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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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일본호러소설 대상작이란 홍보 문구를 보고 흥분하고 말았다. <링>과 <검은 집>이후 그럴싸한 일본호러소설을 보지 못했는데 또 한 번 공포의 오르가즘을 느끼겠구나, 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무서운 구석은 별로 없어 호러소설이라기엔 조금 부족했다. 다만 악몽을 꾸는 듯한 끈끈함과 요괴가 출몰하는 기묘한 밤의 정취는 돋보였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기괴한 제2의 세계를 그리는 일종의 환상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시>에는 표제작 '야시'와 '바람의 도시'의 두 중편이 실려 있는데, 문체나 주제, 스타일이 대동소이해 연작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야시夜市'는 한자 그대로 밤의 시장이라는 뜻이다. 10년도 더 전에 보았던 에로영화 <야시장>이 갑자기 떠오른다. 아무튼 야시에는 요괴나 영구방랑자, 악마 등이 판을 벌인 다음 뭐든지 팔고 있다. 그런데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황천에서 주워온 돌이 1억엔이란다. 그걸 어따 쓰라고? 한 남자가 여자 친구와 함께 야시를 방문한다. 그런데 야시의 규칙은 들어온 이상 반드시 사고 파는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야시에 먹혀 버린다. 알고보니 남자는 몇년 전에 야시를 온 적이 있었고, 자신이 빠져나가기 위해 동생을 납치업자에게 팔아버리고, 야구를 잘하는 재능을 샀었다. 남자는 동생을 찾으러 다시 돌아온 걸까?

 

이야기가 짧은 게 조금 아쉬웠다. 야시가 돌아가는 모습을 좀더 세밀하게 그린다면 잔재미가 더 살았을텐데 말이다. 작가 쓰네가와 고타로는 문장에서도 이야기에서도 군더더기를 줄이고 단순하게 가는 편인데, 짧은 만큼 효과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지만 아마추어의 글을 보는 느낌을 주는 단점도 보인다. 멋부린 문장이 꼭 뛰어난 작가의 필수조건은 아니겠지만, 문장의 맛이라는 것도 분명 있는 거니까. 반면 다카하시 가쓰히코 같은 베테랑 작가들도 칭찬한 종반부의 반전은 과연 훌륭했다. 사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단서나 복선 등을 전혀 주지 않기에 논리적인 반전이라고 하긴 힘들고, 비상한 국면 전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기발한 뒤집기 한판이라고나 할까. 이 이야기의 진행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바람의 도시'도 독특하다. 우리가 걷는 길의 어딘가에는 묘하게 일그러진 지점이 있어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다. 그 길은 '고도'라 불리우며 요괴와 신 등이 살고 있다. 초등학생인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고도로 들어갔다가 그곳의 방랑자와 얽힌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만다. 고도에는 죽은 자를 되살려주는 사원이 있어 방랑자와 주인공은 함께 사원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야시'만은 못해도 이 작품에도 의외의 상황 전개와 급작스런 상황 변화가 있다. 뻔한 이야기를 비틀어 어디로 튀게 만들지 모르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쓰네카와 고타로라는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듯 하다. 그외에도 두 작품 다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일관된 주제를 선보이고, 그 세계의 규칙-'야시'는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나갈 수 없고, '고도'는 고도에 속해있는 자는 나갈 수 없다'-을 잘 활용해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점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일종의 상실감, 허무, 슬픔, 애절함 등을 바탕에 깔아 정서적 울림을 주는 수법에 특히 주목하고 싶다.  

 

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이야기도 재미있는 편이라 꽤 흥미롭게 봤다. 그러나 만인이 인정할 만한 재능은 발견하지 못했고, 그저 다음 작품이 나오면 한 번쯤 더 읽어봐야겠다, 정도의 인상만을 받았다. 이 작품이 134회 나오키상 후보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어리둥절했다. 90년대 나오키상 수상작은 <마크스의 산> <이유> <부드러운 볼> 같은 작품들이었다. 비록 <야시>가 수상은 못하고 후보에 그쳤다지만 언급한 작품들에 비하면 질과 양 면에서 상당히 떨어진다. 그러고 보니 2000년대 이후에 데뷔한 최신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별로 감탄한 적이 없다(많이 읽지도 못했지만). 그 동네도 이제 밑천이 떨어져가는가 싶다. 일본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재능있는 젊은 피에 의한 참신한 충격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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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3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런 점이 있었군요. 전 오히려 짧아서 상상으로 느끼게 되는 공포를 담아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edai2000 2006-10-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이죠. ^^ 상상으로 느끼는 공포가 더 큰 법이니까요. 단지 제 생각입니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느낀 대로 쓴 거예요. ^^

