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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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소수의 영웅이 아니라 대다수의 민중의 힘으로 이룩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에, 영웅을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다.

하지만 차베스를 읽으면서, 체게바라와 마르크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니 역시 영웅들의 이야기가 재미는 있다.

차베스는 쿠테타를 통한 유혈혁명은 실패했지만 선거를 통한 무혈혁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특히 칠레 아옌데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헌법을 바꿔 의회를 물갈이한 센스는 참으로 멋지다.

체게바라의 게릴라전이  20세기까지 통했다면 21세기는 차베스식 입법전이 통하는 시대인가 보다.

북유럽 사민주의에선 노동자의 경영참여가 단지 주식 몇 개 가지고, 이사 자리 몇 석 차지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베네수엘라 사회주의에선 노동자의 직선으로 사장을 뽑는 실험이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

석유 퍼주고, 헌법을 바꾸고, 언론사를 장악해서 영구집권을 꿈꾸는 독재자라는 비판을 반대편에서 받고 있는 차베스

브라질 룰라처럼 변절했다는 말을 듣게 될지, 아니면 진짜 독재자로만 남게 될 것인지 걱정이 되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믿을만한 지도자이다.

차베스 덕에 어제밤 체게바라 평전과 마르크스 공산당선언을 다시 읽게 되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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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양 2019-07-2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고맙냐? 너네 부류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까... 한심한 놈들 에효
 
핀란드 교육의 성공 - 경쟁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학력으로
후쿠타 세이지 지음, 나성은.공영태 옮김 / 북스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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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일요일 밤을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로 즐겁게 보낸 기억 때문에 오늘 밤도 <핀란드 교육의 성공>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매주 일요일 북유럽 교육을 엿보면서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우리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정신이 없다.

이 책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책은 <위기의 학교-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책이다. 평등 핀란드와 경쟁 영국 가운데 현 대한민국 정권은 영국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두 권의 책을 읽고 나면 현 정권이 추구하는 교육제도는 대한민국 국민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학업성취도, 국가경쟁력 세계 1위인 핀란드의 비결은 다름 아닌 평등한 교육제도에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평등한 사회가 버티고 있다. 우열반 편성하지 않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보다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보충수업을 실시하고,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고, 학생들이 협동하며 학습하고, 학생이든 교사든 학교든 성적으로 줄세우지 않는 교육이다. 그러한 교육을 위해 최고 60%에 달하는 세금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사회이다.

스웨덴이든 핀란드든 북유럽 사회가 평등을 지향하는 성숙한 시민사회인 까닭이 무엇일까? 소련에선 실패한 공산주의가 사민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성공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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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 - 창의.다양.여유를 배운다 양철북 청소년 교양 8
이하영 지음 / 양철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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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 2시간을 행복하게 해 준 책이다. 실패한 영국 교육을 다룬 <위기의 학교>와 비교해 읽으면 좋을 듯하다.

스웨덴 교육제도가 장점만 가진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적용해서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최소한 도입해 보고 싶은 매혹적인 제도임에는 분명하다.

저자인 하영이는 딸이고, 그의 이야기 속에 아버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은 듯하다.

