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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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

한 달 전에 읽은 책 간신히 기억 꺼내보기.

알쓸신잡에 출현한 유현준 교수의 두번째 책이다. 방송에 얼굴을 비춘 후 워낙 유명해지셨고(나만 몰랐던 분인가?) 책도 많이 팔리고 했으니 별로 읽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을 책으로 선택됐고,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책의 도입부부터 꽤나 도발적이다. 학교와 교도소가 디자인과 기능, 목적이 모두 유사하다는 것이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입소문을 내고 싶었나 했는데 1장을 읽다보니 또 일정 부분 설득당했다. 전국 8도를 통틀어도 동일한 디자인. 네모난 박스처럼 생긴 건물 외형.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 창문. 건물 부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쳐둔 담장. 학생들이 보이는 여러 신체, 정신적 문제는 교도소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한다. 재밌는 해석이다.

으레 건축이라 하면 그저 도면과 숫자, 콘크리트와 철근, 유리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것만 떠올렸다. 그런데 여는 글의

> 건축물의 진정한 의미는 건축물이 사람고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나와는 동떨어진 물질로만 건출물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건축이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는 문장을 읽고 새삼 놀랐다. 완전히 나 같은 건축 방면 바보에게 건내는 말이잖아?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로지 건축공학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 다소 편협한 내용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충분히 비판할 만한 점이다. 하지만 건알못인 나에게는 이 시선조차 새로웠다.

우리나라는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땅이 물러져 과거 무거운 돌보다는 가벼운 나무를 주자재로 건물을 만들었다. 빗물에 젖은 나무기둥이 문제없이 마르게 하려면 햇볕의 각도에 맞춰 지붕의 처마를 들어올려야 한다. 해의 입사각은 위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위도마다 처마 곡선의 높이도 달라진다(우리보다 위도가 높은 베이징은 처마의 곡선이 낮다). 도시와 건축은 주어진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결과물이기도 하다니. 도시와 건축, 디자인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그대로 투영하는 시선이 반영된 하나의 인문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도시의 성장과 발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걷고 그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히 벌어져 여러 이벤트가 만들어지는 도시를 꿈꾸는 듯하다. 단적으로, 서울과 뉴욕은 외면적으로는 빽빽한 빌딩숲 같은 비슷한 이미지를 주지만 막상 도심 안으로 들어가 거리를 걸으면 그 경험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뉴욕은 도심 곳곳에 시민들이 걸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원이 있다. 반면 서울은 한참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는 등의 이동 감각이 끊기는 경험을 하고서야 다른 공원에 다다를 수 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거리는 활발해지고 도시는 자연스레 자라나는 것이다. (사족. 문득 요새 서울의 문제는 공원과 녹지 부족보 미세먼지 뿜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걱정이 드는 건, 그가 제안하는 디자인이 실제로 가능하냐이다. 1장에서 학교 - 교도소를 묶어 도발을 한 후, 학교 건물을 저층 건물 여럿으로 나누고 공원과 학교를 묶어 학생들에게 자연을 되돌려주자는 콘셉트를 보여준다. 자연친화적인 거 좋지. 하지만 넓은 부지와 아이들 학습 시간은 어떻게 보장하지? 숲과 풀밭에서 놀던 학생이 다치면 학부모의 성원은 어떻게 감당할까? 도시 집약적인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시도는 커녕 입도 뻥긋하기 어려운 제안이렷다. 문제를 해결해나갈 때 이상과 현실의 타협점을 어디에 잡느냐가 가장 어렵다.

사실 여는 글의 건축의 의미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건질거리가 많지 않았다. 잠실 롯데타워(고층형 사옥)와 애플사옥(수평형 사옥)을 비교하며 수직, 수평 권력 이야기를 한다든가, 온갖 상점이 입점한 쇼핑몰의 장단점을 나열하는 등 책 안의 여러 내용은 많은 매체에서 이미 접한 것들이어서 감흥이 덜했다. 게다가 위워크 비즈니스 모델과 탈중심을 언급하면서 tv 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의 멀티 MC 진행방식과 비슷하다, 힙합가수가 후드티를 즐겨 입은 이유가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려고 한다는 비유를 들 때, 글쎄, 이건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또한 건축학과 도시공학은 땔래야 땔 수 없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두 내용을 마구 섞어 사용해서 전체적으로 책의 통일성이 떨어진다. 건축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말하다가 갑자기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다소 약한 고리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심지어 마지막 12장은 벽과 창문, 기둥 등의 공간의 여러 요소를 설명한다. 급하게 기획된 도서가 아닐까, 분량을 채우기 위한 꼼수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회사 후배는 학창시절 주변 강이나 호수에서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사는 자취방 주변에는 탁 트이고 맘 놓고 걸을 곳이 하나도 없어 근처 호수공원까지 한 시간 반을 걸어갔단다. 어디서 살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샌프란시스코라고 답했다. 재밌게도 나의 뉴욕과 그의 샌프란시스코는 저자가 걷기 좋은 도시로 언급한 도시다. 기술이 발달해 스마트폰만으로도 세계여행을 어렵지 않게 하고 차도에 자율주행차가 다니는 시대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길을 걷고 타인과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한 것 같다. 어디서 살 것이냐는 질문이 참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건축과 도시라는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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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 기다림에 대하여 철학자의 돌 6
해럴드 슈와이저 지음, 정혜성 옮김 / 돌베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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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

