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잘먹고 잘사는 법 97
김국 지음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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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의 품질이 오크통 속에서의 숙성 연한에 결정된다면 와인의 가치는 포도를 수확했던 해의 포도에 의해 결정된다. 와인이 오로지 포도만으로 만들어지는 자연의 선물인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와인을 만든 포도를 수확한 해의 날씨가 어떠했는지, 비는 어느 정도 내렸는지, 수확할 때 비를 맞지는 않았는지, 햇빛은 맑고 깨끗했는지 등 포도를 재배했던 해의 자연환경이 바로 와인의 성적표다.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밀레짐(millesime)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빈티지(vintage years)라고 한다. (《와인》,p.61)

그래서 위스키 병의 라벨에는 오크통 속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12년산' '17년산'이라고 표시하는 것처럼 와인병에도 와인의 밀레짐, 빈티지가 적혀 있습니다. 만일 2003년이라고 적혀 있다면 2003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생산해 내는 지역별, 포도 품종별로 각 해의 빈티지를 점수표로 매겨 놓은 빈티지 차트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깊숙히 들어가면 포도주 마시기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제입에 맞으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라고 자연스레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같이 와인을 마신다는 유럽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와인은 4~5유로 내외, 우리 돈으로 채 오천 원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로 치면 소주나 맥주와 다를 바 없습니다. 와인 중에는 정말 값비싼 것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주전자를 들고가 큰 통에서 덜어 사오는 와인도 있습니다. 옛날 찌그러진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오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와인이 매우 대중화되었습니다. 술이라면 맥주밖에 먹지 않던 저도 근래에 와인을 마실 기회가 많았습니다. 어제도 와인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와인은 부담스러운 술입니다. 술 자체가 부담스럽기보다는 그 술에 얽힌 문화가 그러합니다. 술을 따르고, 흔들고, 향을 맡고, 마시는 일련의 행위 중 내가 무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없나 하는 두려움,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감, 대충 주위에서 주워 들은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정말인지 의심스러워 곁눈질해야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개의치않고 소주, 맥주 마시듯 벌컥 벌컥 마시는 분도 계십니다.

성격 털털한 분이라면 대충 드시고, 혹시라도 와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잘~먹고 잘 사는 법> 시리즈 제97권 《와인》편이 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고판에 140쪽 분량이니 출근길에 단숨에 읽고 퇴근길 와인 한 잔 하면서 아는 체 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와인의 역사에서 종류,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마시는 방법, 와인에 대한 잘못된 상식 등 우리가 알아야 할 대부분의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과 별 관계는 없습니다만, 어젯밤에 참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집안(?)에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을 갖춘 오디오 마니아 김갑수님의 음악 감상 공간에 갔었습니다.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는 책을 냈던 시인이자 오디오 마니아인 김갑수님의 지하 음악 감상실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별세상에 들어왔구나하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벽면을 가득 메운 2만여 장의 LP판이 우선 시선을 압도하고, 하츠필드, 알텍A5, AR3, 던텍 소버린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오디오 기기들로 인해 시대를 거꾸로 돌려 놓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이 기기들을 빈티지라 불렀습니다.

빈티지는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원래 포도주의 재배환경을 표시한 것으로, 양질의 포도주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마실 수 있는 포도주이지만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의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고급 음료였습니다. 그러한 '빈티지'라는 말이 오디오 기기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오래된', '오리지널', '명품'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비록 지금이 과거에 비해 훨씬 기술력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빈티지는 제 나름의 경지에 다다른 기기라고 합니다. 50~60년대 오디오 메이커를 창립한 사람들 대부분이 돈을 벌어보자는 장삿속보다는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음을 제대로 내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드는 데 큰 가치를 두었다고 합니다. 소울 마란츠, 알텍의 랜싱, 일렉트로 보이스의 알버트 칸은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 였으며, AR사의 에드가 빌처는 음악애호가요 미술학도요, BOSE사를 창설한 보스 박사는 MIT 공대 음향학과 교수였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제품이니 얼마나 많은 노력과 기술이 들어갔겠습니까. 그러나 70년대 들어와 그런 식으로는 더 이상 제품을 생산할 수 없게 되어, 리어카에서 붕어빵 찍어내듯 싼 제품을 찍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붕어빵 찍어내듯 만들기 전의 최고의 기기들을 빈티지라 합니다.

희귀하니 가격도 상상 외로 비쌉니다. 그러니 이런 기기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고 별 호사스런 취미를 가졌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기에 그가 돈 많은 부잣집 자식이 아닌가 생각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떠돌이 자취생이었고 지금도 아주 넉넉하진 않다고 합니다. 보증금 300만원짜리 월세 집에 살면서 2,000만원짜리 스피커를 머리맡에 두고 살았다는 그에게서 마니아 또는 오다쿠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천착이요 집착이요 허망일 수도 있지만, 2만여 장의 LP판을 매일같이 들으면서도 아직 음악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그의 말이 저에게는 깨침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문을 닫고 볼륨을 높이면 언제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 같은 공간을 나오니 벌써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정지된 듯했지만 바깥 세상의 시간은 여전히 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러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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