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 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 . 

 

 

 때가 되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것들이 있다.
추워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입에서 피어나는 따스한 입김이라던가,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포옹했을 때의 안락함, 노란 은행잎,
다기그릇으로 잎 녹차 마시기, 코코아는 뜨겁지만 달콤하게, 빌 에반스,
별자리, 누군가 말했던 누이 같은 국화차,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시간 떠올리기 등. 

 생각만 해도 편안한 그런 것들과 또한 그렇지 않은 것들과의 충돌.
올해는 그 충돌이 줄었나 싶어도 늘 그대로인 삶.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그저 그렇게 잠시 내버려 둔다. 


 덧,
이미지는 잠산의 일러스트. (http://jamsan.com)
      시는 피터 한트케(Peter Handke) 
     이 시를 알게 된 것은 좋아하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때문이다. 

얼마전 알라딘 서재이웃의 어느분이 올리신 걸 읽고 떠올랐다.

-4340.09.28.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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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 김남조, <편지>
 ⓒ 포토- 네이버 이미지 검색 후 흑백처리.

  -4340.09.17.달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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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비뫼 2007-09-19 21:52   좋아요 0 | URL
^^*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 나태주, <오늘의 약속>
포토- 영화 <델마와 루이스>

  

-4340.09.09.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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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였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4340.09.07.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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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천재화가 이중섭이 쓸쓸한 죽음을 맞은 날이다. 9월 6일 그의 머리맡에는
친구 구상의 <세월>이란 시구와 해와 달, 나무와 초가집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의 나이 40세였으며 바로 오늘이다.
그래서 주섬주섬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서평을 올리며 이 그림도 올린다.

 이 그림은 죽은 첫아들이 하늘나라에 혼자 갈 것이 걱정되어 심심할까 봐 길동무
하라고 그려준 <도원>이란 작품이다. 이중섭도 이제 도원에서 그의 아들과 즐거
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그의 친구 시인 구상도 함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구상이 아플 때 그려준 복숭아를 여기서 실컷 따먹고 있을 테지.

 천재는 작품과 이름을 남기고 떠났지만 그 향기가 무한하다. 유한한 인간에 비하
면 더없이 황홀한 일이다. 뉴스를 보니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오늘 세상을 떠났다고
난리다. 별들이 지고 뜨고를 반복하듯 천재들도 탄생했다가 별로 진다. 그리하여...
어쩌면 세상은 터져버리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중섭을 추모하며,
나도 무릉도원에서 뛰어놀 때가 오겠지.

 
-4340.09.06.나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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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9-10 22:36   좋아요 0 | URL
모두들 명복을 빕니다.

은비뫼 2007-09-10 22:54   좋아요 0 | URL
네, 이중섭 화백과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