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 4 - 하늘가의 방랑객 길 없는 길 (여백) 4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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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길게 왔다. 드디어 마지막 길..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에 대해 그리고 가야산 해인사가 대장경의 원래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수천만개의 글자가 한결같이 고르고 정밀하여 마치도 한사람이 쓴 것 같다고, 서각 예술품으로서 가장 위대한 문화 유산중의 하나라고... 그리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런데 강화도에서 만들어진 이 대장경이 어째서 한양을 거쳐 가야산 해인사로 가게 되었던 것일까? 고려 현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는 이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 동기가 가히 의뭉스럽게 느껴진다. 몽고의 공격으로 나라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백성들의 삶은 참담해졌는데도 강화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잘라 바닷물에 담그고 3년을 기다려 꺼내 켜고 말려 대패질을 하고 경문을 붓으로 쓰고 그것을 칼로 한 자 한 자 새겨나가고 있었다니..  싸워서 적을 물리치기보다는 대장경을 새겨 불력의 신통력으로 몽고군을 물러가게 할 수 있을거라는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란 말인지..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라는데 도대체 그 생각자체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원래 강화도에 있었던 것이 한양을 거쳐 해인사로 옮겨지게 된 이유는 첫째, 해인사가 속대장경을 발간하였던 대각국사 의천과 인연이 깊었던 까닭이다. 해인사는 그가 한때 머물며 열반에 들 것을 꿈꾸었던 도솔천이라는 사실이고 둘째, 강화도가 왜구의 노략질 앞에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왜구들은 수전에도 능했지만 불교를 숭상하는 민족이었던 까닭에 이 대장경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셋째, 가야산이 신령한 곳이며 해인사가 교통이 불편한 심산유벽이어서 외적의 침입을 받지 못할 피난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불교에 의해 흥하고 불교에 의해 멸망한 그 왕국 고려는 어디에 있는가. 그토록이나 신통한 불력을 의지하여 힘겨운 경판에 경문을 새겼던 그 나라는 어디로 갔는가 말이다. 말()이 말()을 이기고 문자()가 문자()를 이기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먹지않은 소쩍새가 '솥적다' 말을 하네... 한 구절의 말이 문득 가슴속에 깊은 앙금을 남긴다. 먹지않은 소쩍새가 '솥적다' 말을 하네... 항상 길이란 그러하지 아니한가.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여 돌아가고 싶어도 온 길이 아까워 계속 나아가고 있을 뿐.. (-128쪽)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커다란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가 다시 불을 밝혀야 함에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고 자꾸만 뒤돌아보며 뒤뚱거리는 것은 아닌지.. 온 길이 아까워 잘 못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않은 건 아닌지.. "어떤 것이 해탈(解脫)입니까?" - "누가 그대를 속박하였는가", "어떤 것이 정토(淨土)입니까?" - "누가 그대를 더럽혔는가", "어떤 것이 열반(涅槃)입니까?" - "누가 그대에게 생사(生死)를 주었는가" (-102쪽)  다시 생각해보아도 말과 글이 먼저가 아닌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불교를 이야기하며 더불어 기독교가 동행하였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쓰는 이가 카톨릭 신자였기에 가능했으리라.. 경허스님을 따라가 그를 암송할 때마다 사제들의 암송도 함께 들려주고 있으니 여러 이름과 여러 갈래를 가고는 있지만 종교라는 참의미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것을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인간들이 저 좋은대로 갈라놓은 길 아닌 길이었음을 내가 알겠다. 後人..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이것을 남긴다.. 경허가 남긴 마지막 글을 보면서 경허를 뒤따르던 강 빈은 마침내 길을 찾았다. 일곱 알의 염주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그리하여 그 자신이 그토록이나 알고 싶었던 것에서부터 놓여짐을 얻게 되었다. 그것도 해탈이라면 해탈일 것이다. 음란한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잡된 생각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을 일러 해탈(解脫)이라 한다 (-50쪽), 고 했으니...

