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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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합니다."

"오늘 누려도 되는 즐거움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말아요."

"개인이 감정을 느끼면 집단생활이 비틀거려요."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게 더 나은 선택이겠지."

"우린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지극히 간단하게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었어. 이단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삶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위협해서 사회 자체를 공격하는 격이야. 그래, 사회 자체를 말이야."

"우린 사람들이 옛것에 끌리는 걸 원하지 않아요. 우린 그들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항상 과학이 최고라는 말을 하는대요. 그건 최면 교육의 표어입니다."

"신은 기계와 과학적인 의학과 보편적 행복과는 병립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문명은 기계와 의약품과 행복을 선택했어요."

"문명은 숭고함이나 영웅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개념들은 정치적인 비능률성의 징후들이죠."

"사람들은 人性의 절반쯤은 병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어요."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 원하지 않는...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산다면 어떤 기분일까?연 그런 세계를 신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멋진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라는 한 줄의 문장을 보면서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 昨今의 세상에서 그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바쳐가며 쟁취해야만 할 의미처럼 되어버린 듯 하다. 삶의 話頭랄까? 그런데 저 한줄의 문장처럼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정말 재미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 행복이란 말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자신이 만든 올가미에 자신이 걸려든 것처럼.

 

<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 시대에 이렇게까지 앞서나가는 세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작품이 조지 오웰의 <1984>였다. big brother에 의해 모든 것이 감시되는 사회. 하지만 소설이 곧 현실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꿈의 나라를 유토피아라고 한다면 지독히도 어두운 현실을 그려내는 걸 디스토피아라고 한다는데 <멋진 신세계>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 판단은 오롯이 독자의 몫인 듯 하다. 신기하게도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가족이란 의미의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남과 죽음까지 길들여지는 과정속에서 인간성이나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긴 채 삶의 여정속에 머문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멋진 신세계>가 그리고 있는 세상이다. 인간을 '맞춤형'으로 제품을 찍어내듯이 대량 생산을 하고,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난다. 자신의 삶에 어떠한 의문조차 품을 수 없도록 끝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는 존재가 하나 나타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시선은 야만인 구역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야만인 구역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딱 지금의 우리라는 것이다.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야만인 구역에서 원래 신세계에 살았던 여인과 그 여인의 아이를 만나게 되고 아이의 아버지가 신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그는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 신세계로 돌아온다. 미래에서 과거로 갔고, 다시 과거에서 미래로 돌아온 셈이랄까? 이쯤에서 살짝 의문이 든다. 작가가 진심으로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어떤 모습일까? 재수없으면 200살까지 살지도 모른다는 말이 떠도는 지금, 늙지도 않고 정신적 외로움도 느낄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자극으로만 이루어진 오락을 즐기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혹 인간이 살기에 가장 좋은 형태의 국가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하는 이도 있다. 사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유토피아>라는 작품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 혹은 사회주의인 듯 보여진다.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인간의 욕구와 수요를 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어쩌면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야만인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모습속에는 인간성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처절한 몸부림이 보여지고 욕망과 이성은 끝없이 싸운다. <멋진 신세계>라고 말은 하지만 그 안에서도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이다. 아무래도 인간의 운명속에서 모순은 피해갈 수 없는 길인 모양이다.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발표되었고, <1984>는 1949년에 발표되었으며, <유토피아>는 자그마치 1516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사는 모습은 똑같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하는 것일까? 인간은 또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행복의 의미를 어디에 숨겨두고 이렇게 찾아 헤매는 것일까? 혹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유토피아는 아닐까? /아이비생각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이지, 결코 실현될 수 없거나 발견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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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문화사 -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아리 투루넨.마르쿠스 파르타넨 지음, 이지윤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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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전만 해도 식사시간에 말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대화가 식사시간에 이루어진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밥을 먹으면서 말을 한다는 건 예의없는 행동이었으며 쩝쩝거리거나 소리를 내는 것 또한 예의없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매너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의나 예절이란 말의 의미와 같을까? 물론 사전에는 예절을 영어로 manner라고 한다고 나와 있지만 뜻밖의 말도 보인다. manner의 어원은 이탈리아 어의 마니에라로, 개성적인 양식이나 필적을 의미함. 13~15세기의 프랑스 궁정 문학이나 이탈리아에서 '매너'라는 말은 보편적인 인간행동과 예술양식에 사용되는 말로서 영어의 '스타일'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뜻을 갖고 있었음. 매너라는 말은 18세기까지는 원뜻 그대로 쓰이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개성적 양식에 대신하는 ‘아류(亞流)’의 뜻을 내포한 모멸적인 말로 쓰이고 있음. 간혹 들려오는 매너리즘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각설하고 이 책은 그 매너라는 형식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전통>이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나름대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기득권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매너라는 형식의 뒷면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신사의 품격처럼 여겨지고 있는 first lady는 문 뒤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암살자들의 방패막이로 여성을 먼저 앞세웠던 것이 시초였다. 위생관념이 없었던 시절, 창 밖으로 버려지던 똥이나 오줌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양산을 쓰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오염물의 냄새를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향수가 만들어졌으며 오염물을 묻히지 않기 위해 힐을 신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양산과 향수와 힐이 멋쟁이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기사라는 이름으로 남자들만의 세상이 펼쳐지던 중세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사회계층에 따라 매너가 뜻하는 바가 달랐다'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럽뿐일까? 우리의 역사속에서도 많이 보여지고 있는 까닭이다. 기득권층은 자신이 마치 다른 존재인양 여러가지 예절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지금 명절마다 치루는 그 제사형식도 그렇게해서 태어났다. 세상이 변하면서 그들만의 예절인 듯한 형식이 일반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다 남의 제삿상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그만큼 씁쓸한 느낌을 깔고 앉은 형식들이 많다는 말일 터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세지는 강하게 다가온다. 매너는 과연 누구를 위한 형식인가.

