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석훈, 이 시대의 등대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를 시작으로 해서 그의 모든 저작을 읽어왔다. <직선들의 대한민국>만 사러가면 된다.

우석훈을 읽기전에 난 확실히 좌파는 맞았고 구좌파가 아닌 신좌파이긴 했지만, 어떤 생각들을 중심으로 내 생각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해야 할 지에 대해서 아무런 감을 잡고 있지 못했다.그러한 점에서 볼 때, 우석훈은 나에게 항상 '좌파가 꿈을 꾸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하여 정책으로 만드는 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곤 했다.

이를테면 한국의 좌파에게 우석훈은 '좌파는 대안이 없다'라는 말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해결사이다(물론 그 정도의 대접을 한국의 좌파들이 해주고 있는가? 여전히 강고한 주사파와, 강고한 구좌파들은 그 만큼의 인정을 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사파는 불가능 할 것 같고, 구좌파들은 좀 더 깨지고 나면 그를 조금 더 쳐다는 볼 것 같다.).

그리고 좌파에 대한 이야기를 떠나서 시민들에게 우석훈은 이 시대를 비춰주는 등대역할을 하고 있다. 허우적 거리면서 세상에 대한 회의만 강하게 남아있던 대한민국에서 그 허우적 거림의 디테일을 파헤치되 다시금 사람들에게 희망을 어떻게 구성해야하는 가(이를테면, 지승호와의 인터뷰집의 제목처럼(http://blog.aladin.co.kr/hendrix/1934810))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촌놈들의 제국주의>, 우석훈의 생각의 연속선상

<88만원 세대>(http://blog.aladin.co.kr/hendrix/1515926),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은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의 3번째 책은 <촌놈들의 제국주의>이다. 그가 그전의 블로그(지금은 없어졌지만 fryingpan.tistory.com)를 통해서 밝힌 계획에서 2권씩 병렬로 하여 2번, 4권의 책을 찍어내고 은퇴하겠다고 했었는데. 그 두번째 기획의 첫번째 권이 바로 이 책이다.

한권 한권 떼어내서 보아도 그 자체의 의미 전달이 강하게 오지만, 그의 저작 전반을 읽으면서 그 궤적을 살펴보는 것이 더 크게 그를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더 큰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1. 이를 테면, <아픈 아이들의 세대>에서 건설자본이 과잉으로 형성되어있는 한국 경제의 현실을 제기한다. 이는 아이들의 아토피와 이어진 부정적 미래를 만들어 내고 있는 문제만을 제기하고, 그 지속 불가능한 생태적 한계를 이야기한다. 이 아이디어는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와서 건설자본이 주도하는 한국경제의 종점이 어쩌면 '한중일' 전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스러운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또,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를 통해서 오히려 미국의 51번 째주에 편입하는 것만도 못하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는 한미FTA의 협상과정을 이야기했을 때, 이러한 이야기는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이르러서 현재의 FTA의 구상이라는 것이 지배층의 프로파간다인 '동북아 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주의적 프로젝트를 위한 구상의 일환일 수밖에 없다는, 즉 동북아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끼리의 충돌이 만들어 냈던 세계대전 이전의 기류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자유무역'이 '평화'를 만들어 냈다는 경험적 자료가 없다는 점에 의해서 뒷받침 된다.

3. 마지막으로 <88만원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를 가지고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세대간 위기라는 것이 강하게 20대들을 탈 정치화하고 그 것들이 20대를 가장 불행한 세대로, 그리고 만만한 세대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우석훈의 주장. 그 근저에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와 수출 중심의 경제전략이 강하게 깔려있다(그 마저도 다양한 전략이 아닌, 건설업 중심의 노가다 정신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대기업이라는 곳은 조직론적으로도 취약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이를 테면 '절이 싫으면 중의 나가라' 식의 협박만 난무하고 실제로 내부경쟁을 제약할 능력조차 없는 취약한 의사결정구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는 대기업의 문제가 장하성 같은 이의 주주총회에서 보여주었던 '소액주주운동'과는 조금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생태적 다안성을 지켜줄 수 없는 경제구조(대기업 중심의 공룡 경제)와 그나마 그 자체 행위자들의 경직성은, 결국 한국 경제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고 전쟁을 추동하는 경제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동북아 중심국가'의 환상은 밖으로 진출하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기반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조정하지 않은 노무현 정부의 '강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이른바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설명이 되는 민족주의자들의 팽창적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괴물 아니었던가? 우리는 현 정부를 비판하지만, 어쩌면 현 정부야 말로 노무현 정부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로운 희망 찾기

