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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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일을 단기 기억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데, 몇 분에서 수십 분 후에는 그것을 장기 기억으로 넘긴다. 이 시스템이 파괴되면 기억은 몇 분에서 몇 십 분만 유지된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 그런 상황에 빠지면 그 이후의 인생은 추억이랄 게 없다. 추억은 그 이전의 일로 국한되는 것이다.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정보가 넘어가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거의 없다. 지금에 와서는 관찰할 수도 실험할 수도 없으므로,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98쪽)


기억이란 뭘까?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가지 의미를 보여준다.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3. 계산에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시간만큼 수용하여 두는 기능... 복잡하다. 그냥 받아들인 것을 저장하거나 꺼내는 기능이라고 간단하게 말해도 될 것을. 기억이란 것은 오늘이다. 오늘은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잡한가?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추억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말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추억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듯 하다.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라. 단순히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추억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추억 역시 기억의 일면일 뿐이다. 인간이 그런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한다. 치매라는 병을.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그런데 이 책은 인간이 그런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도입부분에서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SF인가? 공상과학이라면 머리 아파질 것 같은데 어쩌지? 결국 끝까지 읽는데 꽤나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사실 이 책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 것은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눈 뜬 자들의 도시>라는 책과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버리고 말았던 거다. 하지만 결코 그건 아니었다.


"지금은, 지성이란 게 인간의 신체 내부에 머물지 않고 외부의 광대한 인터넷 공간에 흩어져 있다고 할 수 있죠. 혼란스럽고 엄청나게 거대한 네트워크와 그 내부에 흩어진 지성의 핵심인 개별 인간의 정신, 저는 이게 인류가 도달한 지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중략" (-82쪽)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책속에서 만난다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둥 광대한 네크워크라는 둥 이런 따위의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현실은 그 두개의 단어에 구속된 삶의 형태로 살아가게 되어 버렸다. 엄밀히 따지고보면 자승자박이지만. 기억을 잃은 인간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메모를 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기억들을 하나로 모았다. 결국 기억을 저장하는 칩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그 칩을 인간의 몸 어디에든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칩을 제거하면 갓난아기와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설정하에. 우스운 것은 그 기억의 칩을 어느 누구에게도 꽂을 수 있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몸에 꽂게 되면 몸은 '나'이면서 기억 혹은 정신은 '타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죽은 사람의 칩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그 사람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토록이나 커다란 욕망덩어리인 인간이 그 기억의 칩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며 살아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인 까닭이다.


"계속 같은 일을 되풀이했어. 문명이 저지른 잘못을 또 다른 문명의 힘으로 억지로 수정하지. 그 결과 또 다른 잘못이 일어나고. 이런 일을 되풀이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우리는 그 연쇄를 끊겠다고 결심한 거야." (-233쪽)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런 문명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가지는 않는다고 이 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기억의 칩이라는 장치없이도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이 든다. 책의 말미에 붙여진 해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어쩌면 작가 역시도 인터넷이니 네트워크니 하는 문명의 단어들에게 지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런게 아닐까 싶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현실은 가상이고 가상은 현실이다. 둘에 차이는 없다. (-335쪽)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났다한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해 혹은 인간다워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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