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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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ould 그를 만나다.

2003년 2학기였나?

한동안 경제학에 미쳐있을 때로 기억된다.
경제학을 공부했던 이유는  "맹신적인 수량화의 기술자들이 무슨생각으로 그러고 있을까"가 궁금해서였다.

그 때 나에게 주류 경제학의 마법을 명쾌한 근거로 풀어줄 수 있는 수업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과학철학이라는 과목이었다.

그 때는 엄밀한 의미를 잘 몰랐으나, 기실은 그 수업은 근대 과학의 기초라 상정되는 인식론적 문제들(연역법, 귀납법, abduction(유추법?))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깨주는 역할을 했었다.

예를 들면, 귀납법 같은 경우야, 아무리 많은 사례가 있더라도, 그것의 인과관계를 해석하는 이론적 틀이 없으면, 확증될 수 없다는 거, 그리고 반대로 연역적 방법을 통해서 고안된 이론이라하더라도, 그 것이 현실에서 유의미하게 투영되지 않는 이상은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그러면서 매우 한정적인 경우에만 통계가 이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도! 미친 기술자들이 판치는 현재의 정치학/경제학자들은 마치 통계적으로 상관관계(coherent)가 성립되는 경우, 그 자체를 인과관계(causal)가 성립하는 것으로 가정하지만, 실제로 수학적인 계산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도출할 수 없다.

그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다루었던 것은 찰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굴드의 그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전에 서점에서 미국에서 왜 4할타자가 없었는 지 등의 주제등을 통해서 대중적 과학서를 써냈던 제이굴드를 기억했던 나는, 그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었다.

그리고 까먹고 있던 도중 4학년이 지나, 어느날 갑자기 어떤 신문의 서평에서 '굴드 - 사회주의자이자 진화생물학자'라는 그에 대한 평가와, 그의 저서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중 한명에 선정된 그를 알게 되었을 때, 난 주저없이 그를 알고 싶어졌고, 이 책을 집게 되었다.


2.

굴드는 진화생물학자이다. 그의 논의의 중심에는 언제난 사회/과학의 상호관계, 그리고 그 두가지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순수한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지능테스트와 순수하게 인간을 서열화시킬 수 있는 속성인 g에 대해서 연구한다. g(general intelligence)는 순수한 IQ 테스트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를 토대로 통계화되어서 나타난 속성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는 아무런 실재적 물질로 물화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를 고안해 낸 스피어맨이나, 버트 같은 이들은 이 자체를 하나의 물질적 속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 지능이라는 것이 인간의 선천적 속성이 되고,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개화될 여지가 없는 이들에게는 '배제'의 속성이 부여된다.(이는 마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범죄자들을 다루는 방법과 같다.) 영국의 11+ 시험(초등학교에서 직업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분리했던(!) 시험)이 그러한 맥락에서 시행된다. 하지만 통계적 상관성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g라는 개념은 미분할 경우, 여러가지 다양성으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이는 미국의 교육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견지의 방향성을 갖추어 주었다. 이른바 지능과학에서의 '평등주의'라고나 할까?

 굴드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두가지 입장 모두를 해체시켜버린다. 통계적 상관만을 갖는 속성인 g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물질적인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다양성으로 보거나 일반지능으로 보는 가는 상관없이, 그것은 환경의 요인과 선천적 요인의 '변이'를 언제나 간직할 수밖에 없는 '잠재성'인 것이다. '결정적'인 무언가는 될 수없는 것이다.


3. beyond Biology and Evolution Science

 "만약 빈곤의 책임이 선천적인 것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책임은 막중하다." -찰스 다윈

 현재 내가 평생 공부하겠다고 덤빈 정치학을 비롯한, 여타의 사회과학은 통계와 계량분석, 그리고 그 잘난 경험과학의 메타포와 게임이론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회적 관계라는 것은 수학적 함수로 셋팅되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R 값이 0.4 미만인 어이없는 상관성도 엄청난 결과처럼 여겨지고 있고, 모든 것은 수학적 상관성을 갖고 있는 다음에야 존중받는다. 그런 작자들이 기껏한다는 짓거리는 60년대 근대화이론가들이 "경제성장률과 정치적 민주화 지수에 양의 상관관계(!)가 발견되기 때문에 경제만 성장하면 정치가 민주화될 거다"라는 헛소리를 삐약삐약하게 했던 것의 재판 삼판만 계속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지정책과 경제성장이 음의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에, 복지를 줄이라는 주장등등....

