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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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국 관심이다. 관심은 곧 배려일테다. 그리고 배려는 곧 사랑일테다.  그리고 '한동안 다른 책은 읽고 싶지 않다' 라는 책띠의 구절은 누가 보아도 설레일테다. 이 책을 처음 대하면서 나는 책띠의 저 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다른 책은 읽고 싶지 않다.... 얼마나 크게 가슴을 울렸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졌으면...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접는다. 같은 글을 읽고도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내가 느낄 모든 것들을 묶어버리고 싶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제목처럼 이 책은 수학적인 공식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수식이라는 것이 숫자를 대표하지 않고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대표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본 바로는 그랬다. 박사가 일러주는 숫자들은 하나하나마다 사람의 감성이 묻어났고, 하나하나마다 사람이 느껴야 하는 마음이 숨쉬고 있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못한다,라는 쪽지를 양복의 앞섶에 붙여두고서 자신을 자각해야만 했던 박사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지금의 내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가슴 한쪽이 짠해졌다. 잊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 잊혀지는 것들, 잊고 싶지 않은데 잊어야만 하는 것들, 머물지 못하는 그 수많은 것들은 기억이라는 테두리를 두른 채 우리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런데 그 기억의 한계가 80분이라면?

수식.. 숫자를 보면 우선 문제가 생각나고 그 문제를 풀어야하는 어떤 공식부터 생각난다. 그렇다고 수많은 문제와 숙제가 이 책속에 산재되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약수, 정수, 소수, 자연수, 완전수, 우애수 등 수학용어들과 묘하게 얽혀드는 인간끼리의 접촉, 즉 정情에 대한 의미는 정말 대단하다. 무엇이 되었든 숫자와 얽혀야만 마음을 놓는 박사의 머나먼 기억속에서 숫자는 살아숨쉬는 하나의 따스함이다. 나는 파출부. 어느날 요주의 인물로 찍혀진 박사의 집을 방문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생면부지의 박사와 할 일만 하면 되는 파출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0'의 상태였지만 그 '0' 이라는 숫자가 안고 있는 무한의 의미를 무리없이 부여해주는 작가의 낱말들이 정말이지 기가 막히도록 좋았다.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학에 모순이 없으니까. 그리고 악마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142쪽)  박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부터 생각지도 않게 숫자에 연연하게 되는 파출부와 그의 아들 루트의 행적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짧은 박사의 기억을 위하여 그들이 희생을 감내하는 시간들이 우리곁에서 이미 멀어져가고 있는 타인을 위한 배려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파출부의 손길을 거치며 먼지처럼 풀풀 일어나 풀어헤쳐지는 박사의 지나간 기억들.. 박사의 숫자를 하나 둘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하나의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기도 했다. 박사가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박사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늘 곁에 머물고 있음에도 느끼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니 가질 수 없었던 그 사랑의 흔적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속에서 끝없는 모순과 대립이 끝나지 않을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 증명할 수 없다던 그 악마의 존재를 우리가 몸소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164쪽)  파출부의 아들 루트와 한없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박사. 그 박사가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순수粹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그런... 그리고 그들 셋이서 만들어낸 관심과 배려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기회주의적인 마음이 끼어들지 못하는 그 순수粹함이 있었기에 그들의 인연이 그토록이나 오랜 시간동안 기억되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는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또다른 이름임을 아주 담담하게 말해주고 있어 읽기 시작했던 순간보다는 책장을 넘겨 가면서 더 많은 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다. 그의 말속에서 거론되어지던 일본작가들의 이름.. 꽤나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일본출판계의 흐름속에서 저들처럼 저들의 입속에서 불리워질 우리의 작가는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 가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자꾸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단 한줄의 글귀때문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책 한권의 느낌이 아직은 희미하다. 이 책, 다시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진다. 시간과 마음만 허락한다면... 