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초등학교 시절인 80년대에 이미 컴퓨터를 접하고, 대학생이 된 90년대에 인터넷을 한, 비교적 시류에 빠르게 적응하는 편이지만, 주식거래는 해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해 유산으로 받은 10주와 내가 산 10주가 있으니 그게 바로 한겨레신문 주식이다. (아버지가 한겨레신문 창간 주주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겨레신문도, 경향신문도 더 이상 구독하지 않는다. 어느덧 오십이 넘어 기득층, 보수층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 한겨레나 경향이 나보다 더 빨리 늙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다.
지금 내가 구독하고 있는 건 ‘녹색평론, 오늘의교육, 작은책’ 등이다. 환경, 교육, 노동에 대한 진보성을 아직도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잡지들이다.
손석춘의 ‘신문읽기의 혁명’이 나온 지 20년이 넘어가지만 그 옛날 ‘조중동’은 여전한 것 같고, ‘한경오’는 ‘근근’ 또는 ‘안간’으로 버티는 것 같다. 잃어버린 20년이다ㅠ.ㅠ
<밑줄>
“신문을 읽지 않으면서부터 실로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다.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들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중요한 의무는 아주 쉽게 있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문호 괴테가 신문 읽기에 대해 남긴 혹평이다. 신문 읽는 것을 혐오한 작가는 비단 괴테만이 아니다. 숲속 생활을 찬미한 소로우 또한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눈을 돌려 그것을 통해서 신을 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신문이 갖는 중요성은 괴테나 소로우가 살았던 19세기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현대인의 삶은 이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변화무쌍한 삶의 환경과 우리 삶을 연결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신문인 까닭이다.
따라서 문제는 신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신문을 어떻게 읽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신문사는 일반 회사와는 달리 기업으로서의 이윤 추구보다는 전체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공기관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주식회사 형태로 되어 있음에도 우리 신문들의 소유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다. ‘사주(社主)’에 의해 철저히 전제적인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령 ‘민족지’를 자처하는 두 신문의 경우, ‘조선일보’는 친일 금광재벌 방응모 이래 4대가 세습하고 있으며, ‘동아일보’도 친일 지주 김성수 이래 4대로 대물림해가고 있다. 상업지를 표방한 다른 신문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일보’는 장기영 씨가 창업한 이후 그의 아들들이 신문사 경영을 맡고 있다. ‘중앙일보’의 사주는 삼성그룹과 친인척 관계로서 홍석현 씨 자신이 보광그룹의 회장이다. ‘국민일보’와 ‘세계일보’의 사주는 다 알다시피 순복음교회와 통일교회다.
‘조선일보’는 방씨 일가가 90%대의 주식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한국일보’는 장씨 일가가 무려 99%에 달하는 주식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 ‘동아일보’ 또한 인촌기념회와 김씨 일가가 75%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소유 구조는 자연스럽게 각 신문사 내부에서 이들의 권력을 ‘무소불위’로 만들어준다.
신문 편집의 궁극적 주체가 사주들이므로 대부분 우리 신문들 편집 방향이나 사설 논조가 ‘친자본’이고 노동자들에 적대적인 것은 ‘필연’이다. 사주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자본가로서 스스로 신문사 내부의 언론노동조합운동에 적대적이거니와, 노동쟁의 대부분이 주요 광고주인 재벌들의 사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힘의 균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한국의 현실은 참으로 우려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설은 고교생들에게 논리적 사회의 훈련용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다수 고등학교에서 일선 교사들이 사설을 논술 수업에 적극 활용할 뿐 아니라, 실제로 신문 사설이 대입시험에 지시문으로 출제되고 있다.
이른바 ‘신문교육운동(NIE)’이란 것도 명목상으로야 신문 편집인협회가 교육부로 보낸 공한에서 보듯 “청소년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언론의식, 민주의식, 시민의식을 깨닫게 되어 올바른 현대인으로 자라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낱 사주의 사설(私說)에 지나지 않거나 천편일률적인 사설들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얼마나 민족문제나 노동문제에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신문의 성격이 확연하게 다른 두 신문을 동시에 구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독료가 부담될 수는 있으나, 삶의 현실을 정확히 보기 위한 ‘투자’로 여기자. 조금 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독자라면 언론비평 전문지들을 구입하여 볼 수 있다. 현재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디어오늘’이라는 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