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
박미희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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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엄마에게 김연아 엄마 같은 엄마가 있었다면,

김연아 엄마는 김연아보다 더 훌륭한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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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가 처음 스케이트를 접한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일곱 살 여름이었다. 우리가 사는 군포에서 가까운 과천시민회관에 실내 링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보다도 우리 부부가 더 펄쩍 뛰며 반가워했다. 남편이나 나나 워낙 스케이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 부모가 좋아해야 아이도 좋아하게 된다

 

언니는 시키려면 취미로 하면 좋겠고, 동생은 좀 밀어줘서 크게 키워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재능은 선생이 알아본다. 안타깝지만 자매끼리도 능력차는 있다.

 

연아가 개인 레슨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 생활을 완전히 연아에게 맞췄다

->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연아는 악착같이 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남달랐다

-> 결국 자식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죄송하지만 코치님 상황 때문에 우리 연아가 주춤할 수 없으니, 코치님을 바꾸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 마음 약한 부모는 자식을 성공시키기 어렵다.

 

점프 기술은 2차 성징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해야 하는데, 이후에는 골격이 커지고 체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는 데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 피겨의 성공 여부는 초등학교 때 판단

 

나는 어떻게 해서든 시켜야 했으니 매일 매일이 전쟁이었다

-> 자신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결국 하고 싶지 않아서 포기할 때가 온다. 이때 부모의 악역이 필요하다.

 

한때는 국내에서 뚜렷한 경쟁자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의욕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무대를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 끊임없는 자극,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은 부상이 많다. 얼음판에서 점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부상의 위험이 크다. 심지어 십 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이 노인들에게서나 나타나는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경우도 많다

아픈 아이를 얼음판 위에 내보낼 때의 마음은 피겨맘으로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다.

어차피 아플 거야. 완치되기 전까지는 통증이 있을 테니까 그걸 인정해야 돼. 울어도 없어지지 않는 거니까 조금만 참자.” 나는 그렇게 아이를 설득해서 연습을 시켰다.

어렸을 때는 아픈 아이를 구슬려서 한 번 뛰게 하느라 힘들었다면, 지금은 말리느라 힘들다. 몸이 아파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아이는 무리가 될 정도로 연습을 하려고 한다.

-> 격투기에선 벨트 아래를 가격하는 것을 금지한다. 선수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피겨에선 점프를 금지해야 한다.


엄마로서 좀 더 너그럽게 대해줬더라면 하는 후회도 생긴다. 물론 악역을 자처했던 덕분에 좋은 성과를 얻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방법이 과연 옳았을까? 그저 부디 연아 마음에 그 시절의 전쟁들이 상처로 남지 않았기를

->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때론 그 상처로 평생을 아파하는 경우도 많으니

 

연아한테 첫 번째 부상이 왔다. 남편의 회사가 결국 문을 닫기 직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스케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선생님은 국제대회라도 한번 나가보자며 나를 설득했다.

-> 그때 선생님이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나 내 품에 있지도 않을 내 딸, 혼자서 길을 가더라도 나 대신 누군가 든든히 지켜주는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 내게는 필요했다

-> 메시는 골을 넣을 때마다 성호를 긋는다. 연아는 링크에 들어갈 때마다 그런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연아는 제대로 학교에 다닐 시간이 없었다. 연아의 입장에서는 공부를 못한 것 것 못지 않게 학교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것도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갈 길이 그렇게 정해졌던 것을.

-> 외국은 학업, 직업과 병행하여 운동을 한다. 그러다보니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우수한 선수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운동만 한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이 적다. 그런 상황에서 우수한 선수가 나오는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

 

남편과 큰아이의 섭섭한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쓰다 보면 하는 일도 흐트러질 게 뻔했고,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힘겨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약해진 마음으로 그 모든 요구들을 들어줬더라면, 연아의 뒷바라지는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부모의 희생뿐만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희생까지 있어야 한 아이의 성공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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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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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시절인 80년대에 이미 컴퓨터를 접하고, 대학생이 된 90년대에 인터넷을 한, 비교적 시류에 빠르게 적응하는 편이지만, 주식거래는 해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해 유산으로 받은 10주와 내가 산 10주가 있으니 그게 바로 한겨레신문 주식이다. (아버지가 한겨레신문 창간 주주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겨레신문도, 경향신문도 더 이상 구독하지 않는다. 어느덧 오십이 넘어 기득층, 보수층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 한겨레나 경향이 나보다 더 빨리 늙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다.