경허라는 화두를 쫓아가는 강 빈의 힘겨운 뒷태를 쫓아 나 역시도 헉헉거리며 뒤따랐던 먼 여행길이었다. 불교라는 종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따라다녔던 그 길위에서 돌부리에 채여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너무 뜻깊은 여행이었다.  왕족의 피가 흐른다던 아버지로부터 일곱 알의 염주를 받아 들었던 그 어린나이에서부터 이제는 불혹의 나이까지 와버렸으나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던 그 알 수 없는 무거움..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단지 만공이라는 스님을 찾아갔다가 경허라는 화두를 내려받게 되었던 강 빈 교수.. 그에게 화두를 내려주었던 법명스님조차도 끝내는 그에게 말없는 이별을 고하고.. 허탈하게 돌아섰던 발걸음을 되돌려 그 무거웠던 일곱 알의 염주를 넘겨주고 돌아오던 강 빈의 가슴속은 후련했을까? 자신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내려놓고, 또한 어머니를 내려놓았으니 그는 이제 가벼워졌을게다... /아이비생각 

"어떤 것이 해탈(解脫)입니까"  "누가 그대를 속박하였는가"
"어떤 것이 정토(淨土)입니까"  "누가 그대를 더럽혔는가"
"어떤 것이 열반(涅槃)입니까"  "누가 그대에게 생사(生死)를 주었는가"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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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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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 병자호란때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감. 십년 가까이 청나라의 심양관에 머물며 청나라와 조선의 창구역할을 함.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망해가는 것을 보기도 했고 서양인 선교사를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됨. 이후 여러 방면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워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두 달만에 죽음.. 소현세자에 대한 것을 찾아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말들. 이쯤에서 나는 항상 궁금했었다. 과연 아비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인지, 아니면 당쟁의 희생물이었는지. 이제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제 아비에게 독살을 당했다는 후세의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역사속의 한사람.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아비가 아들을 의심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자신의 손자까지 모두 없애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비 인조였을까?  "저하께서 적의 나라에 오래 계셔서 주먹을 쥐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허면 칼 쓰고 활쏘는 법은 배우셨습니까? 군자는 마음의 길을 닦아 그 길로 성현의 도리에 이름입니다" (-151쪽)  청나라가 자신의 아들을 더 많이 믿는다는 이유로 아들을 미워했다기 보다는 망해가는 명나라를 철저하게 받들어 모셨던, 그리하여 망해버린 명나라와의 의리라는 부질없는 명분에 자신을 묶어버린 신하들에 의해서였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대부들은 그렇게도 마음의 도를 잘 닦아 조선을 그모양 그 꼴로 만들었던 것인가?

그리한데, 임금은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으실 것인가. 정녕 울어주지 않으실 것인가.... (-161쪽)  하지만 이 책속에는 그 지긋지긋한 당파는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분분했던 당쟁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조선의 이야기가 아닌 듯 하다. 병자호란을 겪어낸 왕이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실속없는 명분들은 바람처럼 그렇게 왕을 휘감았었다. 그 때에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지만 그는 기다림을 배워야 함을 알았다. 조선을 위해서. 조선을 사랑했으므로.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청나라로 끌려갔던 세자가 많은 것을 보고 배워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진 소견으로 환국했다고만 말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돌아왔으나 끝내는 죽어야만 했다고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 <소현>은 거기서 끝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세자로써 모든 것을 받아 내야만 했던 한 남자의 속깊은 아픔을 끄집어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간과했던 그 고독을 쓰다듬어주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기원의 아들 석경과 회은군 이덕인의 딸 흔... 병자호란뒤에 최명길과 동조하면서 권력을 잡았던 이가 심기원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어쩌다 볼모가 되어 떠나는 세자의 뒤를 따르게 되었는가. 끝내는 회은군을 추대하는 역모죄로 처형됨으로써 그의 아들까지도 목숨을 잃게 된다. 그 심석경이 세자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진정한 충의였을까? 끝내는 역모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가두게 되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죽어가야 했던 석경은 어쩌면 또하나의 세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반가의 여인이었으나, 그것도 종실의 피를 받은 여인이었으나 전쟁의 화마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끝내는 버리지 못한 육신을 끌어안은 채 죽고자 했으나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흔이라는 여인.. 