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생활사
차윤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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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두 주만에 독서노트를 씁니다. 심신이 피로하여 잠깐 쉰다고는 했는데, 독서노트 쓰는 일만 쉬었을 뿐 오히려 더 고단한 날들이었습니다.
일이 고단하다고 하여 마음이 괴로웠던 건 아닙니다. 몸은 피로했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고, 일은 고단했지만 전진하는 조직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 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어 보입니다. 짬짬이 책을 읽고 정리하는 일만 쉴 뿐입니다. 쉬다 보니 또 그것에 익숙해집니다. 하루 한 두 시간 더 자봐야 뭘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만 허전해질 뿐입니다. 숨어있는 1인치를 찾듯이 비어있는 1분의 시간이라도 더 찾아봐야겠습니다.

쉬면서 좋은 책 하나 읽었습니다. 산림환경학 박사인 차윤정의 <숲의 생활사>라는 책입니다. 분류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언뜻 보면 자연과학 서적인 듯한데, 읽어보니 문학보다 더 감동적입니다. 훌륭한 작가가 쓴 노년의 수필처럼 인생의 지혜가 녹아있는가 하면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고, 잘 쓰여진 산문처럼 꽉 차있습니다.

한 마디로 저자는 글을 참 잘씁니다. 문체는 김훈을 닮은 듯합니다. 문장은 짧고 여운은 강합니다. 인터넷 서평을 보니, 어떤 이는 지나친 수사라고 말합니다. 기교라면 기교이고 수사라면 수사지만, 제가 보기에는 숲의 생활사를 통해 본 삶의 철학입니다. 딱딱하지만,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책 내용을 표현하자면 <숲의 생활사에 대한 철학적 이해>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인간도 자연입니다. 숲의 생활사를 통해 인간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억지 수사인지  비약인지 아닌지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께서 판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을 직접 옮깁니다. (책 순서와는 상관 없이, 지금이 가을이니 가을 얘기부터 옮깁니다.)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라는 자연의 관용이다.
    숲에서 여름이 사라지는 것은 썰물을 빠져나가는 듯 휑하고 빠르다. 삶의 치열함이 물러간 숲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가을은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조정기간이다. 나무는 잎을 정리하고 짐승들은 먹이를 준비해야 한다. 헐거워진 숲을 통과한 빛은 짧은 가을 동안 새로운 희망이 되기도 한다. 여름 끝에 가을이 없었다면 자연은 훨씬 혹독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가을 바람은 나뭇잎의 아쉬움을 존중하며 당분간 얌전하게 군다.(p.140)

    낙엽은 나무의 살아가는 전략의 하나이다. 나뭇잎은 봄부터 여름까지 부지런히 생산 활동을 하지만 가을을 지나 겨울을 나는 동안은 주로 소비활동만 하게 된다. 나무로서는 나뭇잎을 그대로 두는 것은 하릴없이 재산을 축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들은 유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뭇잎을 털어낸다. 하지만 그대로 버릴 수는 없다. 나무들은 낙엽을 떨구기에 앞서 투자한 양분들을 회수한다. (p.171)

    한 그루의 나무에 달리는 숱한 열매들이 모두 다음 나무로 자랄 수는 없다. 나무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열에 아홉은 산짐승에게 먹힐 것이고 그동안 하나는 싹으로 자랄 시간을 갖는다. 싹으로 자라난 것 중 열에 아홈은 벌레에게 먹힐 것이고 그동안 하나는 나무로 자랄 것이다. 나무 열에 아홉은 다시 나머지 하나의 자리를 만들어주면서 희생할 것이다. (...)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이 여분의 희생이 어쨌거나 숲을 부양하는 근원이다. (p.179)

    생명은 제 몸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몸체를 줄이지 못한 생물들은 멸종했다. 식물은 몸체가 줄어들었으나 몸을 줄일 수 없었던 공룡은 멸종했다. 고사리가 걸어온 길을 생각해보라. 나무보다 무성하고 영화로웠던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고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습하고 어두운 환경에 적응해왔다. 고사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인간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공룡처럼 거대해지고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p.129~130)

