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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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민음사, 1999)

가스 냄새가 소년 시절 친구 방의 일부였듯이, 불안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치즘이 횡행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삶의 한가운데>는 니나라는 아주 진취적인 여성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책의 뒷편에 ‘니나 신드롬을 일으킨 삶의 모험과 격정에 관한 소설‘이라는 광고문구가 있는데,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 당시 남자가 아닌 여자가 이렇게 멋있고 냉소적이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가히 신드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니나의 멋짐과 쿨함을 보여주는 몇 구절을 따와보면,

> 아, 때때로 모든 것을 걸 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아무 가치가 없어. _66쪽

라며 삶에서 안전성만을 추구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 발전이 없는 (나같은) 이들에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기도 하고,

> 너에게는 생을 끊으려는 이 시도도 삶의 일부인 것이다. 이것은 너의 정신과 생명력이 너에게 부여한 새로운 뉘앙스이며, 하나의 충격이며, 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며, 일종의 실험인 것이다. _319쪽

라는 위험 수준의 발언까지 한다. 인생이란 그 자체로 축복받은 것이라는 다소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문구는, 자살마저 인생의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하는 니나에게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니나는 자살을 실험이라고 규정해 삶의 결정권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귀속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대로 사랑하니 예나 지금이나 이런 히피적인 모습은 열광할 만하다.

니나는 모든 것을 경험으로 생각하고 지내는데, 딱 하나, 늙은 고모할머니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시간의 흐름과 늙음이라는 두 주제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 듯하다.

> 나는 아주 오래된 사진들을 찾아냈어요. 거기에서 고모는 예쁘고 젊은 처녀였어요. 아름다운 신부였어요. 그런데 지금 저기에 늙고 추악한 여자가 있는 거예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취를 풍기면서. _189쪽

책의 마지막에 달린 작품해설에서는 니나의 여러 모습을 명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여자‘다. 바로 위의 문장과 반대된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란 자연히 추해지는데, 니나는 이를 추악하다고 말한다. 혹시 니나는 고모처럼 추악해지기 전에 삶을 끝내기 위해 자살하려고 하는 것일까?

오직 신세대의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당찬(어떻게 보면 극단적이어서 무서운) 생각이다. 동시에 구세대가 보기에는 치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신세대와 구세대의 구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주요 인물만 봐도 니나는 진보와 신세대를, 슈타인은 보수와 구세대를 대표한다고 하면 조금 무리일까?

어느 리뷰에서는 슈타인이 답답하고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물이라고 칭했다. 분명 슈타인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감정표현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고 모험보다는 안정을 취하는 타입이다. 위의 리뷰 작성자처럼, 이런 슈타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슈타인이 틀리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우유부단하고 느리고... 그래서 그렇지...

의미가 서로 대립하는 두 인물이 논쟁을 하는 장면을 하나 꺼내보겠다.

> (슈타인의 대사) 니나. 나는 말했다. 당신은 젊기 때문에 힘을 믿고 있어요. 그러나 굴러가는 바퀴는 당신들의 저항과 희생과 어떤 영웅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아요. 어느 날 저절로 멈추는 거죠. _348쪽

> (니나의 대사)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 니나는 정말 흥분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_349쪽

읽어보니 익숙한 대화 아닌가? 개인은 힘이 적으니까, 강하게 저항하지 말고 천천히 이룹시다! 아니, 모험을 하지 않은 당신은 뭘 몰라요! 위와 같은 대화는 당장 인터넷 게시판만 봐도 수두룩빽빽하고,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후부터 계속 됐을 것이다. 슈타인은 니나를 걱정해서 조언한 것이겠지만, 니나는 그걸 꼰대질로 느꼈으려나.

> 나 같은 인간에게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맡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명철한 통찰력은 갖고 있으나 그 통찰에 무조건 따르는 힘을 소지하지 못한 부류에 속한다. 미래는 니나와,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지나치고 일방적이긴 하지만 강력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필요가 없다. _355쪽

슈타인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작가는 이런 슈타인을 통해 보수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을 발전시키기 힘들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슈타인이 자신을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점은 조금 가슴이 아프다. 한 인간의 삶과, 세상의 진보라는 두 보기 중 진정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고르는 객관식 문제가 있다면, 어느 것을 골라야 할까? 절대적 가치를 논할 수 없는 항목만이 보기로 주어진 문제는 풀기 어렵다. 이 난제 때문에 우리는 인류 문명사 동안 이렇게 토론하고 싸워왔다.

그래서, 슈타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결심하면서 내뱉는 독백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구시대는 나이가 들었다고, 보수는 사회를 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사회에서 무조건 퇴장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따위는 집어치우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진정한 인류의 진화가 아닐까.

>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 _363쪽

하나의 책을 어떤 이는 페미니즘 소설로, 어떤 이는 역사 소설로, 어떤 이는 사회학 소설로 읽었다. 인물과 시대상을 모두 배제하면 신념과 선택에 대한 아주 근사하고 멋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을 위해서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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