 2001년 미국 정치학회보에는 Mr. Perestroika라는 사람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왜 양적 방법을 쓰지 않는 이들은 미국 정치학회보에 글을 쓸 수 없으며, 왜 교수가 될 수 없으며, 모든 이가 경험과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지였다. 그 후 역사적 연구의 대가였던 Theda Skocpol(하버드 정치학과)가 미국정치학회장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 관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예를 들어 내가 미국에 유학가서 질적방법과 역사적 연구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비수량적 방법'을 쓰는 이상, 나는 미국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애시당초 포기해야하며, 내가 갈 곳은 길거리에서 데모하고, "New Left Review"나 "Monthly Review", "Politics & Society"에나 기고하는 천덕꾸러기 '급진주의자'로 낙인찍힐 따름 아닌가?

 만약 그러한 양적 방법론과 통계 그리고 게임이론으로 거대한 정치현상의 총체적인 면을 구상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그 길로 가겠지만, 사실 커다란 관계의 조망이라는 건, 애시당초 통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동시에 그들은 '거시적 예측' 따위는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거대한 계량 방법의 이데올로기는 후쿠야마 같은 미친 새끼들이 '역사의 종언'을 외치는 배경과 그리 멀리 있지는 않다. 역사적 조망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심층적 연구, 여러가지 초학제간 연구를 가로막는 것은, 그 이면에 자신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상관성'이라는 것의 허구성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실제로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표면적 주제보다, 안도의 한숨이자, '새로운 꿈'을 빨갱이들이 꾸지 않았으면 하는 조바심인 것 처럼 말이다.


4. re-thinking Gould

 re-thinking marxism이라는 저널을 보면, 그 마지막 호(2003)에 특집으로 굴드에 대한 기사를 싫었다. 그의 실천적 삶과, 언제나 말하기는 꺼려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을 보여준 저널...

 그의 업적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것은 나로써 무리다. 다만 그의 생물학적 접근을 통해 사회과학의 현재 작태가 얼마나 한심하고 터널 시야에 갖혀있는 지는 명백하게 알 수 있지 않나?

 경제학/정치학 방법론 시간에 어김없이 과학철학의 논의를 살펴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Karl Popper와 Thomas Kuhn의 논쟁, 그리고 J.S. Mill의 방법론 수준에서 끝났고, 그 이후는 통계와의 지리한 싸움으로 끝이나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대안적이라 할 수 있는 Alexander Wendt의 사회구성주의라던가, 들뢰즈-가타리/푸코를 위시한 프랑스 철학의 탈구조주의 논의 그리고 바슐라르 가스통의 과학에 대한 문학적 메타포는 고려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들을 그들이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을 물을 때, "그건 난 잘 모르는 데" 수준으로만 해줘도 고맙겠지만, 어떤 이들은, "그건 내 논의와 전혀 상관없다. 쓸데 없는 소리는 하지마라"라고 입을 가로막곤 한다.

 '신'이 의심되지 않는 시절 신 자체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신성모독이고 화형이 지극히 당연했고,
 '성리학'의 진리가 국가 이데올로기인 조선시대에서 유교에 대한 탄력적 이해조차 '사문난적'으로 찢어 죽임을 당하고, 모든 가족이 노비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당당하게 '에티카'를 통해서 '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해체했고, 우리가 믿는 상징적인 '신'에 대해 비웃음으로서 새로운 장으로 진입할 토대를 제공했다.

 정약용도, 박지원도, ..........