제대로 느껴보고 싶으니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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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와 산다 - 제3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최민경 지음 / 현문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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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달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내 몸을 빌려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할머니의 빙의를 부정했던 은재에게 예지력과 같은 능력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은재는 할머니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소설, 빙의를 다루고 싶어하는 건 아니다. 단지 빙의라는 형식을 통해서 할머니와 은재의 공통점을 파고 들어가다보면 그들의 속깊은 사랑을 만나게 된다. 은재의 엄마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 그래서 두 아이를 입양했고 그 아이들이 은재와 은재의 동생 영재다. 여섯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엄마와 아빠의 가족이 되기까지 얼마나 힘겹게 소통의 과정을 겪으며 지내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장소설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으례히 청소년을 다루는 책이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네들이 겪어내야 하는 진통을 우리가 성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일까? 하지만 알게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은 뭔가 조금씩 부족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부모중 한쪽이 없다거나 아니면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한다거나 이 책처럼 입양아라거나, 뭐 이런식의 배경이 나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제대로 된 환경을 가진 아이들도 똑같은 성장통을 겪는데 굳이 그런 배경을 아이들에게 깔아준다는 건 특별히 어떤 감각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잘 읽힌다. 이렇다 할 거부반응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그 흐름이 참 자연스럽다는 거였다. 우리가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정면으로 마주치기엔 왠지 껄끄러은 그런 소재를 잘 소화해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의 출판계에 일본소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에 가끔은 회의를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던 때가 있었다. 그들이 뱉어내는 현실적인 감각, 그리고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정면승부라도 걸어볼 양 파헤쳐가는 그들의 시각이 나는 좋았었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문체라니... 그런데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통념처럼 치부해버리는 우리의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듯 보여진다.

은재와 영재가 처음 집을 찾았을 때의 상황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지만 온전히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마져 느껴진다. 은재의 보육원 시절과 영재가 집으로 들어와서도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만 하던 비뚤어진 모습속에는 우리가 모른 척 했던 아픔들이 들어 있었다. 누나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말하던 영재의 그 마음이 생겨나기까지 그 가족이 겪어야 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끝내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은재를 통해서 해결하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해외로 입양된 누나가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존재를 부정해왔던 아빠에게도 그것은 분명 껄끄러운 진실이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어서 해외로 입양을 보내야했던 딸의 존재를 잊지 못하고 은재의 몸을 빌려 자신의 한을 풀려고 했던 할머니와, 엄마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지내야 했던 은재는 동병상련이었다고나 할 수 있을까? 그랬기에 좀 더 질긴 인연의 고리로 엮여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차분하게 하나씩 풀어나가는 방법이 참 편안하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겪는 일상이 은재의 주변에서 문제로 다가왔다가 스스로가 답을 찾아내는 현명함으로 마무리되어진다. 은재의 말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 피곤한 일일 것이다. 언제나 무슨일인가로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힘겨움을 오백원짜리 오뎅 하나와 뜨끈한 국물로 이겨낼 줄 아는 게 또한 성장의 과정이기도 할테다. 감춰두고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비밀 한가지씩은 가슴속에 감춰두고 산다고 한다. 울지않는 아이여서 너무나도 두려웠다는 엄마의 말처럼 그 비밀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을 속여야 한다면 그것 또한 슬픈 일일 것이다. 버려야 했던 딸에 대한 그리움이 한으로 남았던 할머니와 자신을 만나고자 했던 생모에게 모질게 돌아서며 엄마의 품에서 크게 울어버렸던 은재에게는 어쩌면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었던 힘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소설속에서 만나지는 껄끄러운 진실들이 내게는 참 좋은 느낌을 전해주었다. 입양이라는 진실, 그리고 그 입양이라는 말속에 숨겨진 가족간의 힘겨운 소통, 10대들의 방황속에 담겨진 두려움, 친구라는 의미를 통해서 자신들의 두려움을 해소해보고 싶어하는 10대들의 간절함..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바로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그런 착각이 들게 만드는 문체가 나는 좋았다. 별 것 아닌데도 찔끔 눈물이 날 뻔한 부분도 있고, 실실거리며 웃음을 뱉어내는 부분도 있다. 그러면서도 샛길로 빠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끌어가고 있는 작가의 역량이 부럽기도 했다. 흠이 있다면 너무 잘 짜여져 있는 것이라던 심사평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든다.

