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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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하자마자 책을 구입했다. 김훈, 안중근 - 이 두 이름에 눌려 이제야 폈다. 역사의 무거운 이야기인만큼 마음이 어둑해지는 걸 막으려고 짧게 끊어서 읽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책은 일제 치하,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이야기다.


역사는 다들 알테고, 결말은 바뀌지 않으니 내가 이 책을 읽고 느꼈던 점을 몇가지 남긴다. 정리가 안된 거친 스케치다.


1. 온통 무미건조함

김훈의 문체는 건조하기로 유명하다. <하얼빈> 역시 그러하다. 실제로 하얼빈의 추운 기후가 느껴질 정도다. 무거운 역사이기에 더욱 그렇게 쓴 걸까 생각될 정도다. 문장과 인물 모두 과장이 없고 담담하다. 

인물 간 대화만 보면 이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청년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모든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하얼빈>은 일부러 이 모든 것을 배제시켰다는 느낌이 든다. 인물의 개별성을 제거시킴으로써 역사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뭔가 말할 수 없는… 특별성을 만들어냈다.



2. 역사란 무엇일까

이토가 죽고나서의 일이다. 황실은 물론이고 당시 많은 이들이 이토의 죽음을 기렸다. 

> 같은 날 서울 장충단에서 한국 황실과 내각과 민간인들이 합동으로 관민 추도회를 열었다. 

흰 베로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이토의 위패를 모셨다. 위패에 ‘문충공'의 시호를 써붙였다. 황족과 각부 대신, 고위 관리. 한성부민회 임원들, 각 지역 대표들이 이토의 위패에 절했다. 서울의 모든 학교가 수업을 중지했다. 교사들이 학생을 인솔해 와서 절했다. 수도 거주민들은 대문 앞에 삼베를 감은 반기를 걸었다.  _197쪽



마지막 황태자이자 일본으로 유학간 이은은 슬픔을 떠나 조선과 일본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한다.

> 이은은 깊이 상심했다. 강하고 또 너그러운 스승 이토가 왜 조선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지, 조선은 무엇이고 일본은 무엇이고, 어째서 조선이 따로 있고 일본이 따로 있으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은 것인지 이은은 생각할 수 없었다.  _169쪽



복잡 미묘한 순간들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일제치하가 옳지 않음을 알고,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업적이 숭고함을 안다. 동아시아 문화의 개발은 허울뿐인 구호였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를 사는 이들은 이같은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조국을 침략한 이에게 슬픔과 애도를 느꼈을 것이다.


한국에 있던 천주교 주교는 아래와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 뮈텔은 약육강식하는 세계의 맨 앞에 서서 몸으로 세상을 끌고 나가던 이토의 고단한 영혼을 하느님께서 거두어주시고, 그의 수고로움을 가엾이 여기시어 그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뮈텔은 하느님께 간구했다.  _175, 176쪽


> 미개한 사회의 원주민들이 문명개화로 이끄는 선진의 노력을 억압으로 느끼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례들을 뮈텔은 세계의 후진 지역에 파송된 동료 성직자들의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_177쪽



종교는 조금 복잡한 소재다. 대표적인 서양 문물인 종교로서는, 동아시아 문화 개발이라는 일본의 구호에 긍정적이었을 수도 있겠다. 과거 서양 - 특히 유럽은 강자와 열강으로서 역사를 지배해왔으니, 같은 수탈자의 시각과 논리로 미개 사회의 개발에 쉽게 수긍하지 않았을까.


단, 과거 조선도 천주교를 핍박했는데, 핍박을 받은 것과 수탈자의 논리를 긍정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이야기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바로 ‘국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교 관점에서는 국가보다 사람을 더 중시한다고 생각하면, 국가라는 개념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고민하게 된다.



그래도 역사는 약동하며 다시 쓰인다.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미사의 강론에서 일제 치하의 한국 천주교회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그릇된 판단을 내렸으며, 안중근의 행위는 국권회복을 위한 타당한 행위라고 고쳐 말했다. 2000년,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어지러운 시대, 역사의 파도 한 가운데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모른 채 표류하는 이들 가운데, 안중근이라는 하나의 별이 빛나고, 스러졌다. 영웅적인 면모 뒤에 가려진 개인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수많은 생각들을 책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안중근이 정답인 시대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


> 한국의 근대는 문명개화의 꿈에 매혹되었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짓밟혔다. 이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고, 한국인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룩한 문명은 개화의 추동력에 합류할 수 없었다. 20세기 초의 한반도에서 과거는 미래를 감당할 힘을 상실했고 억압과 수탈을 위장한 문명개화는 약육강식의 쓰나미로 다가왔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_305쪽,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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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04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중근이 정답인 시대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문장을 읽으니 아침부터 감동이 밀려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전 김훈의 저 건조한 문체가 정말 힘들더라구요 <남한산성>도 그렇고...

양손잡이 2023-01-04 09:26   좋아요 1 | URL
덧글 감사합니다 :)
남한산성은 여러 의미로 진짜 역대급이라고 들어서 도전을 못했습니다 ㅠㅠ 도전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