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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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의 고전? 글쎄 그것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흔히들 '난쏘공'이라고 말하는 이 작품을 가장 많이 다루었던 공간은 연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읽지 않아도 읽은 듯한 느낌을 주고 보지 않아도 본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 이 작품일 것이다.  조금씩 맛을 보았다고 말하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아주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한번쯤은 그 속에 푹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했었던 것 같다. 정말 오랜 시간을 버텨 끈질기게 쏘아보다가 읽기 시작했는데 왠일인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황들을 이미 오래전에 겪어왔던 일들이겠거니 하면서 가슴 한쪽으로 자꾸만 쓸어버리고만 싶었다. 숱하게 보고 듣고 말해왔던 내용이어서라기 보다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판박이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너무나도 가슴을 아프게 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겪어왔던 일들, 잊을 수 없을 것처럼 각인되어지던 수많은 사회상들이 영화의 장면들처럼 그렇게 자꾸만 나를 아프게 했다. 지나간 일들이, 지나쳐간 모든 경험들이 모여 실수하지 않는 현재를 만들어낸다고들 하지만 그많은 것들이 지나쳐간 자리에서 어쩌면 그리도 모질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고, 또 묻고 싶었다.

안온한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책이라는 말에 어느정도 공감해야 할까? 어느날엔가 왜 이렇게 세상이 힘든 사람만 더 힘들게 만드는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을 때 한 지인이 이렇게 말했었다. 왜 그렇게만 생각하는거냐고. 힘들어보이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모두가 힘들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주면 안되는거냐고. 단 몇 프로의 인간군상을 모두인양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그때 나는 주먹으로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맞게, 상황에 맞게, 형편에 맞게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은 세상에 하나뿐인 진실일 것이다. 그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만이 더 무거운 것 같아 다른이의 십자가와 바꿔지겠다고 말했던 사람이 다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그저 그럴수 있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우리에게 남겨지는 여운이 너무나도 길다. 그러했기에 이 책을 다시 대하는 나의 마음이 왠지 껄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에는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자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미 지나쳐간 우리의 과오가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우리곁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일게다. 사용자를 위해 일한다는 노조의 정의가 지금 이 시대에서조차 통하는 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어머니의 가계부에서 생계비 명목으로 콩나물 얼마, 새우젓 얼마, 정부미 얼마, 배추 얼마, 두통약 얼마 하는 따위의 비용들은 돈의 가치만 바뀌었을 뿐이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시대는 변하는데 나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 보게 된다. 나는 변해가는 시대에 맞춰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를 묻고 싶었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변해가는 사회만 탓하며 나는 그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라도 먼저 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용없이 그저 형식만 변해가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나만 바라봐달라고 하는 사랑이 우리를 힘겹게 하듯이 내 입장만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사회의 한 단면은 역시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 작품에 대한 글은 여기저기 수도없이 많다. 평론가들이 쏟아놓은 말도 수없이 많다. 이 책의 말미에도 작품에 대한 해설부분이 분명하게 들어가 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말 할 만한 실력도 되지 못하니 그저 내가 이해하고 싶은 부분만 이해하자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통해서 보여지던 난장이 아버지 김불이의 삶과 그의 큰아들 김영수가 자신의 삶에 대처하는 자세는 분명히 극과 극이었다. 순응하며 살았던 자신의 삶앞에서 그 파고를 견뎌내지 못한 난장이 아버지 김불이는 어찌할 수 없었다는 지독한 핑게로 자살을 선택했지만, 아들 김영수는 그래도 한번쯤 소리라도 질러보려 애썼다는 거였다. 옳은 길이라고,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비뚤어진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보고 싶다고 발버둥치고 악다구니를 써 보았던 아들 김영수의 모습. 비록 살인자가 되어 사형을 당하긴 했어도 그가 삶을 향해 외쳤던 짧은 단발마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하나의 위안처럼 다가섰을지도 모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읽는동안 짧게 끊어지는 문체가 조금 껄끄럽기도 했다. 마음과 원리원칙이 서로 대립하듯이, 아비와 아들의 죽음이 너무나도 달랐듯이 책속에서 보여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행복과 불행, 고통과 평안, 선과 악, 믿음과 불신처럼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마치도 이 세상을 둘로 갈라놓기라도 하듯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건데 솔직하게 말해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없다. 그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맞춰가는 것이 행복일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많은 것을 갖고 있다고 다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고 가진 것이 없다고해서 다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자신의 삶에 대처하는 자세가 다분히 주관적이듯이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다. 어쩌면 난쟁이 아버지의 죽음이 그 아들에게 일어설 수 있는, 혹은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눈뜨게 해주는 동기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 아닐까 싶다. 모두를 이어주는 끈으로 어머니의 사랑이 존재했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저 밑바닥에도 사랑은 있었다. 사랑이 별건가?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는 마음이 사랑이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사랑만으로 살아내기엔 너무나도 버겁다는 것, 그것이 또한 아픈 진실이라는 거다. 

