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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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민음사, 1999)

가스 냄새가 소년 시절 친구 방의 일부였듯이, 불안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치즘이 횡행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삶의 한가운데>는 니나라는 아주 진취적인 여성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책의 뒷편에 ‘니나 신드롬을 일으킨 삶의 모험과 격정에 관한 소설‘이라는 광고문구가 있는데,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 당시 남자가 아닌 여자가 이렇게 멋있고 냉소적이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가히 신드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니나의 멋짐과 쿨함을 보여주는 몇 구절을 따와보면,

> 아, 때때로 모든 것을 걸 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아무 가치가 없어. _66쪽

라며 삶에서 안전성만을 추구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 발전이 없는 (나같은) 이들에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기도 하고,

> 너에게는 생을 끊으려는 이 시도도 삶의 일부인 것이다. 이것은 너의 정신과 생명력이 너에게 부여한 새로운 뉘앙스이며, 하나의 충격이며, 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며, 일종의 실험인 것이다. _319쪽

라는 위험 수준의 발언까지 한다. 인생이란 그 자체로 축복받은 것이라는 다소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문구는, 자살마저 인생의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하는 니나에게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니나는 자살을 실험이라고 규정해 삶의 결정권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귀속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대로 사랑하니 예나 지금이나 이런 히피적인 모습은 열광할 만하다.

니나는 모든 것을 경험으로 생각하고 지내는데, 딱 하나, 늙은 고모할머니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시간의 흐름과 늙음이라는 두 주제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 듯하다.

> 나는 아주 오래된 사진들을 찾아냈어요. 거기에서 고모는 예쁘고 젊은 처녀였어요. 아름다운 신부였어요. 그런데 지금 저기에 늙고 추악한 여자가 있는 거예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취를 풍기면서. _189쪽

책의 마지막에 달린 작품해설에서는 니나의 여러 모습을 명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여자‘다. 바로 위의 문장과 반대된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란 자연히 추해지는데, 니나는 이를 추악하다고 말한다. 혹시 니나는 고모처럼 추악해지기 전에 삶을 끝내기 위해 자살하려고 하는 것일까?

오직 신세대의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당찬(어떻게 보면 극단적이어서 무서운) 생각이다. 동시에 구세대가 보기에는 치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신세대와 구세대의 구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주요 인물만 봐도 니나는 진보와 신세대를, 슈타인은 보수와 구세대를 대표한다고 하면 조금 무리일까?

어느 리뷰에서는 슈타인이 답답하고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물이라고 칭했다. 분명 슈타인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감정표현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고 모험보다는 안정을 취하는 타입이다. 위의 리뷰 작성자처럼, 이런 슈타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슈타인이 틀리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우유부단하고 느리고... 그래서 그렇지...

의미가 서로 대립하는 두 인물이 논쟁을 하는 장면을 하나 꺼내보겠다.

> (슈타인의 대사) 니나. 나는 말했다. 당신은 젊기 때문에 힘을 믿고 있어요. 그러나 굴러가는 바퀴는 당신들의 저항과 희생과 어떤 영웅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아요. 어느 날 저절로 멈추는 거죠. _348쪽

> (니나의 대사)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 니나는 정말 흥분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_349쪽

읽어보니 익숙한 대화 아닌가? 개인은 힘이 적으니까, 강하게 저항하지 말고 천천히 이룹시다! 아니, 모험을 하지 않은 당신은 뭘 몰라요! 위와 같은 대화는 당장 인터넷 게시판만 봐도 수두룩빽빽하고,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후부터 계속 됐을 것이다. 슈타인은 니나를 걱정해서 조언한 것이겠지만, 니나는 그걸 꼰대질로 느꼈으려나.

> 나 같은 인간에게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맡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명철한 통찰력은 갖고 있으나 그 통찰에 무조건 따르는 힘을 소지하지 못한 부류에 속한다. 미래는 니나와,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지나치고 일방적이긴 하지만 강력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필요가 없다. _355쪽

슈타인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작가는 이런 슈타인을 통해 보수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을 발전시키기 힘들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슈타인이 자신을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점은 조금 가슴이 아프다. 한 인간의 삶과, 세상의 진보라는 두 보기 중 진정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고르는 객관식 문제가 있다면, 어느 것을 골라야 할까? 절대적 가치를 논할 수 없는 항목만이 보기로 주어진 문제는 풀기 어렵다. 이 난제 때문에 우리는 인류 문명사 동안 이렇게 토론하고 싸워왔다.