 '통념'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은 언제나 '꿈'꾸는 자에게서 나온다는 거.. 굴드가 나에게 준 또 하나의 교훈이었다. 

*조금 더 보태자면, 그의 연구 방법은 엄밀하게 푸코식의 '계보학'적 접근과 연장선상에 있다. 어떤 대상의 원류를 찾아서 그 위대함을 밝히는 것이 아닌, 오히려 어떤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것의 꼭대기까지 추적해서 그 '쭉정이' 같은 성질을 폭로하고야 마는 방법.

 그리고 그의 존재론적인 토대는 사회적 관계라는 맑스적 테제에 가장 깊이 간직되어있는 양식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세기의 맑스주의자가 할 일은 이런 일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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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시공 로고스 총서 5 시공 로고스 총서 5
J. G. 메르키오르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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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 많은 입문서들이 있다.

우리는 흔히 원전은 읽지 않은 체, 입문서들만 읽고, 그 저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일쑤이다.

예를 들면, 경제학자들 중의 10% 이내의 사람들 만이 애덤스미스의 '국부론'과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읽었다.

정치학자들이 그리도 떠들면서 '자유론'을 읽지 않고, '자본'을 읽지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한 태도에 대해서 스트라우스같은 정치철학자는 '공상에 빠져있는 짓거리'라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원전을 읽는 다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는 필요에 따라서 입문서와 접촉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그쪽 방면에 대한 이해가 전무할 때 입문서는 나름대로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시공사의 로고스 총서들은 입문서로서 나름대로 기능하기도 해왔다. 그 중에 헤겔이나 아이슈타인에 대한 입문서들은 정말 호기심을 자극하는 입문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푸코에 대한 입문서로 메르키오르의 저작을 택하는 것은 아무리봐도 시공사의 '삑사리'로 밖에 생각이 안된다.

메르키오르는 푸코를 칸트식 구성철학의 잣대로 재단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푸코는 인식론적 학습이 덜 된 '구조주의자'에 불과하며, 그가 아무리 구조주의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려할 지라도, 그가 보기에 푸코는 '구조주의자'일 따름이다.

물론 어떠한 비평도 그 나름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나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문제는 메르키오르가 푸코를 비판하는 근거인 '역사적 연구의 빈약' 만큼이나 메르키오르의 비판역시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메르키오르는 '푸코는 x를 주장하면서 역사적 근거 y를 들고 있다. 하지만 y에 대해서 역사학자 a는 좆까라 했다. 따라서 푸코는 역사적 근거에 있어서 박약하며 그는 구조주의자이다.' 뭐 이런식이다.

메르키오르의 구조적(!) 멍청함은, 후기 구조주의와 구조주의의 차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구조주의는 惡, 후기 구조주의는 善 정도의 유아적 인식에 그치고 있는 것에서 그의 위험한 발상은 더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메르키오르는 푸코를 '강단 허무주의자'라 명명한다. 하지만 푸코의 감옥 인권 운동등의 사회적 활동등이나, 끊임없이 매스미디어와 학계를 종횡무진하면서 전개했던 그의 '실천적 모습' 따위는 염두하지 않고 그냥 허수아비를 끊임없이 버려대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에서 후기구조주의의 모든 사상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 딱지를 붙이면서 매도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근본적인 그의 논점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그에 따르는 비판따위는 볼 수없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저작의 이름이 뭔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야 일독을 말리지야 않겠지만, 푸코에 대해서 심층적인 이해를 하고 싶은 사람은 정말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의 책이다.

푸코에 대한 개론서를 보려한다면, 이런 책보다

이정우 교수가 번역한 마크 포스터의 "푸코, 마르크시즘, 역사", 인간사랑을 읽거나,

푸코 자신의 저작인 "담론의 질서"가 훨씬 더 나을 듯 싶다.

조금 깊게 보자면, 들뢰즈의 저작 "푸코" 라던가(번역판으로는 2가지가 있는 데 아무래도 새길에서 나온 것이 더 충실한 번역으로 보인다.), 알랭 르노와 뤽 페리의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이 더 낫을 듯 싶다..

