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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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鼠類) 연합, 즉 알카포네와 티무르들의 작전을 알게 된 프리덤 타워의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여러 작전을 세워보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다양한 불화가 표출된다. 바스테트는 자신이 티무르와 협상을 해보겠다고 나선다. 티무르는 바스테드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 


- 세상의 모든 책과 음악과 사진과 영화가 들어있는 ESRAE(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확장판) USB를 나한테 줄 것

- 제3의 눈을 무선으로 쓸 수 있는 조그만 동글을 나한테 줄 것

- 인간들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나를 비롯한 쥐들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 p108



서로 속고 속이는 협상의 과정은 치열하며,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바스테드의 활약은 눈부시다. 결국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되고, 고양이-인간 공동체는 보스턴 다이내믹스 공장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행성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열린책들




『행성』 의 주인공 고양이 바스테트도 매력적이지만, 중간 중간 언급되는 바스테트의 어미 고양이도 매우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스테트는 종종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라고 언급하며 엄마의 말들을 들려주는데 그 말들이 상황마다 어울리는 말들이다. 바스테트 또한 '돌이켜 보니 엄마는 정말 대단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실천력까지 뛰어났지.'(p29) 라면서 '엄마가 남긴 말들은 내 삶의 좌표가 된다'(p102) 라고 생각한다. 


남을 도와주는 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야. 상대가 입으로는 도와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도움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 왜 그런지 알아?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일체화했기 때문이야. 자신이 역경과 맞닥뜨린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그 역경을 없애 주겠다고 나서 봐. 그러면 더 이상 자신이 만들어 낸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잖아. 남을 돕기 전에 먼저 잘 생각해 보렴. 상대가 자기를 도와주는 너를 용서해 줄지.


- p29




티무르와의 협상의 과정에서는 고양이 피타고라스의 말을 떠올리며 한 걸음 성장하기도 한다. 초반의 고집불통이고 자신만 생각했던 바스테트가 함께 하는 이들을 통해 점점 변해가는 모습이 이 소설의 한 축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네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다 너를 위한 것이야. 이 시간과 공간을 네 영혼이 현신을 위해 선택한 차원이야. 네가 사랑하는 이들과 친구들은 네가 가진 사랑의 힘을 깨닫게 해주지. 네 적들과 네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의 저항력과 투쟁력을 확인하게 해주지. 네가 부닥치는 문제들은 네가 누구인지 깨닫게 해주고. 


- p101, 고양이 피타고라스의 말 중에서




로봇 고양이들이 지키고 있는 보스턴 다이내믹스 공장에 도착한 바스테드와 인류연합. 이곳에서도 인류는 여러 집단간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결국 그랜트 장군으로 대변되는 무력 집단의 주장에 따라 뉴욕의 쥐들에게 핵폭탄 투여할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핵폭탄을 터뜨린다는 뜻은 그 장소 또한 포기하는 것임에도 먈이다. 바스테트는 인류를 돕게 되지만 핵폭탄이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1권에 비해 2권의 서사 진행속도는 빠르다. 여러 갈등 요소들을 초반에 대부분 서술한 터라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는 모습들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만 카타르시스적 결말이 아닌 씁쓸함을 남기는 현실적 결말에 가깝다. 


인간과의 '말'로 하는 소통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바스테트는 '글'로 소통을 시도한다. 미래세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집사인 나탈리에게 필경사를 해달라고 부탁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렇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마침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 바스테트의 '글'은 『행성』 을 포함한 고양이 삼부작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거슬러 와서 조금 일찍. 그동안 바스테트와 여정을 함께 한 독자들은 지구란 행성의 지속 가능한 행복을 고민해보게 되지 않았을까. 나 또한 그랬듯이.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제공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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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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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을 읽고 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해 안쓰러움을 동반한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인가 작가의 비밀을 공유받고 있다는 느낌에 왠지 작가를 공감해주고 이해해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였었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은 이번에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 를 읽을 때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자기 고백적인 내용과 문체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달려라 메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단편 『도쿄 팔경』 에서 작가는 십 년간의 도쿄생활을 그때그때의 풍경에 내맡겨쓰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제법 점잔 빼는 얼굴을 한 삼실 줄 남자' 가 된 그는 '청춘에 대한 결별 인사로서, 아무한테도 알랑거리지 않고 쓰고 싶었다'(p88) 이라고 고백하고도 있다. 책 속에서 H라고 언급된 전부인 오야마 하쓰요와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처녀작인 <추억> 이라던가, 스스로 유서라고 불렀던 <만년>, H와 온천으로 죽으러 갔을 때의 경험을 담은 <우바스테> 의 작품들이 나온 배경들을 알 수 있게 된다. H와 헤어지고 다시 중매로 결혼한 후 조금이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보내던 그는 스스로를 '한 사람의 원고 생활자'(p113) 라고 표현한다. 