그래서, 슈타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결심하면서 내뱉는 독백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구시대는 나이가 들었다고, 보수는 사회를 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사회에서 무조건 퇴장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따위는 집어치우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진정한 인류의 진화가 아닐까.

>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 _363쪽

하나의 책을 어떤 이는 페미니즘 소설로, 어떤 이는 역사 소설로, 어떤 이는 사회학 소설로 읽었다. 인물과 시대상을 모두 배제하면 신념과 선택에 대한 아주 근사하고 멋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을 위해서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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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 제18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홍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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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 홍희정 (문학동네, 2013)

다소 평론가스럽게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설정과 이야기가 진부한 편이다. 철없이 순수한 남자, 옆에서 짝사랑에 애태우는 여자, 암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할머니, 그 자체가 순수와 젊음을 상징하는 여자아이, 고뇌로 인한 가출. 여기다가 성장을 한 스푼 넣으면, 짜잔! 삶의 어려움을 견뎌내고 어른이 되는 주인공 탄생!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이하 ‘시간 있으면‘)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소설 안에는 우리에게 거창한 삶의 목표라든가 사회의 이데올로기, 미래를 뒤흔들 정도의 성장은 없다. 다만, 책의 마지막에, 이레가

> 할머니, 나 여행 가. 정확하게 말하면 율이를 만나러.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리러. (141쪽)

라고 쪽지를 남기고는 가출한 율이를 찾으러 집을 나서는 장면을 보면서 잔잔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여주인공 이레는 6년째 율이를 짝사랑하면서도 그 사실을 쉬이 말하지 못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느꼈던 ‘절정 이후엔 반드시 공포에 가까운 공허함과 슬픔이 따라온다‘(58쪽)는 나름의 법칙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테다. 지금의 관계가 어그러질까봐, 그냥 이정도로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킬줄 알아야 한다‘(82쪽)는 이레 할머니의 말대로 이레는 자신의 욕망보다 안정감과 절제를 취했으리라. 이런 생각은 이레가 동네 주민인 칸트(이국적 외모에 매일 같은 시간에 슈퍼에 들러서 이레와 율이 붙여준 별명이다)의 미술 작업실을 들러 대화를 나누면서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 -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 -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106쪽)

공허함과 슬픔에 지쳐 넘어져도 결국에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니 나를 절망에 빠뜨린 온갖 것들이 나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갈리 없다. 그럴 때, 자신을 망가뜨릴 줄 알면서도 용기있게 내 공간 안에 단단히 붙잡아둔 ‘원하던 것‘이 힘이 되어줄 것이다. 아포리즘은 우리 인생에 모순으로 다가오면서도 종종 인생에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레는 결국 자신의 고민을 끝내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고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도 ‘아무 일도 아니에요‘라고 미소 짓는 느낌에 절망할 때, 저 멀리 언덕을 넘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은 느낌, 그 사람이 웃어주는 것만으로 우주의 모든 애정을 받는 것 같은 느낌, 꼭 그사람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모아 밤새 태산이라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다시 흠뻑 젖기(79쪽)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용기있게 한발을 내딛는다.

존 레논은 40살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었고, 파블로 피카소는 91살에 심장마비로 죽었고, 유관순은 18살에 고문으로 죽었다(19, 20쪽). 죽음은 다들 제각각,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어느 때로 한정하고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구덩이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고 부족함이 많지만,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요. 좋아해달라는 말, 그리 거창하지는 않다. 한 공간에 앉아서 그저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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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엔 카프카를 - 일상이 여행이 되는 패스포트툰
의외의사실 지음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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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 퇴근길에 카프카를 - 의외의사실 (민음사, 2018)


민음사 북클럽에서 첫 독자 이벤트로 받은 책이다. 3개의 선택지 중 가장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골랐고, 예상은 적중했다.


