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 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
 
적정거리 유지
 
주말에 부모님과 드라이브를 갔다. 날은 쌀쌀했지만 차창으로 넘나드는 햇볕은 뜨겁기만 했다.
잠시 쉬기 위해 휴게소에 정차했다. 사실 나는 정말이지 배가 고팠다. 엄마는 아직 다리가 불편하시니 차에
계시고 아빠와 나왔다. 배고프다는 나의 말에 아빠는 어릴 때의 나에게 말하듯 먹고 싶은 거를 고르라며 또
사먹으라며 돈을 주시는 거였다. 풋풋 웃음이 나왔다. 아부지~ 제가 지금 몇 살인데요. 그런데 아직도 내가
아이로 보이 시나 보다. 아무튼 오랜만에 7살 박이 아이처럼 방글거리며 지폐를 받았다. 그런데 고작 산 것은
핫바 하나였다. 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라서...그리고 아빠는 엄마 주신다고
맥반석 오징어 등을 계산하시고 잠시 손을 닦으러 가셨다. 그리고 잠시 혼자가 된 나는 음식을 양손에 들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낯익은 사람의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선배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딱 그만큼의 거리에 서 있다.
유난히 긴 속눈썹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선배는 나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옆 사람은 부인 같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는 모습인데 내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거 같아 잠시 쳐다보았다. 마주치면 인사
를 해야 하나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선배와 나는 그저 같은 과의 클래스메이트였다. 공과대의 복학생과
여학생. 이렇다할 추억은 없지만 재미있게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정해진 거리가 존재했다.

'왜 집에 가지 않고 이러고 있어요?' -선배
'(약간 웃는 무표정)이제 가려고요.' -나

계단에 앉아 선배가 던진 말에 약간의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오다가다 마주치면 인사했다. 사실
짓궂은 친구 녀석이 선배와 내 이름이 비슷하다고 매일 놀려먹었다. 우리 둘이 녀석의 적정 시야에 포착되
면 어김없이 우리 이름을 애매하게 불러서 둘 다 녀석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었다. 거의 한 학기 동안 매일
장난을 걸었는데, 우린 덕분에 늘 웃게 되어버린 이상한 관계였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는 잘 모르지만 선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서로 관심이 어느새 생겨버렸지만 그저 늘 똑같은 상태로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지만 역시 간단한 안부를 묻고 돌아섰다. 후에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도 마찬가지겠지. 그 침묵을 깨지 않는 편이 서로 편할 거 같다. 학교 다닐 때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는데(묻기보다 따져든 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아빠와 다시 차로 향했다. 입에는 핫바를 물고 차에 앉아 과일을 먹었다.
그리고 선배의 존재는 사라지고 갑자기 멀리 있는 연인이 생각났다.
거리상으로는 연인도 늘 그 거리에 있지만 마음에서는 거리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가끔은 내게 연인이 있는
지도 잊어버릴 정도인데 문제는 그런 현상이 내게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뻣뻣한 나와 반대인 연인은 그야말
로 부드러워서 늘 그 거리를 지켜준다.

어쩌면 사람 사이에서 가장 힘든 것은 무조건적인 밀어붙이기나 후진보다 적정거리 유지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평행선이 마음에 든다.


- 4340.01.13.흙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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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내 혀가
작설이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가난한 벗들의
침묵의 향기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우습도다.
땀 흘리지 않은 나의 혀여
이제는 작살이 나기를
작살이 나 기어가다가
길 위에 눈물이나 있으면 몇 방울 찍어 먹기를
달팽이를 만나면 큰절을 하고
쇠똥이나 있으면 핥아먹기를
저녁안개에 섞여 앞산에 어둠이 몰려오고
어머니가 허리 굽혀 군불을 땔 때
여물통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기를
내 한때 내 혀가
진실의 향기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 * *

두 번째 찾아간 성남의 정형외과에는 예약하지 않고 가서 대기시간이 길었다.
엄마는 환자대기석에 앉아계시고 나는 조금 떨어진 일반석에 앉아 시집을 읽고 있었다.
정호승의 <나의 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고 있었다. 그러다 옆에서 폴짝 거리는 소리와
또 쪽쪽 거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앉아
서 기다리는 다리깁스를 한 엄마에게 뛰어올라 연신 입맞춤을 하는 소리였다. 아이는 나비처
럼 '폴짝' 뛰어올라 엄마의 입과 볼에 '쪽'소리를 내며 신나게 계속해서 뽀뽀한다. 하나의
놀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아이와 엄마.

'엄마가 그렇게 좋아?'
..........................

대답없이 싱긋 웃더니 또다시 그 놀이에 열중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병원에서 너무 정신없이
굴면 안 된다며 앉아있기를 권하지만 아이는 계속 서 있다. 그러자 엄마는 병원이 어떤 곳인
지 그럼 살펴보고 오라며 아이를 보낸다. 아이가 돌아오자 이번에는 환자들을 쳐다보기 시작
한다. 그리고는 나비처럼 양팔을 쭉 펴더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논다. 춤을 추듯 재미
있게 말이다. 아이가 너무도 귀여워서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행동이 이해되었다. 아이
의 눈에는 병원의 환자들의 모습이 춤추듯 보였을지도 모른다. 다리에 깁스를 한 환자가 많으
니 자연스레 외발로 폴짝거리고 콩콩콩 뛰어가는 사람이 여러 명 보였다. 아이도 한발을 들어
폴짝이다가 다시 제자리에서 돌았다. 아이에게는 이 모든 것이 즐거운 놀이의 일부이다. 아이
엄마는 내내 웃어주고 있었다.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이 덕으로 빨리도 지나갔다.
공공장소에서 마구 소리지르며 울거나, 산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는 싫지만 저런 아이라면 얼
마나 예쁜지 모르겠다. 거침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낯선 이에게도 웃어줄 수 있는 마음
을 가진 아이.

나도 어릴 때는 그런 아이였을까. 엄마에게 그런 웃음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엄마가 내게 웃음을 주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의 앉은 뒷모습을 바라보니 죄송하다.
그래도 아시리라 생각한다. 사랑해, 엄마.

-4340.01.13.흙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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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 거침없는 고백을 듣고   
   나 또한 반성하게 만드는 거친 시인.

- 4339.12.09.흙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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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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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 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 4339.05.28.해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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