그리고 이정우 선생의 저작들이 참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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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뿌리들 1 - 개념사 1
이정우 지음 / 철학아카데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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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해서 제대로 차분히 책상에 앉아서 사유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로 어떠한 문제에 대한 더욱더 폭넓은 해석을 위해서, 그리고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읽어내기 위해서 철학을 도구적으로 활용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여러가지 개념들을 갖다 붙이면서 논쟁을 했었지만, 사실 그 개념들의 출발점이 어딘지, 그 역사적 맥락은 어떻게 검토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고려해보지 않았단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우리학교 철학과에 한철연(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의 강사들이 많은 관계로 그들이 만들어 낸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라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같은 현상학의 대가에게 '미디어 철학'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를 4학년 2학기 때에는 갖기도 했었다.

 이 책은 철학 아카데미의 좌장격이라 할 수 있는 소운 이정우 선생의 철학 기초강좌를 녹취해서 책으로 펴낸 것이다. 2학기의 강좌가 있었기에 책은 두권이다.

 '개념-뿌리들'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지만 그 맥락은 전혀 검토되지 않는 개념들과, 그것들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검토한다.

 첫번째 권은 본질, 질료, 형상, 무한, 등등의 이론적 전제가 될 수 있는 개념들에 대해 살펴보고,
 두번째 권은 국가, 기예등의 실천적 문제들에 대해서 검토한다.

 이정우 선생은 끊임없이 철학사에 대한 이해와, 원전에 대한 꼼꼼한 독해(원어로 된 철학책에 대한 강조!)를 강변한다. 그것이 없이 철학을 이해하려들기 때문에, 빈곤한 번역들이 쏟아지고, 그것들이 작위적인 해석과, 철학적 빈곤함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빈곤함은 소모적인 논쟁들을 일으킬 따름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어떠한 철학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지적인 호기심이 늘어났다는 점, 그리고 좀 더 엄밀하게 칼을 벼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아니, 가치가 있는 책이다.

 참 공부할 것은 미어터진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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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사회과학 - 풀빛신서 165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4
최정운 지음 / 풀빛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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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들이 있다. 정치평론가들이고, 지독하게도 '김대중 선상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恨의 정서'가 가득차 있다는 정도? 그래서 이러한 그들의 특징들은 지독하게도 지역감정의 먹이거리가 되게 하기도 했다. 

 그럼 5.18 은 어떤가? 실제로 광주에 대해서 뭔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광주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사람들은 최정운의 이야기를 따르자면 '전혀 쌩뚱맞은 소리'를 한다거나, '전혀 아는 바 없음'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적 차원으로 법제적으로 광주민중항쟁 자체가 복권이 되었으면서도, 항쟁 당시에 관제 여론을 통해서 형성된 담론자체가 아직까지도 뿌리깊게 장년층에게는 박혀 있음과, 현대사에 무감한 젊은 세대들에게 광주의 사건들은 어쩌면 별관심 없이 외워야하는 한국 현대사의 1개의 문항정도로밖에 치부되지 않음이 겹쳐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어떤 미친놈이 대낮에 술을 퍼먹고 돌아다니면서 어떤 여성에게 성폭행을 한 후 살해하고 인육을 먹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일이 밝혀졌을 때,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응할 까? '천인공노할 사건'이다 라고 하면서 매스컴에서 최소 일주일에 가깝게 보도가 될 것이고, 도덕의 추락이라던가, 양심의 파탄이라는 말들이 돌아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더 처참한 국가권력의 살육이 벌어진 광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가? 아니. 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가?

 최정운의 논의는 이 광주에 대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5.18에 대한 담론에 대한 연구, 그리고 광주에서 나타났던 공동체의 모습과 사건의 전개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와 해방광주에 대한 연구 등이 이 책에는 써있다.