    복잡한 숲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빛의 부족이다. 깊은 숲에서 하늘은 나무숲이다. 숲의 층이 겹겹으로 포개지면 숲은 점점 어두워진다. 가장 무성해진 숲의 덮개는 하늘과 땅을 무겁게 가로질러 빛을 차단한다. 가장 빛이 풍부한 계절이라고 하지만 그 빛은 몇몇 나무들이 독점하고 있다. (...) 그래서 여름은 빛에 대한 불평등이 가장 심화되는 계절이다. (p.90)

    꽃의 발달은 이 지구 생물계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화려한 꽃은 처음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화려한 꽃을 피움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씨앗을 잉태할 수 있게 되었지만 꽃을 피우는 데 드는 비용 때문에 나무는 소비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꽃잎이 없는 꽃을 피우는 나무들에 비해 대부분 수명이 짧다. 꽃을 피우기 위한 대가는 씨앗을 만들고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대신 숲의 지배자 자리를 영원히 넘보지 말 것이며 긴 수명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p.45)

    나비는 그야말로 화려한 외형적 변신으로 인해 과거를 용서받는다. 꽃들에게 나비는 거부할 수 없는 방문자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 나비 애벌레는 무서운 속도로 식물의 잎을 해치우는 존재들이었다. (p.60)

    숲의 생명들은 철저하게 자연의 지배를 받고 있다. 빛이 없는 밤은 철저한 휴식의 시간이다. 밤의 휴식이 없이는 한낮의 치열함을 견딜 수 없다. 생명들은 잠들고 시야도 꺼져버린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는 올빼미는 자연의 여백이다. 밤을 어슬렁거리는 자들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밤은 극단적인 반자연이다. (p.131)

    나무의 눈부신 성장은 뿌리의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한다. 포플러나무의 이런 습성은 불량한 토양을 개선하는 데 이용된다. 쓰레기가 매립되어 있는 난지도에서, 붉은 물이 흐르는 폐탄광에서, 듣기에도 마음이 무거운 중금속 오염지에서 포플러나무는 씩씩하게 자란다. (...) 가지를 잘라도 뿌리를 잘라도 잎을 잘라도 본래의 나무로 자라는 기적 같은 능력은 포플러나무의 또 다른 서글서글함이다. (p.138)
읽기 쉬운 글이라고해서 쉽게 쓰여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글쓴이에게는 매우 혹독한 작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혹독할수록 읽는 이는 즐겁습니다. 게다가 저자가 정성껏 찍은 사진들이 눈과 마음을 상쾌하게 만듭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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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평전
조성기 지음 / 작은씨앗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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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으며 내일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오늘은 어제를 행복의 꿈으로 만들며 모든 내일을 희망의 비전으로 바꾸어놓는다.'

유일한(柳一韓)이 늘 품고 있었던 메모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다간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4월 4일, 유한양행 사장실에서 유일한의 유언장이 개봉되었습니다. 그 유언장이 4월 8일에 공개되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1.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시까지 학자금 1만불을 준다.

  2.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평을 물려준다. 대신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만들 것이며, 그 동산에는 결코 울타리를 치지 않고 유한중학생, 유한공고학생들이 마듬껏 드나들게 하라.

  3. 유일한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유일한은 그 전에도 이미 9만 6천 282주를 기증한 바 있다.)

  4. 아내 호미리는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재산을 물려준다는 말은 없다.)