나도 딸 둘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내 딸들이 하영이처럼 되면 좋겠고, 나와 딸들의 관계도 하영이 부녀의 관계와 같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딸들이 취학하기 전에 우리 교육제도를 바꿔 놓거나 스웨덴으로 이민 가는 방법 중에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여 단결하라! 교육제도를 바꿔 놓거나 이민 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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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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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00여쪽 가운데 절반은 연암 박지원에 대한 평전이고, 나머지 절반이 열하일기에 대한 평론이다. 또한 곳곳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인용된다. 그들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이 읽기에는 좀 벅찬 내용이다. 따라서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쉽게 느껴지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다. 다만, 연암이 과거시험을 거부한 것, 연암을 다산과 비교한 것을 재미있게 읽었다. 아울러 이 책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수만 명도 더 되는데, 이름이 불린 사람은 겨우 스무 명뿐이니 참으로 만 분의 일이라 할 만합니다. 문에 들어설 때에는 서로 짓밟느라 죽고 다치는 자를 헤일 수도 없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불러대며 찾아 헤매다가 서로 손을 잡게 되면 마치 다시 살아 온 사람을 만난 듯이 하니, 그 죽어 나간 것이 ‘열에 아홉’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제 그대는 능히 열에 아홉의 죽음을 면하고 만에 하나의 이름을 얻었구려. 나는 무리 가운데에서 만 분의 일에 영예롭게 뽑힌 것을 축하하지 않고, 다시 열에 아홉이 죽는 위태로운 판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만 가만히 경사롭게 여깁니다. ··· 전국 각처에서 수험생들이 올라오면, 그들의 수행원들까지 포함해서 시험 달일 전에 이미 고사장 바깥이 장바닥이 되었고, 또 당일날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수행원들 사이의 ‘닭싸움’으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니, 수만 명이 서로 짓밟으며 형과 아우를 불러댄다는 연암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듯히다. ··· 연암이 단지 제도의 부조리를 풍자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 또 설령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된다 해도, 그는 무엇보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바로 과문(科文)을 참을 수 없었다. ‘사마천과 반고다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지 않으리라“고 하여 고문(古文)을 답습하는 문풍을 격렬히 조롱했던 그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게다가 다만 격률의 완성도만 테스트하는 과문의 구속을 어찌 참을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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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의 가치사전 -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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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욕구, 욕정, 욕심, 탐욕)의 충족(만족,흡족)은 즐거움(기쁨, 신명남, 쾌락, 행복, 유쾌, 환희, 환열, 오락, 환락)인가?

저자가 이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도 ‘절제, 중용이 진정한 즐거움을 낳는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일찌기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답했다.

다만 왜 그런가에 대해선 산뜻한 논거를 보기 힘들다.

자전거를 탈 줄은 알지만 남에게 어떻게 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난감함과 같으려나?

아무튼 이 책은 최소한 즐거움에 대한, 두꺼워서 읽기 싫은 그러나 실제로 읽어 보면 즐거운 사전 또는 역사책이다.


그러나 단지 즐거움에 대한 역사책으로 이 책을 규정하기엔 아쉬움이 많다.

 

필자 박민영이 "이 책의 집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러나 자료 수집에는 거의 30년이 걸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이 총동원되었다"라고 머리말에 밝혔듯, 인간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통찰이 보인다.

 

예를 들어, '지적쾌락 - 교육'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매우 의미있는 교육비평서이다. 다만 인용문이 주된 것이긴 하나 좋은 인용문을 추려 엮은 것으로도 대단하다.

 

오늘날 학생들이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서 교과서 외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이다. 프란치스코 페레의 말을 빌리면 시험은 "학부모의 그릇된 자존심과 교사들의 자만심과 이기심을 위한 것이며, 아이들에게는 고통과 고질병의 원인이 될 뿐이다." 시험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동양에도 있었다.

<소학>에는 "학교는 예의를 우선적으로 가르치는 곳인데, 매달 시험을 보아서 경쟁하게 하는 것은 결코 교양의 도가 아니다"라고 적혀있다. 시험 위주의 교육은 지성의 계발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입시교육도 그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것을 김우창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89년도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한 학생은 중학교 2학년 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본 이후에는 교양서적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 학생은 합격 후 생활설계에 답하면서, 이런 사실을 밝히고 앞으로 책을 좀 읽겠다고 말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각적, 정서적, 지적 욕구의 자연스러운 발로에 따라 스스로 읽는 일을 중단한 학생이 대학에 수석 합격을 해도 좋은 것일까? 정상 사회라면 중학교 2학년 때 <노인과 바다>를 읽은 후 교양서적을 읽지 않은 학생은 수석 입학은커녕 입학시키지 말아야 마땅하다" 스스로 내면화되지 않고 실생활과 연관되지 않은 시험 위주의 교육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학생의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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