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고산유고
윤선도 지음, 이형대 외 옮김 / 소명출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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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많은 시조 작품을 만들어, 가사 문학의 정철과 함께 수험생을 괴롭히는(?) 작가이다. 정철이든 윤선도이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강직한 (나쁘게 말해 융통성 없는) 성격 탓에 유배를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도시 정치판에서 밀려나 시골 자연 속에 있다 보니 벗할 사람 없으니 자연친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술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 한들 이렇게까지 반가우랴

말도 없고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산중신곡 만흥 )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떠오르니 그 모습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산중신곡 오우가 )

 

어찌보면 오늘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의 원조가 아닐까? 도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돈과 몸을 잃고 자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애잔한 이야기다.

 

참고로 아이를 잃은 아빠의 슬픔을 노래한 한시도 눈길을 끈다. 윤선도에게는 인의, 의미, 예미라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차남과 삼남은 윤선도보다 일찍 죽었다. (심지어 아내도 일찍 죽었다) 서자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막내 서자의 이른 죽음을 두고 남긴 두 작품이 인상적이다.

 

<밑줄>

미아의 죽음을 슬퍼하며 (悼尾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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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달래다 (遣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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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신곡 (山中新曲) 중 만흥, 오우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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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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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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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
강민경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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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이 현대에도 재미와 의미가 있으려면 작가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 주는 게 효과적이다.


천하의 이규보가 과거 시험에 여러번 낙방하고, 급제(꿈에 규성이라는 별이 급제 사실을 알려줬다고 이름도 규성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개명했다고)한 이후도 백수생활을 8년간 하다가 고위관료에게 청탁한 끝에 간신히 관직에 들어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울러 어렵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동료랑 싸워서 해고당하고 9년간 또 백수가 된 점도 동병상련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술 좋아하고 기타 연주 좋아하는 건 오늘날 우리가 공감하기에 좋은 점 아닌가.


이렇게 편하게 이규보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원전을 접하게 해주는 게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밑줄>

 

저는 우둔한 자질로 과거에 합격한 지가 벌써 8년이 지났으나 일명(一命)의 벼슬도 제수받지 못하였더니, 이제 은상(恩相) 각하(閣下)께서 전부(銓部)의 권한을 맡아 선비들의 정감(精鑑)이 되셨음을 듣고 그냥 물러설 수 없어서 감히 진출을 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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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완산(完山)의 서기(書記)로 있었다가 동료에게 중상을 입어 파면을 당하였다. 내가 서울에 온 뒤로도 그 사람은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앉아서 교묘한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9년 동안을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곧 사람이 하늘을 이긴 것이다. 어찌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곧 그해에 한림(翰林)에 보직을 받았고 따라서 여러 요직을 거쳐서 빠르게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이것은 바로 하늘이 사람을 이긴 것이다. 사람이 어찌 끝내 방해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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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마시고 한 곡조 타서 이것으로 가락을 삼으니, 이것 또한 일생을 보내는 한 가지의 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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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한때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이,

임궁(琳宮)에서 범어를 파하니 / 琳宮梵語罷

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 天色凈琉璃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부식(富軾)이 그 시를 좋아한 끝에 그를 구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은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陰鬼)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두고 시를 짓기를,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는냐? ,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桃花點點紅

라고 하지 않는가?”

하매, 부식은 마음속으로 매우 그를 미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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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걷다
김태빈 지음 / 레드우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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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이육사 황혼)”

 

이육사는 1904년생이고, 그의 딸 이옥비는 1941년생이다. ‘육사, 걷다의 작가 김태빈은 197*년생이다.

 

인간은 외로울지 모르지만 육사는 외롭지 않다. 이들이, 우리가 그와 함께 걷기 때문이다.

 

의로운 길을 걸을 때 외롭지 않도록

 

: (일본) 육사를 걷던 박정희나, (한국) 육사를 걷던 전두환은 의로운 길을 걷지 않았으니 (저승길이) 외로울 것이다.