뛰어난 미색으로 적국의 황제에게 받쳐졌으나 다시 그 황제의 신하에게 하사되어진, 그리하여 기쁠 흔자를 이름으로 얻게 되었던 그 여인을 향한 압박이 어쩌면 세자를 향한 칼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석경과 흔이 서로의 마음을 받았다. 외로웠기에 그랬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적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국의 말을 배우고 충정이라는 거짓된 허울로 세자곁에 머물면서도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알았을 게다. 그 거짓된 충정을 의심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던 세자 또한 외로웠을 게다. 아우 봉림대군이 곁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서로에게 지워진 짐의 무게가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아팠고 고독했다. 기다려야 한다고, 기다리다보면 때가 올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그 마음은 적국인 청나라에 머물지도 못했고 제나라 조선속에도 있지 못했다. 통한이 무엇을 일컫는 글자였는지도 이제 알겠구나. 적들이 모든 것의 위에 선 이 때에 내가 비로소 그것을 안다. 허나, 잊지 않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이 어찌 굴욕이겠느냐. 내가 저들이 어떻게 이겨 어떻게 여기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잊지 않으리라. 잊지않음이 굴욕을 삼키는 길이 되더라도, 그리하리라 (- 327쪽)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도 먹먹했다.  책 속으로 들어가 세자의 손을 잡아주고 싶으리만큼 먹먹했다. 왕재이기기에 앞서, 세자이기에 앞서 그도 한 남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모른척 해야 했던 것인지.. 책속에는 많은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잭속에는 또한 많은 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 흐름을 따라 세자 소현을 봐달라고 그렇게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만이 있을뿐이다. 그 강물 따라 흘러가며 굽이치면 굽이치는대로, 쏟아져내리면 쏟아져내리는대로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던 한 남자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김 훈의 <남한산성>이 생각났다.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성문을 빠져나갔던 서날쇠의 나라와 여기 <소현>속에서 노비였다 청의 역관이 되어 살아남았던 만상의 나라는 어디였을까? 그들에게 나라는 무엇을 해 주었을까?  그들의 가슴속에서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명분아래 깔려 신음했던 것들이 참 많았다. 그 명분을 내려놓지 못한 채 제 한몸의 안위만을 생각해야 했던 벼슬아치들의 모습이 작금의 현실과 겹쳐지는 까닭은 또 왜인가?  전쟁보다도 정치를 알게 되었다던 적국의 장수 도르곤의 말이 세자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웠으리라. 흔하고 뻔한 조선사를 생각했다면 어디쯤에서부터 맥락을 잡아야 할지 난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저 조용히 끝까지 책장을 넘겨보기 바란다. 그 넘어가는 책장의 소리속에 소현세자의 숨소리가 들려올테니...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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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니치 코드
엔리케 호벤 지음, 유혜경 옮김 / 해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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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별.. 삼각형 두개를 서로 마주보게 겹쳐놓은 그림이다. '다윗왕의 방패'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비드의 별이라고도 불리운다.  베들레햄의 별..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동방박사 세 사람을 아기예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었다는 별이다.  느닷없이 무슨 말이냐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느낌이 그렇게 생뚱맞았다는 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로 한동안 베스트셀레에 머물러 있던 다빈치코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비례도의 모양으로 죽어있던 시체와 그의 배위에 그려져있던 별의 모양으로 시작되어지는 소설.. 하지만 흥미진진했다. 그만큼 빠져들게 만들었던 소설속의 배경들이 현실감있게 다가왔던 탓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다빈치코드라는 말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단지 댄 브리운의 소설제목일 뿐이었다는.. 덕분에 피보나치수열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때문일 것이다. 이 보이니치코드라는 말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현재 예일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는 '보이니치 필사본'이 이 글의 배경이다. 