우석훈의 책들을 결론 장을 보지않고, 떼어서 보면 누구의 말마따나 '호러 경제학' 시리즈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의 우울한 분석과 달리 대안들에 있어서는 뭐랄까, 이러한 표현이 적절할 지는 모르겠지만 '상큼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왜 굳이 '상큼'하다고 하냐면, 구좌파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한 결론이 언제나 '자본주의의 경향적'인 공황의 시기를 기다려서 투쟁을 토대로 그 체제를 전복하자는 식으로 나와서, 실제로 어떤 정책적 대안을 만들 거냐 했을 때에 'all or nothing' 식의 구도로 쉽게 빨려들어가는 반면, 우석훈의 이야기는 그래도 개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펼쳐준다는 점에서이다. 게다가 그 것들의 속성이라는 것이 항상 빽빽한 것이 아니라 '탄력적'인 것이고 그가 좋아하는 표현에 의하면 '뮤턴트'를 양산할 수 있는 다양성과 안정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번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대안중 모델로 제시되었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보라. 국가들간의 상호 이해를 위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서 양국의 지식인들을 재구성하고, 그를 토대로 사회의 평화인프라를 구축한다. 쉽게 생각해보자, 처음에야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가는 유학생 중에 '내가 이 쪽바리들에게 지식을 배워서 이들의 심장에 칼을 꽂으리'라고 생각하는 생각을 가진 이가 한 명이라도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20~30년 상시적인 프로그램으로 상호간 교류가 일어났을 경우, 우리는 일본과 바야흐로 '대화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고, 중국도 가능하겠지.

이 쯤에서 어찌 쪽발이들과 되놈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겠냐는 '애국지사'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난 그들의 그런 "우국충정"이 얼마나 파괴적인 지에 대해서 굳이 부연할 필요를 못느끼고, 그건 기회가 된다면, 다시금 할 이야기가 되겠다. 간단하게 지금 내가 볼 때에 베트남이나 미얀마 등의 동남아 이주민들에게 한국인들이 새로운 '제국주의자'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혹은 아프간 선교사를 본 아프간 민중이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가 그들과의 상생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2만달러' 국가의 예의가 아닐까?

공존의 사고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물질적 기반을 포함하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중심에는 경제구조의 변환이 있다. 우석훈은 그렇다 하여 '경제구조의 변환'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 중심에는 그것을 바꾸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게 만드는 힘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다. 이를 테면, 10대가 끌고 나왔던 촛불 시위의 힘. '수능파업'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러한 시점에서 제대로 된 우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된다. 대화가 되는 우파 말이다. 사회의 안정성이 깨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해야하는 것은 언제가 우파가 아니었던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우파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조악한 이론적 수준을 가지고 한국의 실물경제를 바라보고, 또한 묵시론 적인 대안만을 품고사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더 많다는 생각이다. 왜 우석훈 하나여야 하는가? 영국의 Fabian Socialist Association 처럼 드글드글한 좌파 정책가를 양산하는 싱크탱크 하나 없는 대한민국의 자화상(물론 그들의 결론에 언제나 동의하는 건 아니다.). 가능하다면 공부를 마친후에는 좌파 사회과학자들이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제2의 우석훈, 제3의 우석훈이 아닌. 양승훈이고, 우석훈이고, 그리고 또 아무개이고, 또 아무개인 각각의 공고한 생각들을 가지고 대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파멸을 막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내파 영어달인 김대균의 영어연수 in Korea
김대균 지음 / 김영사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어 학습서에 대해서 내가 말한다는 것! 

 

내가 '영어학습서'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참 생소한 일이다.

그 만큼 나에게 지금 영어는 절박한 현실인데.

 

대한민국엔 참 많은 TOEIC, TOEFL, TEPS, IELTS, TOSEL,.... 수험서들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쏟아지는 영어회화, 영어일기 등이 있다.

 

하지만, 참 많은 영어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면서 느꼈던 생각은, 제대로 된 영어 학습 방법에 대해 논하는 책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처음 집었던 영어 학습법에 대한 책이 있었다. 바로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와 <영어 공부 제대로 하자> 였는데. <영절하> 덕택에 난 문법도 집어 던지고 한동안 영어 테잎과 CD만 열심히 들었었고, <영어 공부 제대로 하자> 때문에 한동안 프레젠테이션 준비만 했었다. (지금쯤 와서 생각해보자면, <영절하>의 방법은 굉장히 이상적이지만, 한국의 현실을 얼마나 고려했는 지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listening을 통해서 소리를 통해서 영어를 하나 하나 익혀가는 것과 말하기, 읽기, 쓰기는 함께 연동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영어 공부 제대로 하자>의 방법은 또 한편으로 한국적 해석법을 버려야 한다는 내 생각과는 좀 차이가 있다. 사실 한글로 된 정확한 뜻을 몰라도 영영사전의 문맥만으로도 그 용법을 정확히 알 수 있고, 그것이 마음으로 느껴지면 그 뜻 또한 한글로 말할 수 있다.우리는 우선 해석하기 보다 쓸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 영어 실력은 잘 늘지 않았었고, 한 동안은 영어를 놨었다. 2003년 영국문화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elementary course부터 시작하여 upper-intermediate course까지 이수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도 내 영어 실력을 측정한 적은 없었지만 혼자서는 내심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영어 하면 괜히 거들먹 거려보려는 경향마저도 생겼다.