 

우리는 흔히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한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거나 관계를 이루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昨今의 '밥 한번 먹자'는 그저 스치듯 뱉어내는 형식적인 말일 때가 많은 듯 하다. 그만큼 관계를 맺는다는 게 어려워졌다는 뜻일까? 아마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이 두려워진 현실 탓이 아닐까 싶은데 혼자만의 생각일까?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걸로 어떤 관계를 돈돈하게 만든다는 게 어려워진 세상이다. 9장에서 보여지는 디지털 중세시대의 이야기는 참 씁쓸하다. 사람들은 이제 SNS 공간에서 허세를 떨고 서로를 유혹하고 행패를 부린다. 중세 기사들의 무절제한 태도가 또다시 만개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중세법은 부활하지 않는거지?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과학과 예술은 인간의 자존심과 명예욕만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인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루소가 보기에도 지금의 모습은 '시대의 인간성이 계몽시대 이전으로, 즉 소수에 대한 혐오 발언에 대중이 선동되었던 종교전쟁 시대의 수준으로 퇴보한 증거라고 여길수도 있다'는 말은 참으로 놀랍다. 인간이 매너를 통해 자신이 동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자 애썼다는 말은 공감할 수 없다. 동물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인간을 상대로 너랑은 다른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애쓴 것 같아서. /아이비생각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난 뒤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좀 더 조심히, 그리고 절제하며 대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국가 권력의 중심, 즉 궁궐에서부터 확연하게 나타났다. 궁궐 사람들은 정확한 예법에 통달해야만 했다. 엄격한 궁중 에티켓이 만사를 규정했다. 궁궐에서 성공하는 유일한 길은 그 에티켓에 통달하는 것이었다. '에티켓'은 원래 프랑스 궁궐에서 입장을 허가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이름표를 뜻하는 단어였으나 점차 '사회가 허용한 태도'를 일컫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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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가족
애덤 크로프트 지음, 서윤정 옮김 / 마카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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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ell me i'm wrong...내가 틀렸다고 말해요, 이 책의 원제다. 그냥 책을 다 읽고나니 원제가 궁금했을 뿐이다. 한동안은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생각난 말, 완벽했다! ... 반전이라는 말은 상당히 매혹적인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전은 이야기의 흐름속에서 어느정도는 숨어있는 모습을 들켜버리곤 한다. 그래서 흠, 그게 반전이었다는 거야? 라는 의구심을 불러올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반전이라는 말의 속성에 끌려들게 된다. 이 책은 반전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정말 끝내주는 반전이었다, 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어떠한 반전을 노리기 위해 꼬인 실타래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지도 않는다. 작가와의 심리전에서 KO패를 당한 느낌이다.

 

전업주부인 메건과 교사를 하고 있는 크리스에게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 에비가 있다. 비록 크고 멋지진 않지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집도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도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그야말로 전원생활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흔히 평화로운 곳이라고 말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메건과 크리스의 시선이 겹쳐지며 그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가끔은 그들이 정말 행복했었던 한 때와, 혹은 조금은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한 때를 오간다. 마치 두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메건은 아이를 낳고 멀어진 듯한 부부관계에 예민하다. 그리고 부쩍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편 크리스는 아내 메건의 그 예민함이 너무 버겁다. 그런 와중에 마을에서 두명의 소년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남편의 수상쩍은 행동때문에 메건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만약 크리스가 범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리스가 정말 살인범일까?

 

가족들 간의 정치라는 게 이래서 무섭다. 아무도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든게 정보를 끌어내고 시험해보고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고안된 베일에 가려진 말들이다. 정말 슬픈 일이다. 왜 서로에게 솔직할 수 없는 거지? 그러면 제임스 본드 같은 허풍쟁이가 모두 사라질 텐데. (-25쪽) 메건이 엄마와 전화로 이야기하며 생각했던 부분이다. 가족이라면 정말 서로에게 솔직해야 하는 것일까? 이야기의 흐름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가족간의 엇박자가 껄끄럽게 다가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인 동시에 누구나 외면하며 살았을 그런 부분인 까닭이다. 살면서 나를 가장 아프게 만드는 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혹은 친구이기 때문에 괜찮을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메건의 저 말은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을 담은 대화가 아닐까 싶어서.