  5.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

  6. 그 외에 세세한 금전 거래, 예를 들어 유한양행 사장인 조권순이 처음 집을 지을 때 돈이 모자라 4백만원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이 가운데 290만원은 갚고 110만원은 갚지 않았으니, 모두 받아 꼭 재단에 넣도록하라는 등.
달리 부언할 말이 없습니다. 당시 언론이 그렇게 강조했듯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한 일한의 결단과 정신은 두고두고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유일한 평전을 읽었습니다. 지난 주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새벽에야 겨우 다 읽었습니다. '겨우'라고 한 것은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지, 읽기에 지겨웠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말 내내 일이 있어 돌아다니다가 딸이 잠든 다음부터 집어들었는데, 오히려 생생한 마음으로 출발해야할 월요일 아침을 담보로 잡으면서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그것도 충분히 본받을만 사람의 전기를 읽는다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세계1,2차 대전과 일제, 해방, 6.25, 4.19, 5.16을 관통하는 격동기를 살았던 유일한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습니다.
돌아가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초간단 버전으로 한 사람의 생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은 서구문물을 배워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 때 일한의 나이 10살.
여러 사람을 도움과 땔감 만드는 일을 하면서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변전소에 취직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미시간 대학에 입학합니다.
당시 국제 정세와 조국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대학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에서 '한국 국민이 독립운동을 일으킨 목적과 바람을 알리는 글'을 발표합니다. 한편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한국 담당 고문을 맡게 되는데, 이 때의 정보력을 바탕을 1942년에는 항일무장독립군격인 '한인 국방경위대' 창설에 주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아가 OSS의 비밀 침투작적인 냅코(Napko) 작전에도 참여합니다. 이 작전은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실현되지 못합니다.

이 당시 OSS 비밀문서를 보면 A라고 표기한 인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A는 50세, 155파운드, 5피트 7인치이며 처와 두 자녀는 콜로라도주에 거주하고 있다. 부친은 돌아가시고 저명한 친척들이 한국에 많이 살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에 미국에 와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네브라스카주에서 마치고 1924년 미시건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부터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사업을 위하여 전쟁 발발 전까지 수차 한국과 미국을 왕래하였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그의 회사 지사들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세워나갔다. 이들 사업체의 지배인, 부지배인, 직공장, 감독 등 감독들은 보다 투철한 애국자들인 그의 친천과 친구들로 메꿨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사업조직망을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얼굴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원들고 같이 들어가지 않고 그 조의 고문으로 남을 것이지만 필요한 경우 한국에 직접 침투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물론 위에서 말한 A가 바로 유일한입니다.

유일한은 사업가로도 역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제너럴 일렉트릭(GE)를 경험한 다음 "힘없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사업밖에 없다"는 생각에 '라초이 주식회사'라는 식품 회사를 설립합니다. 동양 음식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꽤 번창하게 만든 다음, 1926년 한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설립합니다.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꾸고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사원 지주제'를 도입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이승만과 매우 껄그러운 관계였습니다. 비밀 정보요원이었던 유일한을 경계한 이승만은, 그래도 그를 가까이 두고자 초대 상공장관으로 권유했으나 일한은 끝내 뿌리칩니다. 그 후 그는 한국에 쉽게 돌아오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런 다음에도 이승만과 악연은 계속됩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자유당은 유한양행에 3억환의 정치자금을 은밀하게 요구해왔지만, 유일한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문을 닫는 일이 있어도 불법을 자행하는 무리와 공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유한양행에 탈세혐의를 씌워 검찰에 고소하고, 철저한 세무조사를 했지만 아무런 혐의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박정희 정권 때 한 번 더 일어납니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조차도 계속 거부하자 역시 세무사찰이 들이닥쳤고, 그러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자 심지어 과학기술처에서 유한양행 제품에 대한 성분조사까지 실시합니다. 한 푼의 탈세도 없고, 약품의 성분을 조사하면 할수록 그 제품의 우수성이 더욱 입증되자, 이에 감동한 청와대는 오히려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게 됩니다.

