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서 1
브래드 멜처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운명의 서>가 작년 가을 미국에서 꽤 성공한 작품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읽기 전, 기대는 매우 컸었다. 과연 책 소개글을 보면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전직 대통령들이 자문한 정치 스릴러까지 재미있을 요소가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실제 책을 읽어보니 기대보다는 못했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낚였다'는 생각이 절로 날 만큼 그 비중이 작았고, 솔직히 이야기의 주된 흐름과는 전혀 무관해 그야말로 변죽만 울린 셈이다. 단순히 말해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프리메이슨에 의해 건축되어 현재 워싱턴 D.C 지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정도만 간략히 소개되는 정도고, 그마저도 빼버린다 해도 책 내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그토록 숭배한다는 '운명의 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고. <운명의 서>의 또 하나의 강력한 축인 정치스럴러 면에서는 아주 실패하지는 않았지만, 쓸데없이 지나치게 복잡한 감이 있고, 적이 친구로-친구가 적으로 과도하게 반전을 시도함으로써 중구난방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주인공은 라이언 매닝 현 미합중국 대통령의 젊은 보좌관 웨스 할로웨이다. 자신의 실수로 보좌관 중역이자 대학 때부터 대통령의 친구였던 론 보일과 대통령의 면담이 취소되자, 항의하는 론 보일을 달래기 위해 대통령이 개회사를 하기로 한 나스카 레이싱 장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 그를 태운다. 정식 면담 대신 차 안에서 못 한 이야기 나누라는 배려다. 대통령을 보려고 수많은 군중들로 북적대는 레이싱 경기장에 도착한 리무진에서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내리자마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광신도 저격수인 니코가 총을 난사한 것이다. 다행히 대통령은 총에 맞지 않았지만 론 보일은 세 발의 총을 맞아 호송 도중 사망하고, 웨스는 뺨에 구멍이 뚫려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버린다. 그러나 얼굴의 상처도 잊은 채 웨스는 깊은 슬픔에 빠지는데, 자신 때문에 론 보일이 죽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내가 론 보일을 리무진에 태우지만 않았더라면...암살 사건의 여파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과 웨스를 비롯한 보좌관들은 낙향하고 전직 대통령과 그 측근으로써 그럭저럭 살아간다. 8년 후, 매닝 대통령은 말레이시아에 초청 연설을 가게 되고, 충실한 대통령의 그림자 웨스도 따라가는데 그곳에서 볼 수도 없고, 봐서도 안 되는 한 인물을 보게 된다. 8년 전에 죽은 론 보일을. 론 보일 때문에 그토록 마음 아파했는데, 그가 살아 있었다니 하늘이 무너질 일이다.

 

여기까지가 초반부의 내용인데 독자를 상당히 몰입시키는 구석이 있다. 템포도 빠르고, 웨스가 느끼는 절절한 슬픔도 크게 공감이 간다. 하지만 작가 브래드 멜처는 그 이상 나가지 못했다. 구색은 다 갖췄지만 어딘지 치밀함이 결여된 스토리(예를 들어 모든 음모의 주모자로 알려져 웨스가 심혈을 기울여 찾던 삼인조의 정체는 두 다리 건너 전화 한 통화에 그들의 이름, 나이, 이력 등이 술술 나와버린다)가 뼈아프다. 전술했듯이 워싱턴 지도에 숨겨진 프리메이슨 상징들을 소개하고, 대통령이 풀던 크로스워드 퍼즐에 감춰진 암호까지 수록해 흥미를 돋구고 있으나, 결국 그 해답이란 것도 공허하고 플롯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미아처럼 혼자 떠돌고 있다. 배신과 배신, 음모와 음모로 점철된 복마전 같은 정치판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 그런지 최후까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를 알 수 없는데, 너무 복잡하게 꼬다보니 앞에 공들여 만든 설정이 뒤의 반전과 어그러져 어설퍼 보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싱싱한 회와 일등급 한우라는 최상급의 재료로 섞어찌게를 만들어버림으로써 재료들의 맛을 제대로 못 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좋지 않은 내용만 주로 휘갈겼는데, 미덕이 아주 없는 소설은 아니다. 먼저 실제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두 전 미국 대통령이 감수했다는 전직 미국 대통령의 삶은 큰 흥밋거리가 된다. 알래스카에서 뉴욕까지 모든 도로를 전화 한 통화로 텅텅 비울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이 이제는 신호등 앞에서 빨간 불이면 멈춰야 한다는 그 권력무상의 쓸쓸함을 그럴듯하게 그리고 있는 점은 돋보이고 재미있다. 아마도 대통령 보좌관들에게도 많은 리서치를 한 듯 웨스가 대통령에게 느끼는 감정들-대통령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다-이 잘 살아 있는 것도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역시 <운명의 서>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대통령의 그림자로서 살아가던 웨스가 권력을 위해 속고 속이며 한없이 속이는 정치꾼들의 실체를 파악하고는 오로지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는다는 멋진 결말일 것이다. 너무 긴 감이 있고, 부족한 점이 많이 눈에 띄는 소설이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작가가 멋지게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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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1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하늘바람 2007-04-1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 전 못 읽어보아서 참고할게요 님