일단은 과격하지 않은 설정, 그냥 평범한 일상속에서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이 소설속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좋았다. 은재와 엄마가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이나, 그 싸우는 와중에서도 실질적인 입양이라는 낱말을 스스럼없이 뱉어내는 것도 놀라웠고, 실직한지 두달이나 되었으나 여전히 태평하게 버티며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는 아빠의 모습, 공부라는 커다란 짐이 버겁기만 한 아이들이 제 나름대로 그 버거움을 해소해가는 과정도 별스러운 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콕콕 집어주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게 이 책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이러다 아빠가 시험에 떨어지면 우리 식구 뭐 먹고 사냐, 딱 두 번 시켜먹은 걸 가지고 단골이라고 우기냐, 같은 은재의 혼잣말은 은근슬쩍 재미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내를 그대로 들춰내니 나도 이중잣대를 들이대지 않게 된다. 책속에서 보았던 말 중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하는 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이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저마다의 비밀 하나쯤은 인정해주면서 살아가야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 책, 정말 재미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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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역사지리학자와 함께 떠나는 걷기여행 특강 1
이현군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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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울..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 너도 나도 올라간다고 하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 그런데 가끔 나는 그런 서울에 대해 얼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여지는 그런 것들 말고. 개인적으로도 우리 문화에 대한 것들을 좋아하는 까닭에 이곳저곳 많이 들러보기도 했지만 어느곳엘 가더라도 오롯이 옛향기를 즐기고 싶다는 것이 나만의 욕심이었다는 결론뿐이었다. 새로이 복원되어진 흔적이 너무나도 많았던 탓이다. 옛 숨결을 느끼고 싶다고 찾아간다해도 내가 그곳에 대해 알고 가지 않으면 그저 오래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의 저자가 책의 제목을 저렇게 정한 것은?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보면 무엇인가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들이 보여질수도 있다는 말일까? 나는 궁금했다. 은근한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슬쩍 웃음이 났다. 구어체 형식의 글들은 왠지 모르게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문화 해설가와 함께 간다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긴다.

얼마전 나는 벼르고 벼르던 서울성곽걷기에 도전했었다. 오래도록 접근할 수 없었던 탓에 성곽이 보존도 잘 되어있을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자연을 만나볼 수 있다는 말에 부푼 가슴을 안고 출발했었다. 이런 저런 상식을 끌어모아서 기억의 한쪽에 저장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와 정리해보니 내가 놓치고 온 것들은 참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을 따라가다보니 수박 겉핧기식의 탐방이었구나 하는 자책을 하게 되어버렸다. 서울과 한양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작가가 옛 지도를 펼쳐놓고 거기에 현재의 서울을 덧그려갔을 그 노선을 생각하자니 왠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작가의 노선을 따라가다보니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은 많았다. 내가 욕심을 내고 있는 노선이기도 하기에 좀 더 꼼꼼하게 책을 읽게 된다. 토씨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아주 오래전에 어린 아들녀석과 함께 전봉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답사를 해 본 적이 있었다. 전봉준이 태어나 자랐던 곳에서부터 녹두장군이 되기까지의 과정속에는 우리가 찾아보아야 할 곳이 참 많았었다. 처음으로 봉기했다던 그 감나무 아래에서 부패한 관리의 횡포를 참아낼 수 없어 일으켰던 고부민란을 생각하면서 나도 같이 울분을 느껴보기도 했었다. 돌아보는 동안 아주 가끔씩은 나도 전봉준을 따라 농민군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느껴보면서 말이다. 우리문화 답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느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몇 번을 강조하는 말이 바로 상상이다. 그 시대를 상상해보라는 것, 백프로 공감한다. 그 감나무, 아직 살아 있을까? 낫을 들고 쟁기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던 그 농민들의 한서린 감나무가 다시 보고싶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가는 부분은 참 많았다. 