후대에서 '서른 살의 다자이 오사무는 결혼을 계기로 인생과 문학 모두에서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평한다. 질풍노도의 청춘을 뒤로하고 가장이자 직업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다자이의 문학 세계는 이 시기에 한층 다채로워졌다고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


결혼한 이후에도 그는 여러 내연녀들을 만났다. 덕분에 나는 자신의 치졸함을 감추지 않는 그의 자기고백들이 스스로의 방탕함에 대한 교묘한 자기합리화처럼 읽혀질 때도 있다.  「비용의 아내」 를 읽다보면 소설은 픽션이나 작가의 삶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술 때문에 엄청난 빚을 지고 늘 바람을 피우는 방탕한 소설가 오타니에게서는 작가의 모습이, 그런 못난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감싸안는 아내는 다자이 오사무의 부인 이시하라 미치코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말년의 다자이 오사무와 3명의 아이들을 보살폈건만 다른 여성과 동반 자살하는 모습을 봐야했던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비용의 아내」 는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일본 영화가 떠오른다. ( 2009년은 다자이 오사무 탄생 100주년이라 영화, 애니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작가를 기린 듯 하다. ) 원작을 읽은 후 함께 감상해도 즐거운 시간이 될 듯 하다. 



표제작인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일본의 국민소설이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을 원전으로 한다. 주인공인 메로스는 포학한 폭군 디오니스 왕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붙잡히고, 여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처형 전 사흘의 여유를 부탁하게 된다. 왕에게 자기 대신 친구 세리눈티우스를 인질로 데리고 있으라고 하고 떠났다가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돌아온다. "달리는 거야! 신뢰받고 있으니까. 달리는 거야! 제시간에 도착하는지, 못 하는지가 문제가 아냐. 사람 목숨도 문제가 아냐. 난 어쩐지 훨씬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를 위해 달리고 있어!" (p65)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이 다자이 오사무와 친구인 단 가즈오 사이에서 있었던 '아타미 사건' 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친구와 술을 마시던 다자이 오사무가 돈이 다 떨어지자 돈을 구해오겠다고 떠나놓고서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 기다리다 지친 친구가 다자이 오사무를 찾았더니 그는 돈을 빌리려던 스승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자 "기다리는 사람이 괴로울까,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괴로울까?"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문장은 2009년, 일본에서 다자이 오사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애니메이션화한 일명 <푸른문학 프로젝트> 속  「달려라 메로스」 의 프롤로그로도 등장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한 집안의 십일 남매 중 열째로 태어났다.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동안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돈 많은 지주 가문이어서 오는 죄책감, 의지박약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 부정이나 패배의식, 인간에 대한 자조와 사회에 대한 분노 등을 재료로 삼아 문학으로써 승화시켰다. 이는 패전 이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지금까지 일본의 국민 작가로 크게 인정받고 있다. ‘데카당스 문학’ 의 대표 작가로도 불린다. 위키에 따르면 데카당스(Décadence)는 단어 자체는 '퇴폐', '쇠락'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한 문예사조에서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것'을 지칭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전후 혼란해진 일본 사회를 반영하는 문학을 일컫는 말로, 전후 세대의 실존적 허무를 다룬 소설들이 포함된다. 기존의 사회 규범이나 도덕에 대항하고자 하는 경향이란 면에서 전체주의, 군국주의를 강요했던 당시 일본사회에서 개인의 실존을 이야기하는 것은 꽤 '데카당스' 적이었나보다. 