이 평전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오로지 하나 뿐이었습니다. - '正道'
올곧게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올곧게 경영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한 주를 시작하는 아침에 귀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올곧게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번 주의 제 화두는 '올곧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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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강의 - 역사와 문학을 넘나들며 삼국지의 진실을 만난다!
이중텐 지음, 양휘웅 외 옮김 / 김영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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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독서노트가 과거에 비해 참 뜸해졌습니다. 주 3회를 원칙으로 부지런히 보낸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월 3회나 될까싶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 작년 말 동양고전을 주제로 한 연재가 끝난 후부터인 것 같습니다. 독서의 양(量)보다는 스스로 내실을 기하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새벽에 쫓기듯 급하게 글을 쓰지 말고, 여유있게 읽고 쓰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행태를 반성해보건데 주3회라는 나름의 양적 원칙을 가졌을 때에 비해 질적으로 더 나아진 게 없어보입니다. 약간의 여유, 그 사이로 게으름이 싹을 틔운 것 같습니다. 내 평생을 스스로 싸워야할 게으름은 아주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몸을 씻고 구두를 닦는 데는 시간을 아끼지 않으면서 지식을 쌓고 마음을 닦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습니까. 독서노트는 지식을 쌓고 마음을 닦는 수단입니다.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새벽이 즐거워 하루가 즐거워지고, 내가 즐거워 나를 둘러싼 많은 이들이 함께 즐거워지는 묘약입니다. 게으름의 틈을 메우는 보수공사를 서둘러 마치겠습니다.

요즘 몇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KBS의 《유교, 아시아의 힘》, 데론 Q.듀몬의 《집중의 법칙》, 정승우의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등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입니다.

저자인 이중톈(易中天)은 인세 수입만으로도 중국 갑부 순위 안에 드는 스타 학자입니다. 이 책은 이중톈이 중국 국영방송인 CCTV에서 강의한 《삼국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지난 달(2007년 5월)에 출간된 것인데, 이달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저자의 《초한지 강의》도 나왔습니다.

중국에서의 폭발적인 반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잠잠한 듯합니다. 중국에서는 스타 학자라도 아직 우리에게는 아주 낯선 저자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타 저자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이 책이 시금석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본국에서 누렸던 명성을 이곳에서도 누릴 가능성은 좀 적어 보입니다. 책 내용 때문입니다.

이 책은 문학 《삼국지》, 즉 《삼국연의》를 몇 번 읽어본 사람들이나 좀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입니다. 《삼국지》를 읽고 싶어하는 광범위한 독자들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오로지 전에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들로 독자를 국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이 소설 《삼국지》 속의 여러 이야기의 진위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문학 속의 제갈량, 조조, 유비, 손권의 모습과 역사적 모습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사 《삼국지三國志》보다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삼국지》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아니고서는 진수의 《삼국지》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책에는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감동'과 '교훈'을 주는 소설 《삼국지》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보다는 김훈의 《칼의 노래》가 더 감동적이듯 말입니다. 《난중일기》는 필독서 목록에 올라도 건성으로 읽겠지만 《칼의 노래》는 필독서 목록에 없어도 소리 소문도 없이 퍼져나가 여러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난중일기》와 《칼의 노래》를 비교하여 그 진위를 밝힌 책이 과연 어느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책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물론 국영 TV의 삼국지 강의 후광 효과이겠지만, 반드시 그 이유만은 아닐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삼국지》 위상이 《난중일기》와 비할 바 못되고, 저자 이중톈의 문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인문 전 분야를 넘나드는 지식에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은 역사와 문학 사이를 넘나들며 《삼국지》의 진실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인생의 교훈을 끄집어 냅니다. 역사적 사실이 명확치 않을 때에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구성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면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킬지 모르겠으나, 매력적인 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독서유감讀書有感]

이 책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는데, 이중톈과 같이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지식의 소유자를 '유목적 지식인'이라고 부른다면, 이와 반대되는 말이 '선무당'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무당은 서툰 무당이라는 뜻인데, 서투르고 미숙한 것에 그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다가 큰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일컬을 때 씁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인은 혜안과 감동을 주지만 선무당은 사람을 죽입니다. 경험적으로 보니, 선무당에게 결정적으로 모자라는 것은 지식의 한계가 아니라 그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자기 성찰의 부족과 그에 따른 겸양의 부족입니다. 《선무당이 사람잡네》라는 책을 보면 선무당의 여러 악폐가 보입니다. 선무당의 최대 악폐는 사람을 죽이는 데 있습니다. 책임지지 못하는 서툰 굿과 부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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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7-10-02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필독서에 올려놓아야겠군요. ^^
 