책은 의외의사실이라는 만화작가가 그리고 썼다. 총 열세 권의 고전을 읽고 느낀 점을 그림과 글로 남겼다. 책은 모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모던클래식 시리즈다. 선곡, 아니 선책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아주 좋은데,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 『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페스트』, 알베르 카뮈 |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이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는 400쪽이라는 두께에서 오는 부피의 중압감과, 종이 한 장의 두께과 꽤 있어 묵직함이 느껴진다. 막상 책을 펴면 한 쪽에 많아봐야 세 개의 그림과 짤막한 문장이 다다. 책 두께에 겁먹을 책은 전혀 아니다.


여태까지 읽었던 고전 읽기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사적인 책이다. 다들 요약이나 심오한 철학 이야기를 할 때, 이 책은 사변적인 이야기를 반 정도 할애한다. 그 이야기가 되게 별거 아니면서도 의외로 가슴을 찡 울린다. 등대로 이야기를 하면서


> 가끔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이 멈추거나 고여 있는 것 같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순간들.


라고 말하는데, 문장뿐만 아니라 사람이 쇼파에 앉아 멍때리는 그림이 함께 하니 더욱 특별히 다가온다.


고백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알맹이가 단단한 책은 거의 손에 잡지 않았다. 그냥 재미만 좇아서 가벼운 책 읽기가 일쑤였다. 매번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흘려보냈다. 이번에는 좀 다르다. 책에서 제일 먼저 소개한 <체호프 단편선>을 꺼냈다. 아직도 책장에 안 읽은 책이 몇백 권 쌓였지만 지금부터도 늦지 않았으니까. 나도 <퇴근길에 카프카를> 같은 감상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 어느 고전 소개서보다 동기부여도 재미도 가득한 책이다. 의외의사실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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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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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승섭은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학자다. 사회역학이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이라고 한다. 질병의 원인을 사회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학문 영역 바깥에서 우리는 사회역학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유아기의 경험이 성인이 돼서까지 트라우마로 남는 일이나 해고, 직업병, 고용불안, 국가적 재난, 제도의 불합리성, 소수자로서의 고통받는 삶이 각자에게 어떤 영향으르 미치는지,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아는 사실을 나열해서는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 그냥 아는 것과 자세히 아는 것은 조금 다를 것이다. 숫자와 통계 등의 데이터가 함께 있으면 한 사건을 두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각종 데이터를 말하면서 우리에게 끝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사고의 방향을 틀어주는 역할도 한다.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의사는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이익집단으로 그려지는데, 실제로 많은 의료진들이 주 52시간 근무제를 지키기는 커녕 자신의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일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다(물론 전공과 의사 자신의 연차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인 동시에, 의료진들이 일하는 직장(140쪽)이라는 문장을 읽고나서, 고생한만큼 돈을 많이 받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는 반문은, 그저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저급한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책에서 말하는 아픔이 결국 길이 되려면 우리는 공감하고 실행하면 된다. 찬반의 공방을 떠나서 우리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금전적 가치 앞에서는 이상이 현실로 바뀌기 힘들다. 게다가 세상에는 아직 고쳐야 할 것들이 많으니, 결국 개중 옥석을 가릴 것이고, 그 와중에 또 갈등이 생길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이 결국 길이 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까.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한 작은 목소리라도 말하기. 우리가 많은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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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살인죄일까? - 대중문화 속 법률을 바라보는 어느 오타쿠의 시선 대중문화 속 인문학 시리즈 1
김지룡.정준옥.갈릴레오 SNC 지음 / 애플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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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정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살인으로 잡혀들어갈까? 하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책에서 간단히 답을 요약해주는데,

> 데스노트인 줄 모르고 이름을 쓴 것은 아무 죄도 없다. 데스노트일지도 모르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과실이다. 데스노트일지도 모르는데 ‘데스노트면 어때’라고 남의 이름을 쓴 것은 미필적 고의지만, 고의성이 있으므로 살인죄에 해당한다. 형법에서는 “죽으면 어때”와 “죽이겠다”를 똑같이 무거운 범죄로 생각한다.

란다. 모르고 하면 죄가 없지만, 세상에 데스노트의 존재가 충분히 알려졌다면 그때부터 과실의 유무를 판단하게 된다. 실제 법에서는 이렇게 이분법적인 판결은 하지 않겠지만, 법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책은 서문에서 법이란 전문적인 과정을 밟지 않으면 공부하기 힘든 것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대중문화 중 친숙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의 이야기와 법을 섞어 법을 더 흥미롭게 바라게 만든다. 데스노트부터 시작해 괴물로 변신해 소동을 피운 헐크,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해리포터, 악당과 싸우느라 건물을 부순 스파이더맨,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주는 홍길동까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세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인물들과 작품을 통해 법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지 말해준다.

