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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한국의 고전? 글쎄 그것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흔히들 '난쏘공'이라고 말하는 이 작품을 가장 많이 다루었던 공간은 연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읽지 않아도 읽은 듯한 느낌을 주고 보지 않아도 본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 이 작품일 것이다. 조금씩 맛을 보았다고 말하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아주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한번쯤은 그 속에 푹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했었던 것 같다. 정말 오랜 시간을 버텨 끈질기게 쏘아보다가 읽기 시작했는데 왠일인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황들을 이미 오래전에 겪어왔던 일들이겠거니 하면서 가슴 한쪽으로 자꾸만 쓸어버리고만 싶었다. 숱하게 보고 듣고 말해왔던 내용이어서라기 보다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판박이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너무나도 가슴을 아프게 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겪어왔던 일들, 잊을 수 없을 것처럼 각인되어지던 수많은 사회상들이 영화의 장면들처럼 그렇게 자꾸만 나를 아프게 했다. 지나간 일들이, 지나쳐간 모든 경험들이 모여 실수하지 않는 현재를 만들어낸다고들 하지만 그많은 것들이 지나쳐간 자리에서 어쩌면 그리도 모질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고, 또 묻고 싶었다.
안온한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책이라는 말에 어느정도 공감해야 할까? 어느날엔가 왜 이렇게 세상이 힘든 사람만 더 힘들게 만드는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을 때 한 지인이 이렇게 말했었다. 왜 그렇게만 생각하는거냐고. 힘들어보이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모두가 힘들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주면 안되는거냐고. 단 몇 프로의 인간군상을 모두인양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그때 나는 주먹으로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맞게, 상황에 맞게, 형편에 맞게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은 세상에 하나뿐인 진실일 것이다. 그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만이 더 무거운 것 같아 다른이의 십자가와 바꿔지겠다고 말했던 사람이 다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그저 그럴수 있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우리에게 남겨지는 여운이 너무나도 길다. 그러했기에 이 책을 다시 대하는 나의 마음이 왠지 껄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에는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자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미 지나쳐간 우리의 과오가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우리곁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일게다. 사용자를 위해 일한다는 노조의 정의가 지금 이 시대에서조차 통하는 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어머니의 가계부에서 생계비 명목으로 콩나물 얼마, 새우젓 얼마, 정부미 얼마, 배추 얼마, 두통약 얼마 하는 따위의 비용들은 돈의 가치만 바뀌었을 뿐이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시대는 변하는데 나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 보게 된다. 나는 변해가는 시대에 맞춰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를 묻고 싶었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변해가는 사회만 탓하며 나는 그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라도 먼저 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용없이 그저 형식만 변해가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나만 바라봐달라고 하는 사랑이 우리를 힘겹게 하듯이 내 입장만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사회의 한 단면은 역시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 작품에 대한 글은 여기저기 수도없이 많다. 평론가들이 쏟아놓은 말도 수없이 많다. 이 책의 말미에도 작품에 대한 해설부분이 분명하게 들어가 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말 할 만한 실력도 되지 못하니 그저 내가 이해하고 싶은 부분만 이해하자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통해서 보여지던 난장이 아버지 김불이의 삶과 그의 큰아들 김영수가 자신의 삶에 대처하는 자세는 분명히 극과 극이었다. 순응하며 살았던 자신의 삶앞에서 그 파고를 견뎌내지 못한 난장이 아버지 김불이는 어찌할 수 없었다는 지독한 핑게로 자살을 선택했지만, 아들 김영수는 그래도 한번쯤 소리라도 질러보려 애썼다는 거였다. 옳은 길이라고,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비뚤어진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보고 싶다고 발버둥치고 악다구니를 써 보았던 아들 김영수의 모습. 비록 살인자가 되어 사형을 당하긴 했어도 그가 삶을 향해 외쳤던 짧은 단발마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하나의 위안처럼 다가섰을지도 모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읽는동안 짧게 끊어지는 문체가 조금 껄끄럽기도 했다. 마음과 원리원칙이 서로 대립하듯이, 아비와 아들의 죽음이 너무나도 달랐듯이 책속에서 보여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행복과 불행, 고통과 평안, 선과 악, 믿음과 불신처럼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마치도 이 세상을 둘로 갈라놓기라도 하듯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건데 솔직하게 말해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없다. 그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맞춰가는 것이 행복일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많은 것을 갖고 있다고 다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고 가진 것이 없다고해서 다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자신의 삶에 대처하는 자세가 다분히 주관적이듯이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다. 어쩌면 난쟁이 아버지의 죽음이 그 아들에게 일어설 수 있는, 혹은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눈뜨게 해주는 동기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 아닐까 싶다. 모두를 이어주는 끈으로 어머니의 사랑이 존재했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저 밑바닥에도 사랑은 있었다. 사랑이 별건가?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는 마음이 사랑이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사랑만으로 살아내기엔 너무나도 버겁다는 것, 그것이 또한 아픈 진실이라는 거다.
책장을 펼치면서 받았던 질문이 있었다. 첫번째 질문 : 두 사람이 같이 굴뚝 청소를 했다. 그런데 나와보니 한사람은 까맣게 더러워졌고 한사람은 말짱했다. 두 사람중에서 누가 얼굴을 닦겠는가? 답 : 얼굴이 더러워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질문자는 말한다. 아니라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람중에서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자신도 더러울거라 생각하고 얼굴을 닦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다시 두번째 질문, 역시 첫번째 질문과 똑같았지만 그 답은 달랐다. 어떻게 두사람이 똑같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사람만 더러워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책속에는 이 모든 것의 해답을 안고 있는 듯한 두개의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뫼비우스의 띠' 이고 또하나는 '클라인씨의 병'이다. 시작과 끝이 하나일 수 밖에 없는 띠와 들어가고 나오는 입구가 하나인 병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시작과 끝의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고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한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이치는 아닌지... 세상의 모든 질문은 생각하기에 따라 답이 다르다는 것. 그 생각의 차이에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것. 그러니 어느것도 옳다 그르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