jedai2000 2007-04-1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대부분 아쉬운 점이나 좋은 점이나 사람이 보는 관점은 비슷한 것 같아요 ^^

하늘바람님...가볍게 시간 때우기로 보시면 나쁘진 않을 거예요 ^^
 
야구 감독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인간 세상의 무슨 일이든지간에 때가 중요한 법인데, 이 소설 <야구 감독>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나왔습니다.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선보이는 본격 야구소설인 이 작품이 나올 즈음해서 한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일본 프로야구가 거의 동시에 개막을 하니 야구라면 밥보다 좋아하고, 술자리에서 침을 튀기며 응원하는 팀 자랑에 여념이 없는 열혈 야구팬들은 소설과 실제 경기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습니다.

저는 사실 일 년에 한 두번 정도 야구 구경을 가는 그렇게까지 야구팬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대학교 다닐 때 야구선수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한 번 썼다가 보기 좋게 낙방한 경험이 있어 경기의 박진감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야구를 어떻게 요리했나, 살펴보고 싶어 읽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완전 항복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스포츠소설이구나, 하면서 완전 감탄했지요. 작가 에비사와 야스히사의 해박한 야구 지식과 마치 지금 야구장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간결하면서도 박력있는 문체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야구 감독>은 1979년에 나온 작품으로 제 나이와 동갑입니다. 그 시대에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 완성도의 작품을 내다니 확실히 일본 엔터테인먼트 문학의 저력은 넓고도 깊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승엽 선수가 맹활약하고 있는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에도 최강의 팀이자 모든 팀을 통틀어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난 3루수 히로오카 타쓰로는 최약체 앤젤스의 감독을 맡아 복수전에 나섭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외다리 타법의 홈런왕 왕정치, 재일교포이자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안타를 가장 많이 때렸던 장훈,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투수로 활약해 올드팬들은 잘 알고 계실 김일융 등이 한 팀에 있었던 당시 요미우리는 V9(9연속 우승)을 하는 등 설명이 필요없는 강팀입니다. 그런데 앤젤스 선수들은 경기 중에 코를 후비지 않나, 한 시합에 두세 번씩은 필수적으로 알을 까는 집중력 실종에 근성 제로의 낙오자들입니다. 이 한심한 팀을 한 사람의 야구 감독 히로오카가 어떻게 변모시키는가가 핵심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 야구 팀에 관여하고 계시는 분들이 시뮬레이션 삼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 시즌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악재를 다 경험하는 히로오카. 그는 이기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제대로 된 훈련법을 가르쳐주며, 때로는 윽박지르고 때로는 다독이며, 가끔은 경기의 세부 하나하나까지 간섭하고 가끔은 선수들을 완전히 믿고 재량을 주는 등 지혜롭고 현명한 방식으로 팀을 정상권으로 만들어갑니다. 눈치빠른 분들은 여기까지 읽고 아마 깨달으셨을 겁니다. 이 책이 아주 훌륭한 경영서일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예컨대 회사에서 부서장직을 맡은 분들이나 사장님들이 만약 이 책을 읽으면 비단 야구만이 아니라 어떻게 한 조직을 이끌어나가 성공할 수 있는가를 실제 현실에서의 상황과 접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똑같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얻어가려면 생각이 필요한 법입니다.

