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왜 부자와 생태문제를 결부시키는가?

사실, 난 여전히 버스보다는 택시를, 그리고 택시보다는 내 차를 선호하는 대기오염을 더욱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그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부의 불평등이라던가, 계급 갈등에 대해선 항상 민감하게 생각하고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전에 <녹색희망>이라는 책에 대한 신문의 서평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좌파가 왜 녹색(생태)의 아젠다에 공감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곧 잊었고, 생태의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는 좀 외떨어진, 괜히 웬지 모르게 좀 있는 이들의 아방가르드적인 운동일 따름이라고 치부해왔고, 그렇기에 사실 지금도 무지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은 나 같은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세상을 다시금 똑바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도전을 던진다. 그리고 혹여 생태주의라는 것을 낭만적이고 오지랖 넓은 이들의 관점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 하는 이들에게 "자 똑바로 보라고!"라고 외치는 책이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라는 제목이 보여주듯, 이 책은 현재의 생태적 위기와 자본주의 축적의 연관을 보여주고, 그 것들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 지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생태문제와 자본주의의 모순은 함께 맞물려 있는 것이다.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우석훈의 책들(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 도마 위에 오른 밥상)의 공통적인 서술방법이 있다. 굉장한 위기의 경보를 명확하게 울린 후, 그 맥락에 대해서 파헤친 후, 약간 누그러뜨린 대안들(사실은 소박한)의 제시가 그 방법인데, 에르베 캄프의 서술 방법도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두는 그렇기에 무시무시한 경고로 시작한다.


   
 
 인류가 출현하기도 전에 일어났던 다섯 번의 주요한 생물 멸종에 뒤이은 여섯 번째 멸종은 이제 공식적인 표현이 되었다(p.23).

 스위스의 전문가 마티스 와커나겔(Mathis Wackernagel)이 고안한 개념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생태학적 흔적', 즉 생태학적 충격은 '지구의 생물학적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1960년에 인류는 이 생태학적 능력의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나 2003년에는 그 능력보다 1.2배를 더 사용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지구가 생산하는 생태학적 자원보다 더 많은 자원을 인류가 소비한 셈이다(p.32).

 그러나 정말 기막힌 것은 우리 눈앞에서 이미 참극이 반복되고 있고, 위기의 신호들이 끈질기게 확산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 경관을 해치는 풍력 발전, 원자핵 재개발, 친환경 연료 개발, '사회적 책임이 뒤따르는 투자',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한 로비 착수 등으로 해석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상황의 흐름을 바꿔버릴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는 '생태학'이라는 비속어를 없애버리기 위한 의미론적인 무기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미국을 더욱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p.41)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에 대한 믿음 조차도 허물어 버린다. 우리는 아예 '개발'이라는 말을 떼어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해서 놀랍게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데, 이는 일단 위기를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인 다는 것(현 상태에 대한 낙관), 그리고 위기가 설령 있다해도 기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기술발전에 대한 낙관)이 깔려있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것은 부유층의 생활 패턴(명품으로 대변되는)과 그것을 추종하는 그 아래 계층들의 심리, 그리고 그것을 추동해 내고 있는 과두민주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언급한, 부유층의 생활행태라는 것과 과두민주제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건데, 생태문제라는 것은 곧바로 정치의 문제가 되며 자본주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생태문제가 균등하게 우리에게 오지 않고, 빈부 격차라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함께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사회적 구제 장치가 고장 난 상태다. 더 이상 돈을 많이 가진 부유한 자들의 증가가 대다수 일반인들의 물질적인 조건의 개선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도시 빈민층의 확대다. 농민층이 농촌 생활의 궁핍에서 벗어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선택하는 한 방법이었던 '도시화'는 이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국제연합의 거주자 관련 조직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10억여 명의 도시인이(세계 30억 도시인 중) 도시 빈민가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빈곤은 '도시적 삶의 확대에서 가장 큰 특성'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농촌의 빈곤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불도 전기도 없는 누추한 도시의 가옥에서 그리고 내일에 대한 영구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정한 직업이나 노리면서 살아간다. 대개는 푹 꺼진 배를 부여안은 채로(p.62).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덜 번다는 것, 그것은 견딜 만하다. 그러나 그들 수준으로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은 견디기가 쉽지 않다. 사회의 계층 이동 가능성은 이제 희박하다(p.65).

