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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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회(2003년 하반기) 나오키상 수상작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를 펼친다. 나오키상은 일본의 소설가 나오키 산주고(1891~1934)의 업적을 기려, 대중 문학(순수문학과 대칭되는 의미의)의 신인에게 주는 상이다. 원래는 신인상이었으나, 지금은 신인상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중견 작가의 수상이 많다. 



세련된 표현으로 주인공들의 마음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오랫만에 다시 읽어보게 되어 반갑기도 한 시간.



울 준비는 되어 있다

號泣する準備はできていた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소담출판사



작품에 대하여 ‘단편집이지만 온갖 과자를 섞어놓은 과자 상자가 아니라 사탕 한주머니’라고 전하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는 2003년 발표한 12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별이 남기는 아쉬움과 슬픔, 관계의 끝에 위태롭게 서있는 사람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그린 단편들은 사랑의 끝과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맛 사탕으로 모아져 담겨있다.



'혼자 사는 여자처럼 자유롭고, 결혼한 여자처럼 고독하다'라고 독백하는 <요이치도 왔으면 좋았을걸> 의 나츠메는 시어머니인 시츠코와 해마다 가는 온천 여행을 떠난다. 여행동안 나츠메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루이를 떠올린다. 사랑에 빠졌었고, 그 사랑에 자기를 잃어버릴 만큼 애를 태웠고,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랑이 떠났다는 것을 생각한다. 남편이 아닌 다른 이를 떠올리는 여행에서 시즈코는 자신의 아들이자, 나츠메의 남편인 '요이치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를 계속 이야기하고, 나츠메는 '가슴 속에는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데, 이렇게 시즈코와 둘이 바다를 보고 있다니 묘한 기분이었다.(p118)' 라고 생각한다. 홀로 밤바다를 바라보며 '루이를 잃었고, 그보다 오래전에 남편을 잃었다(p123)' 이라는 마지막 독백은 큰 여운을 남긴다. 현실의 본질적인 고독과 결핍,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는 사랑은 서글프다. 



우리가 읽었던 동화들은 서로 사랑했던 이들이 결혼하면서 끝이 난다. 그렇기에 어릴 적에는 사랑의 완성은 결혼인 줄 알았다. 결혼하면 다들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애틋하고 불타오르던 사랑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혼하기로 한 시호와 히로키 부부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히로키 부모의 집을 방문한다. 이혼하기로 했기에 이미 마음의 거리는 멀어졌지만 시호는 시댁 식구들과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히로키에게 그들이 지긋지긋 했다고 터놓는다. 시호가 남편에게 이어 이야기하는 말들은 결혼생활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살기는 같이 살아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 알아, 그거? (p88)


우리는 한때는 서로 사랑했는데, 참 이상하지. 이제 아무 느낌도 없어.(...) 당신, 그거 어떻게 생각해?


- 단편 <골>



어느 순간 중요한 무언가를 잃었지만 울지 않는 이들.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한 감정들을 꾹꾹 누른채 생을 지속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전 읽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들을 떠올렸는데 작가 또한 사강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소설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인간 모두가 자기 의지대로 커다란 몸짓으로, 자기 인생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또렷하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프랑수아즈 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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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바꾸는 인문학, 변명 vs 변신 - 죽음을 말하는 철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플라톤.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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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이 철학서와 소설을 함께 수록하여 '죽음' 이라는 주제로 직접 비교해 읽어보며 철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볼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을 읽어본다.  



생각을 바꾸는 인문학, 변명 VS 변신

플라톤, 프란츠카프카

스타북스



B.C.399년,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인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당했으며, 자신의 사상을 버리거나, 독약을 마시고 죽는 사형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은 당시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과 전체 아테네 인들을 향해 한 연설을 제자인 플라톤이 재구성한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선택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만일 당신이 조금이라도 사회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면, 죽느냐 사느냐의 위험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선한 사람이 할 일인가, 악한 사람이 할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p049



소크라테스는 트로이 전쟁에서의 죽은 영웅들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냐며 반론하면서, 아킬레우스의 예를 든다. 헥토르를 죽이면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살게 될까 걱정하였던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원수를 갚고 곧바로 죽임을 당해도 좋습니다. 살아남아 땅 위의 짐이 되어 뱃머리가 굽은 배에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어떤 자리에 있든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치욕 외에는 다른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정의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죽음을 두려워한 내가 신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지혜가 없는데도 지혜로운 자를 가장한다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로 마땅히 법정에서 소송을 받아야 옳은 줄 알겠습니다. 나는 신탁을 믿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지혜가 없으면서도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죽음은 최대의 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죄악 중 최대의 죄악이라 믿고 있습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며,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일반 사람들과 이 점 역시 같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롭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저 세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점일 것입니다. (...) 따라서 나는 세상에서 악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선할지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을 것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대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신념을 지키고, 시민 상호 간의 합의된 약속인 법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하는 의무도 이행한다.   