다수의 선수들이 실명으로 출현해(앤젤스 팀은 전원 허구지만, 감독 히로오카 타쓰로는 실존 인물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명승부를 펼치는 이 소설은 야구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물론 환상적인 재미를 주고, 저 같은 얼치기에게는 야구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가이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은 히로오카의 팀 메이킹에 흥미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경기 자체의 두근거림을 느끼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이 점 주의하세요. 그리고 아무래도 옛날 작품이다 보니 지금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간혹 나옵니다. 예컨대 앤젤스 구단주인 올림픽 건설회사 사장은 팀이 연이어 승리하자 기분이 좋아져 여비서 엉덩이를 만지는 장난을 치는데, 여비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1979년은 사장님들에겐 좋은 시절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사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성희롱이죠.

번역이 너무 직역투라 약간 아쉽고, 표지가 작품의 격에 맞게 좀더 고급스러우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작품 자체의 재미만은 요즘 나오는 웬만한 소설들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최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야구란 단순한 공놀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승리를 향한 열정과 본래 이기적으로 태어난 인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화합의 차원에서 그리고 꿈을 향한 도전 정신을 충족시켜주는 야구는 아마도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선 가장 재미있는 놀이 중 하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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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모리 히로시 지음, 안소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나고야 대학교 건축과 조교수이자 수십 편의 추리소설로 많은 인기를 모은 모리 히로시의 신작입니다. 국내에도 <모든 것이 F가 된다>와 <웃지 않는 수학자(절판)>가 소개되서 제법 인지도가 있는 작가로 볼 수 있겠네요. '미스터리의 대단함을 알리기 위해' 추리소설을 쓴다는 거창한 포부를 바탕으로 천재적인 탐정이 등장하는, 트릭 지향의 작품을 주로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웃지 않는 수학자>를 그럭저럭 꽤 재미있게 봐서 항상 신작이 나오지 않을까 관심이 가는 작가였는데, 조금 특이한 제목의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가 발간되서 얼른 읽어보았습니다.

 

목차도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부터 '더더욱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 '아직도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까지 독특하고 표지나 본문 일러스트도 상당히 예뻐 눈을 사로잡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읽어보니 미스터리라고는 할 수 없고, 모리 히로시의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띄는 일종의 '기묘한 이야기', 혹은 판타지라고 생각이 되네요. 고야마 교수의 후배 교수가 실종되기 전에 알려준 특이한 음식점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일정한 장소도 없이 아무 때나 연락을 하면 적당한 장소(폐교도 있고, 죽은 예술가의 아틀리에도 있습니다)에서 그럴싸한 고급요리를 파는 독특한 음식점. 그런데 항상 혼자서만 갈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일종의 이동 음식점으로 보아넘길 수 있겠지만, 아주 특이한 것은 매번 갈 때마다 여인 한 명씩이 들어와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

 

물론 별다른 서비스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함께 밥을 먹을 뿐입니다. 물론 돈은 혼자 간 고야마 교수가 내지요. 자기 돈 내고 무슨 거창한 서비스를 받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음식만 대접한다? 상당히 불합리한 조건이죠. 그런데 이 여인들은 십인십색, 한 명씩 알아갈 때마다 교수에게 어떤 깨달음을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인은 단둘이 밥을 먹으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교수는 곧 누군가와 함께일 때 꼭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는 이렇게 교수가 만나는 여인들에게 받은 묘한 감상과 깨달음, 신비스런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그려 나가는 소설입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 모리 히로시가 이 작품에 애착을 꽤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의 본격 미스터리를 완전히 벗어나 다른 작풍을 추구하고 글솜씨를 제법 보여준 이번 작품이 작가에게는 그 의미가 제법 클 수도 있겠더군요. 저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모리 히로시 표 미스터리를 기대하고 보았기에 약간 초점이 어긋난 독서가 된 감이 있는데(마지막 장에서 반전이 한 번 있긴 합니다), 앞으로 보실 분들은 굳이 미스터리로 보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리 히로시가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로 생각하세요. 아마도 모리 히로시는 특유의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미스터리와 트릭의 세계에서 약간 피로를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논리성이나 정합성보다는 환상성을 강조하는 이번 작품에서 잠시 쉬어가려고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지 결말에 이르러서도 주요한 미스터리는 대부분 풀리지 않고 모호하게 끝을 맺습니다. 어딘지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니고, 잘 알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모르겠는 그런 신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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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0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같이 올랐습니다^^