지금 내가 구독하고 있는 건 녹색평론, 오늘의교육, 작은책등이다. 환경, 교육, 노동에 대한 진보성을 아직도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잡지들이다.

손석춘의 신문읽기의 혁명이 나온 지 20년이 넘어가지만 그 옛날 조중동은 여전한 것 같고, ‘한경오근근또는 안간으로 버티는 것 같다. 잃어버린 20년이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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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지 않으면서부터 실로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다.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들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중요한 의무는 아주 쉽게 있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문호 괴테가 신문 읽기에 대해 남긴 혹평이다. 신문 읽는 것을 혐오한 작가는 비단 괴테만이 아니다. 숲속 생활을 찬미한 소로우 또한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눈을 돌려 그것을 통해서 신을 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신문이 갖는 중요성은 괴테나 소로우가 살았던 19세기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현대인의 삶은 이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변화무쌍한 삶의 환경과 우리 삶을 연결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신문인 까닭이다.

따라서 문제는 신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신문을 어떻게 읽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신문사는 일반 회사와는 달리 기업으로서의 이윤 추구보다는 전체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공기관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주식회사 형태로 되어 있음에도 우리 신문들의 소유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다. ‘사주(社主)’에 의해 철저히 전제적인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령 민족지를 자처하는 두 신문의 경우, ‘조선일보는 친일 금광재벌 방응모 이래 4대가 세습하고 있으며, ‘동아일보도 친일 지주 김성수 이래 4대로 대물림해가고 있다. 상업지를 표방한 다른 신문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일보는 장기영 씨가 창업한 이후 그의 아들들이 신문사 경영을 맡고 있다. ‘중앙일보의 사주는 삼성그룹과 친인척 관계로서 홍석현 씨 자신이 보광그룹의 회장이다. ‘국민일보세계일보의 사주는 다 알다시피 순복음교회와 통일교회다.

조선일보는 방씨 일가가 90%대의 주식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한국일보는 장씨 일가가 무려 99%에 달하는 주식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 ‘동아일보또한 인촌기념회와 김씨 일가가 75%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소유 구조는 자연스럽게 각 신문사 내부에서 이들의 권력을 무소불위로 만들어준다.

 

신문 편집의 궁극적 주체가 사주들이므로 대부분 우리 신문들 편집 방향이나 사설 논조가 친자본이고 노동자들에 적대적인 것은 필연이다. 사주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자본가로서 스스로 신문사 내부의 언론노동조합운동에 적대적이거니와, 노동쟁의 대부분이 주요 광고주인 재벌들의 사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힘의 균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한국의 현실은 참으로 우려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설은 고교생들에게 논리적 사회의 훈련용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다수 고등학교에서 일선 교사들이 사설을 논술 수업에 적극 활용할 뿐 아니라, 실제로 신문 사설이 대입시험에 지시문으로 출제되고 있다.

이른바 신문교육운동(NIE)’이란 것도 명목상으로야 신문 편집인협회가 교육부로 보낸 공한에서 보듯 청소년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언론의식, 민주의식, 시민의식을 깨닫게 되어 올바른 현대인으로 자라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낱 사주의 사설(私說)에 지나지 않거나 천편일률적인 사설들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얼마나 민족문제나 노동문제에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신문의 성격이 확연하게 다른 두 신문을 동시에 구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독료가 부담될 수는 있으나, 삶의 현실을 정확히 보기 위한 투자로 여기자. 조금 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독자라면 언론비평 전문지들을 구입하여 볼 수 있다. 현재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디어오늘이라는 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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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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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좋아하는 일본 사상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 분 책만 나오면 바로 사서 읽는다. 그리곤 이 분을 만나기 위해 도쿄에 있는 집(개풍관)에 직접 찾아간 일도 있다. 아내 덕분에 우치다를 알게 되서  책 몇권을 읽긴 했는데, 그 것 중 이게 제일 재밌다.