2006-11-1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광골의 꿈 - 전2권 세트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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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젠지 아키히코와 친구들이 돌아왔다. 전작 <망량의 상자>에 이어 꼬박 1년은 흐른 것 같은데, 이렇게 <광골의 꿈>을 쥐고보니 그 오래된 기다림은 다시금 만족으로 바뀌었다.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이야기는 이제 신작이 나올 때마다 한일 양국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인기 시리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원래 디자이너였는데, 묘하게도 요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요괴를 좋아한다니 철없다고 꾸짖지 마시기 바란다. 기독교나 천주교, 불교 등의 거대 종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아직도 생활 곳곳에서 요괴의 존재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전통 문화의 한 분야로 연구한다고 한다. 전통 요괴라야 기껏 도깨비 정도만 생각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일본만의 고유한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1994년 아이를 낳다 죽은 어미의 한이 요괴로 변한다는 '우부메'라는 전통 요괴를 소재로 한 <우부메의 여름>이라는 작품을 직접 출판사로 들고갔고, 이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출판사 측에서 출간하여 숱한 화제를 뿌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고서점 '교고쿠도'의 주인이자, 인간에게 들러붙은 요괴를 떼어내는 퇴마사인 추젠지 아키히코와 그의 독특한 친구들이 활약하는 이야기는 현재 9편의 시리즈로 이어져 작가 '교고쿠 현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가 현재진행중이다. 또한 교고쿠 나츠히코는 제2작 <망량의 상자>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속, 항간에 들리는 기이한 이야기>로 나오키상을 탈 정도로 평단의 절찬, 동료작가의 인정, 그리고 작가로서 가장 행복한 독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작가다.

 