책장을 펼치면서 받았던 질문이 있었다. 첫번째 질문 : 두 사람이 같이 굴뚝 청소를 했다. 그런데 나와보니 한사람은 까맣게 더러워졌고 한사람은 말짱했다. 두 사람중에서 누가 얼굴을 닦겠는가?  답 : 얼굴이 더러워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질문자는 말한다. 아니라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람중에서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자신도 더러울거라 생각하고 얼굴을 닦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다시 두번째 질문, 역시 첫번째 질문과 똑같았지만 그 답은 달랐다. 어떻게 두사람이 똑같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사람만 더러워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책속에는 이 모든 것의 해답을 안고 있는 듯한 두개의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뫼비우스의 띠' 이고 또하나는 '클라인씨의 병'이다. 시작과 끝이 하나일 수 밖에 없는 띠와 들어가고 나오는 입구가 하나인 병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시작과 끝의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고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한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이치는 아닌지... 세상의 모든 질문은 생각하기에 따라 답이 다르다는 것. 그 생각의 차이에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것. 그러니 어느것도 옳다 그르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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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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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남자의 하루란 소개글은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렇고 그럴것이다는 뻔한 생각을 하면서 만났던 책이었지만 생각처럼 뻔하지 않은 하루를 그려주고 있다는 것에 다소 당혹스러움을 느껴야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그 남자가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죽음이었고, 그 죽음을 끌어안고 살았던 하루라는 시간속에서는 사랑에 대한 집착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것도 아직까지는 우리의 관념속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동성에 대한 사랑.. 책을 읽으면서 그 남자, 조지 아저씨에 대해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랬다. 너무나도 난해하게 다가왔던 조지아저씨의 하루속에는 보여지는 것보다 숨겨둔 것들이 더 많아 보였던 까닭이다. 그가 지나쳐가는 모든 일상속에 내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숨겨져 있는 듯한 느낌을 어쩌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그만큼 이 책의 문체는 짧고 간결하다.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조지아저씨의 나이는 58세, 하는 일은 교수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캠퍼스까지 가는 길은 다분히 지루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스쳐가는 풍경마다 긴 설명이 따라온다. 하지만 그 풍경들속에 얽혀드는 조지아저씨의 생각들은 차를 타고 지나쳐가듯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깊은 상념같은 것들... 그리고 학생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강의를 하고, 질문을 받고...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씩 호명해가며 그 사람들과 얽혀드는 관계의 고리를 설명해주는 단계에서조차 왠지 가볍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한 남자의 하루를 따라가며 그 남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깊게 깔려지는 생각들을 밟고 지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 밟히는 느낌은 왠지 껄끄럽다. 에세이적인 느낌이랄까? 한사람의 주관적인 틀에 얽매이는 느낌이었다면 맞을까? 하여,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책날개의 작가이력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그렇지... 58세의 조지아저씨속에 58세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있었다.

책속에서 표면적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가볍다. 교수가 직업인 한남자의 시간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그 만남의 고리를 엮어가는 주인공의 생각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책속에 담겨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은 조지아저찌의 사랑이었다. 그가 사랑했다던 그의 애인은 남자였다. 58세 교수의 동성애라... 뭐,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나이든다는 것은 좀더 원숙한 사랑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일테니. 동성애조차도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은 나 역시도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이겠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뚜렷하게 이것이다,라는 말로 정의내릴 수 없음이니... 하지만 시대가 1960년대라면 다르겠지. 어떻게보면 앞서가는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 당시로 본다면  파격적인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 책속에서 그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을 것이다.