<혹부리 영감>, <우라시마 씨>, <카치카치산> 등을 포함한 「옛이야기」 편은 작가의 각색으로 더욱 재미있어진 듯 하다. 용궁에 다녀온 우라시마씨가 마치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 같은 용궁 선녀의 선물을 여는 순간 순식간에 삼백 살이 되어버리는 <우라시마 씨> 이야기 속에서 "세월은, 인간의 구원이다. 망각은, 인간의 구원이다" 라며 "일본 옛이야기는 이처럼 깊은 자비심이 있다" (P189) 라는 문장에 담긴 작가의 유머에 함께 웃었다고 할까. 


 「달려라 메로스」 에 담긴 단편들은 원작 소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른 컨텐츠들이 많아서 더욱 즐거운 독서가 된다. 단편집이기에 출퇴근 길에 짧게 한 편씩 읽기에도 좋았던 소설집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접하는 이도, 이미 다자이 오사무의 팬인 독자에게도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 더욱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이 책을 선물해준 책친구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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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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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43명의 승객(승무원을 포함하여)을 태우고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에어프랑스 006편은 예고에 없던 난기류를 만나 위기를 겪은 후 무사히 착륙한다. 그리고 세 달 뒤 6월, 동일한 여객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고 관제탑에 구조신호를 보낸다. 비행기와 기장의 이름을 확인한 관제탑은 혼란에 빠져들고, 곧 북미 방공 사령부(NORAD) 가 개입하며 국가안보의 문제를 적용하여 특수한 프로토콜 42를 실행시킨다. 프로토콜 42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아노말리

L’Anomalie

에르베 르 텔리에 장편소설

민음사



「아노말리」 는 초반부부터 여러 시간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등장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 서로 연관없어 보이는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오는지, 또 그들의 이야기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추리하듯이 읽어보게 된다. 이후 미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나서야 왜 그들이 등장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6월에 착륙한 승객들은 자신들이 6월에 착륙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3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사' 되었다. 3월에 먼저 착륙한 자신이 존재했던 것.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이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6월의 비행기를 뉴저지 공군 기지로 비상착륙 시키고, 과학자들을 소집하여 원인을 밝히려고 애쓴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인들, 철학자들도 모여 다방면으로 분석하지만 다양한 가설만 세울 수 있을 뿐 뚜렷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다. 이 과정은 SF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노말리」 는 ‘이상’ ‘변칙’이라는 의미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어? 당신이 둘이라는 걸?” 소설 속 이 대사가 작품의 주제를 보여준다. 소설은 뉴욕에서 파리로 비행기를 타고 온 인물들이 3개월 후 똑같은 여객기를 타고 온 자기의 분신과 만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SF 장르가 흔히 구사하는 사고실험이다.



조르주 페렉,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마르셀 뒤샹 등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들이 포함된 문인 집단 울리포(OuLiPo, 잠재적 문학의 작업실) 의 일원인 에르베 르 텔리에는 '제약(contraintes)을 도구로 사용하는 문학' 을 이 책 「아노말리」 에서도 구현해낸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문인과 수학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문학적 실험 집단인 울리포는 일견 창작의 자유를 방해하는 듯 보이는 제약(contraintes)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문학을 일상적 기능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새로운 잠재력을 끌어내려고 했다고 한다. 수학, 과학, 생물학, 음악 혹은 뚜렷한 규칙성을 띠는 놀이 등에서 제약을 찾아내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일정한 규칙을 세운 후 그에 따라 글의 형식과 구조를 변형하는 문학 실험이  「아노말리」 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지 궁금해하며 읽게 되기도 했다. 좀 더 검색해보니 현재까지 울리포 공식 웹 사이트(www.oulipo.net) 에 등재된 잠재문학 작가들은 서른여덟 명이라고.



물론 이런 문학적 실험을 분석하고 찾아내지 않더라고 이야기의 서사만으로도 흥미로운 소설이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3월과 6월의 인물로 나뉘어 3개월 간의 시간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이후 각자의 삶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겉으로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실제로는 청부 살인 업자인 블레이크, 시한부를 선고받은 비행기 기장 데이비드 마클,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활동하는 나이지리아 뮤지션 슬림보이, 한때 사랑했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앙드레와 뤼시, 엄마에게도 말못한 비밀을 가진 어린 소녀 소피아와 엄마인 에이프릴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각 인물들간 관계들의 양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몰입하게 한다. 작가가 각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데 서로 다른 문체를 사용하는 형식실험을 시도했기에,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이 되고,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미스터리가 되며, SF 와 철학을 넘나들기도 하는 단편들이 모인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아노말리」 는 등장인물들 중 하나인 소설가 빅토르 미젤이 쓴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장치 또한 재미있다. 