 금전적인 개념 이외의 빈곤을 걱정하는 또 다른 방식은 이처럼 인간 존재의 환경적 조건에 대한 묘사와 관련될 것이다. 더구나 생태학적 위기로 인한 결과들을 우선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빈곤층이다(p.71). .... 홍수나 사이클론, 해일 등의 자연 재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도 피해를 복구할 가능성도 거의 가지지 않은 빈곤층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잔인하게 공격당하고 있다(p.72). .... 기후 변화의 충돌은 세계의 가장 빈곤한 계층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컨대 가뭄을 악화시키고 가장 메마른 지역들에서 농업 생산을 감축시키면서. 사실 온실 효과의 주범인 가스 배출은 본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인데도 말이다(p.73).
 
   

 
 
결국 저자의 말마따나 "빈곤과 생태학적 위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문제들(p.74)"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보통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추동하고, 보통 정상적인 사회라면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 나름의 기제를 통해서 작동해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브레이크가 안 걸린다는 것이다. 왜 일까?

그것에 대해서 저자는 부유층들의 gate-keeping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온존이 사회적 기제의 작동을 막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부유층에 대한 묘사는 압권이다.
 
 


   
 
 빈틈없는 매니저는 마치 보통 사람들이 자전거나 전기톱을 고를 때처럼 수송용 항공기 카탈로그를 뒤적거린다. 나는 그에게 다른 수송기들에 비해 연료를 아주 적게 먹는-1600킬로미터를 가는데 1톤도 채 안 되는 연료가 소비되는-그래서 제조업자가 그린 머신(green machine)이라 명명한 팔콘 900EX를 권한다. 상상해보라. 스스로를 진정한 환경보호론자라 느끼면서 자신의 전용기를 타고 나는 모습이라니......(p.91).
 돈은 이제 더 이상 숨길 게 아니다. 아니, 반대로 이제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주 멋진 파티를 여는 것만큼 괜찮은 아이디어는 없으리라. 프랑수아 피노는 자신의 개인 박물관 개관식을 위해 920명의 '친구'들을 베네치아에 초대했다. 그들은 당연히 전용기를 타고 왔고, 그로 인해 마르코 폴로 공항은 포화 상태였다. 헬리콥터들을 그 승객들을 그라시 궁전으로 태워 날라야 했고, 그 때문에 제트기 160대를 다른 공항으로 보내야 했다(p.92).
 
   


뭐 그들의 취향에 불만은 나 역시 없다. 언젠가 우석훈이 이야기했었지만, 문제는 이런 사회는 유지가능성이 떨어진 다는 것에 있다. 관리되지 않는 위기의 연속은 사회의 붕괴를 초래한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이것을 즐기는 듯 하다. 이러한 그들의 심리와 그것들의 사회적 효과에 대해서 저자는 베블렌의 툴을 도입하여 설명한다.


   
 
오늘날처럼 문명화한 사회에서 사회 계급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유동적이다. 어떤 조건이든 상위 계급의 규칙은 어려움에 부딪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상위 계급은 자신들의 구속력을 띤 영향력을 사회 구조의 위에서 아래로, 가장 비천한 계층까지 확장한다. 결과적으로 각 계층의 구성원들은 바로 위 계층의 삶의 방식을 이상적인 삶의 방식처럼 받아들이고, 이 이상을 향해 모든 힘을 쏟아 붓는다(p.105).
 
