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즐기기 -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닐 포스트먼 지음, 홍윤선 옮김 / 굿인포메이션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만사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제 역사상 최초로, 질문과 무관하게 답하고 때로는 응답할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116쪽)

전신으로 인해 깜짝 놀랄만 한 공적 의사소통 형식이 새롭게 등장했다. 바로 선정적이고, 개인적 삶과 무관한, 조각난 소식으로 이루어진 '헤드라인 뉴스'라는 신종언어였다. - 중략 -

전신을 통해 형성되는 담론속에서는, 역사적 조망을 할 만 한 여유도 허용되지 않았고, 중요하다고 해서 우선권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전신의 시대에는 지성이란 '많은 것을 아는 것'을 뜻하지 '많은 것에 대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17쪽)

책을 읽으면서 여러번 한숨이 나왔다. 백퍼센트, 아니 만퍼센트를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책의 내용을 보면서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이런 현실을 모르고 있을까 싶기도 했다. 알면서 외면한다는 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았다고 나중에 후회하겠다는 말이나 똑같은 까닭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한 때 'que sera sera'라는 말과 'Carpe Diem'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앞의 말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의미이고, 뒤의 말은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될대로 되라, 현재를 즐겨라라는 의미로 더 많이 받아들였던 듯 하다. 그만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 우리의 뇌는 자신이 믿고 싶은 쪽으로만 받아들인다. 많이 생각해야 하고 이것저것 따져봐야 하는 건 그야말로 질색인 것이다. 이 책의 내용상 어쩔 수 없이 일인칭으로 느낌을 쓸 수 밖에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개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개성이 없는 시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나도 많은 정보에 휩쓸려 어떤 때는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사실 TV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채널을 돌리면 늘 똑같은 얼굴들만 가득하고 그놈의 광고는 왜 그렇게나 많은지 그야말로 짜증을 유발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한때 집에서 TV를 없애자고 건의도 해 보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시대다. 그런데 그 많은 정보중에서 쓸 만 한 정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그저 그 물결에 휩쓸리며 흘러갈 뿐이다.

여기서의 논점은 텔레비전이 오락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인해 모든 경험적 표현이 자연스럽게 오락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젼을 통해 온 세상과 교감을 유지하지만, 이는 인격이 사라진 무표정한 방식일 뿐이다. 문제는 텔레비젼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139쪽)

결국 우리는 "하찮음의 추구"라고 부를 만한 정보환경으로 급속히 들어서고 있다. 이 게임은 '사실'을 오락을 위한 원재료로 사용하기에, 우리의 뉴스 출처도 오락의 재료가 될 뿐이다. 오보나 판단오류가 난무해도 문화는 졸속가능하다고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단 22분만에 어림잡는다거나 재미있는 뉴스가 가치있는 뉴스로 둔갑하는 상황에서도 문화가 살아남을지는 모르겠다. (-174쪽)

내가 TV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이 책의 저자가 확실하게 짚어주고 있다. 아주 철저히 오락적인 것 투성이인 까닭이다. 그저 시청자가 좋아할 만 한 것들로 편집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서로 베끼기를 하다보니 어떨때는 우리나라의 방송채널이 하나뿐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가끔은 다큐멘터리 프로에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진짜로 편집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프로그램이냐고. 이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서글프게도 신문이나 책을 보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종이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는 소리도 자주 듣게 된다. 어쩌다 우리는 남이 대신 책을 읽어주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프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반갑기도 했지만 서글프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과연 그 책을 자신이 읽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또다시 분노가 치민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매스컴에 대해. 사회의 중심이 되어주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언론매체에 대해.

그렇다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기억하길 거부하지는 않았으며 기억하는 일이 쓸모없다고 단정짓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일'에 있어서는 부적합한 존재로 변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억하는 일이 단순한 향수 이상의 그 무엇이라면, 어떤 상황적인 바탕(이론, 통찰력, 메타포)을 필요로 하는데, 그래야 그 안에서 사실을 체계화하고 유형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정치나 즉각적인 뉴스는 그러한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작위로 제공하여 방해할 뿐이다. 거울은 그저 모든 사람들이 입은 옷만을 비출 뿐이다. 어제에 대해선 침묵한다. 텔레비젼을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끊임없이 모순된 현실속으로 뛰어든다. (-209쪽)