그러면서도 답사의 방법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는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말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중심으로 보게 되었던 나의 답사기. 하지만 책에서 본 내용을 확인하는 답사와 장소 자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는 답사에는 차이가 있다는 말이 나의 가슴속 깊이 각인 되었다. 장소를 통해 시간의 의미를 재발견하라는 그 지침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도 해 본다. 조선시대의 성곽도시였던 한양의 모습을 옛 지도를 따라 걸어본다는 건 왠지 설레임을 줄 것만 같았다. 책속에서 안내해주는 코스를 따라 도는 것만해도 내게는 벅찬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한바탕 우리문화를 따라 돌면서 역사기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조선의 기록 어디에서도 청계천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며 청계천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공주가 살고 있는 곳이라해서 소공동이 되었다고하는 동네이름이나 지역명에 대한 유래들은 낯설면서도 낯설지않게 들렸다. 옛 지도를 따라 걸으며 성곽을 복원해가는 작가의 숨결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곳은 성곽길이었습니다,라는 안내글이나 표지판을 벽이나 보도블럭에 표시를 해 준다면 좋지 않을까하는 작가의 생각을 나도 해 본적이 있었다. 도로를 내기 위하여 끊어져버린 남한산성의 성곽을 바라보면서 차라리 성곽모양의 육교라도 만들어 성곽을 연결해 놓았으면 참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 마음이 우리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스피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의 역사를 다루는 책들이 보통은 성안의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에 맞춰져 있는 까닭에 가끔 성 밖의 서민들 이야기가 나오기라도 할라치면 나는 망설임없이 그 책을 선택했었다(요즘은 그런 책들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그런데 이 책의 작가 역시도 성 안의 이야기만을 따라가지 않고 성 밖의 이야기를 따로이 들려주고 있다. 성 안은 지배이념이었고 성 밖은 성 안의 삶을 지원해 주었던 실물경제의 생활이었다고 말해주면서 주요 농업지대나 한강을 따라 뱃길이 머물던 나루터, 물류의 중심지는 어디였는지 그리 흔하지 않아 우리가 건너뛰기 좋은 지리적인 역사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음이다. 여러가지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참 많았다.

조금만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는 않다. 잘못되었다면 다시 찾아가 제대로 느껴보면 되는 일일테니 말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옛 지도를 보면서 나도 다시한번 성곽의 도시 서울, 아니 한양을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아직은 찾아가 보지 못한 곳이 많다. 끊어진 성곽길의 군데군데만 찾아보았을 뿐이니 다시한번 가야할 곳에 대한 정리를 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옛 지도를 펼쳐보며 따라가 보았던 서울성곽이 새롭게 다가온다. 작가의 말처럼 내게도 시간의 흐름, 역사로 장소를 볼 것이 아니라 장소를 통해 시간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답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들고 작가가 펼쳐주는 옛 지도를 보면서 다시한번 도전해 보리라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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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100쇄 특별판, 양장)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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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말로 할 수 있는 표현법은 몇가지나 될까? 입속의 칼이라는 혀를 굴려야만 나오는 목소리를 통해 전해질 수 있는 眞心은 얼마나 되는가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망설이고 망설여야만 하는 우리의 목소리.. 그렇다면 사람이 글로 또는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건 많을까? 말로 하기에 껄끄러운 것들은 글로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말보다는 글로 할 수 있는 표현법이 더 많아 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로 하든 글로 쓰든 모두가 한가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일텐데 뭔지 모르게 다른 뉘앙스가 풍겨난다. 예를 들자면 전화로 들려주는 목소리나 간단한 문자보다는 연필로 꼭꼭 눌러쓴 편지가 더 좋다는 말처럼.. 왜 그럴까?

말이 되었든 글이 되었든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일테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으니 어떻게든 전달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그런 존재, 마음.. 그런데 그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망설이고 망설이게 된다. 노파심일 수도 있겠고 내 뜻과는 다르게 잘못 전해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일게다. 마음, 도대체 그 마음이 무엇이길래!