그다지 길지않은 내용이었음에도 이 책을 읽는 느낌은 너무 길었다. 책이 담고 있는 것은 많은데 눈에 보여지는 것은 많지않으니 더디게 읽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책의 말미에서 나는 그 더딤을 해소할 수 있었다. 옮긴이의 말을 통하여 내가 놓치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것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끔 설명해주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1962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하루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그 시대의 사회적인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조지아저씨와 학생들간의 대화속에서 언뜻언뜻 보여지던 사회상들을 그제서야 이해하게 된다. 또한 다수집단이 소수집단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야기하며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적절하게 잘 섞어놓았다는.. 그 당시에는 아직 '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조지아저씨에게도 이성친구는 있었다.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눈을 뜨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하루를 끝맺는 조지의 시간들. 그 시간속에서 마주쳤던 일상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일수도 있겠다. 그가 꿈꾸었던 사랑마져도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 사랑의 형태는 똑같다. 늙은이가 되었든 젊은이가 되었든 사랑의 마음은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달라야한다고,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선입견이 문제일뿐이다. 책 내용중에서 경험에 관한 대화가 나오는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과거의 경험을 이용하지 않으려 하면, 다시 말해서,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그 일을 그때그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게 오히려 경이로울 수 있지...(-183쪽) 경험을 쌓은 뒤나 아무일도 겪지 않았을 때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냐고 묻는 제자에게 조지아저씨는 그렇게 말했었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수도 있겠구나 싶은 저 말이 자꾸만 내 생각의 끝을 잡고 있다. 책을 읽고나니 우리가 정해놓은 틀에 우리 스스로가 갇혀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변화를 추구하되 나와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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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모어 이모탈 시리즈 1
앨리슨 노엘 지음, 김경순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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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VERMORE.. 영원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에 없는 것이기에 그토록 우리를 아련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책표지의 꽃그림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마치도 영원히 지지않을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항상 꿈을 꾸는가보다. 영원한 사랑을..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다리는 모양이다. 영원히 곁에 머물러 줄 사랑을..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책속의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죽지않는 불사자不死者라면 몰라도. 뱀파이어도 아니고 좀비도 아닌 불사자들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책속세상이 왠지 낯설게 다가왔다. 인간의 상상력은 정말이지 놀랍다는 생각도 해 보면서. 흔한 소재를 살짝 용어만 바꾸었을 뿐인데도 왠지 색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아 피식거렸다. 요즘 인기있는 <트와일라잇>이나 <뉴문>과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지만 무언가 차별화되기를 노린 것처럼 다가오는 불사자不死者라는 단어가 그렇다는 말이다.

생生과 사死의 중간.. 온전히 죽기위해서는 거쳐갈 수 밖에 없는 그곳에서 잠시 헤매이다 누군가에 의해 다시 삶의 세상으로 돌아온 소녀 에버가 있었다. 그리고 에버에게 생긴 초능력. 뭐 그다지 초능력이라고까지야 할 건 없다. 단지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다는 오로라가 보이고 스쳐가기만해도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일뿐. 영매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류의 소재는 주변에 많고 많다. 계간문학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런쪽만을 다루어주는 책들도 꽤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사고가 난 소녀가 죽은 사람의 눈을 이식하고 그때문에 생과 사의 중간지점을 헤매이는 사람들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그런 영화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 아주 특별한 소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영화 한편이 있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은행나무침대>라는 영화다. 아주 오랜시간을 거쳐 사랑을 찾아 은행나무침대로 환생했던 여인의 사랑을 그려 내게는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었던 그 영화가 책을 읽는 내내 오버랩되었다. 비슷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사이에는 항상 그 사랑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등장하기 마련이고, 이미 오랜 시간을 지나 다시 찾아온 옛사랑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그 옛사랑을 인정한다는 소설의 틀을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전체 6부작으로 되어 있는 시리즈중에서 첫번째 책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죽지않고 영원한 삶을 살아야하는 남자 데이먼과 환생을 거듭하며 못다 한 사랑을 이루려는 에버의 이야기라고 되어있었지만, 책을 읽어보니 못다한 사랑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한남자의 이야기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영원한 삶을 찾기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며, 옛사랑이 자신을 인정하기까지의 많은 시간을 인내할 수 있는 데이먼의 모습이 약간은 색다른 소재로 느껴졌다는 말이 어쩌면 맞을것도 같다. 시리즈물이라고는 하지만 1편만으로도 이야기에 만족할 만하다. 1편은 1편대로, 2편은 2편대로 그 나름대로의 맛을 달리할 수도 있기에 시리즈물이라는 말에 유혹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음편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결론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1편에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사랑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걸로 끝이 났다면 2편에서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미리 짐작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뱀파이어도, 좀비도, 늑대인간도 이제는 모두가 식상한 소재가 된 것일까? 이제는 불사자의 이야기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형식속에서 이름만 바꿨을 뿐이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지 작가의 상상이 기대되기도 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니까. 생生과 사死의 중간지점이라는 곳이 정말 있기는 있을까? 하나같이 아름답게만 그려지고 있는, 찬란한 빛으로 쌓인 그런 세상이 정말 존재하기는 할까?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세상일지라도 참 멋진 뉘앙스를 풍긴다. 