 

<밑줄>

육사는 어려서부터 멋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안경알 없는 안경도 멋 때문에 썼단다. 나는 종종 1941년에 촬영해 가족과 친구에게 선물했던 중년의 육사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청년 육사는 영락없는 모던보이였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1940년 육사가 발표한 현주·냉광-나의 대용품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식용품에는 가배에 다분히 딴 놈을 넣는 모양이나 넣을 때 보지 않는 만큼 그냥 마십니다마는, 그도 심하면 아침에 삼월(三越)에 가서 진짜를 한잔합니다.”

여성이란 잡지에 기고했기에 일상생활의 단면을 가볍게 쓴 것으로 보이는 이 글에 따르면, 중일전쟁 이후 부족해진 일용품을 대신한 상품이 널리 팔렸던 것 같다. 대용품이니 질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개중에는 가짜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 같은 기호품은 더 구하기가 어려웠을 테니 모던보이 육사로선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으리라. 그럴 때 육사는 미쓰코시(三越)에 간다고 했다. 육사와 교우했던 김기림은 조지야(丁字屋)에서 캘리포니아산 커피를 마셨다는 글을 남겼다.

 

그때 옥비 여사는 내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했다. 너무 놀란 내가 재차 확인했을 정도였는데, 만약 이육사 선생이 해방을 맞았다면 북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는 말씀이었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의 반공 체제 확립과 친일파의 준동, 그리고 두 동생의 월북까지 모두 이유가 되겠지만, 육사의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는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노선이자 방법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나는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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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저리 아저씨 - 한흑구 제3수필집·유고집
한흑구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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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가 생전에 낸 수필집은 두편인데, 사후에 남은 수필들을 묶어서 낸 세 번째 수필집인 셈이다.

 

나의 이름과 내가 쓴 시가 영문으로 인쇄된 것을 처음부터 바라볼 때에 나는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것보다는 알바는 물론이고, 학보 문예부의 여학생 기자들까지도 나를 큰 시인인 것 같이 대우하고 또한 격려하였다. 나는 용기를 얻어서 밤을 새우면서 영미 시인들의 시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학보에 수십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순정의 학우 알바 )”

 

한흑구는 수필가로 유명했지만 시작은 시인이었다. 그가 밤을 새우면서 시를 쓴 이유는 그가 좋아했던 스웨덴 여학생 알바와 학부 문예부 여학생들 때문이었다. 스물의 흑구는 나라 잃은 설움이나 조국에 두고온 어머니나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아버지 생각은 잠시 잊어도 될 나이였다.

 

중학시설에 나는 새벽마다 모란봉을 산책하는 것으로 새벽 일과를 삼았었다. 두 손에 아령을 쥐고 뛰기도 하고, 대동강 물에 냉수마찰을 하였다. 서문 안에서 살고 있던 나의 산책 코스는 서편 길로 모란봉을 올라가곤 했다. 서문여고, 숭의여고, 정의여고가 서 있는 길 복판을 뚫고, 만수대를 넘어서 서평야에서 들어오는 큰길을 건너 토성을 끼고 칠성문을 지나 을밀대로 오르는 것이었다 (모란봉의 봄 )”

 

실향민 한흑구가 평양 살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남중생 한흑구에게 서문여고, 숭의여고, 정의여고 길은 매일 산책 코스였나 보다. 숭의여고는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서문여고랑 정의여고는 남쪽에 동명이교(?)가 나중에 개교하였다. 

 

정해진 주제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소재의 탐구에 오랜 시간을 보내며 관찰과 이해를 얻기에 노고를 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무를 쓰는 데 5, ‘보리’ 3, ‘석류’ 2, ‘코스모스’ 2년 등의 시간을 경과하며 관찰한 뒤 붓을 들었던 일이 있다 (직관력과 영감 )”

 

수필 한편 쓰기 위해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니, 작가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ㅠ.ㅠ 다만 가난은 부유보다 좋은 글감이니 벌이를 위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게 역설적인가?