어느날 아침 눈을 뜨고 나니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한 남성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사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죽음에 관한 주제를 건져올리려면 「변신」 한 권 만으로는 어려운 감이 있다.  「변신」 에서의 죽음은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가 죽는 결말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에서는 죽음만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곤 한다. 죽음, 존재의 불안, 운명의 부조리성은 카프카의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코드들이기도 하다. 카프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죽음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적기도 했다.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 란 제목으로 더욱 알려진 카프카의 편지글 문장인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의 의미 속에 또한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했던 카프카는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생겼던 상처가 심해져서 죽는다. 그러나 타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레고르 스스로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운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가족조차 경제적 이해타산이 얽히면 그 관계가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비판을 담았다고 해석되면서  「변신」 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소설로도 읽혀지고 있다. 가족과 직장으로부터 외면당한 한 개인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벼랑에서 삶을 놓아버린 듯한 결말... 이런 그레고르의 모습은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살고 있을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속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문득 '인간이란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란 질문이 연이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 속 죽음을 분석하며 삶을 생각하게 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책을 지원받고 읽은 후 직접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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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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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장편소설

열린책들



심장병이 악화되어 죽음이 가까워지자,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록하기로 마음 먹은 한 철도 공무원이 등장한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하나씩 삶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유년기와 학창시절, 대학을 중퇴하고 철도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때와 결혼, 가정 생활이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된다. 매우 일반적이고 큰 우여곡절은 없는, 주변에서 다들 경험했음직한 인생 궤적이 펼쳐진다.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그런데 주인공의 내면에서 또 다른 자아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말 평범한 인생이냐고. 주인공은 자신이 써놓은 것들이 온전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는 독자에게도 인간의 삶이란 결코 겉으로 보이는 평범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한다.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넷, 다섯, 여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 다른 상황이 주어졌더라면 내게서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서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위했을 수도 있다.


주인공은 다시 생을 되짚어간다. 앞에서 묘사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다른 시선에서 표현된다. 그는 스스로에게 평범한 인간, 억척스러운 인간, 우울증 환자 라는 자아들이 있었음을 깨닫고, 계속해서 자신도 알지 못했던 다른 자아들을 마주한다. 때로는 낭만주이자가, 때로는 영웅적인 자아가 등장하는 식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항상 내면에 존재하며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다중인격이나 정신분열이 아닌 '평범'한 일이지 않을까. 나 또한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자아가 공존한다. 가끔 난 스스로에게 '카멜레온 같은' 이란 수식어를 붙이고는 했으니 말이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은 또한 자기 내면의 모든 자아들은 다 어떤 순간을 계기로 어떤 사람의 영향으로 생겨난 경우들이라는 것 또한 깨닫는다. 나와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되뇌이기도 하고, 그 많은 자아들을 조상들의 흔적과 연결시켜 보기도 한다. 즉 ‘나’라는 한 사람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조상들의 일부의 총합 혹은 그것들이 여러 조합으로 모인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네가 될 수 있었던 모든 걸 잘 보라.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 각각의 속에서 네 자신의 일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놀랍게도 너의 이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어쩌면 우리 각자는 세대에서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인지 모른다.



작가는 주인공의 이런 과정을 통해 다른 이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다시 타인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과정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평범해 보이는 하나의 삶에 숨겨져 있는 다양하고 섬세한 면면들이 새삼 놀랍다.


'내면의 모든 존재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은 곧 타인을 관찰하는 것이다.' 라는 것은 카렐 차페크가 다른 작품에서도 강조하는 휴머니즘이다. 「평범한 인생」 이 카렐 차페크 작품 들 중 휴머니즘의 정수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면이 아닐까. ‘나’ 혼자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가 ‘우리’ 라는 것.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무수히 많은 자아들로 이루어졌으며 그 자아들은 사람들끼리 서로 비슷한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평범하다' 는 뜻은 어떤 뜻일지 궁금해졌다. 검색해보니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예사롭다.(흔히 있을 만하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대나 문화에 따라 평범함이란 정의는 달라지지 않던가.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평범한 인생' 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다른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 또한 완성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인공의 입을 빌어 전하는 작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범한 인생이고 우리 모두의 인생이라고 외치는 듯 하다. 