   

우리 모두에게는 차별화하려는 속성이 있고, 모든 계층은 더 위의 상위 계급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이는 소득의 개선 뿐만 아니라, 소비 습관을 통해서 자신들의 계급을 탈바꿈 하려는 '허영심'과도 함께 맞물린다. 하지만 이러한 상류층의 소비행태를 따라가려는 순간 그 밑의 계층들은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황새를 쫓아간 뱁새처럼 말이다. 맑스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다." 말을 좀 바꾸자면 "모든 소비 문화는 지배 계급의 소비 문화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는 없을까? 문제는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의 주장들을 '열성 당원'(zealot)의 그것으로 치환하고 있는 언론의 환경(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그리고 네그리의 '훈육통치'의 양식마냥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보려 하는 생태적 방식의 통제(예를 들면 RFID 카드-교통카드-를 통해서 우리의 위치를 식별할 수 있는 것처럼) 등의 방식으로 우리가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광고에 의해서 미디어가 움직이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력화되는 전반적인 구도하에 있고, 또한 '9.11' 이후의 미국처럼 인권 따위는 무시한 채, 죄수에 대한 고문 등으로 표현되는 통제적 정책들은 기술발전과 맞물려 우리의 '정치적 저항'에 대해 억압적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구도들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을 보면서, <1984>의 빅 브라더를 연상해 보았다. 저자는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경구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가? 사실, 디테일한 대안제시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닌 듯하고,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석훈 처럼 '정책적 아젠다'까지는 못 나아가고 있다.


   
 
 좌파는 불평등의 원인들과 생태학을 두루 아우르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져 다른 사상들처럼 전반적인 혼돈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p.155).
 
   

어떤 문제이든, 문제는 항상 얽혀져 있고,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 대해선 실천을 통해서 모색할 수밖에 없다. 난 저자가 '전술가'이기를 바랬지만, 그의 직업이 '기자'라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그는 세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림은 그려졌고,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 지가 관건이 될 듯하다.

발로 뛰면서 기사를 써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디테일의 충실함이 느껴지고, 집요하게 추적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나 역시 이런 글을 쓰고 싶어 미치겠다. 이 책을 통해서 '경제 성장'의 마법에서, 명품의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최소한의 이 책에 대한 기대치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프심 2008-03-2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달아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환경문제와 부의 문제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닌 같은 문제로 엮어서 이해하는 것에는 큰 점수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목이 부자들이 어떻게 지구를 망쳤나라고 정한 것은 거기에 대한 일말의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며 저널리스트적 사실 관계는 권력관계에 숨어 있는 장치를 들춰내서 그 장치를 작동하는 원리 및 해결책이 나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적어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책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받기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 큰 점수를 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재를 둘러보니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서 기분이 많이 좋습니다. 탐서가의 길을 계속해서 진행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양승훈 2008-03-26 16:48   좋아요 0 | URL
네,, 울프심님의 생각이 이해가 되고, 그런 '대안적 방식'에 대한 책들도.. 그냥 청빈하고 소박한 것들 말고, 디테일이 있는 '정책' 혹은 '장치를 작동시하는 원리 및 해결책'에 대해서 저 역시 궁금하고 모색하고자 하는 데..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을 해요.. ^^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그녀가 쓴 책 중 네 번째로 읽은 책이다. 뭐랄까, 누군가도 이야기했었지만, 정말 '읽는 맛'이 있는 글쓰기이다. 너무나 부러워 시샘하게 만드는 글쓰기. 예를 들면, 난 이런 글쓰기엔 정말 소질이 없다. 당연히 잘나가는 소설가와 나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사실 말이 되지는 않지만,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글쓰기와는 너무나 다른 방향인 거다. 정이현의 글쓰기는.. 부럽고. 나도 이런 질감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담 말이다...

뭐, 이 책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고, 뒷 부분에 있는 평론가처럼 그녀 소설의 본질에 대해서 구구하게 늘어놓을 만큼 문학에 대해, 이런 글쓰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공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뭐랄까? 지난 번에 읽었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주로 다루어 지던 여자들이 30대 초반, 그리고 미혼이면서도 꿋꿋이 또한 영리하게 살아가는 그런 여성들이었다면.