 

우치다와 나는 (감히ㅋㅋ) 비슷한 면이 꽤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가출한 것, 딸을 키운 것, 여학교에서 근무한 것,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 집을 지은 것, 밴드를  좋아하고, 여행을 안 좋아하는 집돌이 등등

 

하지만 차이는 첫째, 우치다가 블로그에 쓴 글은 책으로 내겠다는 편집자가 줄을 섰지만 난 그렇지 않다는 점. 둘째, 우치다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집을 지었지만 (나도 우치다처럼 1층은 음악과 체육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으나ㅠ.)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 셋째, 우치다는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는 능력이 있으나 난 그 반대라는 점.

 

아무튼 어떻게든 되겠지란 낙천적인 성격이 무엇보다 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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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스승은 무의식적으로 제자가 자기보다 열등한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할 스승님을 모시고 있다고 믿는 편이 제자의 기술 향상에는 효율적입니다. 다만 이 시스템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습니다. 언제나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계속 여기도록 만들기 위해 제자의 실력이 향상하지 못하도록 스승이 제자의 성장을 무의식적으로 가로막을 위험이 있다는 점입니다.

 

히라카와 군과 나는 얼마 전까지도 일본제국주의 타도라는 슬로건을 외쳤는데, ‘어라, 자본주의도 쓸 만한 시스템이잖아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일반적으로 관계자들 전원이 될수록 득을 볼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놓으면 어김없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분야를 과감하게 탐구해가는 일은 용감하고 창조적인 기획이기는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심사 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받아 연구자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합니다. 내가 8년 동안 32개교의 공모에 모조리 낙방한 것도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든가 낮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수준의 연구자인지 심사할 수 없기때문이지 않았을까 하고 돌이켜봅니다.

 

단지 문법 규칙이나 단어를 통째로 외우게 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고, 언어의 본질을 본격적이고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편이 학생들의 빠른 이해를 돕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관사란 어떤 세계관의 산물인가?’ ‘()이란 어떤 시간 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가하는 언어의 근원부터 설명하면 학생들은 빨리 이해해줍니다.

 

인간은 내심으로 배움을 원합니다. 교사의 배움의 스위치를 켜주기만 할 따름입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배움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교육법이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쓰루 군, 전쟁에서 살아남는 비결을 알고 있는가?” 장인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느데요.”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면 바로 숨는 거야하고 장인이 답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쉬지 않고 책을 낼 수 있는 이유는 이제까지 써놓은 글을 거의 전부 인터넷에 올린 덕분에 편집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각자 기호에 맞게 자기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중요한 능력일 텐데, 확실히 나는 그런 능력이 높은 편입니다. 혹시 요령이 있다고 한다면, 상대방의 가장 좋은 점을 찾아내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교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재능은 그곳에 있다기보다는 그곳에서 태어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풍부한 재능으로 만들어낸 작품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에 비판보다는 칭찬하고 심사하기 보다는 기대하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창작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교육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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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 노르웨이의 한국인들이 말하는
박노자 외 지음 / 꾸리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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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식의 장래에 대한 고민이 많다. 애는 참 착하고 성실한 편인데, 그런 애들이 이 대한민국에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삼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겼다. 그런데 의외로 노르웨이에 대한 책이 별로 없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비록 10년전 나온 책이긴 해도 다행히 좋은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는데, 박노자가 공저자다.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시작해 한동안 박노자에 푹 빠져있었는데, 그게 벌써 20년전이라니 세월 참... 박노자와 나의 공통점(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ㅋㅋ)은 첫째, 나이가 같고, 둘째, 사립학교에서 노예처럼 일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박노자는 좋은 곳으로 떠났고, 난 그대로 머물러 있단 점이다ㅠ.

 

노르웨이는 산유국이다. 국토는 우리보다 6배나 큰데, 인구는 1/10이나 적다. 따라서 바로 따라할 모델이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소련이 옆에 있어서 공산화 될까봐 복지국가를 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도 그렇게 공산주의가 싫고, 공산화될까봐 두렵다면, 노르웨이처럼 복지국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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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봄. 나는 한국의 모 사립대학에서 비정규직(계약직) 강사로 채용되었다.

한국에서 사립학교 재단의 노예로 사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던 나는 외국에 자리를 알아봤다.

우리 가족은 20003월 말에 노르웨이에 와서, 현재 13년간 거주해오고 있다.


