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여전히 ‘박정희 신화’가 지배하고 있다.…사회적 양극화와 실업난이 심할수록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젖는 사회가 과연 미래를 향해 갈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보수세력만 책임질 일은 아니다. 진보와 개혁을 주창한 세력이 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라는 자책을 불러온 것도 박정희 부활에 기여했다. 박정희 모델을 뛰어넘는 사회 발전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진보세력의 한계 역시 박정희 신화를 띄웠다. 이렇게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의 반성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2009년 10월 26일자 사설 ‘왜 아직 박정희를 넘지 못하는가’의 일부다. 왜 그럴까? 왜 아직 우리는 아직 박정희를 넘지 못하는 걸까?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동원된 근대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후마니타스, 2010)은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기도 한다. 이 책은 ‘성장과 경제적 성취 대 폭압과 수탈’, ‘동의 혹은 헤게모니 대 폭압과 강압’, ‘산업화 대 민주화’, ‘수탈 및 착취 대 근대화’, ‘분배를 수반한 성장 대 불평등 성장’ 등의 대립 구도라고 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서 매우 정교한 분석과 복합적인 이론적 구성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읽기에 쉽거나 부드러운 책은 결코 아니지만, 기존 이분법 투쟁에 지친 사람들은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어 공부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 진보적이면서도 기존 진보적 시각에서 좀 게으르다거나 ‘도덕 과잉’의 냄새를 맡은 사람이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책이기도 하다.
조희연은 박정희 시대의 구조적 성격을 ‘근대화를 향한 동원’을 주된 특성으로 하는 체제로 파악하고, 이런 점을 드러내기 위해 ‘개발동원체제’라는 용어를 쓴다. 개발동원체제는 ‘근대화(개발, 산업화, 발전 혹은 성장)’라는 국민적․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기존의 박정희 체제 분석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크게 보아 세가지다.
첫째, 복합적이다. 박정희 체제의 폭압과 모순, 위기를 강조하는 진보적 서술에서 출발하되, 새로운 문제 제기들을 단순히 비판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도전들에 대면하면서 기존의 진보적 인식틀을 성찰적․확장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박정희 시대를 재인식한다. 둘째, 보편적이다. 박정희 체제를 한국만의 유일무이한 ‘특수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일반적’ 특성을 갖는 대상으로 파악한다. 셋째, 총체적이다. ‘하나의 박정희’가 아니라 ‘다양한 박정희’가 존재는 하는 점에 주목해 박정희 체제의 ‘모순적 복합성’을 규명한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영 모르겠다고 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조희연은 진보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투철한 자기성찰과 더불어 기존 진보적 시각의 한계를 지적한다. 예컨대, 조희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론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의 성찰적 계기로 작동하기보다는, 이론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과 곧바로 동일시되거나 도구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이론적 실천의 도구화’는 운동적 언어가 쉽게 분석적 언어로 치환되어 동일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속에서 분석의 문제는 쉽게 ‘입장’의 문제가 된다.…일종의 ‘본질주의’적 분석이 진보적 분석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 분석의 공백에 뉴라이트적인 현대사 분석이 존재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진보적 분석 내부에서의 ‘순수주의’ 같은 것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조희연은 조심스럽게 또는 고급스럽게 표현했지만,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간 박정희를 보는 진보진영의 시각은 도덕적 분노 일변도여서 오히려 ‘박정희 붐’에 일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일상적 삶에서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이면서도 박정희를 종합적으로 긍정 평가하는 대중이 많다. 이들의 생각이 분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분석을 시도하게 되면, ‘박정희는 무조건 악인’이라고 낙인 찍는 식의 진보파가 펄펄 뛰며 반격해온다. 박정희 시대에 저질러진 인권유린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흥분해대기 시작하면, 어느덧 소통과 논쟁은 실종되고 누가 더 민주주의와 인권에 투철한가 하는 ‘자격 검증 시험’으로 변질된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같은 사람의 뜨거운 박수는 받을지 몰라도, 이는 그 어느 중간 지점에 있는 대중을 박정희 찬양 세력의 대열에 들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격이다.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된 점도 있다. 왜 우리는 아직 박정희를 넘지 못하는가? 이를 둘러싼 논쟁과 논란은 뜨겁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딱 두가지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기를 옛날의 왕보다 훨씬 더 강한 철권으로 지배한 지도자가 박정희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논쟁과 논란이 평행선을 달리며 상호 접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이 두가지 이외의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아닌 다른 독재자가 그 시기를 책임졌다면 오늘과 같은 번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사실 이건 사소한 질문일 수 있음에도 우리는 주로 이 문제를 놓고 논쟁과 논란을 벌인다. 박정희 찬양 세력은 ‘성공’이라는 결과에 주목하고, 박정희 비판 세력은 ‘성공’의 정체와 더불어 그 ‘그늘’에 주목한다. 각자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여기에 이해관계까지 끼어든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은 18년이었지만 사실상 그 체제를 연장한 5공화국과 적어도 인적 구성에서 5공을 연장한 노태우 시기까지 합하면, 박정희 체제의 기득권 세력은 30년 넘게 한국을 지배해 온 셈이다. 3당통합으로 집권한 김영삼 정권도 반쪽은 그 체제의 연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박정희를 넘어서는 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게다가 지도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존재하는 ‘비극적 죽음’의 프리미엄이라는 문제도 있다. 조희연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역사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의 경우 ‘비운에 간’ 인물들에 대해서만 ‘동의적’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우리 현대사의 경우, 지배에 대한 동의 자체가 적고 지배의 불안정성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현실 정치인들은 민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은 정치인들에 한해서, 기대가 투영되는 식으로, 정치적 지지가 남아 있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원된 근대화’는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지도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그런 ‘동원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난 한 세대에 걸쳐 박정희의 명예를 자신의 명예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층으로 우뚝 섰거니와 ‘비극적 죽음’에 약한 민중의 정서가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를 읽으면서 박정희 체제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차분하게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선샤인뉴스 2010.1.25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