「평범한 인생」 은 「호르두발」, 「별똥별」 에 이은 차페크의 ‘철학 3부작’ 소설의 마지막 작품이며, 세 소설은 각자 독립적인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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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2.봄호 - 73호
공원국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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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2 봄호, 통권 73호

나비클럽



미스터리 문학 전문 잡지 「계간 미스터리」 가 올해로 20년째를 맞이했다. 미스터리라는 단일 장르의 잡지가 단 한 번의 끊김도 없이 20년을 버텨왔다는 것은 매우 괄목할만한 성과다. 다양한 OTT 서비스 채널을 통해 여러 컨텐츠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요즘, 여러 컨텐츠의 원작이 되기도 하는 장르소설에 대한 호기심과 친숙도 또한 높아지고 있다. K-드라마, K-웹툰 뿐만 아니라 이제 K-미스터리 또한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길에는 수준 높은 한국 추리문학을 즐길 수 있는  「계간 미스터리」 가 함께 하고 있다. 



이번 봄호에서는 특집으로 <세계 속의 한국 추리 소설> 편으로 한류의 다음 물결로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있다. 해외에서 거두고 있는 성과 사례들이 제시되면서, 앞으로 한국 미스터리가 매혹시켜야 할 대상은 세계 출판시장으로 확대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두번째 특집  <황세연을 읽다> 는 '지독한'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자신의 '철두철미한' 변증법적 사고의 여과지를 통과한 단어들을 흩뿌려놓는다는 추리소설 작가 황세연에 대한 작가론이다. 또한 작가론에 나온 이야기들을 확인해볼 수 있는 특집 <내가 죽인 남자> 가 수록되어 있다. 작가론과 함께 꼼꼼히 살펴보게 되는 단편은 더욱 재미있게 다가온다. 



 「계간 미스터리」 는 매 호마다 신인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추리와 그 하위 장르의 중단편 작품이 대상이다. 이번 호의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은 최필원 작가의 <바그다드>가 수상했다. '이국적인 배경을 담고 있으며 인종차별, 군대 내 폭력이라는 주제 의식이 높은 가산점을 받았다. 물론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이 없어 미스터리한 요소가 약하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됐지만, 현실적인 주제와 디테일한 전투 장면 묘사, 안정된 문장과 범인의 심리 묘사를 활용해서 서술 트릭을 펼쳐낸 점이 높이 평가됐다' 라는 심사평 또한 이어진다. 기울어진 글씨로 진행되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두 축을 이루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지며 범인이 밝혀진다. 심사평에서 언급한 서술 트릭은 '의도적으로 편향된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고의적으로 정보를 오인하도록 만드는 수법' 인데, 나 또한 1인칭 서술의 범인이 소설의 배경인 이라크의 반군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빌어먹을 양키 놈들. 내가 오늘 다 쓸어버리겠어' 라고 나오니 그럴 수 밖에! 



기성작가의 작품으로는 홍정기 작가의 <무구한 살의>, 박상민 작가의 <무고한 표적>, 박소해 작가의 <겨울이 없는 나라>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연재되고 있는 <미스터리란 무엇인가> 가 흥미롭게 읽혔는데, 문화평론가 박인성의 〈하드보일드와 느와르, 내면의 분투 혹은 후까시로의 승화〉 에서 하드보일드라는 이 미스터리의 하위장르가 어떻게 ‘개인’과의 대결을 ‘도시’로 확장했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게 한다 


하드보일드는 이미지 중심으로 특정한 정서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집중한다. (...) 하드보일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개인 범죄자의 정체를 백주대낮에 명명백백 밝혀내는 장르가 아니라, 도시의 어둠 자체를 응시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는 더 이상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일상과 비이성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일상적인 도시의 단면이자 현대사회의 명백한 일부분이다. 범죄는 개인의 비이성과 혼란 때문에 생겨나는 거싱 아니라 전체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시대적 현상이자 사회 구조적 변화의 결과물이다. 