작품에서 즐겨 요괴를 소재로 하기에, 아직도 요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일본에서 그의 작품들이 인기가 많은 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우부메니 '망량'이니 '광골'이나 하는 일본 요괴를 전혀 모르는 한국에서도 팬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교고쿠 작품의 제재가 요괴라고는 하지만 실제 요괴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요괴를 모티브로 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탐정격인 추젠지 아키히코가 그 기이한 일들을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끔 풀어내기에 독자에게 짜릿함을 안기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다루는 기이한 일들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이 안 되는 환상적인 사건이다. 예컨대 <우부메의 여름>에서는 20개월째 해산을 못한 여자의 방(밀실)에 같이 있던 남편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남편은 아내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일까? 두번째 작품 <망량의 상자>는 더욱 대단하다. 기차 사고로 온몸의 뼈가 남김없이 조각난 소녀가, 병원에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날아간 것인지, 땅으로 꺼진 것인지 실종되어 버린다. 물리적, 과학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추젠지 아키히코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자신만의 해답을 준비해놓고, 득의양양하게 웃고 만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두고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마침내 해답을 찾으면 뛸듯이 기뻐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인간의 본성이다. 더군다나 이 수수께끼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빠져드는 것이 인간의 두뇌이다.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는 아주 영악한 사람이라,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이 1,0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여러 갈래로 꼬고, 매듭을 묶고, 이리저리 비틀어 한계까지 복잡하게 만든다. 이미 독자의 두뇌는 포화상태이다. 수많은 정보와 복선과 함정들(그러나 한계를 넘을 정도로 복잡하게 꾸미지는 않는다. 독자가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 책을 집어던질 테니까. 이 선을 잘 알고 있는 것이 교고쿠 나츠히코의 영리함이다)...그러나 복마전같이 얽혀있는 스토리를 헤치고 나가다보면, 결말에서는 추젠지 아키히코가 특유의 명쾌함으로 해답을 제시한다. 시달릴 대로 시달린 우리의 뇌는 모든 것이 정리가 되면서 느껴지는 순수한 만족감에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에서는 이런 원초적인 두뇌 만족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교고쿠 나츠히코의 그 두껍고, 복잡한 이야기들을 계속 찾는 것이다. 마지막의 상쾌함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광골의 꿈>이 전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첩첩산중 시골에서 자란 여자가 있다.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 바다에서의 기억들로 고통받고 있다. 분명히 어렸을 때, 바다에는 간 적이 없는데 말이다.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침투한 것일까. 한편 그녀에게는 8년 전, 목이 잘려나가 살해당한 전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바다에서의 기억이 찾아온 순간부터 전남편이 다시 나타난다. 요괴일까, 사령일까. 그녀는 공포에 질려 전남편을 다시 목 졸라 죽인 다음 목을 잘라 바다에 던져버린다. 그러나 전남편은 무려 네 번이나 다시 나타나고 그때마다 아내에 의해 목이 잘린다. 참으로 불쾌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내가 목을 던져버린 그 바다에서 금색해골이 목격된 것이다. 며칠이 지나고 이번에는 바다에서 머리카락과 살이 붙은 머리가 발견된다. 전남편의 해골에 다시 살이 붙어 온전한 머리가 되고, 다시 부활한 것일까? 기묘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환상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에 관여하게 된 추젠지 아키히코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광골의 꿈>은 교고쿠 나츠히코 만의 여전한 특성이 잘 살아 있다. 무엇보다 다루고 있는 사건과 요괴와의 절묘한 배합이다. 아이를 낳다 죽은 요괴, 우부메와 20개월째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가 한 쌍을 이루는 <우부메의 여름>처럼 <광골의 꿈>에 등장하는 '광골'은 뼈만 남은 해골 상태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요괴다. 네 번이나 죽은 전남편이 마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참으로 절묘한 배합이다. 또한 교고쿠도 시리즈의 고정 출연진들의 등장도 반갑다. 수다쟁이 추젠지부터 소심한 소설가 세키구치, 다른 이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탐정 에노키즈, 행동파 기바 형사까지 익숙한 멤버들이 여전히 출연한다. 그외에도 새로 가세한, 세상일에 달관한 듯한 낚시터 주인 아사마, 프로이트에 경도된 전직 정신과 의사 후루하타까지 '교고쿠 월드'는 점점 확대되어 간다. 독특한 등장인물에 기묘한 사건, 요괴에 대한 담론과 추젠지 아키히코의 장기인 종교, 사회, 과학 등의 장광설까지 이전 작품들의 모든 맛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달라진 구석도 있다.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는 교고쿠도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광골의 꿈>부터 본격적으로 탄탄한 시리즈를 이끌어갈 것을 구상한 듯 보인다. 제1작 <우부메의 여름>과 <망량의 상자>가 요괴 마니아의 개인적인 역작이었다면, 제3편 <광골의 꿈>부터는 그간 입증된 자신의 상업적인 역량을 극대화화려는 계획이 보인다. 무엇보다 시점이 소설가 세키구치가 친구 추젠지 아키히코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변했다. 기존 작품들에서는 세키구치가 기묘한 사건에 맞닥뜨리고, 해결에 고심하다 추젠지를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키구치가 가져올 수 있는 사건과 추젠지 아키히코의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이전 작품들에서는 추젠지 아키히코의 장광설은 그걸 직접 듣는 세키구치와의 대화에서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시점이 자유자재가 된 이번 작품에서는 도처에 장광설이 깔린다. 신처럼 전지전능해진 작가가 무차별적으로 개입해 사건의 배경 지식, 등장인물 상호간의 대화(꼭 추젠지와 세키구치의 대화가 아니라) 등에서 온갖 지식을 쏟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추젠지 아키히코와 세키구치가 등장하지 않아도 사건은 확대되며, 이야기는 더욱 넓게 벌어질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제4작, 제5작으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이며, 도처에 장광설이 삽입되다 보니 자연히 페이지도 늘어난다. 원고지 매수가 늘어나면 작가 고료가 늘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이것도 교고쿠 나츠히코의 귀여운 계략이라 할 수 있겠다.

 