작가는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인터뷰에서 “내 자신의 분신과 대면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하면서 쓴 소설”이라며 “자신의 분신과 대면할 때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여덟 명의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라고 말하고,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각 인물들의 특징에 맞는 문체로 텍스트 구현했다”며 “살인 청부업자 이야기는 스릴러 법칙을 지켜가면서 썼고, 작가 이야기는 문학분석적 장르로 만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분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다보면 살짝 결은 다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Double)」 , 그리고 다비드 칼리 글, 클라우치아 팔마루치의 그림책 「누가 진짜 나일까(Le Double)」 도 떠오른다.  「아노말리」 에서 자신의 분신을 마주한 인물들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주인공 골드랴낀과 비슷한 과정을 겪은 인물은 누구일까 생각도 해보고( 비슷하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 실제로 내가 나의 분신을 마주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게도 된다.  「아노말리」 속에서 소설가 빅토르 미젤과 인터뷰를 진행하던 한 방송인은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일단 비현실적인 기분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 존재 여부가 의심스러우면 볼을 꼬집어 보는 걸로 충분하죠. 그리고 또 하나의 나는 내 비위를 맞춰 주지 않는 거울 같지만 내 비밀까지 다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죠. 그렇게 노출이 되면 나는 변화 혹은 도피를 결심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삶에 둘이 있으면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뜻이죠. 틀림없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아, 다 허무하구나, 아파트, 직장, 물질적인 것 전부가.... 내면의 알맹이,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것에 집중하겠지요.


- p435~436,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자신이 가상이 아닌가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부분은 영화 <매트릭스> 가 저절로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의 시간이 착각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한 세기도 거대한 컴퓨터 프로세서에게는 찰나에 불과할까요? 그러면 죽음은 뭐죠? 그냥 한 줄 코드상의 '엔드(end)'?


- p281



 「아노말리」 는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드물게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 참고적으로 지금까지 공쿠르상 수상작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이라고. ) 공쿠르상(The Goncourt Prize) 은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 상으로, 프랑스의 아카데미 공쿠르(Academie Goncourt)가 "그 해 최고의 그리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 작품" 과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노벨문학상, 맨부커상과 함께 세계 3개 문학상 중 하나로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공쿠르(Edmond de Goncourt)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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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아이, 노드 -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공모전 제11회 수상작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55
박지현 지음 / 현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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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분석학자이자 심리 상담 전문의인 클라리사 에스테스 박사의 명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Women Who Run With the Wolves / 1992년) 는 신화, 전설, 동화에 담긴 의미를 융의 원형 심리학과 여성지향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심리 치유서다. 「대지의 아이, 노드」 의 작가는 이 책에서 노드(NOD)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노드는 '육체와 심리가 한데 섞이고 서로 영향을 주는 곳’을 뜻하며, 

‘이곳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고 상상과 영감의 창고이며, 

모든 자연이 치유되는 곳’이라 설명되어 있었고, 

나는 곧 이곳이 아이들의 상상력이 피어나는 잠재의식을 뜻함을 직감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대지의 아이, 노드

박지현 글, 그림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공모전 제 11회 수상작

현북스




'대지의 아이' 라는 제목에서 얼핏 땅의 요정 같은 신비로운 생명체를 떠올렸다. 그러나 등장하는 주인공은 우리 아이들과 같은 현실 속 평범한 아이다. 다만 아이에게는 칠흙처럼 까만 머리카락 사이에 몇 가닥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있었다. 아이가 행복해 할 때마다 머리카락은 더욱 환하게 빛났다. 





남들과 다르면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노드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주인공 노드는 그런 시선들이 무섭다. 그리고 학교의 선생님은 노드의 엄마에게 학교에서 시선을 피해 홀로 있는 노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노드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미용사에게 부탁한다. 문득 아이만의 개성을 없애버리고 남들과 비슷한, 튀지 않는 아이를 길러내고자 하는 우리의 교육 현실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매우 서글프다. 