차를 타고 외출을 할 때 가끔 남편과 작은 말다툼을 벌일 때가 있다. 오로지 네비게이션만을 믿고 움직이는 남편이 답답해서. 예전에는 네비게이션 없이도 잘만 다니더니 어째서 이렇게 길치가 되어가는 거냐는 나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남편의 대답은 딱 한마디다. 편하잖아! 사실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네비게이션은 없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최첨단으로 처리하지는 못한다고 네비게이션 관계자가 말했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의 뇌는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만 생각하게 되어 있다니까..... 이 책의 경고는 오직 TV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생각하는 스마트폰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다고해서 저자가 TV나 스마트폰을 없애자고 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것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우리모두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을 비교하며 들려주던 이야기는 이채로웠지만 신선하게 다가왔다. 헉슬리가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고자 했다던 마지막 메세지를 다시한번 되새겨본다. 사실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미래가 올 것이다,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이 책은 이미 그런 암울함에 빠져버린 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기에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역설적인 책의 제목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죽도록 즐겨라, 너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면.... /아이비생각

"멋진 신세계에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 없이 웃고만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왜 생각을 멈추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2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 전달자 특서 청소년문학 14
이상권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좋은 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굵은 나무라고 말할 것이다. 오래된 집만큼은 아니라해도 굵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그야말로 그림같은 동네다. 우리가 꿈꾸는 전원주택이나 전원생활이라는 게 자연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일테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과연 그것이 진짜 전원생활일까? 라고 묻고 싶어진다. 있는 자연을 밀어내고 터를 닦아 그 위에 정형화된 집들을 세우고 구불구불한 자연의 길을 반듯하게 닦아 차가 들어가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 그리고 또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반듯하게 펴서 산책로 혹은 데크길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deck라는 말 역시 인공구조물을 뜻하는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자연과는 멀어도 너무 먼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쯤되면 진정한 전원생활이라는 게 뭔지 되묻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자연을 품은 집을 전원주택이라는 포장속에 감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昨今의 대한민국은 어딜가나 공사중이다. 개발바람이 분 곳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소설은 부동산 투기의 열풍이 불어닥친 수도권의 전원주택 마을에서 출발한다. 처음 그들이 그곳을 선택했을 때는 너무나도 좋았던 숲을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 없애야 한다는 사람들의 너무나도 세속적인 이야기를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생각만해도 얼마나 한심한 작태가 펼쳐질지 짐작할 만 하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고 누구나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어른들의 핑게가 바로 아이들인 것이다. 너희 잘 되라고, 네가 잘 먹고 잘 살라고 이러는 거라고. '시간전달자'라는 이름으로 어른들의 숨겨진 민낯을 아이들 앞에 전부 까발리고 있다. 앞과 뒤가 다른 어른들의 얼굴을 아이들에게 낱낱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후손들을 위해서 숲을 지키겠다고 맹세까지했던 부모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그 숲을 버리겠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력이 이채롭다. 어릴 때는 시골에서 자라다가 대도시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불안증과 난독증으로 학교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때 문학을 배웠다고. 그러고보니 작가의 작품이 꽤나 많다. 더구나 그 작품들중에서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는 고등학생의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고, <아름다운 수탉>과 <새박사 원병오 이야기>는 중학교 국어와 도덕교과서에 수록되었다고 하니 그저 놀랄 뿐이다. 그만큼 작가가 전하고 싶어하는 메세지가 강하다는 말일 터다. 작품을 보니 <신 호모데우스전>, <빡빡머리 앤>, <난 멍 때릴 때가 가장 행복해>,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등이 있는데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는 스테디셀러라는 말도 보인다. 한번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이 앞서는 건 아무래도 나만의 옹달샘이 있었고, 나만의 동굴이 있었으며, 나만의 나무도 여러 그루 있었다는 작가의 이력이 환경과 가까워보이는 까닭이다. 이 작품 역시 환경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늘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자연보호에 대한 의미를 다시한번 되짚어보게 된다.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자연이라고 말은 하면서 지금의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꾸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묻고 있다. 당신은 어떠냐고.


