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결국 관심이다. 관심은 곧 배려일테다. 그리고 배려는 곧 사랑일테다.  그리고 '한동안 다른 책은 읽고 싶지 않다' 라는 책띠의 구절은 누가 보아도 설레일테다. 이 책을 처음 대하면서 나는 책띠의 저 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다른 책은 읽고 싶지 않다.... 얼마나 크게 가슴을 울렸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졌으면...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접는다. 같은 글을 읽고도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내가 느낄 모든 것들을 묶어버리고 싶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제목처럼 이 책은 수학적인 공식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수식이라는 것이 숫자를 대표하지 않고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대표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본 바로는 그랬다. 박사가 일러주는 숫자들은 하나하나마다 사람의 감성이 묻어났고, 하나하나마다 사람이 느껴야 하는 마음이 숨쉬고 있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못한다,라는 쪽지를 양복의 앞섶에 붙여두고서 자신을 자각해야만 했던 박사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지금의 내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가슴 한쪽이 짠해졌다. 잊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 잊혀지는 것들, 잊고 싶지 않은데 잊어야만 하는 것들, 머물지 못하는 그 수많은 것들은 기억이라는 테두리를 두른 채 우리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런데 그 기억의 한계가 80분이라면?

수식.. 숫자를 보면 우선 문제가 생각나고 그 문제를 풀어야하는 어떤 공식부터 생각난다. 그렇다고 수많은 문제와 숙제가 이 책속에 산재되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약수, 정수, 소수, 자연수, 완전수, 우애수 등 수학용어들과 묘하게 얽혀드는 인간끼리의 접촉, 즉 정情에 대한 의미는 정말 대단하다. 무엇이 되었든 숫자와 얽혀야만 마음을 놓는 박사의 머나먼 기억속에서 숫자는 살아숨쉬는 하나의 따스함이다. 나는 파출부. 어느날 요주의 인물로 찍혀진 박사의 집을 방문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생면부지의 박사와 할 일만 하면 되는 파출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0'의 상태였지만 그 '0' 이라는 숫자가 안고 있는 무한의 의미를 무리없이 부여해주는 작가의 낱말들이 정말이지 기가 막히도록 좋았다.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학에 모순이 없으니까. 그리고 악마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142쪽)  박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부터 생각지도 않게 숫자에 연연하게 되는 파출부와 그의 아들 루트의 행적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짧은 박사의 기억을 위하여 그들이 희생을 감내하는 시간들이 우리곁에서 이미 멀어져가고 있는 타인을 위한 배려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파출부의 손길을 거치며 먼지처럼 풀풀 일어나 풀어헤쳐지는 박사의 지나간 기억들.. 박사의 숫자를 하나 둘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하나의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기도 했다. 박사가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박사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늘 곁에 머물고 있음에도 느끼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니 가질 수 없었던 그 사랑의 흔적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속에서 끝없는 모순과 대립이 끝나지 않을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 증명할 수 없다던 그 악마의 존재를 우리가 몸소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164쪽)  파출부의 아들 루트와 한없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박사. 그 박사가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순수粹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그런... 그리고 그들 셋이서 만들어낸 관심과 배려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기회주의적인 마음이 끼어들지 못하는 그 순수粹함이 있었기에 그들의 인연이 그토록이나 오랜 시간동안 기억되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는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또다른 이름임을 아주 담담하게 말해주고 있어 읽기 시작했던 순간보다는 책장을 넘겨 가면서 더 많은 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다. 그의 말속에서 거론되어지던 일본작가들의 이름.. 꽤나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일본출판계의 흐름속에서 저들처럼 저들의 입속에서 불리워질 우리의 작가는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 가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자꾸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단 한줄의 글귀때문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책 한권의 느낌이 아직은 희미하다. 이 책, 다시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진다. 시간과 마음만 허락한다면... 제대로 느껴보고 싶으니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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