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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바라는 기도 ㅣ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박사님, 그녀가 보고 있습니다."
"누구 말이오?"
목에 걸린 듯한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카렌이요. 전 믿습니다. 제 눈을 보십시오."
박사는 망설이듯 조금 고개를 돌려 흐린 눈으로 내 눈을 보았다.
"카렌이 보고 있습니다. 저는 카렌의 한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딸애를 잘 알지도 못하잖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세상에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립탐정 켄지에게 한 여자 의뢰인이 찾아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여자의 이름은 카렌 니콜스, 미인인데다 이 타락한 도시의 죄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켄지는 스토킹으로 고통 받고 있는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여, 친구인 부바와 함께 스토커를 묵사발로 만들어놓는다. 간단한 일이었다. 받은 것은 약간의 수고비와 그녀의 눈부신 미소뿐. 그러나 6개월 후, 켄지는 카렌의 이름을 신문에서 발견한다. 높은 빌딩 옥상에서 옷을 모두 벗고 뛰어내려 자살한 그녀.
평범한 호텔 부지배인었던 그녀의 지난 6개월은 파란만장했다. 애인은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술과 마약에 취해 직장과 집, 전 재산을 잃고 몸을 팔기도 한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것일까? 켄지는 그녀가 자살하기 얼마 전,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켄지는 다른 여인과의 가벼운 하룻밤 관계를 위해 그 도움을 외면했었다. 죄책감과 더불어 왠지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켄지는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든다.
<미스틱 리버>를 쓴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이자, 아카데미 주요부분을 수상한 대표작 <미스틱 리버>외에도, 5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와 <살인자들의 섬>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고, 국내에도 총4권이 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1966년생으로, 스물여덟 살인 1994년에 데뷔해 13년 동안 8권의 책을 펴냈다. 일년에도 여러 권씩 책을 내는 미국의 다른 스릴러 작가들과는 달리 과작이라 할 수 있으며, 플롯이나 문장, 주제 등에 굉장히 공을 들여 매번 '제대로 된' 작품을 써내는 일급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미국 미스터리 스릴러 계열 작가군 중에서는 가장 신뢰하고 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제4작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는 유괴 범죄를 다루었다면, 이번 <비를 바라는 기도>는 살인자에게 조금 특이한 설정을 부여한다. 목표 대상의 심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사랑하는 것들을 남김없이 빼앗아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면 피해자는 결국 자살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범죄는 피해자의 몸이 아닌 마음을 산산히 부수는 것이기에 대단히 극악하지만, 결국 마음속 일이다보니 증거는 남지 않는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라 감탄하고 말았다. 이 작품의 살인자는 범죄소설 역사상 가장 얄미운 인간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재미를 느낄 부분은 대단히 많아 누가 봐도 만족할 것이다. 전편에서 안타깝게 헤어진 켄지와 제나로의 공적, 사적 파트너 관계가 다시 회복될지도 궁금하고, <좋은 친구들>을 보는 듯한 마피아 세계의 스케치도 재미있다. 켄지의 손을 떼게 만들려는 살인자는 마피아를 사주해 그를 협박하는데, 마피아 보스는 켄지를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가든 파티에 초대한다. 정원의 그릴에서 스테이크가 익어가는 가운데 마피아의 가족들은 웃고 즐기느라 정신이 없다. 보스는 켄지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느물느물 협박한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죽고 죽이는 살벌한 대화가 오가는 마피아 세계의 풍경을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영화를 꽤 좋아하는 듯 작품 속에 영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아마 갱스터 영화도 꽤 보는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은 등장인물은 아무래도 켄지, 제나로의 친구인 '부바' 로고프스키일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야수인 그는 친구들만은 꽤 아껴, 위험한 처지에 놓인 친구들을 위해 M16 소총을 들고 돌진하는 호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의 살인마가 비열하고 야비한 살해 방법을 쓰는 괴물인데 비해, 부바는 그보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른 악인이지만 오히려 단순하고 우직한 모습에 호감이 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켄지/제나로의 현재까지 마지막 작품인 <비를 바라는 기도>의 출간 연도가 1999년이라 시리즈가 재개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부바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역시 <비를 바라는 기도>의 하이라이트는 살인자의 수법에 맞서 똑같이 응수하는 켄지의 복수일 것이다. 켄지는 살인자의 정체를 파악한 후, 한발한발 접근해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살인자의 심리를 엉망으로 뒤흔든다. 그야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이 장면의 긴장감과 통쾌함은 숫제 기가 막힌다. 전편 <가라, 아이야, 가라> 만큼은 암울하지 않은, 재미있고 잘 씌어진 스릴러 소설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소설계의 보증수표다. 누구도 환불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소."
"뭘 말입니까?"
"카렌."
"어떤 잘못이요?"
"그앤 나약한 것이 아니라 착한 애였소."
"예. 그랬습니다."
"그앤 착해서 죽은 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 악을 징벌하는 것 같소."
"무슨 뜻입니까, 박사님?"
그는 다시 고개를 젖힌 다음 두 눈을 감았다.
"살아 있게 하는 것으로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