이번에 다루어 지는 여성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성들이 다수라는 느낌이다. 물론 1990년와 1980년대의 저자 자신을 비추는 것만 같은 "삼풍 백화점"과 "위험한 독신녀" 등의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다루는 주된 이야기의 중심 인물들은 40대로 넘어가는 듯 하다. 그녀의 나이 탓인가? 아니면 지평의 확장? 난. 그래도 지평의 확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면,, "타인의 독백" 등의 소설 에서는 여전히 정이현이 가지고 있는 영리한 여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뭐랄까? 내가 읽은 소설이 얼마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거창한 소설들(예를 들면 조정래, 황석영)에 비해서 확실히 가벼운 주제이지만, 그 가벼운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나서 이상하게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이 것 저것 많은 생각이 든다는 거다... 우리 안에 내밀하게 끼어있는 때들이 박박 벗겨져서 타일에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문제는 그 때들이 아무리 밀어도 밀어도 계속 나온다는 데 있다. 정이현의 화자들은 언제나 착하지 않고, 때묻어 있고, 위악적이지만, 또 게다가 사회에 대해서 삐딱하지만. 그들은 나름의 살 방법을 찾고 영악하며,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뭐랄까? 속물이 된 여성주의자 내지는 좌파??

그들이 주는 효과는, 우리가 드러내지는 않지만 내심 갖고 있는 습속들을 꼬집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거다. 왜냐면, 그들의 내면이 글로서 우리에게 표출되니까 말이다...

이제 그녀는 어떤 주제든 쉽게 녹여내기 시작한 것 같다. 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들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일상에서의 우리 속내를 잊지 않고 계속 녹여주었으면 좋겠다. 김영하처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이현이 끌리는 이유~

정이현의 소설 중 <낭만적 사랑과 사회>(http://blog.aladin.co.kr/hendrix/1939916)를 읽고 완전히 꽃혀서, <달콤한 나의 도시> 또한 읽어버렸다.

정이현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런 거였다. 할리퀸류에 나오는 여성들의 갈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남자가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땅에 디딤발을 대고 쓰는 글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정이현의 소설은 마치 <캔디>와 <내 이름은 김삼순>의 간극만큼, 다른 여성들의 섬세한 '연애소설'들과 달라보였고 그녀의 소설은 웬지 읽을만 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쏟아내는 한겨레ESC의 <남자, 남자, 남자> 칼럼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녀의 글빨에 대한 신뢰를 가졌고, 그녀의 산문집 <풍선>을 집어들었다. 여기까지가 간접적인 소설을 읽은 배경이라면, 직접적인 이유는 이 책의 표지에 씌여있는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라는 말이 끌려서 였다. 항상 여러가지 이유로 미적거리다 표현 못하거나, "화성에서 온 남자"의 관점에서 "금성에서 온 여자"의 이유를 몰라서 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어쩌면 이런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팍팍 꽂혔고, "이 언니"라면 마땅히 지침을 주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여튼, 집었다.

근데, 이게 웬걸? 이 산문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연애 이야기 혹은 남녀 이야기가 아닌, 그녀의 문화생활의 감상문들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뒷부분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갖고 읽기 시작했지만, 종반으로 다가갈 수록 그런 기대는 접고, 그녀의 문화생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관점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감성이 세상에 살아가는 뭇 여자들이 자신의 '여자'인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와 웬지 모르게 흡사할 것으로 생각되어 솔직함을 느꼈다.

 

정이현의 문화생활 관람기, 그리고 여자가 본 세상 이야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시작되는 그녀의 영화 이야기와 드라마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역시 예측했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에 대한 예찬도 있고, 잘은 모르겠지만 이 책에 쓰여진 내용들이 어떤 신문의 칼럼 따위에 쓰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줘 보세요!!).

읽다가, 그녀의 사랑의 관점 쯤은 뽑아 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것 아닐까?

   
 
 생애 처음으로 타인과의 내밀한 친밀감을 경험한 사람은, 미처 아무것도 '계산'하지 못한다.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이기적으로 투정부린다. 자신의 장애와 결핍을 상대방이 온전히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를 맡김으로써 사랑이 성립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 때문에 사랑은 붕괴되고 문득 이별이 찾아온다(p.20).