 

“70이 다 되어가는 나는 젊어서 나의 집과 땅과 재산과 고향마저 잃어버리고, 타향에서 늘 향수의 서러움 속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잃었던 나의 조국을 되찾은 기쁨과 행복 속에서 더 오래 살고 싶은 희망에 차 있는 것이다. 어서 남북이 통일이 되고,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젊은 날에 뛰어놀던 나의 모란봉 꼭대기에 입을 맞추는 기쁨에 감격하고 싶은 것이다 (노년이 맞이하는 일 년 )

 

조국이 통일되어 평양으로 귀향하여 젊은 날 뛰어 놀던 모란봉에 입 맞추는 기쁨을 소망하며 이 수필을 썼는데, 그로부터 3년만에 별세를 하고 만다. 한흑구 사후 50년이 지난 오늘도 조국은 여전히 분단된 상태이다. 2026년 기준 실향민 생존자 약 3만 명 중 70% 이상이 80대와 90대라서 10년후에는 거의 다 돌아가실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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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 -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김주완 지음 / 피플파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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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

1. 교육청은 사립학교에 대한 평가와 감사를 통해 잘잘못을 비교 공개하고, 못하면 국고보조를 줄이거나 잘하라고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2. 단기적으론 사립학교를 공적으로 운영하고, 장기적으론 사립학교를 공립화해야 한다.

 

<이유>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를 낭독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 헌법재판관 후보청문회에서 재산이 4억이라고 신고하며 일반인의 평균 재산을 넘어선 것 같아 반성한다고 말할 정도로 청렴한 사람이다. 그가 없었으면 오늘날 우리는 부자유와 불평등한 독재 정권 아래서 숨죽이고 살거나 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릴 때 가난으로 학업을 포기할 뻔했는데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학업에 전념한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 독지가를 통해 자유, 평등, 박애, 공동체를 깨우쳤다고 한다. 이처럼 문형배 판사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가르친 사람은 바로 김장하 선생이다.

김장하 선생은 가난 때문에 학업을 잇지 못했던 자신과 같이 불쌍한 학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과 한약업을 하면서 환자들에게서 받은 돈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립학교를 세웠고 그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사립학교의 공립화만이 학교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립학교는 어떠한가?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인건비, 일반운영비를 국고로 보조받고 있다. 심지어 자기 부담의 의무를 가진 법정부담금조차 거의 안 내고 있다. 사실은 공립처럼 국민의 혈세로 지원 받고 있으니, 사적으로 설립했을 뿐 공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즉 사립이지만 공영학교인 셈이다.

사립학교법과 법인정관에 따라 학교를 운영하되 그 구체적인 방법은 관할 교육청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민주적인 인사와 투명한 예결산이다. 관할청은 사립학교에 대한 평가와 감사를 통해 잘잘못을 공개 비교하고, 못하면 국고보조를 줄이거나 잘하라고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단기적으론 사립학교를 공적으로 운영하고, 장기적으론 사립학교를 공립화해야 한다.

 

<참고 : 김주완-줬으면 그만이지 >

198239세의 김장하는 필생의 사회환원 프로젝트 고등학교 설립에 착수한다. 자신은 끝내 진학하지 못했던 고등학교를 직접 설립,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19837월 학교 신축 기공식을 거쳐 198432일 신입생 488명의 입학식을 열었으니 바로 학교법인 남성학숙 명신고등학교였다.

 

김장하 이사장은 교사와 직원 채용에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친인척이나 지인은 쓰지 않겠다. 둘째, 돈을 받고 채용하지 않겠다. 셋째, 권력의 압력에 굽히지 않겠다.

 

학부모에게 손 벌리지 마라.”

이사장의 또 다른 방침이었다. 80년대 당시만 해도 이런저런 잡부금도 많았고 교사들의 회식비를 학부모들이 부담하는 관행도 있었다. ‘촌지도 전교조가 거부운동을 펴기 전에는 공공연했다.