펀을 잡아라 Catch the F.U.N.
진수 테리 지음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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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직장에서 처음으로 팀장을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은 컴퓨터 교육용 교재를 내는 출판사였고 저는 기획 편집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기획이지 실은 집필까지 도맡아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일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실제 집필력까지 갖춘 이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성실해야 하고 밤을 낮삼아 일하는 약간의 워커홀릭의 기질을 갖춘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업무의 성격을 그리 규정하고 사람들을 충원하고 일을 추진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하나가 마음에 들면 또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좀 좋다 싶으면 성실하지 않고, 성실하다 싶으면 또 일 처리 능력이 좀 문제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획하고 집필하고, 밤을 낮삼아, 휴일을 평일 삼아, 월화수목금금금, 일을 했습니다.

몇 개월 견디는 사람들이 잘 없었습니다. 팀원은 수시로 교체되고 저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젊은 패기가 있어 그렇게 만 2년을 보냈습니다. 참 많은 것을 배웠고, 참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저는 모든 기력을 소진했고, 결국에는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왔습니다. 오로지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속된 말로 참 '무식하게' 일했던 때였습니다. 일에 집중하고 몰두하여 단시간에 성과를 거두고 스스로에 대한 능력을 확인했던 자랑스런 시기였습니다. 반면 남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목줄 묶은 강아지를 끌고 가듯이 팀원들을 질질 끌고 다녔던 어설픈 리더의 시기였습니다.

리더십은 결코 강제와 권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비록 리더 스스로 앞장서 솔선수범하더라도 그것이 압박과 강제로 비쳐질 때, 그것은 또 하나의 강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강압은 결코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살인적인 솔선수범은 무언의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려'가 없는 본보기는 독단일 뿐이었습니다. 작은 일을 이룰 수는 있을지언정 큰 일을 도모하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리더의 최상의 덕은, 능력의 탁월함과 솔선수범의 정신이 아니라 이해와 배려가 있는 커뮤니케이터로서의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진수 테리는 탁월한 커뮤니케이터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 배려와 이해에 있음을 알고 있는 프로페셔널 커뮤니케이터입니다.

나이 서른에 미국으로 넘어가 음식점 종업원과 최저임금을 받는 의료부품 조립공을 거쳐 한 중소기업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했습니다. 그곳은 이민자가 대부분이었으며 그는 노동자들을 숙련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주말도 없이 7년을, 그야말로 미친듯이 일했지만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습니다. 다시 의류회사의 생산담당 매니저로 취직하여 회사 매출이 크게 뛰어오르도록 노력했지만 승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전 직장의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이클, 대체 내가 왜 해고당한 거죠?"
    "이런!"
    "이유가 뭐예요?"
    "그걸 몰랐단 말이에요?"
    그의 되물음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세상이 다아는 걸 나만 모르고 있다는 투였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나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인즉슨, 내가 재미없어서 해고되었다는 것이었다.
    "재미가 없다고요?"
    "그래요, 당신이 너무 무섭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직원들이 많아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지금 그는 웃음의 전도사가 되어 '웃다가 성공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닙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시는 2001년 7월 10일을 '진수 테리'의 날로 선포했고, 2003년 미국 연방정부는 소수민족 비즈니스 리더에게 주는 'Minority Business Advocate'상을 수여했습니다. 2004년에는 연방정부로부터 수출공로상을 받았고, 200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전미연설가협회(NSA)의 정회원이 되었습니다. ABC-TV에서 '아시아 지도자 11'인 중 하나로 선정했고, 올해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가 미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중소기업 6인' 중의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이자 실전 경영서입니다. 개인에게는 감동과 열정을, 기업에게는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어 생산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진수 테리 10년의 깨달음과 노하우를 F.U.N이라는 세 글자에 담고 있습니다.