<광골의 꿈>은 추젠지 아키히코 이야기를 장기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작가의 계획에 따라 조금 성격이 달라졌다. 예전 분위기나 시점을 마음에 들어했던 독자라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핵심은 변지지 않았다. 여전히 분위기는 음침하고, 사건은 기괴하고, 등장인물들은 매력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잡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냈을 때 느껴지는 그 원초적인 두뇌의 쾌감을 기억한다면, 이후의 이야기들에도 손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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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바라는 기도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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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그녀가 보고 있습니다."
"누구 말이오?"
목에 걸린 듯한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카렌이요. 전 믿습니다. 제 눈을 보십시오."
박사는 망설이듯 조금 고개를 돌려 흐린 눈으로 내 눈을 보았다.
"카렌이 보고 있습니다. 저는 카렌의 한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딸애를 잘 알지도 못하잖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세상에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립탐정 켄지에게 한 여자 의뢰인이 찾아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여자의 이름은 카렌 니콜스, 미인인데다 이 타락한 도시의 죄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켄지는 스토킹으로 고통 받고 있는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여, 친구인 부바와 함께 스토커를 묵사발로 만들어놓는다. 간단한 일이었다. 받은 것은 약간의 수고비와 그녀의 눈부신 미소뿐. 그러나 6개월 후, 켄지는 카렌의 이름을 신문에서 발견한다. 높은 빌딩 옥상에서 옷을 모두 벗고 뛰어내려 자살한 그녀. 

 

평범한 호텔 부지배인었던 그녀의 지난 6개월은 파란만장했다. 애인은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술과 마약에 취해 직장과 집, 전 재산을 잃고 몸을 팔기도 한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것일까? 켄지는 그녀가 자살하기 얼마 전,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켄지는 다른 여인과의 가벼운 하룻밤 관계를 위해 그 도움을 외면했었다. 죄책감과 더불어 왠지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켄지는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든다. 

 

<미스틱 리버>를 쓴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이자, 아카데미 주요부분을 수상한 대표작 <미스틱 리버>외에도, 5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와 <살인자들의 섬>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고, 국내에도 총4권이 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1966년생으로, 스물여덟 살인 1994년에 데뷔해 13년 동안 8권의 책을 펴냈다. 일년에도 여러 권씩 책을 내는 미국의 다른 스릴러 작가들과는 달리 과작이라 할 수 있으며, 플롯이나 문장, 주제 등에 굉장히 공을 들여 매번 '제대로 된' 작품을 써내는 일급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미국 미스터리 스릴러 계열 작가군 중에서는 가장 신뢰하고 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제4작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는 유괴 범죄를 다루었다면, 이번 <비를 바라는 기도>는 살인자에게 조금 특이한 설정을 부여한다. 목표 대상의 심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사랑하는 것들을 남김없이 빼앗아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면 피해자는 결국 자살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범죄는 피해자의 몸이 아닌 마음을 산산히 부수는 것이기에 대단히 극악하지만, 결국 마음속 일이다보니 증거는 남지 않는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라 감탄하고 말았다. 이 작품의 살인자는 범죄소설 역사상 가장 얄미운 인간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재미를 느낄 부분은 대단히 많아 누가 봐도 만족할 것이다. 전편에서 안타깝게 헤어진 켄지와 제나로의 공적, 사적 파트너 관계가 다시 회복될지도 궁금하고, <좋은 친구들>을 보는 듯한 마피아 세계의 스케치도 재미있다. 켄지의 손을 떼게 만들려는 살인자는 마피아를 사주해 그를 협박하는데, 마피아 보스는 켄지를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가든 파티에 초대한다. 정원의 그릴에서 스테이크가 익어가는 가운데 마피아의 가족들은 웃고 즐기느라 정신이 없다. 보스는 켄지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느물느물 협박한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죽고 죽이는 살벌한 대화가 오가는 마피아 세계의 풍경을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영화를 꽤 좋아하는 듯 작품 속에 영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아마 갱스터 영화도 꽤 보는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은 등장인물은 아무래도 켄지, 제나로의 친구인 '부바' 로고프스키일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야수인 그는 친구들만은 꽤 아껴, 위험한 처지에 놓인 친구들을 위해 M16 소총을 들고 돌진하는 호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의 살인마가 비열하고 야비한 살해 방법을 쓰는 괴물인데 비해, 부바는 그보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른 악인이지만 오히려 단순하고 우직한 모습에 호감이 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켄지/제나로의 현재까지 마지막 작품인 <비를 바라는 기도>의 출간 연도가 1999년이라 시리즈가 재개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부바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역시 <비를 바라는 기도>의 하이라이트는 살인자의 수법에 맞서 똑같이 응수하는 켄지의 복수일 것이다. 켄지는 살인자의 정체를 파악한 후, 한발한발 접근해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살인자의 심리를 엉망으로 뒤흔든다. 그야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이 장면의 긴장감과 통쾌함은 숫제 기가 막힌다. 전편 <가라, 아이야, 가라> 만큼은 암울하지 않은, 재미있고 잘 씌어진 스릴러 소설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소설계의 보증수표다. 누구도 환불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소."
"뭘 말입니까?"
"카렌."
"어떤 잘못이요?"
"그앤 나약한 것이 아니라 착한 애였소."
"예. 그랬습니다."
"그앤 착해서 죽은 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 악을 징벌하는 것 같소."
"무슨 뜻입니까, 박사님?"
그는 다시 고개를 젖힌 다음 두 눈을 감았다.
"살아 있게 하는 것으로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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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10-2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봤습니다...데니스 루헤인이라는 작가는 다방면에 소질이 있는 듯^^
전 부바와 여검사의 러브모드(이게 스포일러는 아니겠죠?^^;;)가 젤로 웃겼죠..ㅋ