미지의 문자로 이루어진 이 책이 수십년간 진위논란에 휩쌓여 학자들의 말속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일종의 자연과학과 관련된 삽화들이 그려져 있다는 이 책은 1912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미국인 보이니치가 갖게 되어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수학자나 과학자등 다방변의 학자들이 그 책을 해독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이 책속에도 알 수 없는 그림들을 실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애쓰는 세 사람의 발빠른 움직임이 있다. 소설의 구도는 당연히 종교적인 관념과 과학적인 관념이 서로 마주치게 되고 그 중간에 인간의 욕심이 서 있다. 카톨릭 수도원에서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치는 젊은 수도사 엑토르가 종교계의 주자이고, 캠브리지 대학의 우주학자인 존이 과학계의 주자로 나선다. 거기에 철저하게 종교주의적인 어떤 자의 매수인으로 등장하는 멕시코 여성 후아나가 함께 동행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유다서' 와 같이 종교계의 뜨거운 감자로써 존재하는 것들이 꽤나 있는 모양이다. 물리학 박사이기도 하고 스페인의 천체물리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내고 있다는 저자의 이 작품이 팩션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책속의 내용 모두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하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관심분야를 그쪽으로 둔 사람이 아니라면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기가 쉽지는 않을 듯 싶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채로 끝을 맺게 되는 이 이야기속으로 몰입해 들어간다는 것이  내게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소설의 형식보다는 어떤 주제를 연구해서 제출한 리포트를 읽는 듯한 느낌이 너무나도 강했던 탓이다. '보이니치 필사본'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느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이런 것이니 한번 들려주겠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루한 느낌이 강했다.

"Amazing!" 을 외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이 소설의 끝부분까지 무사히 와 주었으니 되었다,라는 안도감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 예일대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보이니치 필사본.. 이제 그 비밀의 문이 열린다! - 책표지의 글이 얄밉기만 하다. 비밀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 어떤 뜻이었을까? 너무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가버린 듯한 씁쓸함이라니.. 물리학, 천문학 전공자로서의 소신이 너무나도 강하게 베어있는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다. 15~16세기에 있었던 종교계와 과학계의 갈등을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그 맥을 집어낸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맥락은 아닐 것 같다. 과학지식소설이라는 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같은 문외한이 보더라도 책속에 존재하는 지식들을 통해 그 흐름이 이랬었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으니. 반복되어지는 듯한 느낌때문에 조금은 지루했지만 말이다. 

책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사실들은 정말 많았다. 일상적으로는 가까이 다가가기 쉽지않은 분야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음이다. 흥미로운 암호풀이를 생각하고 이 책을 만난 사람이라면 꽤나 야속했을 것 같다. 단순한 암호풀이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되기에 하는 말이다. 보이니치 필사본의 이상한 그림들과 문자들.. 지금도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던 알 수 없는 문자들을 그저 단순히 아랍문자에서 따온 장식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해독하는 모습과 함께 보여주었던 그 실례들이 어떤 한 부분만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그것을 유추해가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저자의 말속에서,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과 그 친구들도 모두 가공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말에서 저자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책속에서 언급되었던  '보이니치 리스트' 라는 동호회도 인터넷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 '보이니치 필사본'이란 신비로운 책에 대한 저자의 관심도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천문학을 연구했던 많은 사람들의 일생이 주가 되었던 이 소설은 허구의 형식보다는 실제적인 역사에 더많은 비중을 준 듯 하다.  화자인 엑토르 신부의 제자 시몬이라는 학생이 떠오른다.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은 아닐런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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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길 3 - 생각의 화살 길 없는 길 (여백) 3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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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엇인가... 