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17  절망을 버리고 ‘분단시대’에 어깨를 결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⑪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공간’에서 그들과 통했고
어설프고 서툰 채
우리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무궁화 전설에 민중을 담은 시
‘울타리꽃’이 창간호에 실리고
경찰사찰도 시작되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그랬던가요?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김수영 <절망> 중에서)라고.

헤맴 십 년, 절망 십 년, 방황 십 년. 그렇게 십 년을 보내고도 “절망이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반성할 줄 모른 채 졸렬과 수치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문득문득 찔레 한 송이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아까시꽃만큼이나 향기를 지니고 살고 있는 것일까? 불두화만큼은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까? 꽃 한 송이를 보며 그 생각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었습니다. 끝까지 문학의 길을 가자던 이들은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이중섭을 죽도록 좋아해서 “마누라가 창녀가 되고 자식새끼가 거지가 될 때까지 문학을 하자”고 소리치던 이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율도 감동도 없이 세월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이 삼십이 되어간다는 것을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20대의 열정, 희망, 감수성, 방황, 함성 속을 지나서 30대는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해체 정리하지 않으면 한 편의 시도 남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30대 작가란 그들 자신의 20대적 문학을 전부 약탈해서 불태워 버리는 세대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삼십이립’(三十而立)의 동양적 세대론 속에 ‘선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헤맴 십 년 따위를 고은 시인은 해체하고 불태워버리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체하고 정리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를 만났습니다.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보았습니다. 나는 헤맴밖에 자랑할 게 없는데 동갑인 그녀는 삶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몸 전체로의 삶이었습니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으로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일하는 가게는 헤매는 이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우선 글쟁이들이 모였고, 모여서 시낭송을 하면 음악 하는 이들이 피아노를 치거나 플루트를 불었습니다. 연극쟁이들이 모여 마임을 할 때도 있었고, 가난한 화가들이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공간’이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그녀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김희식이라는 국문과 대학생을 만난 것도 그곳이었습니다. 한참 물이 오른 운동권 대학생인 김희식은 김창규라는 자기 선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광주항쟁 관련 유인물을 돌리려고 자전거에 싣고 가다가 붙잡혀 곤욕을 치르고 나온 전도사였습니다. ‘공간’에서 만나서 떠들다가 열이 오르면 근처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거기서 다시 대구에 있는 친구들을 소개해 주는 이가 있어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배창환, 김종인, 김용락, 김윤현, 정대호, 김형근 이런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곧 의기투합해서 청주와 대구를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정만진, 김승환, 김시천, 김성장, 정원도 등이 합류하였습니다. 대구 쪽에서는 정대호 시인이 학생운동을 한 경험이 있는 문청이었고 나머지는 교사가 많았습니다.

‘분단시대’. 여러 번의 만남 끝에 우리 모임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분단시대’라는 말은 강만길 선생이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라는 책에서 쓰신 용어이기도 합니다. 강만길 선생은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가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는 일을 그 최고 차원의 목적으로 삼은 시대라면 20세기 후반기, 즉 해방 후의 시대는 민족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민족사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 시대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 이 시기는 ‘분단시대’로 이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중서 선생 역시 <분단시대의 문학>이라는 책에서 “남북 역사의 모든 불행과 결핍의 근원이 바로 분단 현실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셨고, “문학예술은 역사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발견하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필요와 능력을 밝혀주며 인간의 더 나은 운명을 개척해 나아가는 능력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 바 있는데, 두 분의 글과 백낙청·염무웅 선생의 글 등을 읽고 토론하면서 모임의 이름을 ‘분단시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몰려다니다 첫 번째 동인지를 내면서 우리는 동인지 맨 앞에 이런 머리말을 썼습니다.

“시는 만남이다. 안과 밖의 만남, 개인과 시대와의 만남, 자아와 그 자아를 둘러싼 상황과의 만남, 나아가서 민중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의 만남, 정신적 구조와 역학적 구조와의 만남이다. 시는 그것들의 화해이어야 하고 악수이어야 한다.