말이라는 건 한번 소리로 표현되어져버리면 그뿐,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글이라는 건 쓰고 또 쓰고 다시쓰고를 반복할 수가 있으니 몇번이라도 고칠 수가 있을테다. 그러니 말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죽했으면 연필로 사랑을 써야한다는 노래가 다 나왔을까?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하지만 이 표현은 영 개운치가 않다. 왠지 가식을 조장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처음의 그 마음을 자꾸만 변색되게 만드는 것만 같아서)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장황한가? 바로 그 마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까닭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드디어 읽고나니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 하나를 전달한다는 것이 이리도 힘겨운 것이었구나 싶은 생각에서다. 연어,라는 말속에는강물 냄새가 난다...는 한 문장으로 처음과 마지막을,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는 책. 안도현님의 <연어>였다. 글이 있고 그림이 있는 아주 얇은 책. 글이 있어 마음이 보여지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 이런 책을 읽으면 마음 한쪽이 지우개로 지워져버린 듯한 느낌이 찾아온다. 이런 책을 읽으면 잠시 멈춰선 채 가슴속에 바람을 하나가득 품어안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런류의 책이 좋다.

그런데 처음부터 작가의 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낚시전문잡지에 기고했던 짧은 글 한편으로 독자들의 항의전화를 몇 통 받아야 했다던 작가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자기 자신만의 잣대로 작가의 글을 재어본 사람들의 말일터이지만 그랬기에 그는 다시한번 글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연어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싶어 이것저것을 찾아 헤맸다던 작가는 물속에 추락해버린 비행기 그림으로 연어떼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 연어떼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두 마리의 연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등이, 다른 연어처럼 푸른 바닷빛을 닮지 않은 채 온통 은빛인 '은빛연어'의 이상과 꿈. 그 은빛연어의 삶을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눈치챌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어느 순간 불곰의 커다란 손아귀에서 은빛연어를 구해주었던 '눈맑은연어'는 이렇게 말했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내가 오래도록 정말 유난스럽게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하나 있다. <오세암>이다. 몇번을 보아도 볼 때마다 눈물바람이고 그 어린 주인공들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켠에 찬바람이 일곤 한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힘겹게 싸우는 어린 길손이에게 스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마음으로 바람을 볼 수 있다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거라고...

현실속에 안주하기보다는 세상의 더 먼 곳을 바라보기 원했고 가질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은 꿈을 꾸었던 은빛연어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진정한 꿈을 꿀 수 있다고 말해주던 눈맑은연어의 사랑은, 간절한 만남이었으나 어느 지점에선가 서로 비켜가야만 하는 교차선 같다. 하지만 은빛연어도 끝내 이렇게 말해주었지. 삶의 특별한 의미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희망이란 것도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 세상 어디엔가는 희망이 있을거라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아주 평범한 삶의 이치를 두마리의 연어를 통해 보여주는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흔히 꿈꾸는 그런 사랑과 꿈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중요한 것은 은빛연어의 방황을 지켜보았던 눈맑은연어의 마음일거라고 작가는 은근히 부추키고 있는 것 같다. 눈곱만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그 마음의 방황이 훨씬 더 아름다운 거라고. 왜 자꾸만 세상의 다른 곳을 보려하는지, 왜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했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병든 강물의 통증을 알아채는 연어가 있었고( 하지만 강물은 그 아픔에 대해 떠들어대거나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다), 그 강물속에서 사는 연어의 등이 이유없이 굽어버리는 현실속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있었다. 카메라를 든 인간과 낚싯대를 든 인간중에서 당신은 어떤 인간인가? 단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해버리는 연어의 시선속에는 결코 낯설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들어있음이다. 당신은 어느쪽인가?  연어가 연어만의 길을 가야하듯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는 바로 나였고 너였을테다.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의 삶이 바로 우리의 삶이었을테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슴 한켠이 시리다.  들어오는 바람의 느낌때문에 싸아하게 아프다. <오세암>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어린 길손이와 바람처럼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의 이름도 내 기억의 저편에 깊이 묻혀질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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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 초개체 생태학
