정하거나, 의기양양하거나, 빤한 눈초리를 보면서 왜 난 그녀들의 소망과 나의 소망이 같다고 느끼고 내가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그녀들이 이루었다고 느끼는 걸까? 그리고 확실히 남자가 그린 누드와 여자가 그린 누드는 다르다. 에로틱의 기름기를 제거한 여자의 누드는 너무도 선선하다.
(나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ㅡ 지금보니 그야말로 조각같은 미모와 몸매로군. 내가 그때 조금만 밝혔어도 침흘리고 쳐다보는 건데 말이다)
수잔 발라동은 르느와르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르느와르가 그린 뽀샤시한 저 여인이(왼쪽) 알고보니 저렇게 성깔있어 보이는 여자였던 것이다(오른쪽-자화상)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여인의 누드(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자화상). 이 여인은 서른살에 남편을 놔두고 홀연히 파리로 떠나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나는 모더존이 아니에요. 그리고 더 이상 파울라 베커도 아니에요. 나는....나일 뿐이지요.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더 이상의 뭔가가 되는 것이에요"라고 말하며....30세 되는 해, 여섯번째 결혼 기념일에 파리의 외딴 방에 홀로 앉아 이 그림을 그린 파울라의 가슴 속엔 무엇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