 누군가를 칼로 베는 순간 비로소, 그전에 내 등을 찔렀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굴러간다는 교훈을 얻는 일이야말로 연애의 진정한 목적이다.
 "할래? 말래?" 연애란, 그저 그렇게 남녀 개인의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일 뿐이라고 믿는가. <연애의 목적>은 바로 그런 당신의 뒤통수에 서늘한 얼음을 가져다대는 영화다. 이곳은 거대한 세트장이며 시스템은 공고하다. 다만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개인의 사생활은 '사회적인 어떤 것'이 되어 객사한 거지의 동냥그릇처럼 거리 한복판에 까발려질 수도 있다. 우리는 끝없이 연애의 바깥을 꿈꾸지만, '바깥의 연애'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세트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내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로맨틱 코미디로 위장한, 장르를 알 수 없는 영화 <연애의 목적>이 당신에게 묻고 있다(p.27).

 상대의 완강한 등을 보며 비틀비틀 가야 하는 사랑, 보답받지 못해도 애걸할 수 없는, 그런 사랑도 사랑이다(p.39).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권력관계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게임이 사랑이다(p.49).
 
   


내가 원했던 만큼은 이 만큼이었고, 나머지의 부분에서는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을 우회적으로 영화, 드라마를 만났던 시선들을 통해 보여준다. 예를 들면, 30대 여자에게 비추어지는 29세 이른바 '노처녀' 들의 이야기에 대한 관점(마치 30을 인생의 무덤인 냥 묘사하는 시선)에 대한 분개 따위 말이다. 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한 번 곱씹어 볼만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게, 내가 지금보다 네 살이 어리다면 매일 춤추고 다니겠다. 근데 <싱글즈>의 나나도 그러더니 왜 영화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노처녀들은 죄다 스물아홉 살인 거야?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걔들 서른 살 맞이하는 자세가 너무나 비장하지 않아?" "꼭 일이냐, 결혼이냐,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놔야 삼십대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스물아홉 살짜리 남자가 자기 나이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화 본 적 있어? 이게 바로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거라고!"(p.106)

 어린이는, 천사인가? .... 기억 한번 더듬어보시라. 먼 옛날 얘기도 아니다. 기껏해야 2, 30년 전, 당신은 어떤 어린이였는가? 때 묻지 않은 영혼? 순진무구의 표상? 오호, 정말 그러셨는가? 물론 기억만큼 왜곡이 쉽고 빈번한 영역도 없을 테니, 당신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옛날 그 시절의 아이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착했는지. 거기 비하면 요즘 애들이 되바라지고 발랑 까지긴 했어. 다 삭막하게 변해버린 세상 탓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맑고 순수하지." 아, 예.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본인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셨나 보다. 참고로,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내 모교는, 일명 콩나물 교실에 3학년까지 2부제 수업을 실시하던, 80년대 당시 기준에서 몹시 평범한 공립학교였다.
 그 시절 우리는 다 친구였다고? 아이들이 몇 명이 모이면 자연스레 패가 갈리던 것, 잊으셨나 보다. 왕따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해서 모두의 은근한 따돌림의 대상이던 아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나름대로의 권력욕과 배신, 음모와 질투도 분명히 실재했다. 몸이 작아도, 어린이는 들끓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다. 우리는, 어른들은, 그걸 자꾸만 까먹는다.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그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던 어린이들은 순백색의 내면세계를 지닌 거의 완벽하게 무욕적인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pp. 153-154).
 
   


 
잠깐 옆길로 새지만,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특히 진보적인 관점을 가진 남자들이 갖는 트러블인데, 남자들끼리 '거시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다 보면 술잔은 기울어가고, 이미 욕설은 난무한 가운데 결국 봉착하는 이야기의 종결점은 "근데, 너 ~랑 잤냐?"(보다 훨씬 더 걸진 표현으로..) 차라리, 정치적 진보는 같은 지평에서 싸워볼 수나 있지만, 여자와의 관계 등등 '미시적 세계'(그들의 말로 하자면, 야들야들하고 아기자기할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들의 이야기, 게이같은 이들의 이야기)은 논할 수 없는 주제, 다룰 수 없는 문제이며, 그것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곧바로 'out' 콜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 말이다.
 