김장하 이사장은 이런 잘못된 관행을 없애기 위해 매월 모의고사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사비로 교사들 회식을 시켜주는 한편 해마다 학기가 끝나면 23일 전체 교직원 여행을 보내 주기도 했다. 또한 입시가 끝나면 고생한 3학년 담임교사들을 위해 가족여행을 보내줬는데, 두툼한 봉투를 주면서 제일 좋은 곳에 가서 자고, 가장 먹고 싶은 음식들 마음껏 먹고 오시라고 말했다.

 

명신고등학교에서는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집단해직사태 때 단 한 명의 해직교사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2015년 책으로 펴냈던 풍운아 채현국의 채현국 이사장이 운영하던 양산 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 역시 단 한 명의 해직교사가 없었던 것과 상통하는 얘기다.

전교조 결성과 함께 전국 곳곳의 사립학교에서는 사학비리 척결’, 공립학교에서는 교육민주화참교육 실현이라는 구호가 터져나왔고, 실제 수많은 사학비리가 폭로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사학재단과 전교조 조합원 교사들 간에 대립구도가 형성됐고, 정부의 해직 방침을 빌미 삼아 사학재단이 앞장서 교사들을 자르기도 했다.

그러나 진주 남성학숙과 양산 효암학원에서는 이른바 사학비리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재단과 교사들 간에 대립이 생길 일은 없었으나, 전교조를 불법으로 규정한 노태우 정부의 해직 압력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명신고등학교는 경남지역 초··고등학교를 통털어 전교조 조합원이 가장 많은 학교 중 하나였다. 1987년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시절부터 그 숫자를 불려온 명신고의 조합원은 한때 40여 명에 달했다. 전체 교사가 61명일 때였다.

 

이 학교에는 모든 사립학교에 다 있는 재단이사장실이 없었다. 개교 초기 잠시 있었기는 했다. 커다란 책상과 명패, 소파 등이 있는 교실 1개 크기의 이사장실이었다. 처음엔 으례히 그런가 보다 하고 거기서 집무를 봤는데, 한 달 정도 지나 보니 학교 시설이 부족한 데다 이사장이 자리를 차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장하는 교장에게 이사장실을 비우라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양호실로 쓰도록 했다. 그래서 학교 안에는 이사장이 머물 공간이 따로 없었다. 그 역시 특별한 행사나 회의가 있는 날 말고는 학교에 자주 가지도 않았다. 법인 이사회도 교장실에서 열었고, 결재할 일이 있으면 서무실에서 했다. 학교에 갈 때도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이 학교 학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는 원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오직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한약업에 어린 나이부터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서는 다소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욕심을 감히 내게 되었던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즉,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 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본교는 제 전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의 신조는 앞서 말씀드렸듯, 제가 거둔 금전적 이득은 제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 이상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 근검 절약의 결과로 쌓이고 쌓인 것이 바로 본교인 것이고 또 그것은 금전적으로도 저의 전 재산이며, 정신적, 상징적으로도 제 전부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버려두고 떠나는 이 자리에 서고 보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라 해서 아깝고 서운한 느낌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 마음은 향후의 본교에 대한 더 한 층의 애정으로 키워 나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새로운 것을 쌓아 올려 볼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또 반대하고 나무라는 의견이 있음을 저는 알고 있고, 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학교의 공립화만이 학교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방책인가 하는 것이며, 또 본교가 가졌던 명문 사학으로서의 긍지, 명신인이라는 그 따뜻한 울타리가 엷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아픔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인 것입니다. 제가 계속 이 학교를 움켜쥐고, 지원을 나름대로 해 나간다 하더라도 저의 생전이나 또는 사후에 저와 또는 저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본교의 모습 또한 현재의 발전적인 것을 영원히 지속되리란 보장 또한 희미한 것입니다.” - 학교법인 남성학숙 이사장 김장하 퇴임사 중

 

남성학숙은 해산하고 명신고등학교는 국가 재산으로 귀속돼 1991년 공립으로 전환됐다. 사립 시절 채용됐던 모든 교직원도 공립 교직원으로 고용승계됐다.

 

2021년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고 남은 재산 345000만 원을 모두 경상국립대에 기증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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