시적 진실은 안에만 머물고 삶의 진실은 외면된 채 방치되어 있거나 불행한 시대와 역사는 왜곡된 파행을 계속해 가는데 시인은 폐쇄적인 자아의 성 내부에서 공허한 탄식을 되풀이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한 시대의 삶이 비극적이라고 할 때 시가 획득한 예술성이 전혀 그 비극의 진원지를 향해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시는 그 속에서 개인을 구제하고 소극적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결국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오늘날, 개인의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과 민족의 역사적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단절되어 있다. (…) 국토의 분단에서 시작한 그것들은 결국 민족의 분단, 진실의 분단, 진리의 분단, 시대의 분단, 정신의 분단을 가져오고 만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나뉘어진 모든 것을 향하여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려 한다.”

-<분단시대> 제1집 머리말 (1984년, 온누리)

과학적으로 정돈이 덜 되어 있는 글입니다. 마음만 앞서 있고 논리가 정연하지 못한 글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인 고백도 글 안에 들어 있고, 고은 시인의 보이지 않는 영향도 문맥에 배어 있는 걸 느낍니다. 분단시대와 분단 극복이라는 명제를 만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토대로 하고 국가간 체제를 상부구조로 하며 분단구조가 응축된”(하정일, ‘탈식민과 근대극복’) 복잡하고 특수한 체제, 백낙청 선생이 말씀하신 ‘분단체제’의 극복이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로 출발한 문학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프고 서툰 통과제의를 겪으며 우리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1980년대 전반기 그때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기간행물이 다 폐간되어 글을 발표할 매체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과 같은 우리나라의 지성을 대표하는 문학지들이 폐간되어 발행되지 못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제 막 문단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는 때에 글을 발표할 매체가 폐간되고 없다는 것은 자연히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인들은 <실천문학>과 같은 부정기 간행물 즉, 무크지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와 경제> <오월시> <삶의 문학> <반시> <목요시> <자유시> 같은 동인지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른바 동인지 문단 시대를 열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춘문예나 추천 등의 등단 방식에 얽매여 신춘문예용 시에 매달리거나 추천해줄 문인의 아류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 못마땅하던 우리들은 이참에 등단제도 자체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으로 시대적·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 어떤 신문을 통해 등단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인지 <분단시대> 창간호에 저는 <고두미마을에서> <울타리꽃> <진눈깨비> <분꽃> <삼대>(연작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아직도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보다 더 절박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뷔작 중의 한 편인 <울타리꽃>은 이런 시입니다.


아들아, 나 죽어 이 집의 울타리가 되리라.
칼 뽑아 네 어미 아름다움 버혀 가려던
눈먼 무리 앞에 무릎 꿇 순 결코 없어
황망한 칼빛 아래 내가 죽거든
아들아, 억새풀 엉겅퀴 새 돌 눌러 날 묻지 말고
우리집 마당 가운데 나직하게 묻어다오.
혹 떨어져 나간 내 뼈 있거든
밤마다 숫돌에 갈고 갈아 화살촉 만들고
흩어져 날리는 머리칼 있거들랑
빠짐없이 추려 모아 화살줄 매어다오.
앞 못 보는 너희 아빌 핍박하러 오는 무리
날만 새면 사립문 앞에 눈 치뜨고 모이리니
내 어이 죽어선들 한적한 산그늘이나 떠돌며 다니리
아들아, 이 어민 속 붉은 꽃으로 꼭 다시 피어난다.
나 죽어도 내 집의 울타리꽃으로 피어난다.

-졸시 <울타리꽃> 전문


울타리꽃은 무궁화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라꽃인 무궁화의 전설을 바탕으로 쓴 시인데 권력에 대한 저항과 져도 져도 끝없이 다시 피어나는 민중의 끈질긴 정신을 표현해 보려고 했던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려 있는 동인지 <분단시대> 창간호를 서울대학교 학생회에서 필독도서로 선정하는 바람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경찰의 사찰을 받는 일이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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