위르겐 타우츠 지음, 헬가 R. 하일만 사진, 최재천 감수, 유영미 옮김 / 이치사이언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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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도 포유동물이다? 왜? 포유동물처럼 번식률이 낮고, 자손을 양육하기 위해 젖과 같은 왕유 즉 로열젤리를 분비하며, 안전한 양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벌집을 만들고, 36도의 체온을 유지하는 포유동물과 비슷한 35도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 가장 뛰어난 학습능력과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 조그만 꿀벌을 포유동물로 본다는, 처음부터 낯선 이론과 마주치게 되는 꿀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일 것이기에 일종의 설레임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현란한 사진들이라니!  작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붙어 있는 아주 짧은 설명글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대충 보아 넘기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유럽에서 세번째로 중요한 가축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꿀벌이다. 이번에는 또 가축이라고? 왜? 그것은 농작물의 수분활동에 관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란다. 벌이 사라진다면 4년안에 지구가 망할 것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해주기에 충분한 근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많은 의문점들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꿀벌의 탄생부터 벌집을 만드는 과정이나 벌집의 구조, 여왕벌의 혼인비행, 벌들의 언어등등 꿀벌에 관한 새로운 정보들이 놀랍도록 세세하게 잘 설명되어져 있다. 벌집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지키고, 유충을 돌보는 등 많은 일을 하던 일벌이 나이가 들어 가장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꿀을 채집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내가 알고 있던 상식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모든 벌들이 꿀을 채집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분봉을 하는 과정에서조차 나는 새로운 여왕벌이 따로이 분봉을 하는 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여왕벌이 태어나면 기존의 여왕벌이 원래의 군락에서 70%가량의 일벌을 데리고 옛벌집을 떠난다고 한다. 일벌의 1/3을, 꿀과 꽃가루. 애벌레로 가득 채워진 벌집을 지참금으로 받는 새로운 여왕벌의 출발은 그야말로 탄탄하다고 한 말이 이해된다. 하지만 아주 어린 일벌과 노쇠한 일벌들만이 남겨지는 것과 여왕벌을 따라 분봉하기 위해 벌집을 떠나는 일벌의 일령이 엇비슷하다는 걸 보면 노동과 이익을 고루 분배하는 사고관념이 놀랍기만 하다.

꿀벌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색깔을 알게되니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나에게 곤충들의 습격(?)이 있었던 어느날의 산행이 떠오른다. 여러색 중에서 한가지 색을 골라야 할때 망설임없이 파란색과 노란색을 선택한다는 건 그다지 의미있는 행동은 아닌 듯 보여지지만 파랑과 노랑이 꽃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이고 다른 색의 꽃에도 파랑과 노랑의 파장이 많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사실이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움직임에 민감한 꿀벌 군락앞에서는 절대로 크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사물은 슬로모션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또하나 꿀벌군락 근처에서는 바나나를 먹지 마라. 공격할 때 쏘는 침에서 경고 페로몬이 분비되는데 이 페로몬은 다른 벌들에게 공격개시를 알리는 신호가 된다고 한다. 이 때의 경고 페로몬은 잘 익은 바나나 향기를 풍긴다고 하니 명심할 일이다.

꿀벌이 꽃을 찾아 날아다닐 때 한동안 똑같은 종류의 꽃만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어떻게 꿀벌이 대부분의 수분활동을 도와주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풀리게 한다. 그토록이나 많은 꽃의 형태와 종류를 보면서 내심 그런 점들이 궁금했었던 까닭이다. 또한 꿀벌의 지능에 관한 부분은 정말이지 놀랍다. 오른쪽과 왼쪽, 대칭과 비대칭, 같은 것과 다른 것, 더 많고 적은 것등을 알 수 있으며, 미로에서 길을 찾아야 할 때 어떤 표지를 따라가야 하는지를 아주 빠르게 인식하고 습득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말이다. 사전에 작업 계획을 세워 효율적으로 작업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하찮은 미물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가 너무 부끄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그 많은 꿀벌들이 똑같은 꽃에 앉을 확률이 많지 않을까? 