jedai2000 2006-10-2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셨군요. 루헤인 책은 뭐 다 재미있죠. ^^ 저도 부바의 러브모드에 너무 웃었습니다. 부바가 거의 짐승 같은 섹시함이 있나봐요. 웬만한 여자는 한 번 보면 다 뿅가죠..ㅋㅋ
 
마인드 헌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5
존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이종인 옮김 / 비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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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 FBI도 만들고, 비행기도 타면서 수사를 하지만, 한국은 몇 발자국만 걸으면 끝에서 끝이라 두 발로 신나게 걸어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과연 그 말대로 미국 땅은 넓고도 넓다. 게다가 인구도 어제 신문에서 보니 3억명을 돌파해 세계 3위의 인구 대국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필연적으로 잔인무도하고 흉악한 연쇄살인범도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총기 소유까지 자유로운 나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마인드헌터>는 잔학한 연쇄살인범들과 대결한 FBI수사관 존 더글러스의 실제 수사 기록을 담아낸 논픽션이다. 그는 최근에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등장해 일약 유명해진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을 고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FBI 수사지원부의 부서장으로 재직하며 가장 많은 연쇄살인범을 체포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사관 중 한 명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논픽션이라니 딱딱하고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오산이었다. 이 책에는 실제 사건의 현장에서 뛰었던 자만이 알려줄 수 있는 범죄 현장의 생생함과 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범인을 옭아매는 두뇌싸움, 추격전의 스릴이 흥미롭게 녹아들어가 있다. 특히 범죄학과 심리학, 교육학 등에 조예가 깊은 작가가 연쇄살인범과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정리한 행동과학이라는 연구의 면면이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당시 행동과학부에는 나중에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 밥 레슬러를 비롯한 살아있는 수사관의 전설들이 포진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행동과학과 범죄심리학 등에 대단한 흥미를 느꼈고, 관련 도서들을 좀더 읽어볼 계획이다.

 

이 책은 존 더글러스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일화를 자서전 형식으로 풀어낸다.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인생의 굴곡을 거쳐 FBI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여대생만 골라죽여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에드 캠퍼 사건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는 교도소를 출입하며 연쇄살인범계의 대스타들, 찰리 맨슨, '샘의 아들' 데이비드 버코위츠 등을 인터뷰하며 범죄자의 본성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된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그는 연쇄살인범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심리를 읽고, 범죄 현장을 마음의 눈으로 재구성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을 고안한다.

 

존 더글러스와 그의 유능한 동료, 부하들은 이 프로파일링 기법으로 수많은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그가 맡았던 사건은 그야말로 별 게 다 있었는데, 숲 속으로 창녀를 유인해 벌거벗긴 다음 도망가는 여인들을 사냥한 자부터, 열 명의 흑인 어린이만 골라 죽인 자를 비롯해 끔찍하고 기상천외하다. 만약 존 더글러스가 없었다면 분명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을 것이기에 그는 충분히 이런 회고록을 쓸 자격이 있다. 그는 누구나 선뜻 말하기 주저하는 사형 제도의 지지자라는 것을 숨김없이 밝힌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의 배를 칼로 갈라 그 안에 사정하는 흉악범들을 두루 보아온 그에게 살인자의 인권 따위를 논하는 것이 우습게도 보인다.

