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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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

80년생인 내게 꽤나 도발적인 제목을 가진 책이었다. 80년생이 온다, 같은 제목의 책은 없었는데, 나는 초등학교 영어수업도 없었는데, 뭔가 상대적 박탈감이 들었다. 회사에서 이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한참 주역으로 일하고 있으니 과연 그들과 나 사이에는 어떤 벽이 있을지 궁금했다.

표지가 꽤나 깜찍하고 글씨체도 둥글둥글, 가벼워 보이는 책이었는데 내용은 꽉 차고 은근히 어려운 세대론에 가깝다. 1990년생이 올해 딱 서른 살이 되니, 그들이 직업을 가지고 주 소득원이 있으며 사회의 주 소비층이 되는 지금 적절한 책인 것 같다.

저자는 현재의 청년층- 즉 90년생이 자라오면서 겪어온 사회적 이야기(2000년 후반 미국 모기지론 사태, 9급 공무원 선호,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모바일 기술의 발달)와 그들의 특징(간단, 재미, 병맛, 정직을 추구)을 주루룩 언급한다. 뒤이어 이들이 기업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를 말한다. 회사에서 90년생을 어떻게 관리하고 미래의 주 소비층을 맞이하는 시장 지형의 변화를 말한다.

책은 길게 늘려 쓴 <트렌드 코리아> 느낌이다. 책을 읽다보면 90년생만의 특징보다는 현재 20~40대의 문화와 소비 양식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가 보인다. 그러니까, 이 책은 90년대생을 이해하려고 쓰인 책이 아니다. 지금 사회 트렌드가 어떻고 거기에 맞춰 뭔가 시도해보려는 이들에게 어울린다. 90년대생이 <90년생이 온다>를 읽고 맞아, 우리가 이런 특징이 있지, 하면서 깨달음을 얻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90년생이 책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는 책이다. 문유석 판사의 ‘변한 것은 세대가 아니라 시대‘라는 말처럼 몇년생, 무슨무슨 세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70, 80, 90년대생들이 성인이 되는 길목에 뭔가 큼지막한 사건이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70년생은 민주화 운동, 80년생은 IMF와 인터넷, 90년생은 모기지론 사태와 아이폰 출시다. 이처럼 사회의 큰 변곡점이 우리의 생각과 사고의 뼈대를 바꾸었을지도 모르겠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더니 참 신기한 격언이 아닐 수 없다.

이제 00년생이 20살이다. 회사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친구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참 신기하다. 10년 후에는 00년생이 온다, 진정한 밀레니엄 세대가 온다, 같은 책이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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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7-04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면 새로운 세대 담론이 나올 것이고 세대 격차를 걱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것입니다. 세대를 주제로 한 책들을 접하면 정말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구나‘하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

양손잡이 2019-07-04 22:36   좋아요 0 | URL
말씀 들어보니 매번 반복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ㅎㅎ 10년 뒤에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도 궁금하고... 저는 어떤 세대로 분류됐을지 고민(?)되네오 ㅎㅎ
 
인생의 차이를 만드는 독서법, 본깨적
박상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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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었는데도 삶에 아무 변화가 없던 것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읽었어도 읽은 것으로만 끝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 유명한 <본깨적>을 읽었다. 책을 읽은 후 본 것, 깨달은 것, 적용할 것을 적어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태도. 이런 심플하고 강력한 독서법을 소개한 책이다. 독서를 자기계발로 적극적으로 연결해서 유명세를 탔다. 나는 독서경영에 열광하는 타입의 독자가 아니기에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부서 후배가 줄까지 쳐가며 읽었다니 관심이 갈 수밖에.

허나, 결국 이 책에서 얻은 건 본깨적은 꽤나 괜찮은 독서법이다, 정도. 무의미한 독서를 추구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나, 독서로 자기계발을 꾀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이다.

사실 이 책은 발췌독으로 후루룩 읽는 쪽이 편하다. 초반부 대부분을 독서가 여러 사람을 인생을 이렇게 바꾸었다는 사례로 채웠기 때문이다. 중간을 넘어서야 독서법에 대한 썰을 푸는데 이것도 간단한 소개에 불과할 뿐이지 자세한 내용이나 풍부한 예시는 없다. 분명 끌리는 독서법이고 방법까지 알려줬지만 디테일이 아쉽단 말이야... 라는 생각이 든다면 저자가 소개한 독서경영 모임을 나가면 된다. 그렇다. 이건 독서 모임에 나오라는 유혹이다.

2013년도 당시에 본깨적은 새로운 독서방법이었을지 모르겠지만 2019년의 지금에는 그리 새로운 것은 없다. 이미 많은 독서 강좌에서 다룬 내용이고, 책에서 언급한 독서법 - 책 고르기가 중요하다, 손과 입으로 읽어라, 책에 글을 써가며 읽어라 - 은 이미 널리 퍼진 내용이다. 뭐, 결국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유의미한 것이겠지만.