화두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화두를 내려주는 스승도 없이 스스로 화두를 정해 마음과 눈이 열리도록 수행했던 경허.. 그가 그토록이나 힘겨운 수행과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렇다 할 제자가 많지 않았다.  스스로가 기행을 서슴치 않았던 탓에 그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수행자들도 많았다 한다. 그가 추구했던 선의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을까?  경허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강 빈속에는 어쩌면 내가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1편, 2편, 3편까지 건너왔음에도 이렇게 마음 한켠을 크게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내심 놀랍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알고자 했던 부분이 담겨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속에 떠도는 종교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가. 이 뭣고(是心磨)....  경허하는 이름 한 자가 구한말의 뛰어난 선승으로 끊긴 선맥을 이어내린 대선사임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 것인가. (-77쪽)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선사들의 이름은 이미 과거속의 인물들 이 대부분이다.  삼한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흥하고 망하는 불교의 명암을 두루 거치면서 우리에게 그나마도 이름석자 내려올 수 있었던 선사들이 작금의 시대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듯 싶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는 경허라는 대선사의 행적도 행적이려니와 수월과 혜월, 그리고 만공이라는 세분의 제자들을 통해 보여주는 대선사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그다지 많지 않았던 제자중에서 맏형인 수월은 북으로 가 북방을 비추는 상현달이 되었고, 혜월은 남으로 가 남방을 비추는 하현달이 되었으며, 만공은 홀로 중부에 남아 보름달인 만월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또한 그들만의 약속이었다는 말은 책을 읽는 내게는 하나의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 - 불교에서 개달음에 이르기 위해 (선)을 慘究(참구)하는데 疑題(의제)로 하는 것은 話頭(화두)라 하고 話頭(화두)는 천칠백가지가 있다. 그 중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是甚磨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시심마) 라는 것이 있다. 이 뜻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疑題(의제)를 疑心(의심)하기 위하여 이 뭣고..하며 골똘이 慘究(참구)하면  本來面目 (본래면목) (즉) 眞我 (참 나)를 깨달아 生死(생사)를 解脫(해탈)하게 된다 - -

스승이 그러하니 제자 또한 그러하리라.. 수월도 혜월도 만공도 스승처럼 그다지 많은 제자를 두지 못했던 듯 하다. 경허를 거쳐 그 세개의 달이 세상을 비추는 모습을 3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수행과정이라거나 그들이 교화했던 구도의 길 또한 서로의 입을 빌어 말해주고 있음이다. 일제를 사자후로 일갈하여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던 만공의 의지.. 그 만공을 찾아왔다던 만해 한용운.. 문득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수도자도 아니고 구도자도 아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나는 무엇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나는 그리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으며 마침내 어디로 가고 있음일까. (-176쪽)   모든 형식과 모든 이론을 뒤로 한 채 홀로이 몸으로 직접 구도의 길을 갔던 경허.. 그의 기행적인 모습을 통해 우리가 지금 얽매인 채 끌려가고 있는 형식의 굴레를 보게 된다. 소의 코에 꿰어진 코뚜레마냥 우리의 코를 뚫어버린 그 형식과 이론..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쯤은 되돌아 볼 일이다.  타인 먼저가 아닌 내 자신이 먼저일 때부터 모든 것은 시작이다. /아이비생각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 금강경 -

과거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사람들은 마땅히 집착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과거는 죽은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미래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사람들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미래는 환상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현재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사람들은 분별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현재라고 불리는 바로 이 순간ㄴ도 현재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357쪽)

'구도자는 사물에 집착 없이 베품(布施)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구도자가 만약 '나는 사람들을 제도하였다'고 하는 생각을 일으켰다면 그는 진실한 구도자가 아니다. 구도자들은 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형태에 집착한 마음을 버리고 소리나, 냄새나, 감촉이나,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법()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또한 법 아닌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법은 법이 아니며, 법 아닌 것도 법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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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싸는 집 - 세계의 화장실 이야기