- p350



미스터리 신간에 대한  「계간 미스터리」 편집위원들의 한줄평도 꼼꼼히 훑어본다. 읽었던 책들에 대해서 다른 이의 시선을 느껴보며 반가워하고, 읽어보지 못한 책들에 대한 한줄평을 읽어보며 호기심이 이는 책들을 메모해보기도 한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2035 SF 미스터리」 에 대한 궁금함이 가장 크게 쌓이기도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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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파수꾼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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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파수꾼』 는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45세의 도로시 시모어와 그녀의 차에 치인 아름다운 청년 루이스의 기묘한 동거를 그린 작품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환각제(LSD), 위스키, 경주용 고급자동차, 파티 등의 소재들은 여전히 등장한다. 사강은 일부러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비난하는 것들만 골라 썼다고도 한다. 40대의 주인공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젊은 여주인공이 나왔던 전작 소설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음의 파수꾼

Le garde du coeur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소담출판사



도로시와 그녀의 연인인 영화사 대표 40세의 폴이 함께 탄 차에 어느 날 루이스란 이름의 한 젊은 청년이 LSD에 취해 뛰어든다. 루이스를 보살피기 위해 도로시는 루이스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다. 의무로 시작한 이 관계에 점점 미묘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약혼을 생각해보고 있는 연인도 있고 나름의 사회적 성공도 이룬 40대 여성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내보이는 청년이라니.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성적인 관계는 없다. 젊음을 유지하면서도 나이와 세월을 의식하는 도로시와 그녀와의 정신적 사랑을 갈망하는 20대 젊은 남자 루이스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다. 


나는 그가 사랑에 대해 정말이지 이상한 개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의 개념은 지금껏 내가 상상해온 개념들과 닮은 데가 전혀 없었다. 그가 가진 사랑의 개념에는 배타성이 개입되어 있었다. 


- p145




마치 새끼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각인하고 따라다니듯, 루이스는 도로시에게 집착한다. 그 집착의 끝은 도로시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랑이란 미명하에 살인을 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루이스의 이 일그러진 표현은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극단적 상황에 몰린 이들 주인공들의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로시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살인의 공범자가 된 것 같은 느낌에 괴로워한다. 


도덕관념이란 기묘한 것이어서, 지나치게 유동적인 경향이 있다. 나는 죽기 전까지 굳건한 도덕관념을 결코 형성할 수 없을 것 같다. 


- p141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이 청년은 최고의 팜므 파탈인 도로시 시모어의 품안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완벽한 시민이었다. 도로시 시모어가 그를 네 번이나 살인으로 몰아넣었다. 당황스러운 사실이었다. 


- p159




다른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바랐지만 순수한 선의로 자신을 대한 사람은 도로시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도로시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루이스는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맹목적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처음에는 이 둘의 관계를엄마와 아들의 관계처럼도 생각해 보게도 되었으나, 루이스가 도로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도로시가 루이스를 '아들'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전에 당신에게 말했잖아요, 도로시. 당신을 알기 전에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외로웠다고요. 하지만 지금은 뭔가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걸 보호하려고 할 뿐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 p163



 『마음의 파수꾼』 에서는 이야기의 진행과는 별도로 나는 사강 특유의 통찰이 드러나는 문장들을 더욱 많이 발견하고 밑줄을 그어둔다. "다음 날인 월요일이면 우리는 보수를 받는 정확하고 일상적인 일의 세계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을 자게 해주는, 우리의 삶에 대해 '다른사람들'을 안심시켜주는 세계로 돌아갈 터였다. 그러나 제기랄, 나는 때때로 삶과 그 연쇄적인 순환의 고리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그건 우스꽝스러웠다. 내가 그래왔듯이, 모든 형태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밑바닥에서부터 삶을 증오할 필요가 있었다"(p87) 라던가 "삶이 내손안에서 빠져나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같은 표현들. 이런 문장에서 문득 첫 소설 이후 나이가 든 사강의 모습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소설이 1968년에 나왔으니, 1935년에 태어난 사강은 33살 즈음에  『마음의 파수꾼』 을 발표한 셈이다. ( 물론 그래도 책 속 여주인공보다는 열 살 정도 어리지만 )



루이스는 도로시의 도움으로 영화배우로 성공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로시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도로시, 폴, 루이스의 기묘한 동거로 이야기를 맺는다. 국내에서는 『마음의 파수꾼』 을 원작으로 하여 1992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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