이 책은 <숲은 그렇게 대답했다>라는 작품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개정판으로 다시 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만나지 못했을 책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고맙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자주 숨을 고르게 된다. 메세지의 전달이 한박자 쉬고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굴이 사라진 밤
루이즈 젠슨 지음, 정영은 옮김 / 마카롱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건 뭐지?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았다. 번번이 비껴갔던 결말앞에서 믿기지 않았다. 선제공격을 했음에도 오히려 더 크게 한 방 얻어맞고 KO패 당한 기분이다. 보는 내내 심장이 졸아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책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일요일 아침에 깨어난 곳은 분명 내 집, 내 침대위였는데 몸상태는 내가 아닌... 여기저기 다치고 아프고 게다가 피까지... 기분좋은 데이트를 생각했던 어젯밤의 기억은 사라져버렸다. 거울속의 얼굴은 낯선 여자일뿐이다. 병원을 찾았고 의사의 진단은 안면인식장애였다. 안면인식장애라는 말은 오래전 어느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누구라 할지라도. 간혹 1000명중 하나 정도는 알아볼 수도 있다는데... 가장 가까운 동생과 남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에게 불안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사람의 뇌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게다가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게 되면 충격받았을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말도 있다. 친한 친구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에게 토요일 밤의 기억은 두려움과 절망을 함께 불러왔다. 낯선 편지, 낯선 택배, 낯선 얼굴, 그리고 알수없는 협박까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 토요일 밤에 누굴 만났는지 알 수도 없고, 토요일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 그녀의 하루하루는 어떻게 될까? 복선처럼 깔리는 그녀의 과거가 내내 신경을 건드렸다. 끝까지 밝혀주지 않는 작가의 노련함앞에 그저 탄식할 뿐. 다 읽은 후 되새겨보며 생각하게 된다. 부부사이의 진정한 사랑에 대해. 가족간의 믿음에 대해. 또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시한번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긴장감때문인지 몰입도가 최상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끝은 더디기만 하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혹시라도 그녀에게 더 나쁜 어떤 일이 벌어질까봐. 이 책은 심리 스릴러다. 그러다보니 심리적으로 겪어내야 할 공포의 크기가 정말 대단하다. 폭력과 스토킹, 게다가 불법 촬영, 협박까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공포를 모두 모아놓은 듯 하다. 씨줄과 날줄의 짜임새가 너무도 촘촘해서 감히 예측했었던 범인의 그림자는 이내 놓쳐버리고 말았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범인처럼 느껴진다는게 오히려 이채로웠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싶었는데 범인의 존재가 나타나는 순간 헉, 숨쉬기를 멈춰버리게 된다. 기억할 수 없는 그 밤에 어쩌면 자신이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이의 얼굴을 잃어버린 여자가 겪어야 할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만약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세세한 심리상태를 그려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모든 일을 단기 기억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데, 몇 분에서 수십 분 후에는 그것을 장기 기억으로 넘긴다. 이 시스템이 파괴되면 기억은 몇 분에서 몇 십 분만 유지된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 그런 상황에 빠지면 그 이후의 인생은 추억이랄 게 없다. 추억은 그 이전의 일로 국한되는 것이다.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정보가 넘어가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거의 없다. 지금에 와서는 관찰할 수도 실험할 수도 없으므로,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98쪽)


기억이란 뭘까?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가지 의미를 보여준다.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3. 계산에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시간만큼 수용하여 두는 기능... 복잡하다. 그냥 받아들인 것을 저장하거나 꺼내는 기능이라고 간단하게 말해도 될 것을. 기억이란 것은 오늘이다. 오늘은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잡한가?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추억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말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추억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듯 하다.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라. 단순히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추억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추억 역시 기억의 일면일 뿐이다. 인간이 그런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한다. 치매라는 병을.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그런데 이 책은 인간이 그런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도입부분에서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SF인가? 공상과학이라면 머리 아파질 것 같은데 어쩌지? 결국 끝까지 읽는데 꽤나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사실 이 책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 것은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눈 뜬 자들의 도시>라는 책과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버리고 말았던 거다. 하지만 결코 그건 아니었다.


"지금은, 지성이란 게 인간의 신체 내부에 머물지 않고 외부의 광대한 인터넷 공간에 흩어져 있다고 할 수 있죠. 혼란스럽고 엄청나게 거대한 네트워크와 그 내부에 흩어진 지성의 핵심인 개별 인간의 정신, 저는 이게 인류가 도달한 지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중략" (-82쪽)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책속에서 만난다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둥 광대한 네크워크라는 둥 이런 따위의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현실은 그 두개의 단어에 구속된 삶의 형태로 살아가게 되어 버렸다. 엄밀히 따지고보면 자승자박이지만. 기억을 잃은 인간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메모를 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기억들을 하나로 모았다. 결국 기억을 저장하는 칩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그 칩을 인간의 몸 어디에든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칩을 제거하면 갓난아기와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설정하에. 우스운 것은 그 기억의 칩을 어느 누구에게도 꽂을 수 있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몸에 꽂게 되면 몸은 '나'이면서 기억 혹은 정신은 '타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죽은 사람의 칩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그 사람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토록이나 커다란 욕망덩어리인 인간이 그 기억의 칩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며 살아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인 까닭이다.