계간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자꾸만 부풀어오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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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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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신은 존재할까? 이렇게 물으면 신에 대한 존재의 有無가 약간은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우주속에 신은 존재할까? 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건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오, 이런 이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고 나만의 느낌일 뿐이니 오해마시라.. 왜 이런 말을 꺼냈는가하면 내가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 책 <파이이야기>의 서두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모습부터 시작되는 까닭이다.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소년은 그 철자의 발음때문에 이름으로 인한 곤혹스러움을 겪게 되지만 파이 파텔, 덧붙여 π=3.14라는 애칭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한고비를 넘어간다. 소설속의 배경은 인도. 그다지 잘사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사는 것도 아닌 파이의 부모님은 동물원을 경영한다.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일상생활을 보면서 자라나는 파이에게는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특성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울림의 미학이 여기에 숨어 있다. 우리가 모르는 동물들만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어느날의 여행길에서 똑같이 생긴 세개의 언덕을 오르며 파이에게 다가왔던 신의 존재는 놀라웠다.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귀결시키는 기독교의 신에 대해 묘한 반항심을 느끼면서도 그 조용함을 잉태한 평안이 좋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 빵가게 주인을 통해 이슬람교를 만난다. 사랑받는 사람들에 대한 종교라는 말과 함께. 그를 통해 본 것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곳 자체에서 빠르고, 필요한 동작만 하는 그들의 믿음이었다. 자아가 알라와 만나는 순간을 축복이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그렇게 알라신은 들어왔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캐나다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고 사랑 넘치는 미소를 지어주었던 성모 마리아를 보면서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해서 세번째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단지 가슴 떨리는 기쁨과 평안으로 다가왔던 신의 이름은 세개였지만 그가 받아들였던 신은 오직 하나였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마음속에 머무는 신!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와 신의 만남을 세상사람들은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했던 대답은 정말이지 멋졌다.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 그러므로 나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랬기 때문이었을것이다. 단지 신을 사랑하고 싶었을 뿐인 소년이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아 벵골 호랑이 한마리와 장장 7개월을 바다위에서 살아냈던 것은.. 처음 구명보트에 함께 남겨진 것은 파이와 하이에나와 얼룩말과 나중에 바나나배를 타고 왔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 호랑이 이렇게 다섯이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하이에나에 의해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죽어갔고 그 하이에나는 벵골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기싸움은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설정이기도 하지만 동물원에서 자랐던 파이의 어린시절 경력을 상황에 맞춰본다면 그다지 생뚱맞은 모습은 아닌 듯 하다. 먹이가 될 수도 있는 작은 소년으로 인하여 먹이를 조달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벵골호랑이의 선택은 탁월했다. 함께 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다. 어쩌면 살고 싶다는 의지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었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작은 구명보트와 파이가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었던 뗏목이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이었다. 아래는 물고기와 상어들의 세상이었고 구명보트의 한쪽은 벵골호랑이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현명했다. 구명보트의 모든 것들로부터 삶의 방식을 터득해나가기 시작했고, 벵골호랑이와의 기싸움에서조차 더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 사람이었지만 동물화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느끼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속의 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해주었던 벵골호랑이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227일간을 버텨냈던 그의 조난생활은 지루하지가 않았다. 아니 스스로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한정된 배경속에서 엮어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 좁은 공간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벵골호랑이와 작은 소년의 어울림이 묘하게 따스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잠시 멈췄던 해초섬에서의 짧은 휴식조차도 그들을 떼어놓지는 못했다. 구명보트의 생활에서 풀려나 육지를 밟았을 때 아무런 인사도 없이 훌쩍 밀림속으로 떠나갔던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인사도 없이 떠났다고 눈물짓던 파이의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가슴 찡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파이는 구조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물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탔던 배는 왜 침몰하게 되었는지.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벵골호랑이와 함께 했던 파이의 모든 시간들을. 해초섬에서 식충식물을 만났던 그 모든 사실들을. 소년 파이가 할 수 있었던 말과 사람들이 파이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너무도 달랐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은 어째서 작은 소년의 구명보트위 생활보다도 배가 침몰했던 이유만을 듣고 싶어했던 것일까? 파이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말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소년 파이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는거라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거라고.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무덤덤한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거라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의 안일성을 꼬집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아렸다.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만 알면 된다는 식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의 편협된 마음을 꼬집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입부분에서 살짝 엇나가고 싶었었다. 