 

나는 미국 사회를 떨게 만들었던 강력 범죄들이 거의 모두 나오는 이 책을 대단히 재미있게(?) 보았다. 때로는 오싹했으고, 가끔은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으며(한 사건의 희생자인 소녀가 보낸 마지막 편지가 특히 그렇다), 의분으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대다수의 연쇄살인은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정신이 병든 자가 분노와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엉뚱한 자리에 엉뚱한 시간에 있었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런 무차별 범죄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지금 현재 분명히 존재하는 위협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류의 범죄가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의 존 더글러스가 등장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수사 당국은 제2의 존 더글러스 양성을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5년 동안 수천 건의 사건에 시달린 존 더글러스는 과로와 스트레스(그가 제시한 프로파일링이 빗나가면 엉뚱한 결과가 도출되고 결과적으로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로 쓰러져 거의 죽을 뻔하기도 하며, 가정을 돌보지 못해 이혼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개인적인 희생을 치루면서도 그는 연쇄살인범 수사를 포기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공명심이나 직업적인 성공만을 위해서라면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세상에서 몰아내기 위한 사명감이 있는 자만이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다. 존 더글러스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BONUS1: 이 책에 따르면 99.9%의 연쇄살인범은 남자라고 한다. 여자는 분노와 열등감 등의 정신병질적 요인을 안으로 삭여 살해에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남자는 테스토스테론의 영향과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로 살해를 저지른다고 한다.

 

BONUS2: 강간범들에 대한 거세형벌 논의가 한창이다. 하지만 연쇄강간범들은 성욕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분노를 폭발시키기 위해 강간을 저지르기 때문에, 거세를 해도 같은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한다.

 

BONUS3: 거의 모든 연쇄살인범들이 어려서 학대를 당했거나 가정이 매우 복잡했다고 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25년 동안 흉악범들을 연구, 조사하면서 좋은 성장 환경, 우애 깊고 서로 도와주는 가정,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이 흉악범이 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 가정을 꾸릴 모든 사람들은 이 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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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6-10-1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죽했으면 대학교 이 책을 도서관에서 읽고 나중에 군병원 도서관에 이 책이 있는 걸 보고 그걸 집어왔겠습니까(라고 한들 절도는 절도군요-_-). 이 재밌다(라고 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책이 다시 나와서 정말 다행입니다ㅎ

jedai2000 2006-10-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게(?)보셔서 들고 오셨(다고 하지만 절도 맞습니다)군요. ^^ 저는 아주 만족했습니다. 이런 논픽션을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구요. 저도 못 볼 뻔했던 책을 이렇게 읽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
 
셜록 홈즈 전집 5 (양장) - 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 시리즈 5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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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실상 판매 부수를 따져보면 오히려 여름이나 겨울보다 적다고 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파랗고 높다란 가을 하늘을 보면 소풍이나 등산에 나서고 싶지 집에서 가만히 책만 읽기는 힘들지 않겠어요? 괜히 싱숭생숭해지기도 하고요. 그런 이유로 일년에 200권 가까운 책을 읽는 저도 가을에는 활자가 눈에 잘 안 들어옵니다. 게다가 취미도 독서요, 직업적으로도 책만 읽어야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어느 순간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책에 치여 사니 어쩔 수 없이 물리는 거지요. 이럴 때 제가 늘 꺼내드는 책은 단 하나 셜록 홈즈입니다. 책이라면 지긋지긋한 순간에 셜록 홈즈를 펼쳐들고 단편 하나씩 곶감 빼어먹듯 맛을 보다보면 어느새 잊고 있던 독서의 재미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참재미를 알려준 셜록 홈즈는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도 꽤 될걸요. 어렸을 때 셜록 홈즈를 읽고 나서 책이 얼마나 재미있나 하는 걸 깨달았다는 사람들이요. 우선 제가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저는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친한 친구가 단편 전부를 소장하고 있었어요. 저는 거의 매일같이 그 집에 놀러가 한 편 한 편 야금야금 읽어내려갔지요. 처음에는 친구 어머님이 차비 하라며 얼마간 돈도 주셨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이 되자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요. 그래도 굴하지 않고 방과 후면 친구를 졸라 졸래졸래 따라가곤 했었습니다. 저에게 어린 시절 셜록 홈즈 이상 가는 친구는 없었답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셜록 홈즈를 창조한 건 영국의 아서 코난 도일 경입니다. 원래 의사였는데, 손님이 너무 없자 생활고 해결과 아내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셜록 홈즈 시리즈 제1탄 <주홍색 연구>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가 확고히 독자들의 마음에 자리를 굳힌 건 다음 편인 <4인의 서명> 때부터라고 합니다. 그 뒤로 신사를 위한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에 홈즈가 활약하는 단편들을 매호 연재했고, 그 순간부터 셜록 홈즈의 전설은 시작됩니다. 작가는 자신보다 훨씬 유명한 셜록 홈즈로 인해 폭발적인 인기와 남부럽지 않은 명예를 얻었지요. 그러다가 다른 작품을 써보고 싶은 열망에 홈즈를 숙적 모리아티 교수와 동반자살 시키기도 합니다만,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다시 부활시키기도 했지요. 요즘 인터넷 등으로 주인공의 운명을 바꿔달라, 누구와 누구를 맺어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극성맞은 일부 드라마 팬들의 원조가 여기 있는 셈입니다. 