무용한 독서를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책이다. 그리고 독서경영하는 사람 치고 문학을 자주 읽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간간히 읽는 문학조차 분석과 교훈찾기의 재료로 전락해버리니 가슴아플 때가 있다. 하지만 문학을 경제, 사회학과 한데 엮어 융합하는 독서법과 사고방식에 감탄할 때도 많다. 그래, 문학을 다른 방향으로 읽는 연습도 필요하긴 한데.

휘갈겨 쓰다보니 무용한 독서고 뭐고, 그래 뭐든 내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바꾸려고 읽는 건데 자기계발이라고 무조건 비난할 필요가 있나 싶다. 이렇게 또 하나 배우고 가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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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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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

직전에 읽은 박준 시인의 <당신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가 마음을 크게 울려서 호기롭게 편 시집이었지만... 너무 어렵드아. 박준은 뭔가 말랑말랑한 감성을 건드려서 편했는데 허수경은 이전에 학교에서 배운 ‘시‘의 이미지에 아주 부합하는 글이었다.

감정의 층위가 박준보다 조금 더 깊고 무거웠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읽다보면 아, 문장 하나하나가 내가 소화하기 힘든 감정을 싣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잠에 들기 전 침대에서 누워 읽다가 어느새 앉아서 각잡고 읽게 되는, 그런 글이었다니까. 그러니 다음 시집은 가벼운 걸로 골라야겠다.



*이 가을의 무늬*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렜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발이 부은 가을 저녁*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 걸었습니다
저녁을 말아먹고 검어지는 수제비마당에
대야를 내놓고 발을 담급니다

걷다가 아주 많은 발을 보았습니다
말, 양과 돼지 오리와 토끼의 발 자전거 자동차의 발도
빌딩이라는 황무지를 걷다가
김밥을 넘기며 잠시 멈춘 발도

지금쯤 그들의 발도 퉁퉁 불어 있을 겁니다
모두들 걷고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파스를 붙인 어깨로
늙은 호박의 가장자리를 말리고
마당 그늘에서 고사리는 갈빛의 우산을 펴네요

여름길 걷느라 지쳐서 낡은 구두는
늙은 소처럼 어둠 속에 웅크립니다
앞으로 걸으려던 발자국들이 미숙한 아이로 남은이 저녁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눈*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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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 그들이 배운 미덕에 대한 불편함
오마르 지음 / 레터프레스(letter-press)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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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

유튜브에서 솔직 시원한 영상으로 유명한 오마르의 책이다. 에세이라기보다는 짤막한 단상 모음이다.

꽤나 기대했는데, 유튜브에서 다룬 내용은 주로 1장 ‘미덕‘부분에만 있고 2, 3장은 개인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쿨함, 솔직함과 오글거림, 허세는 한끗 차이인데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다행히 전자에 걸치고 있지만.

군데군데 참신한 표현과 문장, 곱씹을만한 단락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와- 읽어보세요대박! 의 느낌은 없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유튜브에서 영상으로 사이다 발언을 한다고 해서 그가 항상 옳다는 법은 없고, 그도 매번 고민하고 조심하는 삶을 살 게 분명하다.

> 유머는 사람을 살피는 일이다.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상대방이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잘 살펴봐야 할 수 있는 고급 스킬이다. 많은 상황 속에서 경험치를 키워 어떤 말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또 어떤 말이 분위기를 망치는지 판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_28쪽, ‘유머는 사람을 살피는 일이다‘에서

> 1.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나를 찾는 곳이 늘어서할 일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지. 삶은 늘 한쪽이 괜찮아지는만큼 다른 쪽이 안 괜찮아진다. 모든 면이 괜찮은 삶은 없는 거겠지. 그래, 그런 건 정말 없었으면 한다.
>
> 2. 나는 심리적 허기를 실제 허기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집앞 편의점에 근무하는 청년은 이제 나를 꽤 아는 사람처럼 대해준다. 새벽마다 그를 만나러 간다.
>
> 3. 꿈에 짧은 머리의 여자를 백 허그한 채 잤다. 그녀의 머리냄새는 향기롭고 체온은 따뜻했다. 굳이 등을 돌려 그 얼굴을확인하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세 사람 중 한 명이겠지. 그게 누구든 그냥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생각하며다시 그 머리에 코를 파묻었다.
>
> 4. 새벽에 눈이 떠지면 마음속 공허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모르겠다. 나는 왜 깬 건가?
> 괜히 너에게 전화를 건다. 곧장 끊는다. 다시 눕는다.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말들은 보통 아침에 깨고 나면 다 별로인 것들뿐이다.
> _175, 176쪽, ‘밤의 기록‘에서