약간은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그 도입부분의 파이 이야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깊은 뜻이야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길을 가다가도 굳게 닫혀진 종교건물의 출입문을 보게되면 '저들만의 신이 저들만의 공간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활짝 열리지 못하는 종교, 형식의 너울을 뒤집어 쓴채 닫혀진 그들의 종교는 불쌍하다. 파이처럼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면 안되는 것일까?  신은 '궁극적인 실체'이자 존재를 떠받치는 틀이건만, 마치 신의 힘이 약해서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듯 나서서 옹호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 이라는 이 책속의 말에 백프로 공감한다. 그런 자들이 정작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며 단호하게 그 아픔을 물리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겉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신을 옹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과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는 걸 모른다는 말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바깥의 악은 내면에서 풀려나간 악인 것을... 선을 위한 싸움터는 공개적인 싸움장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있는 작은 공터인 것을... 96쪽의 이 말은 내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파이와 벵골 호랑이의 짧지않은 동거속에서 내가 찾아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보인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어울림의 아름다움과 서로 엉킨 마음이 만들어냈던 따스함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여운이 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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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미쳐가는 세상에서 완전 행복해지는 심리학
박지숙 지음 / 무한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살짝 미쳐가는 세상에서 완전 행복질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떠오른 의문점이다.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런 방법을 찾아 이리저리 뒤져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렇게 내려놓기, 비우기, 버리기 등등의 말들이 우리 곁을 맴도는 것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살짝 미쳐가는 세상을 따라 나도 미쳐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왕이면 최고이고 싶고, 이왕이면 내가 일등이 되었으면 더 좋겠고, 이왕이면 남보다 더 빨리가고 싶고, 이왕이면 내가 더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 보통의 사람 마음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자꾸만 사람들은 2등이면 어떠냐고 말하고, 최고가 아니면 어떠냐고 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정도면 되었지 뭘... 하면서 은근슬쩍 나를 안심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런데 기가막힌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최고를 지향하고 일등을 위해 뛴다는 사실이다. 그런 위안마져도 의심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니 살짝 미쳐가고 있다는 말이 이해되기는 한다.

저자의 말처럼, 아니 굳이 저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말을 많이 하고 듣는다. 그래서 어떻게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가가 늘 관건이다. 어떻게 하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렇게 묻기전에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를 먼저 물어야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 혼자만의 생각을 말해보자면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길을 가는 것이 행복한 일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굳이 타인의 틀에 나를 맞추기보다는 나만의 틀속에서 짜맞추며 만들어가는 나의 일상이 행복일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에는 온전한 나만의 기쁨이 있을테니 말이다. 어쩌면 좀 특별하다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고 그래 너 잘났다 라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받을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남의 눈치와 잣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리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하는 말이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0으로 만들어야 하며 둘째, 지금 이순간을 행복할 것이고 셋째, 놓아버려야 하며 넷째, 잠시라도 쉬어 가려고 노력할 것이며 다섯째, 비교하는 마음을 없애버려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댓가성의 의미가 존재하고 있다. 은연중에라도 그런 마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좋아서,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런 일들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좀 더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음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은 행복해 질 것이다. 무슨 일에든 댓가를 바라게 된다면 지금 혹은 나중에라도..라는 생각에 연연하게 되어 그 생각들이 나를 괴롭힐 건 뻔한 일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의 그런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게 된다면 어떨까? 어떤 일을 해놓고 그 댓가를 바라는 것도 사실은 욕심이고 욕망일 뿐이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하니 그것 또한 괴로움일건 뻔한 일이다. 그러다보면 나도 괴롭지만 주변 사람 역시 괴롭게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 놓아버리자. 놓아버리고 잠시동안만이라도 쉬어보자. 때로는 돌아가야 하는 길도 있는 것처럼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닐테니 말이다. 놓아버리는 삶속에서 비교하는 마음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비교대상은 한도 끝도 없으며 그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수도없이 '더더더'를 외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위의 다섯가지 사항을 잘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해지지 않을까?

책은 크게 다섯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인생의 모든 답을 알고 있는 마음먹기와 타인과 소통하며 맺어가는 관계맺기, 내 몸을 통해 행복을 얻는 방법, 사랑이라는 테마를 통해 바라보는 행복얻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성공과 돈을 통하여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자잘한 일상을 통하여 많은 예를 보여주고 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저자 소개글에서 보았듯이 선禪을 통한 마음 다스리기였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으며 또한 그것만큼 자신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위에서 말한 다섯가지의 행복비결조차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세상이 아무리 미쳐 날뛴다해도 나의 마음만 잘 다스릴 수 있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내공이 쌓여야 할 것 같다.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가장 어려운 화두... 그러나 언제나 우리를, 아니 나를 따라다닐 영원한 숙제가 아닐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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