법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나이기에 책의 에피소드 전체가 재밌고 새롭게 다가왔는데, 그중 몇가지를 꼽아보자.

1. 재산 피해는 민법이 담당하고 몹쓸 짓은 형법이 담당한다. 난 이 사실을 책을 읽고나서 처음 알았다. 아무리 이과에 공대를 나왔다 하더라고, 시민으로서 교양을 전혀 쌓지 않았다는 방증이리라... 그리고 헌법은 가장 높은 법이란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2. 때로는 우리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판결이 나오기도 한다. 생각나는 몇가지만 적어보자면, 집에 침입한 도둑에게 과잉방어를 해 살해한 사건이다.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어느정도 갈피가 잡혔다.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후에 계속 공격해 상대를 다치게 하면 과잉방어로 인한 상해죄가 성립되는 셈이다. 집주인이 느낀 감정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가장 쟁점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의 반려견을 죽였을 때 재물손괴죄로 판결이 나는 케이스다. 애견인들에게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판결이겠지만, 아직 우리나라 법에서 반려동물은 재산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남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했으니 재물손괴죄가 나오는 것이다. 반려동물이 재산으로 취급되느냐 마느냐의 사회적 함의와 함께 현재의 법이 완벽하지 않고 충분히 바뀔 여지가 있음을 말해준다.

3. 민법은 유추적용할 수 있지만 형법은 유추적용을 금지한다. 형법은 법에 정해진 문구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비슷한 것을 들이대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다. 형법에서 ‘이러이러한 것은 범죄다‘라고 규정한 것만 범죄가 되고, 그에 따른 벌도 법에 정해진 대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죄형법정주의라고 한다. 형법의 이런 특성 때문에 우린 때로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을 보기도 한다. 저게 왜 징역 3년밖에 안되지? 왜 쟤는 불구속이야? 법원은 순수하게 법전을 바탕으로 판결내리지 않고 시민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겠지만, 이럴 경우 자칫하면 감정에 따른 인민재판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저자는 죄형법정주의를 이렇게 말한다. 참 어려운 지점이다.

> 그래서 평범한 이들이 주인이 된 근대사회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죄형법정주의를 형법의 근본 원리로 택했다. 죄형법정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 하나는 형법에 규정된 범죄행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범죄자로 처벌하지 않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즉, 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국민에게 무한한 행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범죄자는 형법에 정해진 형벌의 범위 내에서만 처벌한다는 것이다. 법에도 없는 가혹한 형벌을 마음대로 내릴 수 없게 만든것이다.

4.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발상을 전환하지 못한다 느낀 지점은 두발자유에 대한 장이다. 머리를 기르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행복추구건, 신체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에 속한다. 머리 길이 제한은 이런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이므로, 머리를 기르려면 ‘기본권의 제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머리를 기른다고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사회질서, 국가안보, 공공복리에 악영향을 미치는가? 결국 교칙에 의해 머리길이가 정해진다. 그렇다면 교칙은 헌법을 넘어설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학교는 머리를 기르면 학업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머리 길이를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학생들은 두발자유와 성적이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데 애를 먹었다. 실상은 **두발 규제를 주장하는 쪽에서 두발 자유와 탈선이나 사회질서 유지, 공공복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셈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내가 자라면서 응당 누려야 할 기본권을 지키지 못하고 시키는대로만 했는지,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생각조차 못했는지, 설사 잘못을 알았더라도 그저 순응만 했는지, 많이 반성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요새 학생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가지 이야기만 나열했는데 책 안에는 정말 많은 서브컬쳐 이야기를 법과 적절히 버무려 흥미롭게 풀어낸다. 딱딱하게만 생각했던 법을 이렇게 쉽고 재밌게 풀어낼 수 있다니, 아이디어와 기획이 빛을 발하는 책이다. 법을 조금 더 쉽게 알아보고 싶은 이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물론 책 안에서 틀린 내용이 있겠지만 그건 더 깊게 공부하면서 차차 알아내면 되니까. <지대넓얕>의 법 버젼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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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8-09-0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렇게까지는 생각 못해봤는데, 재미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