두 달 전에 읽은 책 간신히 기억 꺼내보기.

제목을 보자마자 아, 이 책이다! 시인,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시인이 되는 것일까? 이토록 낭만적인 제목에 빛이 바랜듯한 분홍색 표지는 이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하지만 첫 장을 보자마자 나는 알았지, 이 제목은 사기라는 걸.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친구와 두 시에 만나기로 해놓고 30분 늦으니 잠시만 기다려, 라고밖에 생각하지 않는 나로서는 앙리 베르그송이 어쩌고, <오디세우스>에서 저쩌고, 시몬 베유가 솰라솰라, 아이고 머리 아프다. 책 뒷편의 광고문구는

> 기다림, 시간의 선율과 공명하는 마음의 산책 - 문학과 예술, 인문학을 경유하며 탐색하는 생의 비밀스런 사건

이란다. 심지어 영문 제목은 그냥 <On Waiting>이다. 그 어디에도 시인의 ㅅ 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 출판사의 속임수에 깜빡 넘어간 것이다.

들끓는 분노와 치미는 배신감을 뒤로하고 어찌됐든 책을 넘겨보기로 했다. 저자는 기다림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치환한다. 생활의 템포가 빨라진 현대에서 기다림은 이 현대성을 방해한다(27쪽).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지금 시대에, 게다가 그 기다림이 아무 목적 없는 기다림이 된다면 정말 최악의 경험이 될 것이다(35쪽)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에 대한 책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야기할 것이다. 극 안의 두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라는 인물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막이 내릴 때까지 고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내가, 고도가 언제 오는지, 그(그것)가 사람인지 강아지인지 신인지 저승사자인지 원자폭탄인지 알 수 없는 세상에 떨어진다면 절망적일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은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고 기다림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조정하지 못한다. 앙리 베르그송은 설탕이 녹을 때까지 “나는 좋든 싫든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단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나의 욕구와 의지가, 물리학적으로 정해진 설탕이 녹는 시간을 어찌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는 우리가 이 ‘비조율’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만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41쪽)고 말한다. 컴퓨터 게임을 할 때는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지만, 플랭크는 고작 30초 버티고는 초침이 빨리 움직이기 바라는 것과 비슷하려나?

결국 기다림은, 우리가 온몸으로 거부하지만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하지만 그 시간을 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온전히 느끼며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시계를 보게 만드는, 삶의 악당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기다림이 이렇게 나쁜 개념이었다니! 하지만 저자는 지루하고 의미없을 것 같은 기다림이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봤다. (여담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책 내용이 복잡해서 단순한 나로서는 굵직한 내용밖에 못 읽어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앞서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에만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우리는 시간과 자신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 이때 자신을 바라보는 철학적 인식은 내부로 깊이 들어간다. 우리가 더 깊은 곳에 닿을수록 우리를 표면으로 밀어내려는 반발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철학적 직관이란 이 접촉이며, 철학이란 바로 이 약동하는 힘 자체라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철학에 할애한 시간이 없었지만 기다리는 동안에 의지와는 무관하게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55, 56쪽).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는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시간은 언제 가나, 하며 시계를 계속 흘끔거리게 된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주변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평소에는 그냥 배경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이때는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벽지에서 작은 흠집을 찾고 한 쪽이 접힌 책을 보며 문득 침대 위 이불의 색이 칙칙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리는 사람의 괴로운 시선 속에 주변 물체들이 고유 특징을 회복하는 것이다(78쪽). 나와 주변의 물체를 대체 불가능한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고, 그 순간 우리는 얽매여 있던 동일화의 도식에서 벗어나 예술을 발현시킬 수 있는 셈이다(158, 159쪽).