 광주는 해방구이기도 했고, 동시에 그러한 해방구의 상황에서 사유재산도 계급도 없어져버린 절대적 공동체가 생겨난다. 절대적 적과 그를 제외한 나머지들의 사랑의 공동체(가장 영감을 받았던 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절대적 적의 긴장감이 사라지자 일상으로의 회복에 대한 요청이 생기고 다시금 일상에서의 모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해방광주).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나름의 해결될 수 없는 차이들은 나름의 대안들을 만들고 곧 광주는 공수부대에게 접수된다.

 어떠한 면에서 광주의 시민들은 폭력에 저항했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 공동체는 왜 파괴되었는가?

 그에 대한 물음과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전개된다.

 

Trans-Political Science

 더 말할 것도 없이, 세상에서 정치학에 대한 주된 인식은 정치학은 지배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관된 최초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정치체계(철저한 계급적 분업과 엘리트주의에 기초한)에 대한 언급부터, 현대의 거버넌스의 이론까지 지배적인 정치학의 입장이라는 것들은 언제나 지배계급, 지배적 신분의 통치(Government)라는 관점에서 주되게 쓰여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정치학 하면, 대통령, 의회, 정당, 국가, 국가들간의 관계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며, 당연히 그러한 인식만큼이나 그러한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지배적 경향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멀게는 루소로부터, 조금 더 정확하게는 맑스로부터 정치학은 단순한 지배 계급의 통치기술을 넘어선, 그에 대항하는 '전복의 정치학'은 구성되어왔고, 계속 생성되고 있다. 또한 그를 입증하기 위한 경험적 연구들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 맑스의 빠리 꼬뮨에 대한 분석은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우리에게 저항의 정치학이라는 것은 어떻게 연구되고 있고, 어떻게 경험적으로 입증되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나는 갑오농민전쟁이나, 독립운동사 등을 연구하는 몇몇의 역사학자와 정치사학자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이 책 "오월의 사회과학"을 읽으면서 그 생각들을 기각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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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 비틀어 보기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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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다는 건 뭘까?,, 그건 지식의 용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밥을 먹기 위해서 우리는 '숟가락질'이라는 것을 배운다.

지식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되는 것도 실상은, 몇꺼풀 벗겨내고나면, 우리의 일상과 맞다아 있을 법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식이 '거창하게' 불리는 걸 보면, 그 몇꺼풀이 깨나 두텁기는 한가보다.

그래서 지식인이 존재해왔고,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 몇꺼풀을 쉽게 푸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추상적 담론수준의 문제들을, 집에서 빨래하면서 듣는 라디오의 '여성시대'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예를 들면 비타민에 나오는 의사마냥) 지식인의 역할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은 하나의 'performanc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곧바로 지식인들은 광대로서도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지식인들, 특히 상아탑의 학자라는 사람들은 그런 사회적 책무들보다, 이따금은 그들만의 세계에 심취해서 빠져서 자신들의 담론들 사이에서만 허우적 거려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코는 그런 상아탑 속의 Armchair-philosopher(안락의자에 처박혀서 철학하는 먹물들)들에게도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에코는 광대가 되어 춤을 춘다.

분과학문의 경계따위는 허물어 버리고, 해박한 지식의 활용으로 시작도 끝도 정해지지 않은 춤을 춘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끝없는 지식의 질주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적 자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세상에 대한 풍자와, 새로운 영감의 생성이 동시에 춤을 춘다.(사실 에코 역시 니체주의자 중에 하나라 말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커피이야기부터, 지식인 사회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 따위까지. 그리고 인문학적인 이야기부터 첨단 테크놀로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움베르토 에코와 미셸 푸코를 자꾸 읽다보면 또라이가 된다던데, 이런 또라이라면 나도 그냥 잠시 또라이가 되보는 것도 멋질 듯 싶다.

죽음의 공포에서 빠져나오려면, 세상 모든 이들이 바보라는 걸 인지해야 한다는 에코.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것은 사실 어쩌면 죽음에 대항하는 '삶의 활력' 그리고 삶의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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