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즐기기 -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닐 포스트먼 지음, 홍윤선 옮김 / 굿인포메이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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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제 역사상 최초로, 질문과 무관하게 답하고 때로는 응답할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116쪽)

전신으로 인해 깜짝 놀랄만 한 공적 의사소통 형식이 새롭게 등장했다. 바로 선정적이고, 개인적 삶과 무관한, 조각난 소식으로 이루어진 '헤드라인 뉴스'라는 신종언어였다. - 중략 -

전신을 통해 형성되는 담론속에서는, 역사적 조망을 할 만 한 여유도 허용되지 않았고, 중요하다고 해서 우선권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전신의 시대에는 지성이란 '많은 것을 아는 것'을 뜻하지 '많은 것에 대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17쪽)

책을 읽으면서 여러번 한숨이 나왔다. 백퍼센트, 아니 만퍼센트를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책의 내용을 보면서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이런 현실을 모르고 있을까 싶기도 했다. 알면서 외면한다는 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았다고 나중에 후회하겠다는 말이나 똑같은 까닭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한 때 'que sera sera'라는 말과 'Carpe Diem'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가 있었다. 앞의 말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의미이고, 뒤의 말은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될대로 되라, 현재를 즐겨라라는 의미로 더 많이 받아들였던 듯 하다. 그만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 우리의 뇌는 자신이 믿고 싶은 쪽으로만 받아들인다. 많이 생각해야 하고 이것저것 따져봐야 하는 건 그야말로 질색인 것이다. 이 책의 내용상 어쩔 수 없이 일인칭으로 느낌을 쓸 수 밖에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개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개성이 없는 시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나도 많은 정보에 휩쓸려 어떤 때는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사실 TV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채널을 돌리면 늘 똑같은 얼굴들만 가득하고 그놈의 광고는 왜 그렇게나 많은지 그야말로 짜증을 유발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한때 집에서 TV를 없애자고 건의도 해 보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시대다. 그런데 그 많은 정보중에서 쓸 만 한 정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그저 그 물결에 휩쓸리며 흘러갈 뿐이다.

여기서의 논점은 텔레비전이 오락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인해 모든 경험적 표현이 자연스럽게 오락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젼을 통해 온 세상과 교감을 유지하지만, 이는 인격이 사라진 무표정한 방식일 뿐이다. 문제는 텔레비젼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139쪽)

결국 우리는 "하찮음의 추구"라고 부를 만한 정보환경으로 급속히 들어서고 있다. 이 게임은 '사실'을 오락을 위한 원재료로 사용하기에, 우리의 뉴스 출처도 오락의 재료가 될 뿐이다. 오보나 판단오류가 난무해도 문화는 졸속가능하다고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단 22분만에 어림잡는다거나 재미있는 뉴스가 가치있는 뉴스로 둔갑하는 상황에서도 문화가 살아남을지는 모르겠다. (-174쪽)

내가 TV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이 책의 저자가 확실하게 짚어주고 있다. 아주 철저히 오락적인 것 투성이인 까닭이다. 그저 시청자가 좋아할 만 한 것들로 편집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서로 베끼기를 하다보니 어떨때는 우리나라의 방송채널이 하나뿐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가끔은 다큐멘터리 프로에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진짜로 편집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프로그램이냐고. 이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서글프게도 신문이나 책을 보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종이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는 소리도 자주 듣게 된다. 어쩌다 우리는 남이 대신 책을 읽어주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프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반갑기도 했지만 서글프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과연 그 책을 자신이 읽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또다시 분노가 치민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매스컴에 대해. 사회의 중심이 되어주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언론매체에 대해.

그렇다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기억하길 거부하지는 않았으며 기억하는 일이 쓸모없다고 단정짓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일'에 있어서는 부적합한 존재로 변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억하는 일이 단순한 향수 이상의 그 무엇이라면, 어떤 상황적인 바탕(이론, 통찰력, 메타포)을 필요로 하는데, 그래야 그 안에서 사실을 체계화하고 유형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정치나 즉각적인 뉴스는 그러한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작위로 제공하여 방해할 뿐이다. 거울은 그저 모든 사람들이 입은 옷만을 비출 뿐이다. 어제에 대해선 침묵한다. 텔레비젼을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끊임없이 모순된 현실속으로 뛰어든다. (-209쪽)

차를 타고 외출을 할 때 가끔 남편과 작은 말다툼을 벌일 때가 있다. 오로지 네비게이션만을 믿고 움직이는 남편이 답답해서. 예전에는 네비게이션 없이도 잘만 다니더니 어째서 이렇게 길치가 되어가는 거냐는 나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남편의 대답은 딱 한마디다. 편하잖아! 사실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네비게이션은 없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최첨단으로 처리하지는 못한다고 네비게이션 관계자가 말했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의 뇌는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만 생각하게 되어 있다니까..... 이 책의 경고는 오직 TV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생각하는 스마트폰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다고해서 저자가 TV나 스마트폰을 없애자고 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것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우리모두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을 비교하며 들려주던 이야기는 이채로웠지만 신선하게 다가왔다. 헉슬리가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고자 했다던 마지막 메세지를 다시한번 되새겨본다. 사실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미래가 올 것이다,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이 책은 이미 그런 암울함에 빠져버린 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기에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역설적인 책의 제목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죽도록 즐겨라, 너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면.... /아이비생각

"멋진 신세계에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 없이 웃고만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왜 생각을 멈추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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