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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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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일컬어지는 <어스시 연대기>의 작가이자 여성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주창하고 말해왔던 어슐러 르 귄의 강연과 에세이, 서평을 모은 도서이다. 1976년부터 1988년까지의 글이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목차에 각 글마이 다루는 주제를 간략히 표시한 점이다. 아래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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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페미니즘
ᄋ(세계) : 사회적 책임
ᄆ(책) : 문학, 글쓰기
➝(방향)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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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은 같은 소주제 안에서도 글끼리 말하는 바가 달랐는데,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독자가 원하는 주제를 손쉽게 꼽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한 글에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두 개 이상의 주제로 쓰인 글들은 다른 것보다 한층 복합적이다(이런 글들은 어렵지만 읽고 난 후의 쾌감은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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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쪽이 넘는 책이어서 하나하나 모두 보지는 못했고, 주로 ᄋ(세계)와 ᄆ(책)을 다룬 글 위주로 읽었다. 가장 눈여겨본 건 역시 창작론에 관련된 글꼭지다. 특히 서사에 관련된 글이 인상깊었는데, 조금 길지만 아래 발췌를 남겨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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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집어서 소설, 일반적으로 서사는, 주어진 사실에 대한 가장이나 왜곡이 아니라 선택지와 대안들을 제기하여 환경에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과정이자, 현재 현실을 증명할 수 없는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연결하여 확장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순전히 사실만을 다아내는 서사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서사는 수동적일 것이다.
(중략)
우리는 이성에게 부조리의 바다를 건너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 오직 상상력만이 우리를 영원한 현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으며, 상상력이 길을 발명하거나 가정하거나 꾸며 내거나 발견하면 그제야 이성이 그 길을 따라 선택지 안으로 뛰어들 수 있다. 선택의 미로 안을 통과하는 하나의 단서이며 미궁 속의 금실인 그 길, 이야기가 우리를 제대로 인간일 수 있는 자유로 이끌어준다. 비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_86,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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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사실만을 담은 서사는 이야기로서 매력이 떨어지고, 아니, 그보다도 애초에 그것은 제대로 된 서사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상상력의 부재, 그것이 우리를 수동적이고 메마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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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갈등’이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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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가문 간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이고, 그 플롯에는 양쪽 가문의 두 개인이 벌이는 갈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른 요소도 다루지 않나? 그 다른 요소야말로 하찮은 분쟁 이야기엿을 것을 비극으로 만들지 않는가? _337,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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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모든 이야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갈등으로 정의하거나, 갈등으로 제한하면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사를 갈등에 의존하면, 모든 이야기가 일차원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등은 소설의 중요한 한 요소일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갈등 외의 다른 요소들이 이야기를 비극으로 만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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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시나요?’(339~ 352쪽), ‘여자 어부의 딸(373~420쪽)이 눈에 계속 밟힌다. 이 부분들은 접어두고(웬만하면 책을 훼손 안하는데!) 간간히 다시 읽고 싶다. 특히 ‘여자 어부의 딸’은 ‘작가에게 꼭 있어야 하는 한 가지는 연필과 종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은, 남성-여성, 백인-흑인, 부자-빈자, 이런 갈등을 다 떠나서 자신이 자유롭는 것을 느끼라는 작가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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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학술회에서의 강연도 있고 어려운 내용의 기고문도 있다. 재미보다는 성찰과 공부의 마음으로 읽다보면 어슐러 르 귄이라는 작가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이 시대의 학자이자 등불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