안나 마리아 뫼링 글, 김준형 옮김, 헬무트 칼레트 그림 / 해솔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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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가지씩은 똥에 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시골 할머니댁에 갔을 때 난감했던 기억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만큼 우리 화장실의 변천사는 그리 길지 않은 듯 하다. 아주 오래전 내가 어렸을 적에는 화장실이라는 말보다 뒷간, 똥간, 측간, 변소 따위로 불리워졌었다.  그시절에는 변소 한귀퉁이에 잡지 한 권쯤 놓여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똥싸면서 심심하면 그 책을 읽기도 했었다. 똥푸는 아저씨가 똥지게를 지고 다니며 " 똥 퍼~ " 를 외쳐대던 소리는 " 머리카락 팔아요~ " 하던 소리와 " 뻔~ 뻔~ " 하며 다니던 고물장수 아저씨의 소리처럼 내가 어린시절에 자주 들었던 외침중 하나이기도 했다. 학창시절에 아주 짓궂은 생물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점심시간만 되면 각 반을 돌아다니시면서 큰소리로 묻곤 하셨었다. " 얘들아~ 콩나물 먹고 화장실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 그러면 비위 약한 아이들은 그만 도시락 뚜껑을 닫아버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아이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정말 지푸라기로 밑닦개를 했던 시절도 있었다. 변소 한귀퉁이에 놓여있던 잡지책이 행여라도 두꺼운 종이였을 경우 그것을 싹싹 비벼 부드럽게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었다.  몇년전 부모님께서 강원도에 계실 때에도 그 집 화장실은 정말이지 재래식 변소였었다. 한번은 잘 놀던 조카가 느닷없이 집에 가자고 울며불며 떼쓴 일이 있었는데 자초지종을 알고보니 바로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서 집에 가야한다는 거였다. 그만큼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변소라는 말조차도 생소할게다. 

똥! 똥이 더럽다고? 뭐 솔직히 말한다면 더럽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만큼 똥이라는 말은 터부시되었던 말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 똥이라는 말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된 듯하다. 더럽게만 보아오던 똥이 우리 건강을 체크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건강이 우리의 관심사가 된 뒤부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받고 한번 훑어보았는데도 더럽다거나 하는 별다른 느낌은 생기지 않았다. 이 책은 화장실에 관한 이야기다. 시대별로 화장실이 변해져가는 모습을 만날 수도 있고, 각 나라마다 다른 화장실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일인용이 아닌 다인용 화장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며, 노르웨이의 가족용 화장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저런 화장실이 생긴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한번 해보게 된다.  여성의 상징인 하이힐이 바로 똥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예나 지금이나 오물처리가 고민거리였음은 같은 모양이다.  그러나 저러나 어떤 왕이 썼다던 그 대리석 화장실은 겨울에 사용하기엔 너무 괴롭지 않았을까?

똥이야기, 화장실 이야기였음에도 재미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라면 이 책을 빌미로 껄끄러운 주제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말이다. 그림만 보아도 더럽다며 인상 찌푸리기 보다는 흥미를 느끼게 할 수 있을 듯 싶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를 위한 책을 보면서 나도 배울 수 있다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집을 갈 때 필수적으로 준비했었다는 요강..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만의 특색인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각 나라마다 똥오줌을 처리하는 데 공통적으로 요강을 필요로 했다는 것,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종류의 변기가 있었다는 것, 등등 아이와 마주앉아 재미있게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의 흐름이 매끄러워 괜찮았다. 이 책을 읽고나니 한가지 욕심이 생긴다. 엄마가 직접적으로 표현해주지 못하는 성에 관한 주제도 이렇게 풀어주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렇게해서 부모와 아이가 자연스럽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참 좋을 것만 같다.  책장을 덮으면서 한가지 괴담(?)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학교의 화장실이 모두 재래식 변소였을 적에는 변소괴담도 꽤나 많았었다. 때마침 휴지를 가져가지 않아 당황스러운 아이에게 손이 쑥 올라와서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를 줄까~ 하고 물었다던 이야기는 정말 무서웠었는데...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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