 

셜록 홈즈는 에드거 앨런 포 이후 명맥이 거의 끊기다시피 한 탐정소설 장르를 확실히 부활시켰고, 향후 100년 동안 탐정소설, 추리소설이 융성하게 만든 기초를 충실히 다졌습니다. 도대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의 대명사 셜록 홈즈에게는 대관절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셜록 홈즈는 기묘할 정도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분석력과 논리력, 추리력 등 탐정이 가져야 할 기초적인 능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화학 실험과 지질학 등 근대에 태동한 과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합니다. 그러나 그외에도 셜록 홈즈가 인기 있는 요인은 영국 전통의 기사다운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여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 육체적인 완력 등이 그것이지요. 그는 곤경에 처해 있는 약자를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며,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모두 투자해 도움을 베풉니다. 단편집 <셜록 홈즈의 모험>에 수록된 '너도밤나무집' 사건에서 홈즈는 위험해보이는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 의뢰인의 소식이 궁금해 전전긍긍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초조해하는 것입니다. 홈즈는 알고보면 이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홈즈는 사건을 해결한 뒤 범인을 무작정 경찰에 넘기지 않고, 그 나름의 합리적인 방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컨대 범인도 충분히 고통 받았다 싶으면 '그 사람도 나름 고통을 받았으니까 이쯤에서 잊어주지'하는 식입니다. 남성적 매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얼룩 띠의 비밀'이라는 작품에서는 홈즈의 개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거한이 쇠부지깽이를 두 손으로 굽히는 경고를 하고 사라집니다. 홈즈는 그가 사라지자 조용히 굽혀진 부지깽이를 도로 펴놓지요. 멋지지 않습니까? 이런 다채로운 모습들은 홈즈의 인기를 나누고자 탄생한 무수한 논리기계들과 홈즈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에 위치시켜 둔 홈즈만의 매력이랍니다. 참고로 홈즈는 가장 많이 영화화된 인물입니다. 아마 200번이 넘을 겁니다. 단순히 추리하고 논리하는 기계라면 이런 인기를 얻기란 불가능할겁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장편이 4권, 단편집이 5권입니다. 개인적으로 꼽는 장편은 <공포의 계곡>, 단편은 '얼룩 띠의 비밀'입니다. 보통 평자들이 우수하다고 꼽는 단편집은 <셜록 홈즈의 모험>인 것 같더군요. 이 단편집에는 셜록 홈즈 모험담의 백미인 '얼룩 띠의 비밀' '입술 삐뚤어진 사나이' '빨간 머리 연맹'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고딕적인 으스스함, 탁월한 논리성, 사건의 기묘함, 홈즈의 매력 등이 잘 배합되어 잊을 수 없는 고전의 깊고 풍부한 맛을 제공합니다. 독서의 가장 원초적인 매력, 즉 재미가 있는 소설이라는 거지요.

 

모쪼록 어렸을 때 읽고 치워뒀던 셜록 홈즈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빠져보세요. 시간이 아무리 지났어도 여전히 그는 마술 같은 능력으로 당신을 한 번 쓱 훑어보기만 해도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성격인지를 맞출 것입니다. 그거야말로 셜록 홈즈의 진짜 장기죠. 비록 지금 기준으로 사건과 트릭이 다소 단순한 면이 있을테고,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겠지만 그 점이 100년 넘게 지속된 셜록 홈즈의 인기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당신이 책장을 펼치는 곳이 파랗고 높다란 가을 하늘 아래 벤치이든, 불가의 뜻뜻한 벽난로가든, 이불을 뒤집어쓴 침대이든 어디든 좋습니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당신은 짙은 안개가 낀 베이커 가 221B로 안내될 것입니다. 가스등과 이륜마차, 증기기관차, 프록코트, 드레스는 소품으로 제공됩니다. 오늘 당신은 그곳에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탐정 셜록 홈즈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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