하지만 한번 방문했던 꽃에 '꿀이 없음'이라는 화학적인 표지를 달아두어 다른 꿀벌이 그 꽃에 내려앉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해 준다는 꿀벌의 학습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꽃들도 저마다의 상황에 맞게 꽃을 피워올리지만 그 시간표에 맞춰 식탁앞으로 날아갈 수 있는 시간 감각까지 갖추고 있다는 꿀벌의 학습능력, 그리고 별다른 수확이 없었던 꽃밭은 기억속에서 지워버려 다시 찾아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는 망각기능을 볼 때 꿀벌을 통해 우리도 배울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개미의 세계. 그 개미의 세계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통해 만났을 때 정말 기막히도록 놀라웠었다. 그리고 그 작은 개체군에 매료되어 연구를 하고 정보를 알아내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조직적인 사회를 갖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두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 책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를 통해서 또하나의 황홀한 개체군을 만나게 되었다. 체계적으로 조직을 이루어나가는 이 두 개체군의 모습을 보면 왠지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개미들이 내뿜는 페로몬과 꿀벌들이 풍기는 나시노프샘의 페로몬이 담고 있는 그들만의 언어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벌들도 말을 한다고? 실제로도 꿀벌은 그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다고 한다. 바로 '춤 언어'라고 한다. 소리도 없는 몸동작만을 할 뿐인데 다른 벌들이 그 메세지를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가 떠올랐다. 백설공주를 사랑했던 일곱번째 난장이는 벙어리였다. 그래서 몸짓과 춤으로 그의 사랑을 표현했지만 공주는 알아듣지 못한 채 떠나버렸다는... 그런데 꿀벌은 달랐다. 달콤한 꿀이 있는 목적지까지의 방향과 거리를 아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몸짓만으로! 더구나 춤을 추는 주연벌과 조연벌이 따로 있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이 때 그 행위의 나침반이 되어 주는 것이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자연과 하나된 꿀벌들의 생태를 알 수 있는 일이다.

꿀벌은 집을 짓기 위한 터를 고를 때도 상당히 까다로운 듯 하다. 벽의 상태가 어떤지, 주변의 환경은 어떤지 살펴보고 자신들이 원하는 여러가지 조건에 충족되었다고 여겨지면 선발대를 편성하여 그 주변 지역까지 알아보는 섬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집을 지을 때도 알방, 유충방, 고치방은 중앙에 그 주위로는 꽃가루가 채워질 방을 만들며 나머지는 꿀을 채워넣을 방을.. 이렇듯이 벌들은 집을 지을 때도 각 기능에 맞게 집을 짓는다고 한다. 벌집 자체가 다양한 기능을 해야하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뚜껑이 있고 없으며 방의 크기가 큰 수벌의 방에 비해 일벌의 방은 더 작고 납작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 밖에도 꿀벌들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방법으로 질병을 물리친다거나 추위를 막기위해 꿀을 날라다주는 주유벌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벌집의 입구를 지키며 자신의 벌통에 속하는 벌인지 그렇지 않은 벌인지를 식별하여 낯선벌의 출입을 막는 경비벌은 엄격하지만 꿀방울과 같은 뇌물을 넘겨주면 못본척 눈감아주기도 한다고 한다. 조직적인 생활을 하는 군단에게는 비리(?)가 필요불가결한 것일까? 윌리엄 골딩의 작품 <파리대왕>에서 파헤쳤던 조직적인 사회에서 우두머리를 만들고자 하며 군림하고 싶어했던 이기적인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그 많은 개체군속에서도 한마리의 우두머리를 통한 지휘체제가 아닌 꿀벌의 세계는 정말 신비롭기까지 하다. 꿀벌의 직업군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여왕벌은 결코 지시나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벌, 일벌, 수집벌, 난방벌, 주유벌, 물을 운반하는 벌, 부채질하는 벌, 환기를 담당하는 벌, 건축벌, 통풍벌, 시녀벌, 장례벌 등등 각 상황에 맞추어 저마다의 일을 하는 벌들이 서로 협력하여 그 조직을 이끈다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여졌다.  그야말로 꿀벌의 세계를 탐닉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꼼꼼하게 읽혀지던 책이었다. 그 많은 사진 한장 한장이 나에게는 놀라움을 선사해주었고,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했었던 꿀벌이라는 존재를 다시보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듯 하다. 책의 맨 마지막 구절처럼 '꿀벌을 돕는 일이 우리 스스로를 돕는 일' 이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구의 생태와 경제를 위해 꿀벌이 건강하게 존속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잊으면 안되지 싶다. 책을 통하여 꿀벌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경에 따라 수명이 달라지는 것에서 노화연구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듯이, 꿀벌의 복잡한 생물학적 연관들에 대한 것들을 통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살만한 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책임의식을 느끼도록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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