책을 다 읽고 나시 제목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기다림은 우리 삶에 철학과 예술을 비추는데, 살면서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래도 시인은 너무했잖아. 분하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속은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지루하고 의미없고 돈 안되고 피할 수 없는 기다림. 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새로운 세계로 침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다림. 나는 앞으로 살면서 이 시간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적어도 시인은 못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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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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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 (한겨레출판, 2003)

한국 남자 소설가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단언코 박민규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형식의 <카스테라>부터 시작해 찌질한 사랑 이야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감히(!) 미국을 비판한 <지구영웅전설>, 단편집 <더블>까지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집도 2010년에 박민규가 대상을 타고나서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지. 그와중에 읽지 못한 책이 있었으니, 이번에 읽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삼미’)이다.

책 첫 장을 펴자마자 박민규 특유의 이야기꾼의 재담 같은, 한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사다난한 1982년을 이야기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전세계의 온갖 사건 사고를 읽으며 꽤나 즐거웠다. <삼미>가 2003년에 출간된 책이어서 작가 특유의 문장과 표현방식이 이제 한물 간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왕년에 좋아하던 작가의 다다다다 쏟아붓는 수다가 반가웠다.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수식어( ‘아쉽게도’ 전대통령은 아프리카 4개국과 캐나다 순방을 마친 후, 무사히 귀국한다 _11쪽)는, 역시 박민규 이꼬르 위트라는 공식을 머리에 떠오르게 만든다.

감히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보자면,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탄생한다. 인천 시민의 온갖 기대를 받으며 시즌이 시작했건만 온갖 기록은 다 세우며 6개 팀 중 6위를 기록한다. 다음 해에는 엄청난 선전을 해 2위로 시즌을 마감하지만,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자신들이 세운 기록을 갱신하는 등 대체 프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많은 팬들이 등을 돌렸고 소설의 주인공도 야구에 관심을 끊고 대학에 입학하고 회사에 취업한다. 사회의 온갖 짐에 짖눌려가던 나에게 어릴적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응원하던 조성훈이 찾아와 이미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 팀의,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인 것이다.

범인인 내가 과거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이었다면 돈 받고 그것밖에 못하냐며 온갖 쌍욕을 다했을텐데 박민규는 특유의 상상력과 시선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책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처럼 야구 이야기가 메인일줄 알았건만 왠걸, <삼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그 안에서 좌절하는 우리네의 모습을 그린다.

작가에 의하면 야구가 처음 프로리그를 출범하면서 사회에는 프로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로라는 새로운 세계와 가치관, 의미가 생기고 프로복음이라는 것까지 설파한다.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와 같이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문장들이 프로복음에 속해 있다(77, 78쪽). 모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선 위에 서서, 사회가 인정하는 프로쪽으로 발돋움을 하려고 노력한다. 지옥철에 몸을 실고 야근을 하고 퇴근 후에 학원을 찾는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IMF 같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온몸 받쳐 열심히 살아도 결국 사회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만다. 프로의 세계에서 평범한 삶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삶은 몇 위일까? 순위는 커녕 프로팀에서 바로 방출당할 것이고, 삶으로 치면 죽음인 셈이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봐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는다. 허리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126, 127쪽). 사회의 모두가 프로가 되기를 원하는 곳에서 어설픈 아마추어에게 주어진 것은 결국 죽음인 것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우리도 마냥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길들여왔을지도 모른다.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와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은 산업혁명시대에 착실한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제도가 시발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알게 모르게 제도와 시스템에 길들여져 근면과 성실이 최고의 가치인줄 알고 쉬지 않고, 쉴 줄 모르고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262쪽).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수록 훌륭한 사원으로 꼽히는 것마냥 말이다.

자본주의와 프로의식에 삐딱한 시선을 보이는 작가의 의도는 꽤나 좋았지만, 그가 풀어낸 뒷 이야기와 결말은 다소 아쉽다. IMF 시대를 겪은 주인공은 아내와 재결합해 돈도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조성훈은 프라모델 도색으로 장인이 되지 못할 바에는 얼른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어려운 때에 낭만적으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충분히 희망적으로 봐도 될법하지만 이렇게 삐뚜름하게 쳐다보는 건, 과연, 내가 프로 ‘프로인 척하는 아마추어’여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도 좋다. 절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캐치볼을 하다가 공을 잡지 않고 거대하고 광할한 파란 하늘을 쳐다보기만 해도 좋다. 2루타성 타구를 잡으러 갔다가 땅에 핀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 멍하니 쳐다보아도 좋다. 박민규 식으로 말하자면, 진짜 인생은 삼천포로 빠져야 만날 수 있는 것이고, 프로의 세계에서 이길 수는 없어도 삼천포에서는 무얼 해도 좋을 것 같으니까. 비록, 지금 삼천포는 사라졌지만, 그럼 어디로 갈까요, 칠천포는 어떨까요.