jedai2000 2007-04-0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

bongbong 2007-08-1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것이 F가 된다' 는 어떤가요? 아직 안 읽어봤는데...
신비한건 좋은데 글쎄요...정말 그 특이한 밋밋함은 어쩔수 없더군요^^

jedai2000 2007-08-1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이 f가 된다>는 컴퓨터나 로봇 이야기가 많이 나와 약간 복잡하지만 본격 미스터리로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굉장히 오래 이어지는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하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금 특이한 여자>는 조금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이 부족한 작품이라 봅니다.
 
미스터 문라이트
이재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깜깜한 밤에 <미스터 문라이트>를 읽고 있는데, 어느새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창문을 두드립니다. 읽던 것을 잠시 멈추고 창가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니 묘한 생각이 듭니다. 비라는 것은 원래 땅 위에 흐르는 물이 증발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거쳐 비가 내리면 다시 땅을 적셔주고, 그 물이 또 하늘로 오르고...이렇게 비는 영원한 것,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에 사랑하는 연인의 몸과 마음을 적셔주던 그 빗물이 오늘날의 연인들에게 또 내리는 거고...

 

연애소설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평소에는 무심하던 것들에서 괜히 낭만적인 뭔가를 찾게 되네요. 매일매일 전투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전하는 연애소설의 한 페이지는 일종의 쉬어갈 수 있는 간이역 같은 기분으로 다가옵니다. <미스터 문라이트> 역시 마침표나 느낌표가 아닌 쉼표의 연애소설입니다. 누가 읽어도 편안함과 감동, 다소나마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지요. 

 

대학교 때 한 여자를 짝사랑해서 그녀를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해 결국 사랑을 얻어내지만, 여자의 죽음으로 안타까운 이별을 맞고...그렇습니다. 뻔하디 뻔한 설정의 모음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희생해 사랑하는 법을 알았던 연인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죽은 연인과 꼭 닮은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는 후반부를 보면서 아, 이거 정말 심하게 뻔하네 하고 실망하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아주 말랑한 소설은 아니고, 결말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 혹은 그럴 듯한 국면의 전환이 있어 힘을 받습니다. 아마 드라마나 영화로 각색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는 그런 결말이예요.

 

작가가 현직 음악방송 프로듀서답게 상황에 맞는 노래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건스 앤 로지스부터 엘튼 존, 김현식, 김광석까지 읽으면서 다 한 번씩 들어보고 싶더군요. 글솜씨도 무난하고, 아니 잘 쓰는 수준이구요. <잃어버린 너>부터 <혼자뜨는 달> 까지 국산 연애소설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옛날 생각도 좀 나더군요. 주인공들의 사랑이 맺어진 곳이 대학교라, 저의 예전 풋풋했던 대학생 시절 짝사랑의 기억도 많이 났습니다.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의 끝물에 대학을 다닌 터라 주인공들의 고풍스런 연애담이 아주 낯설게 다가오지 않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요즘 미스터리에만 너무 심취해 연애소설의 이런 재미들을 다 잊고 있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연애소설을 틈틈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스터 문라이트는>는 위에도 지적했듯이 클리쉐의 남발과 대책없는 순애 지상주의 등의 단점이 아쉽지만 더 멋진 다음 작품을 위한 일보 후퇴로 생각하렵니다. 건승하시길!

 

p.s/ 작가가 우연히 들은 실화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실제 있었던 일 같지는 않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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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1 밀리언셀러 클럽 51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난생 처음으로 휴대폰을 갖게 된 것은 1999년도였다. 그때쯤 휴대폰 값이 많이 내려(그전에는 대당 100만원도 넘었다) 전 국민의 휴대폰 소지화가 가속화되었고, 지금은 아시다시피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부터 가정주부, 팔순 노인까지 온 가족이 휴대폰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내가 뭐 그다지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살면서 휴대폰 만큼 빠르게 확산된 물건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휴대폰이 널리고 널렸으니 이것에 관계된 에피소드들도 몇 가지씩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공포스런 일이 하나 있었으니 누군가를 뒤에서 씹는 문자를 실수로 그 욕 먹는 당사자에게 보내 버린 적이 있다. 수습하느라 고생 좀 했다.
 