정이현의 이야기는 남녀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문제들에 대한 제기이며, 어쩌면 진보운운하는 인간들은 이런 이야기 담론에서 어떤 말들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하지 않나?
 

물론 남성의 담론구조와 여성의 담론구조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같은 지평에서 서로의 말들을 이해하고, 서로의 관점에서 스며들면서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정이현의 글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지, 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발랄하면서도 정곡을 신랄하게 찌르되, 또한 그렇게 후비지는 않는.. 쿨하게 '핫'한 이야기를 꺼내는 능력이랄까? '아이크림'과 자본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사람. 이런 언니들을 만나고 싶어요!!
 

다시 돌아오자면, 정이현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녀가 읽었던 책들을 알 수만 있다면 좀 구해다 읽고 싶은 마음이고, 그녀가 봤던 영화들을 다시금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명랑한 사랑'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명랑하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본다. 소통이 '명랑'하다면, 그 결과물도 명랑하지 않을까라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내 주위에는 '해방된 조국'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는 이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들에게 언제나 엄정한 한국사회의 대안이라는 것은 '자주'와 '반미'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며, 그 롤 모델은 크게 운운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자주'와 '반미'를 선취하고 있는 그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한동안은 부정으로, 나중에는 '역사적 정통성'을 들고나와 배를 째곤 했다.

그들에게 지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를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복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본가들의 세상을 타파하고 민중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난 그들에게 조금 더 마음을 빼앗겼지만, 궁극적으로는 좀 더 튕겨나간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지리한 'NL-PD' 혹은 '주사파-vs 좌파'의 구도를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이유는, 당시에 '북한사회'에 대한 책들을 읽었을 때 PD들이 이야기하는 몇 가지의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당시에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박헌영'과 '여운영' 정도 밖에 없었기에 다른 이들에 대한 언급이 무슨 말인지를 도통 모르고 그냥 듣기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의 핵심은 기억할 수 있었다. "민족해방 운동의 전통이 오로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사회주의자들 또한 한 축으로 있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이 밖에서 깃발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때, 국내에서 파업을 조성하고, 혁명운동을 하던 일군의 그룹이 존재했다" 뭐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명제의 강렬함은 기억되었으나, 그 사람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유추'만 했을 뿐 그 디테일에 대해서 읽은 적은 없었다.

<경성 스캔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사실 창피하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인 줄 알고 <경성 트로이카>를 집었다. 항상 사회과학-역사-철학 따위의 이야기만 나오면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며 잘난 척하던 나였지만, 이럴 때도 있다. 밑천 드러난 거 인정한다. 여튼,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의 이효정의 시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잊혀져 버린 자들의 이야기. 이현상과 경성 트로이카의 이야기. 이야기는 살아남은 경성 트로이카의 운동가 이효정의 목소리를 통해서 복원된다. 어느날 인사동 전시를 보다가 비장한 그림을 보고 반해버린 저자와의 인연을 통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괜찮은 인텔리였던 이효정을 '빨갱이'로 전향시켜버린 이현상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설득하는 힘과 경청하는 힘이었고, 그런 가운데 '진실'에 기대는 그의 호소력이었다. 
 
사회주의를 패션으로 생각하던 '모던뽀이'들과 '모단 껄'들을 일제는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을 통해서 '정치적 아젠다'를 제기하는 진짜 멋쟁이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일제는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사랑도 꽃피고, 또한 질투도 싹트며, 일상이 주는 압박 또한 펼쳐진다. 언제나 '부양가족'의 문제는 남자든 여자든 그 힘을 축소시키게 되는데, 그것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걸 강제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세상을 뒤집어 엎고 싶었던 거다. 
 
이런 그들의 열정이라는 것들도, 일제의 압제하에서, 또한 해방후의 좌우대립속에서 '이방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순간 결국 '이룰 수 없는 세상'의 꿈으로 아스라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북에서는 '미제의 쁘락치 박헌영'파로 분류되어 사상검증과 '자아비판'이 필요했고, 남쪽에서는 '빨갱이'라는 그 한마디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광장>의 이명훈의 고민이라는 것은 마음 속의 것이었다면, 이건 모든 곳에서의 폭압을 수반한 물리적인 것이었다. 
 