진수 테리가 말하는 F.U.N.은 Fun, Unique, Nurturing을 뜻합니다. 책은 전반적으로 Fun, 웃음을 이야기하지만, 핵심은 N에 있습니다. '보살핌'이 곧 배려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입니다.

진수 테리는 말합니다.
'펀은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데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고.

리더와 리더를 꿈꾸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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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이화 지음 / 열림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TV는 지금 가히 사극 열풍입니다. <주몽>과 <연개소문>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고, 지금도 <대조영>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얼마 전 <왕과 나>(세조)가 시작됐고, 곧이어 <이산>(정조), <태왕사신기>(광개토대왕), <홍길동>도 방영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참 첫 북한 합작 드라마라는 <사육신>도 방송중입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 사극은 비록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긴 하지만 역사 대중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단 몇 줄의 역사적 기록에서 수십회 분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비록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부터의 지나친 이탈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을지라도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진부하지만,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 질문일 것입니다.
평생을 역사의 대중화에 몸바쳐 온, 전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소장의 최근작 『역사』의 머리말 첫마디도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이 질문은 간단하지만 그 답은 단순명쾌할 수 없습니다. 이이화 선생도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하는 저의와 일본이 우리의 근대사를 부정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보면 알 것이다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왜 알아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라는 구태의연한 대답이 결코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500쪽이 조금 넘습니다. 단숨에 읽기에는 다소 부담이 되긴 하지만, 인류의 기원에서 1980년대 6월민주항쟁까지의 기나긴 역사를 단 한 권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이화 선생 특유의 읽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큰 흐름, 즉 '맥'을 짚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히 최적의 역사서라 할 만합니다.

비교적 사실의 전달에 충실하고자하여 그 표현이 밋밋한 일반 역사서에 익숙해진 독자라면 선생의 서술 방식이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정부에서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892년 보은에서 집회를 가졌다. 남루한 옷차림의 교도들 수만 명이 보은 장내리에 모여들었다. 비록 행색은 다들 초라했으나 눈에는 형형한 빛을 띠고 걸음걸이는 힘찼다. 괴나리봇짐에는 며칠 먹을 양식이 들어 있었고 허리에는 짚신이 몇 결레 매달려 있었다. 장내리의 산과 들에는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세력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다)'가 씌어진 오색 깃발이 나부끼고 외국 상품을 거부하자는 외침도 들렸다. 좁은 골짜기에 깔려 있는 흰옷은 마치 함박눈이 내린 듯하였다. 그리고 떡·엿·국수장수들이 북적댔다. (p.348)

마치 소설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 구절은 동학농민전쟁 발발 직전의 보은 집회를 묘사한 장면입니다. 역사적 사실의 나열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심지어는 역사서에서 쓰면 안 될 것 같은 표현도 종종 보입니다. 개화기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갈등을 설명하는 대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1899년 1월, 줏대라고는 한푼어치도 없는 고종 황제가 또다시 수구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게 했다. (p.372)

때로는 늘 쓰던 역사적 용어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올바른 용어의 사용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따위입니다. 엄연히 국가 간의 전쟁이니 '조일전쟁', '조청전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듣고 보니 그러합니다. 무신의 난, 홍경래의 난과 같은 나라 안의 소요 사태와 국가 간의 전쟁을 똑같이 '난'이라 표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역사적 존속 기간의 길고 짧음과는 무관하게 선생이 생각하는 역사적 중요성에 따라 분량이 들쭉날쭉한 것도 특징입니다. 흔히 통일신라라 부르는 '후기신라'의 문화 이야기는 고작 7쪽 분량인데 반해, 잊혀진 과거 '발해'의 사상과 문화에 대해서는 장장 39쪽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이화 선생의 『역사』는 신선하고, 쉽고, 재미있습니다. 너무 짧은 역사서에서 빈곤함을 느꼈거나, 너무 방대한 역사서의 분량에 질려 감히 읽지 못했던 분들에게 최적입니다(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는 22권입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우리 역사의 큰 흐름을 잡길 원하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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