스티븐 킹의 <셀>은 본인의 휴대폰 공포담과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전율과 긴장감을 안겨주는 특급 공포소설이다. 아마도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은 휴대폰이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공중을 가득 메우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맹목적인 고리가 되고 있는 현실에 일말의 공포감을 느꼈던 것 같다. 등장한 지 몇 년 만에 세상을 온통 뒤덮는 데 성공한 이 휴대폰이라는 물건에 대한 생리적인 혐오감과 더불어 60년대 유행했던 <새벽의 저주> 같은 좀비 영화, <나는 전설이다> 같은 좀비 소설을 결합함으로써 스티븐 킹은 고전적인 좀비 호러와 휴대폰이라는 최신 트렌드를 하나로 엮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솜씨다.
 
메인 주(스티븐 킹의 소설은 거의 항상 메인 주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의 만화가 지망생 클레이는 몇 년의 고생 끝에 마침내 보스턴의 유명 출판사에 작품을 팔게 된다. 클레이는 아내와는 별거 중이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고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조니 보이는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눈 앞에 찾아온 성공에 기뻐하며 보스턴에서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오는 중인데, 갑자기 평화로운 공원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휴대폰 통화 중인 여자가 아이스크림 트럭 아저씨를 공격하며, 멀쩡한 신사가 개의 귀를 물어뜯는다. 자동차끼리 서로 부딪쳐 도로는 베이루트처럼 되어버렸으며, 창공을 날던 경비행기가 9.11 때처럼 빌딩으로 추락한다. 클레이는 식칼을 들고 날뛰는 사이코에게서 곁에 있던 톰이라는 남자를 구해주는데, 두 사람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를 추론하다, 사이코들이 모두 휴대폰으로 통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휴대폰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고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리는 전파가 퍼져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클레이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메인 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클레이의 곁에는 톰과 자기 손으로 미친 엄마를 때려 눕히고 탈출한 십대 소녀 엘리스가 있다. 폰 사이코들이 활동하는 낮에는 빈 집에 숨어서 자고, 밤에는 수십 킬로미터를 행군하는 강행군을 펼치는 세 사람. 그러나 폰 사이코들은 맹수 같은 폭력성만을 보였던 초기 몇 일과는 달리 점점 집단 행동을 하고, 텔레파시 같은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하는데...클레이는 진화하는 폰 사이코에게서 살아남아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아들을 만난다 해도 아들 역시 폰 사이코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클레이가 아들에게로 가까워질수록 독자의 심장 역시 거칠게 고동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류를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도구가 휴대폰이라는 것은 부두교 주술이나 죽은 사람들이 공동묘지에서 단체로 깨어나는 옛날 좀비 책들보다는 훨씬 효과적인 설정이다. 전술했다시피 대부분 가지고 있기에 확산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고, 책에도 나오지만 마침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전부 미쳐 날뛰면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 빌어먹을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하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멀쩡하던 사람도 2차로 폰 사이코로 변해버리는 거고. 작디 작은 휴대폰 하나가 온전히 좀비를 양산하는 공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셀>에서는 이 전파를 누가 쏘았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뿐 시원스레 전모를 밝히지 않아 한층 더 궁금하게 만든다.
 
예전에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 <애완동물 공동묘지>와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 중 '안개'라는 작품과도 느낌이 비슷한데, 세 작품이 모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부정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유독 부자관계에 천착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셀>을 잡으면서 뭐야, 또 아버지와 아들이야, 하며 약간 실망하긴 했다. 그러나 그 뻔한 부자간의 사랑 이야기에 이렇게 또 가슴 저린 감동을 담아내는 능력을 보고 다시 한 번 작가에게 케이오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마치 두 번 연속 직구에 당하고, 세번째도 직구라는 걸 알면서도 완벽하게 제압당하는 미련한 타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주말 내내 <셀>을 읽으며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와 감동, 문학성과 오락성의 조화에서 완벽했던 다른 몇몇 걸작들에 비교하면 약간 떨어지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속도감 있는 진행과 아슬아슬한 탈출을 비롯해 재미만은 최고 수준이다. 현재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다른 스티븐 킹의 작품과는 달리 스펙터클한 장면들(대화재, 대폭발 등)이 많아 영화로도 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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