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한 사람을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월의 더께에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은 퇴색하여 기억은 왜곡되어 갔다. 나이가 들면서 젊었던 날의 흑백사진보다 더 퇴색해버린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저 상상속에서나 만들어져야 할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내 오랜 추억 속에 있던 주인공의 얼굴조차도 희미해져 갈 만큼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와의 갑작스런 조우에 이미 그 주인공은 나의 추억과는 너무나 많은 세월의 거리를 두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때 나의 기억이라는 것은, 또 나의 아름답기까지 했던 추억들이란 얼마나 많이 왜곡되어 있는지를 쉬이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이 책은 1인칭시점으로 전개되는 주인공 토니의 이야기이다. 예순이 넘어서야 알게 된 진실, 그것을 추적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많이 왜곡 되어 있는지를 깨닫기까지 주인공이 읊조리는 이야기들은 삶의 진실과 거짓의 잣대에 던지는 날카롭고 에누리 없는 시선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누구나 한번쯤 지나온 시기- 어른들보다 더 삶을 확실하게 포착한 착각속에서 진실과 도덕과 예술에 탐닉하며 적어도 어른보다는 낫다는 '허세'를 부리는 그런 시기-에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 친구들 중에 가장 똑똑하고 지성인인 장래가 촉망되는 에이드리언과는 달리 토니와 그 친구들은 문학과 섹스에 심취한다.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여자친구, 순결한 처녀일 것 같고 아름다운 베로니카를 향한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과 싸워야 했던 젊은 날은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에게 호의를 보이자 토니는 이후의 모든 기억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토니의 삶은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결혼하였고 아이도 낳았고 이혼하였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여사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토니는 자신의 왜곡된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한다. 자살하기 전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가 지워진 기억을 되살려 놓고 그제야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지우고 살았는지를 깨닫는다. 이렇게 자신 앞에 정체를 드러낸 삶의 명징성은 예순이 지난 토니를 자신의 기억에 기만당하고 농락당하고 살았다는 진실 앞에서 망연자실 할 뿐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2011년 영연방 최고 문학상인 맨부커상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줄리언 반스의 최신작이다. 나이듦에 대해서, 삶의 진실에 대한 통찰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이 소설은 올해 읽은 문학 작품 중에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나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육십 오세에 기억이란 주제로 책을 쓴 줄리언 반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삶의 명징성이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은 불확실해지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함으로써 왜곡이 심해져간다. 기억은 스스로 지워지기도 하고, 다시 덧칠도 되었다가 점점 불투명하게 자리 잡아 간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마냥 좋을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해감에 따라 , 최후의 상실까지 겪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법을 배우는 삶의 과정을 줄리언 반스는 날카롭고 에누리 없는 시선으로 명징하게 보여준다. 책을 다 덮고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는 과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파편들이 진실인지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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