책 속 주인공 노드는 꿈 속에서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노드의 꿈속 공간들은 나무와 풀, 해초와 산호가 등장하는 환상적인 공간이다. 숲의 초록과 바다의 파랑, 현실 속 노드를 표현하는 검정과 잠재의식 속의 개성적인 노드를 표현하는 듯한 소녀의 흰색과 노랑이 보여 주는 색의 대비가 눈을 사로잡는다. 꿈 속의 소녀는 노드에게 "넌 특별해", "너 자신을 잃어버리면 안 돼" 라는 응원을 들려주면서 노드가 잃어버렸던 것을 돌려준다. 작가는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자신 안에 잠재된 무한한 대지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치유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의 중요함’ 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대지의 아이' 였던 것. 우리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대지를 품고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림책에서 전통적으로 자주 다뤄졌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노드의 특이하고 마법같은 세계는 보는 사람을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빛과 그림자를 사용한 방식, 잘 조절된 색상 팔레트,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디자인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 앤서니 브라운, 수상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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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벽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54
지혜림 지음 / 현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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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달과 구름의 모습만 보면 동양화 속의 신선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풍경인데, 마을 속 집들의 모습은 유럽의 어느 산 속 마을 풍경 같기도 하다. 몽환적인 표지다. 노란색 땅 위의 핑크색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파란 '벽' 이 보인다. '벽' 이란 단어와 일러스트가 맞물려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단절'.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공모전 제 11회 수상작인 「파란 벽」 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파란 벽

지혜림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현북스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등장한다. 산꼭대기와 바다 가까이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판화기법으로 작업한 듯한 색 톤과 일러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책 소개를 살펴보니 '에칭으로 작업한 듯한' 이란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 작업한 듯한.. 이라고 하면 실제 작업은 다른 작업이라는 뜻일까? 디지털 작업 같은? ) 펜이나 연필로 종이 위에 직접 그리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선의 효과가 특징인 에칭 기법은 금속판을 부식시켜 섬세하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금속판의 차가움과 잘 계획되고 정리된 화면의 느낌이 특징이라고 한다.




평화롭게 서로 잘 지내던 이 두 마을은 큰 파도가 아랫마을을 집어삼켜 버리면서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잃은 아랫마을 사람들이 살기 위해 윗 마을로 올라오려고 하자, 윗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눠 갖자고 할 거야', '나쁜 병균을 옮길지도 몰라' 라며 걱정한다. 결국 누구도 넘어오지 못 할 장벽을 쌓는다. 



윗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일까.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아랫 마을보다는 윗 마을의 상황에 가깝게 말이다. 최근 사례를 떠올려보면 예멘 내전을 피해 제주특별자치도로 무비자 입국한 예멘인 500여명이 난민 지위를 신청했던 제주 난민 사례도 있고, 코로나 위기로 인한 제노포비아 (낯선 것, 이방인이란 뜻의 제노(xeno)와 싫다는 의미인 포비아(phobia)를 합쳐 만든 말로, 외국인 또는 이민족 집단을 혐오, 배척하는 것 현상을 뜻한다. 악의가 없어도 자기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일단 경계부터 하는 심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 또한 떠올려보게도 된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벽을 쌓았던 도널드 트럼프 때의 상황은 책 속 모습과 매우 닮아 있기도 하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던 이곳에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파란 벽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 담고 있는 주제는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보게 하지만, 이야기의 서사는 어렵지 않고, 권선징악적인 마무리는 전래동화처럼 쉽게 다가가게 하는 느낌이다.  




다양한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고 그림 속에 담는 것을 좋아한다는 지혜림 작가는 팬데믹을 겪으며 인종, 연령, 성별 간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짓는 일들을 보았다고 하면서, '재난과 같은 상황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도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고 상대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어내지 못한 차별과 혐오의 양상을 이번 그림책에 담았다' 라고 전한다. 



문득 면지를 오래 들여보게 된다. 벽은 마을 단위가 아니라 개인들도 쌓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벽을 올렸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 벽은 스스로를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강렬한 그림들이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느낌으로 들려주네요. 길게 설명하지 않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색상과 디자인을 멋지게 사용한 독창적이면서도 굉장한 그림들입니다. 조금 큰 아이들까지도 잘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앤서니 브라운, 심사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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