여담. 박민규 하면 톡톡 튀는 문체가 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위트있는 표현(한 게임 한 게임 그것은 분명 평범한 패배가 아니었고, 뭔가 야구의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의 패배였고, 우주의 역행과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는, 그런 느낌의 패배였다. _63쪽)과 섬세한 묘사(창을 건너온 봄볕이 - 따끔따끔, 내 등에 스킬 자수를 놓듯 두 가닥의 햇살을 피부 속에 심었다 매듭을 지어 뽑아 올리고 있었다. _113쪽)도 꽤나 있었다. 마초 작가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의외다.

여담 2. 위에서 썼듯이 마초 작가(…)여서인지 일부 설정과 이야기, 묘사가 거북할 수 있으나 2003년 당시의 시대를 감안해야 하겠다. 작가에 대한 비호가 아니라, 소설과 시대상을 완전히 분리해서 해석하는 것은 제대로 된 소설 읽기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해당하는 부분이 소설의 주 이미지라면 안되겠지만, 다행히 <삼미>는 이를 피해갔다.

여담 3. 가장 아쉬운 점인데, 이 작품은 표절 논란이 있었고 작가는 사과했다. 논란이 있었을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읽고서 작가가 표절했다는 글을 찾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위트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원글에서 몇 보였다. 작가가 잘못을 시인했으니, 게다가 몇 안되는 애정하는 작가니까… 참작해주자… 하다가도 괘씸한 마음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여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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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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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독후감을 쓰기 쉬운 책이 있다. 내용이 너무 엉망이면 실컷 욕을 하고(<언어의 온도>,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어중간하게 마음에 들면(<열두 발자국>,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소감도 어중간하게 쓰면 된다. 반면에 마음을 강하게 흔들면 소감을 적기가 어렵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 크기 떄문이다. 발췌문만 잔뜩 가져오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좋다, 좋다, 고만 하는 소감을 싫어하지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하 슬픔)은 아쉽게도 좋다, 좋다, 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책이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신작이다.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과 미발표 원고를 추렸다고 한다. 영화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이어 두번째 읽은 신형철의 책인데, 앞선 두 권(<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에 비하면 이 두 권은 일기 정말정말정말 쉬운 편이었다. 초기 두 권은 읽다가 덮어버렸으니 말 다했지.

한 리뷰어는 신형철의 글이 이전보다 문제의식이 얕아지고 글의 길이가 줄었다고 말했는데, 나름 수긍이 가기도 한다. 초기보다 더 대중친화적이지만 나쁘지 않다. 이게 신형철식 진화가 아닐까. 저 같은 무지랭이에게 좋은 글 읽게 해줘서 감사드립니다.

책 내용에 대해서는 감히 평을 할 수 없다. 제목처럼 책은 대체적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골자로 삼았다. <정확한 사회의 실험>에서 보지 못한 사회에 대한 글 - 진보와 보수, 박 전 대통령 탄핵, 혐오사회, 국가주의 - 은 신형철이라는 사람을 조금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아내의 수술과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어있다. 그래도 신형철은 문학평론가니까, 가장 눈에 밟히는 부분은 역시 문학에 관한 부분이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들인데 신기하게 신형철의 목소리, 아니 글소리를 통해 읽으니 새롭게 다가온다.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은 아주 많지는 않고 글이 크게 어려운 편도 아니다. 하지만 한 달이 넘게 책을 못 끝내다가, 12월의 끝자락에 마음먹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렇게 보내기 아쉬운 책이었다. 산문집의 출간 간격이 7년이니, 다음 산문집은 2025년에 출간되나? 작년에는 2018년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때문이라고 농담했는데, 2025년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다.

이하는 발췌문. 찜해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고르고 골라 소개한다.

>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_53쪽

>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문학은 4.3과 5.18의 반복을 겨우 저지한다. 제주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것은 나의 확신이라기보다는 다짐이었다. _93쪽

>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_176쪽

> 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_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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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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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리뷰어는 이 소설을 읽고 이렇게 평했다. 아무 주제도, 의미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만 좇아 소설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소설을 이렇게 평했을까.

소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인간 본연을 탐구하고(<죄와 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전쟁과 평화>), 사회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냥 이야기 자체가 끝장나게 재밌는 소설이 있다(스티븐 킹의 많은 작품). 소설에 이렇게 계보가 많은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이하 나는 생각해)는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나는 과감하게 ‘무용하지만 쓸데없이 섬세해서 아름다워 좋은 소설‘류에 두고 싶다.