"계속 같은 일을 되풀이했어. 문명이 저지른 잘못을 또 다른 문명의 힘으로 억지로 수정하지. 그 결과 또 다른 잘못이 일어나고. 이런 일을 되풀이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우리는 그 연쇄를 끊겠다고 결심한 거야." (-233쪽)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런 문명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가지는 않는다고 이 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기억의 칩이라는 장치없이도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이 든다. 책의 말미에 붙여진 해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어쩌면 작가 역시도 인터넷이니 네트워크니 하는 문명의 단어들에게 지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런게 아닐까 싶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현실은 가상이고 가상은 현실이다. 둘에 차이는 없다. (-335쪽)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났다한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해 혹은 인간다워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은 마법사입니다
아이나 S. 에리세 지음, 하코보 무니스 그림, 성초림 옮김 / 니케주니어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화의 끝은 일단 해피엔딩이다. 계몽과 교훈을 목적으로 둔다. 옛날부터 전해져내려오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낸 것이 전래동화이고, 현대 사회에 맞게 다시 태어난 창작동화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두가지 모두 동화의 특성상 교훈을 목적으로 하지 않나 싶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원작은 이런 내용이었다면서 어른들을위한 잔혹동화라는게 눈길을 끌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잠깐 그런 싯점으로 바라본 동화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던 듯 하다. 어찌되었든 동화라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아이들을 위하여. 맑고 순수한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래서 '어른들을 위한 우화'라는 책도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린 어른의 상실감을 채워주기 위해서. 물론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다고는 해도 동화만큼은 그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상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반적인 동화 한편으로 또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이야기속에 아이들과 함께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과학적인 요소나 관습과 같은 것을 함께 다루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어른인데도 읽을 때의 느낌이 꽤나 괜찮았다. 주변에 아이가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내용도 충실하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동화책임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식물이야기가 함께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림이 있는 책이라면 식물은 빠질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 그런 그림을 보면서 이 식물은 어떤 이름을 가졌을까 궁금할 때도 있었는데 이 책은 바로바로 그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예를 들자면 백설공주가 먹었던 독이 든 사과를 통해 이 세상에 약 2만종의 사과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전부 똑같이 생긴 사과만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접목'을 하기 때문이다. '접목'은 식물들만 할 수 있다. 접그루 나무에 복제하고 싶은 사과나무의 가지를 붙이기를 수십, 수백 번을 하면 원하는 품종의 사과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하나 있다. 바로 마차로 변해 신데렐라를 태우고 갔던 호박에게는 자매가 있었으니 옥수수와 덩굴강낭콩이다. 그래서 그 셋을 호박 밭의 세 자매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 세 자매는 함께 있으면 더 강해진다는 것도. 이와같이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가 있었으니 <식물은 마법사>라는 책의 제목은 꽤나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 세계명작동화를 한편도 읽지 않고 자라는 아이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동화는 아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세계위인전도 아이들에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책이긴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그건 부모의 욕심이 더 큰 게 사실이다. 잘 된 결과보다도 잘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속에서 위인들의 진솔한 생활이 밝혀지고 있는 昨今의 현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아이가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바램은 아마도 끝나지 않을 듯 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딱딱한 위인전을 읽히기 보다 차라리 이런 책을 함께 읽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오히려 더 훌륭한 아이로 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위인전을 읽으라고 독촉하기 보다는 이렇게 부모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책이 더 많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샤를 페로, 앙투안 갈랑, 가브리엘 쉬잔 바르보 드 빌뇌브, 야콥 그림, 빌헬름 그림, 조지프 제이콥스... 어떤 사람들일까? 아마도 야콥 그림과 빌헬름 그림이라는 이름을 보면서 동화작가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겠지만 작가의 이름보다도 <신데렐라>, <빨간 모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알라딘과 요술램프>, <미녀와 야수>, <헨젤과 그레텔>, <백조왕자>, <잭과 콩나무>, <아기 돼지 삼형제> 와 같은 동화명이 먼저 떠오른다. 책의 끄트머리에 붙여진 작가소개글을 통해 새삼스럽게 동화작가의 이름을 다시한번 불러보게 된다. 멋진 이름들이다. 커다란 그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도 모르게 두번을 읽어버렸다. 정말로 재미있는 책이다. 추천하고 싶은 책!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