 

알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 남편과 그 비밀로 인해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 완벽해보였던 그들의 삶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알게 된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 무엇을 되돌아보아야 하는지를. 사랑은 그저 좋은 것을 사주고 맛있는 걸 먹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모든 순간을 배려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작은 것까지도 함께 울어주고 기뻐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비생각

 

모든 사람이 행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문제를 안고 있다. 힘든 일을 겪고 있고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그 문젯거리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문젯거리는 우리에게 인생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병적이다.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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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색 색연필로 완성하는 Real 풍경화
하야시 료타 지음, 김재훈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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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다. 그림도 그렇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번 더 그려보는 게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책을 가까이하고 말았다. 자꾸 그려봐야 한다는데도 뭔가 더 빠르게 이룰수 있는 지름길을 찾고 있는 것일 게다. 그게 아마도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싶은데 사실 뭐든 그렇다. 자신이 하는만큼 실력이 느는 건 진리다. 그래서 또 반성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의 그림을, 그것도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보여주는 그림이라면 한번쯤은 더 봐도 될 듯 하다. 물론 자신의 취향에 맞는 그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

책을 펼치면 저자의 그림이 먼저 반긴다. 그러나 개인적인 느낌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살짝 불편하다. 어둡고 칙칙한데 음산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비 온 후의 장면이라거나 물과 관련된 장면이라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비가 많다는 일본의 기후조건을 떠올리게 된다. 그거야 어쩔 수 없이 화가만의 작법일수도 있겠고 화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가 그럴수도 있으려니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묘한 힘이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책에서 사용한 그림도구가 색연필 5자루뿐이라는 거다. 파랑, 빨강, 노랑, 검정, 흰색이다. 전부 프리즈마컬러라고 나오는데 사진으로 보여지는 것은 48색이다. 저 다섯가지 색상만으로 모든 색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색연필을 쥐는 위치와 쥐는 힘을 조절하면서 색연필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새롭게 다가온다. 색연필은 유성과 수성, 두가지가 있다. 사실 빨강, 파랑, 노랑은 색의 3원색으로 그것들을 섞으면 왠만한 색은 다 만들 수 있다. 파랑, 빨강, 노랑은 유채색이고 검정과 흰색은 무채색이다. 만들 수 있는 색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정도는 익숙해져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오로지 연습량의 차이일 것이다. 흰색을 제외하고 빨강, 파랑, 노랑, 검정이 기본4색이라 하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나무 한그루를 그리며 덧칠하는 순서를 보여준 것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입체감 표현하기, 깊이 표현하기, 물 표현하기, 구도잡기등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야외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실전연습용이 보여진다. 저자의 말대로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하세요, 라고 저자가 권하는 작은 꿀팁도 있다. 연필로만 그리다가 색을 입히고 싶은 욕심에 한번 들여다 본 책이었는데 '오래된 문이 있는 풍경'은 저자의 알려주는대로 따라서 한번 그려보고 싶어졌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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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갇힌 소년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로이스 로리 지음, 최지현 옮김 / F(에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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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outsider 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아웃사이더란 말은 너무 흔하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아웃사이더 outsider 라는 말은 평론가 콜린 윌슨이 1956년 같은 이름의 책을 쓴 이래로 널리 쓰이게 됨. 어떤 그룹에 끼지 못하는 사람. 원래는 局外者를 말함. 혹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나 동화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이 말하고 싶어하는 침묵하는 소년은 진정한 아웃사이더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외계층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답답했다. 이야기의 흐름도 너무 더디고 이렇다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한 소녀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 소녀가 바라보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신지체아에 대한 소녀의 특별한 마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럼에도 이 책속의 話者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그 소년에 대한 이야기! 라고. 그 소년의 존재감을 그렇게나 작게 그려놓고는.

 

호기심 많은 여덟 살 소녀 캐티는 다정한 부모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느날 우연히 알게 된 제이콥에게 관심을 갖게 되지만 정신지체아인 제이콥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그저 아버지의 농장일을 도우며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구도 제이콥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제이콥은 동물과 특별한 교감을 나눈다. 할머니가 된 캐티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속에서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침묵에 갇힌 소년'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앞뒤없이 그저 캐티의 기억에 잠깐 등장한다고나 할까? 이 책의 제목이 '침묵에 갇힌 소년'이 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장애우들에 대한 나의 관심도는 얼마나 될까?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얼만큼이나 가지고 있을까? 어쩌면 아무런 편견없이 제이콥을 바라보았던 캐티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하고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던 캐티의 그 열린 마음이.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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