250쪽의 분량에 판형도 작고 한 쪽에 글자 수도 적다. 그런데 총 8~15쪽으로 쓰인 19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책 자신도 첫 페이지부터 김금희의 ‘짧은 소설‘이라고 명명한다. 아, 가뜩이나 단편은 이해하기 힘든데 길이도 짧다니, 난항이구만. 각각에 대한 소감을 말하기에는 지식과 정성이 부족하므로 대충 분위기를 나눠보자면 낭만, 이별, 일상의 위화감 정도 되겠다.

낭만의 테마를 가진 작품들은 나를 살짝살짝 웃음짓고 설레게 했다. 책의 포문을 여는 ‘원피스를 돌려줘‘는 원피스를 돌려달라는 여자의 요청에 헤어진 연인이 잠시 만나는 이야기다. 주말 오후에 할 일이 없어 헤이리로 드라이브를 갔다가 주차한 차가 어디 있는지 잃어버리고 마는데, 여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되뇌는 ‘산술 불가의 여름밤‘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사람의 감정은 그래, 순수 논리로만 이어진 산술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인 거겠지.

이별의 분위기는 발췌문이 덕지덕지다. <나는 생각해>를 읽은 사람 중 꽤나 많이 이 부분에 줄을 쳐두었으리라 생각한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감각적인 문장이다. 이별의 고통과 견딤에 대해 예리하게 써내려갔다.

>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견뎌야 완전한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_‘우리가 헤이, 라고 부를 때‘에서, 77,78쪽

또 하나 소개하자면, 우리가 소중한 것을 잃을 때 마음 속에서 뚝 부러지는 느낌을 표현한 문장이다. 물리적 충격으로 시디가 부서지고, 그 파편들이 가슴에 박혀 콕콕 쑤시는 느낌이 절로 든다.

> (좋아하는 가수 보아 음악은 엠피스리로 안 듣는다면서) ˝그건 뭐 다른 데서 다른 게 아니라 쉽게 지울 수가 없으니까, 지우려고 하면 이른바 일종의 충격, 버튼을 누르든 시디를 부러뜨리든 아무튼 힘을 써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해야 뭔가를 지울 수 있다는 건 중요해. 그런 건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닮았달까.˝ _‘영건이가 온다‘에서, 122쪽

마지막으로는 일상의 위화감이다. 낭만과 이별은 몽글몽글하고 감성적인데 반해 위화감이 풍기는 작품은 꽤나 불쾌하다. ‘이행성‘은 한 가족이 밀림을 끼고 있는 리조트에 여행을 가는 이야기다. 작중 아버지는 리조트에 몰래 얹혀 살아온 투숙객(멀쩡한 사람이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오랑우탄 같은 모양새를 하고 리조트에 몰래 머무른다고 한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기묘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들과 아내가 그들만의 다정한 대화를 나눌 때, 밀림의 깊숙하고 텅 빈 공간을 통과하는 바람소리를 들을 때 - 즉 자신도 모르게 가족에게서 소외되고 마음 깊숙한 곳에 공허가 자리잡았다는 것을 깨닳을 때마다 불안에 휩싸여 호텔 체크아웃 날짜, 비행기 편명, 직장과 직급을 떠올린다. 자꾸 아버지와 소문의 투숙객의 이미지가 겹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해>를 말랑말랑한 감성과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채운 소설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려면 정교한 장치가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이 가장 잘 계산된 작품은 단연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인데, 일정 시점 이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모두 어릴 적의 나쁜 기억을 지웠고, 작품의 마지막에 여자는 단골 술집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와 <장 발장>을 몰래 가져온다. 재밌게도 두 작품 모두 과거 자신의 모습을 지우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인물의 이야기다. 위 두 편의 소설에 비춰보면 과거를 지운 둘은 밝은 미래로 향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스토리가 압축된 소년소녀세계문고를 아무리 읽어도 작품 전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듯이, 과거의 한 부분을 지웠다면 나를 온전한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단골 술집 이름이 ‘없는 집‘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은 어떤 시간을 밀어내고 예정되어 있는 그 뒤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에 올 시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기대가 있는 때였다.
˝행복하다. 못할 게 뭐 있나, 맞제?˝ _‘나의 블루지한 셔츠‘에서, 146쪽

1년의 마지막 달 12월에 읽기 딱 좋은 작품집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김금희 작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읽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그래, 산술불가의 이유였다. 사소한 일, 아무 의미 없이 우리 곁을 지나쳐간 많은 일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사사롭지 않게 기록해둔 김금희 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나도 당신들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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