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총 400여쪽 가운데 절반은 연암 박지원에 대한 평전이고, 나머지 절반이 열하일기에 대한 평론이다. 또한 곳곳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인용된다. 그들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이 읽기에는 좀 벅찬 내용이다. 따라서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쉽게 느껴지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다. 다만, 연암이 과거시험을 거부한 것, 연암을 다산과 비교한 것을 재미있게 읽었다. 아울러 이 책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수만 명도 더 되는데, 이름이 불린 사람은 겨우 스무 명뿐이니 참으로 만 분의 일이라 할 만합니다. 문에 들어설 때에는 서로 짓밟느라 죽고 다치는 자를 헤일 수도 없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불러대며 찾아 헤매다가 서로 손을 잡게 되면 마치 다시 살아 온 사람을 만난 듯이 하니, 그 죽어 나간 것이 ‘열에 아홉’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제 그대는 능히 열에 아홉의 죽음을 면하고 만에 하나의 이름을 얻었구려. 나는 무리 가운데에서 만 분의 일에 영예롭게 뽑힌 것을 축하하지 않고, 다시 열에 아홉이 죽는 위태로운 판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만 가만히 경사롭게 여깁니다. ··· 전국 각처에서 수험생들이 올라오면, 그들의 수행원들까지 포함해서 시험 달일 전에 이미 고사장 바깥이 장바닥이 되었고, 또 당일날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수행원들 사이의 ‘닭싸움’으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니, 수만 명이 서로 짓밟으며 형과 아우를 불러댄다는 연암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듯히다. ··· 연암이 단지 제도의 부조리를 풍자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 또 설령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된다 해도, 그는 무엇보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바로 과문(科文)을 참을 수 없었다. ‘사마천과 반고다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지 않으리라“고 하여 고문(古文)을 답습하는 문풍을 격렬히 조롱했던 그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게다가 다만 격률의 완성도만 테스트하는 과문의 구속을 어찌 참을 수 있었으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