이제 해방후 60년이 넘었고, 전쟁이 끝난지 55년이 되어가지만, 이들은 여전히 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독립운동>의 정사(正史)에도 기록되지 못하는 이방인의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글로, 또 다른 어떤 이는 발로 뛰면서 해방을 갈구 했다. 그들에 대한 재평가는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정치적 건강함'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살아남아있는 자들의 기록이 역사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지금 쇠락해 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기록의 발견이라는 것에 역사를 대입한다면, 우리가 복권해야 할 역사는 이런 것이 아닐까? 괜한 알맹이 없는 국체 논쟁을 할 께 아니라면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1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김혜리, 공감하고 경청하여 얻어낸 기록들

<그녀에게 말하다>. 그녀에게 말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예술인들의 기록이다. 흔히 궁금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예전에 한 동안 씨네21을 열심히 본 적이 있었다. 한겨레 21과 씨네 21을 한꺼번에 사서 다 읽는 것이 한 주의 윤택한 나의 문화활동이라는 신념이 있었을 때였다(물론 지금도 그런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그만큼의 여유가 없다.). 당시 '김혜리가 만난 사람'이라는 꼭지를 통해서 문소리와의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다른 <연예가중계> 따위에서 절대 찾을 수 없는 질감으로 토로하는 문소리를 보면서 인터뷰의 질이 다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중심에는 '구조'가 있었다. 사회구조, 또 문화구조, 계급구조, 권력구조 등등등 '-구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세상의 '틀'에 대해서 지독하게 중심을 두고 바라바 왔었다. 하지만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의 구조라는 것은 아무리 지독한 완고함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신'의 영역이 아닌 이상 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갈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이건 들뢰즈와 알튀세를 읽던 내 결론이다), 어쨌거나 지금의 구조만을 계속 뜯어본다고 해서 모든 결론을 낼 수는 없다.

그래서 점차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예전에 '사회경제사'와 '국제체제' 등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것에서 점차 변화하여 이제는 '지성사', '인물사', '평전', '자서전' 그리고 '수필'쪽에 훨씬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요즘 향후 직업에 대한 결단을 내린 가운데, '방송-신문' 등을 포괄한 언론, 그리고 그 주위에 거대하게 포진하고 있는 엔터테이너 시장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 같으면 그 구조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론도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자본'이 있다. 물론 지금의 결론도 큰 틀에서 그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구조 안에서 꿈틀대면서 또한 그 구조가 갖고 있는 맥락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기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김혜리의 책은 그런 문제의식을 해결해 주는 내 첫번째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김혜리는 굉장히 꼼꼼한 인터뷰어다. 지승호의 인터뷰를 보면서 '꼼꼼한' 인터뷰라는 것이 어떤 것인 지에 대해서 생각헤 보았지만, 그녀는 본인의 전공인 '영화'를 제외하고도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디테일을 무섭게 추적하면서 인터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따금 허를 찔린 인터뷰이들의 '앓는 소리'도 종종 느껴진다. 사회과학을 하는 이들의 좋은 인터뷰라는 것은 '매서운' '치명적인' 측면이 종종 부각되어야 하는데,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에 우선 필요한 것은 '공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혜리는 '공감'에 충실하며 '경청'함으로써 더 많은 결과들을 얻어낸다는 생각이 들며 그 와중에 인터뷰이들의 '밑바닥'을 은연중에 긁음으로 '허'를 찔리게 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가장 맘에 드는 인터뷰는 강금실과 김선아의 그것을 꼽아내고 싶은데, 우선 강금실의 인터뷰는 그녀가 갖고 있는 '춤추는 칼'의 느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윤곽을 그려내는 것이었고, 김선아의 인터뷰라는 것은 '성장하는 연기자'의 소탈함이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인터뷰들도 그녀의 '꼼꼼함'과 '공감'이 어우러 내는 하나의 짧은 자서전의 구술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따금은 이런 책들을 왜 집는 지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 했었는데, 인터뷰의 매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되는 기회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