노르웨이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30퍼센트가 공공부문에서 일한다. 비록 시장성이 없는전공(고대 희랍어라든가 등등) 졸업자라 해도 일단 인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공공부문 직장(예컨대 복지사무소 상담원 등)을 보통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과 결정적 차이는 결국 공공부문 고용의 크기인 듯하다.


노르웨이는 소매업 시장의 99.3퍼센트를 4개의 큰 독점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다. 개인이 가게 내서 장사에 성공했다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노르웨이는 전체 비농업 부문 피고용자에 대비해 비농업 자영업가 4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피고용자 100명 이상이면 노사 간의 소통과 노동자의 발언권, 즉 경영참여가 법제화되어 있다. 때문에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안정된 소득의 임금 노동자들이 맹목적 성장보다 차리리 재분배 위주의 정책에 더 쉽게 합의한다.


한국은 지금도 산업국으로서 최악의 비정규직 비율(노동인구 중 56퍼센트 정도)을 전혀 줄이지 못하고 있지만, 노르웨이는 비정규직이 약 8퍼센트에 불과


노르웨이에서 복지국가의 기본적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 초기였다. 당시 노르웨이의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인접국가인 소련처럼 아예 체제를 전복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비록 의회에서는 약세였지만, 급진적인 노조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수정당들이 차선책으로 차라리 복지개혁을 실시하겠다는 노동당의 집권을 수용한 것은 결국 혁명에 대한 공포로 인한 하나의 양보였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북유럽은 경험적으로 잘 증명하고 있다. 총국민생산 중 세수의 비중을 보자면, 노르웨이는 43퍼센트, 스웨덴은 45펴센트, 러시아만 해도 37퍼센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미국과 똑같이 26퍼센트 정도이다.


지구인 전체가 노르웨이만큼의 소득 및 소비 수준을 누리자면 우리에게 약 세 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노르웨이의 특수한 경험을 무조건 보편화시켜서 다른 나라들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반드시 노르웨이 정도의 화려한국가적 지출은 아니더라도 한국과 그 경제수준이 비교가 가능한 남유럽, 동유럽의 상당수 국가들까지도 적어도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행하고 있기에, 이와 같은 정치적 목표들을 한국의 경우에도 상정할 수 있다.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은 인구가 한국보다 많지 않아서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유지할 수 있고 한국에선 그런 모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사실일까? 스칸디나비아 복지 모델은 근본적으로 독일 모델을 근간으로 해서 발전시킨 것으로 독일인구는 남한의 두배에 가깝다. 문제는 총인구 숫자가 아니라 부자와 기업으로부터 얼마나 효과적으로 징세를 하는가, 그리고 부자에게 징세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행할 만큼 정치적 의지력이 있는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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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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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지

작년에 갑툭튀 유행한 말이다.

혹시나 사전에 있는 말일까 검색해보니 역시나 없는 말이다.

일단 말이 안된다.

수십년의 일제강점기를 지나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으니 해방이란 뭔가 역사적이고 극적인 단어일텐데 어찌 매일매일의 일상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의 일상은 죽음이란 극적인 해방 전까진 끊임없는 지옥의 연속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해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히려 해방엔 일지가 더 어울릴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아무튼, 2022년 상반기엔 박해영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있었고, 하반기엔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있었으니, 해방의 나날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사실 아버지의 일기가 아니라 딸의 일기다. 그것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며칠간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일기를 통해 아버지는 해방을 맞는다. 단지 정지아 아버지만의 해방이 아니라 이 땅의 사회주의자, 아니 사회주의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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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고 뭐고 남자란 죄 야들야들한 암컷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모양이었다

 

광주교도소에서 함께 복역한 동지 한 사람이 떠르르한 지주의 자식이었다. 그에게는 늘 사식이 풍성하게 들어왔다. 그 사식을 벤소에 숨겨놓고 돼지처럼 저 혼자 먹었다고, 진짜배기 혁명가가 아니라고, 아버지는 두고두고 흉을 보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감방에 있었는디 갸들은 지 혼자 묵들 않애야. 사식 넣어주는 사람 한나 읎는 가난뱅이들한티 다 노놔주드라. 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

 

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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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2023-06-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534357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2430088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신나 2023-06-0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님 반갑습니다. 좋은 책 꼭 읽고 리뷰도 써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