> 40권에서 완결되는 소년 만화를 예로 들자면 처맞던주인공이 각성하는 시기는 아무리 늦어도 10 ~13권이다. 즉, 당 신이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만화 속에서 27권인 현재까지 당신이 처맞고 있다면 이제는 내가 이 만화의 주인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해 봐야 한다.
> _289쪽, ‘의심‘에서

> A와 나는 영화 이야기를 즐겨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많은 영화를 추천해 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내가 추천한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그의 추천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우리는 영화를 본 후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좋은 영화를 계속 추천할 뿐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중요하다.
> 내가 이 영화를 좋게 봤다. 이 영화는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다. 이건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그러니내 취향은 고급이다. 너는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뭐 그런 것들.
> _296쪽, ‘우월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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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도서분류/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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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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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

트레바리에서 김민철 작가 강연이 있어서 급하게 읽었다. 결론은, 여태까지 읽은 ‘여성작가의 에세이‘ 중에서 최고. 2015년에 나온 책인데 왜 빨리 읽지 못했나, 정말 아쉽다.

책과 여행, 취미 등을 말하면서 참 공감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분야를 말하기도 한다. 심각하지 않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글들. 유쾌하게 살고 말하는 저자의 태도가 정말 좋다.


>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기억난다

책읽기에 관한 문장. 저자는 정말 뒤돌면 까먹을 정도로 워낙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도 기억력이 좋지 않아 책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의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또 책이 풍기는 분위기와 거기서 나오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기억할 뿐이다. 저자의 문장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이유였다.


저자 부부의 취미는 맥주 병뚜껑 모으기란다. 병뚜껑 따위,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쓰잘데기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외국 지폐와 우표를 수집했던 시아버지의 반응이 정말 재밌다.

> 하루는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가 수천 개의 병뚜껑을 보셨다. 너까지 이런 걸 모으는거냐, 라며 지긋지긋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등 뒤에서 시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한마디를 남기셨다.
“병뚜껑은 모을 만하지.”

시아버지의 흐뭇한 표정과 시어머니의 어이없는 표정, 그리고 저자 부부의 뿌듯한 표정까지 눈앞에 그려진다. 이렇게 재밌는 장면이 지나가고 저자는 맥주 병뚜껑 모으기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한다. 그들은 그냥, 재미있으니까 모으는 거다. 아무것도 아닌 맥주 코너가 그들에게 보물상자가 되고 둘만의 기쁨이 탄생하는 것이다.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태도.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의 끊을 놓지 않은 채로 항상 깨어 있는 삶의 태도. 그의 말이 퍽 반갑다.


>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그 편지를 본다면 연애편지로 읽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구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편지처럼 읽히도록 쓰시오.

저자가 카피라이팅 세계에 들어오면서 친 시험의 문제 중 하나다. 그는 모호한 감정을 어렴풋이 드러내게 요구하고, 심지어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문제여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안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흠, 나는 이 문제에 어떤 글을 써내야 할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요리보고 저리봐도 알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


마지막 5장은 쓰기를 다루는데, 앞선 글들과 감정이 다르다.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는다.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변한 감정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눈에 띄었다. 이 부분을 100% 공감하지는 못하지만(나는 글을 못 쓰고, 이만한 감정을 갖기에는 깜냥이 없으니까) 책과 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책읽기와 글쓰기의 온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읽다가 울었다니까.

> 어느 날 문득, 불안해졌다. 내게 그토록 익숙했던 밤의 문장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카피라이터가 되면서, 남편을 만나면서, 이전의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많이 달라져버린 것 같았다. 확실히 생각은 단순해졌다. 감정도 직선으로 흐를 때가 많았다. 한 발 빼고 남의 이야기로 흘려버리는 때가 많았다. 나는 괜찮으니까, 라고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감정의 끝이 많이 뭉툭해졌다. 문장 하나에 열광하는 일은 더 잦아졌지만, 문장 하나에 아파하고 끝없이 생각하고 우울해하고 결국 일기장을 꺼내는 일은 사라져버렸다. 속은 텅 비어갔지만, 사는 게 괜찮았으므로 나는 괜찮았다. 심각한 생각은 쓸데없는 구덩이를 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그냥 흘려보냈다. 시간도 자각도.
그러다 보니 나는 대충 괜찮아졌고,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되자,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물론 하루라도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저 버티는 건 정말 사는 걸까’라는 노래 가사 한 줄을 며칠 동안 곱씹던 20대는 지금 내겐 너무 버거웠다. 누구의 20대가 안 그렇겠냐만은.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다.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으면서 20대의 나를, 그때의 글쓰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불안했다.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불안함이었다.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종이책으로 한 권 들이고 우울해질 때마다 펴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참 마음에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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