그러던 와중 대학교 4학년 1학기에 TOEIC을 볼 기회가 생겼다. 생전 처음 본 TOEIC 점수는 430점이었다. 헛헛한 마음이 들정도로 황당한 점수였지만, 사실 당연했다. 지금 쯤 생각해보건데 어휘력은 Penguin Readings에 나오는 기준으로 하면 한 1800단어(intermediate) 정도나 되었을 것이고 문법은 완전히 놨던 나머지 elementary 수준이나 되었을까? 그냥 수업을 이수했다 뿐이었다. 하루에 영국인 선생과 10분 정도도 대화하지 않는 회화학습을 받고 숙제도 설렁설렁하고 Reading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RC, LC 모두다 바닥을 치는 것은 당연했다.(이제서야 솔직히 말해보는 거다.. -_- 사실 4년만의 고백이다.)

 

그 후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시험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벼락치기 TOEFL CBT 학습으로 유학이 가능한 점수를 만들기도 했고, 공군 사관후보생 시험에 필요한 만큼의 어휘와 문법, 독해력을 갖추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점수들을 맞고서 잠시 좋아했었지만 올해 다시금 영어에 대한 준비를 하면서 느낀바는 참 공허하다는 거였다. 회화실력은 영국문화원에서 깔짝대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고, 다시금 미드의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아 재미가 없었고, 참 많이 보던 어휘와 표현들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 다는 것. 어학은 놓으면 곧바로 도태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엮여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한 묶음으로 생각하여 시작했다. 미드를 보면서 중얼거리고, 읽고 싶었던 영국 저자의 책을 원서로 보면서 입으로 따라하고 있고, 그 후기들을 되도록이면 영어로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지도가 과연 있는 학습인가에 대한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대균의 <영어연수 in Korea>를 집었다. 즉 내가 이 책을 집은 이유는 내 생각에 대한 공증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약간 내가 잘못했던 점들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데..

 

예를 들면, 나는 어려운 책이라도 끝까지 조금씩이라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김대균은 쉬운 책을 많이 읽어 영어식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기를 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Roald Dahl의

 

그리고 LC역시 쉽게 들을 수 있는 수준의 Audio Book 부터 시작하라는 조언을 하는데. 그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마지막으로 영영사전을 보라는 것. 뭐 이유는 말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난 계속 내 방식대로 할 것이다. 약간 내가 요즘 자신감이 생긴 것은 TOEIC과 TEPS 문제집 없이 각각 800과 900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책 읽기가 굉장한 실력 향상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오디오 북 읽으면서 따라하는 것이 LC에 굉장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빠른 향상이 생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영어가 나에게 계속 떠나지 않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그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난 영어 점수를 획득하는 것보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이다.

 

굳이 외국에 나아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글쎄?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외국인을 만나기 위해서 외국에 나간다거나, 같은 커리큘럼의 수업을 굳이 영어권 국가에서 배우기 위해 가는 것이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이태원이나 강남이나 홍대나 어디에 가도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들이 즐비하고, 조금만 인터넷을 쑤시면 숱한 reading material들과 listening material들이 널려있고, 채팅 상대를 구하느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달인의 생각을 읽으면서, 또한 내 영어 공부 Plan을 작성해본다. Practice makes perfec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merican Accent Training (Paperback, 2nd) - A Guide to Speaking and Pronouncing American English for Anyone Who Speaks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2nd Edition
앤 쿡 지음 / Barrons Educational Series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If you want you to improve your English spe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기의 학교 -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닉 데이비스 지음, 이병곤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내 학교 생활 - 면돌이 라이프?

그냥 저냥 겨우 겨우 하루 하루 풀칠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집의 경제적 여건이라는 것은 '서민'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생활동안, 내 친구들은 우리집을 잘 사는 집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집'(정확히는 내 부모의 집)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뭇 면목동의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패턴을 가진 평범한 면목동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이 정확하리라고 본다.

왜 '면목동'을 계속 이야기하냐고? 내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위기의 학교>에 나오는 '실패한 공교육'과 가장 흡사한 상황이 펼쳐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이 흡사하냐고?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모두를 포함해서, 나의 관심사, 또는 약간 몸이 약한 아이들의 관심사라는 것은 언제나 '맞지 않고, 뺏기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학교 폭력이 심각한 수준라고 말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표본적 사례는 내가 살던 동네와 일치했다.

대부분의 '공부'에서 약간 이탈해있는 녀석들은 담배를 피울 줄 알았고, 고등학교에 진입하자 흡연률은 절반을 상회했고, '왕따'의 표본적 모델은 내 중학교 1학년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학교 나오기 싫어서 그냥 집에 틀어박히고 롯데리아에서 알바하거나 피자집에서 택트를 몰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술마시고 담배피우고, 여자와 관계를 맺는 녀석들은 즐비했다.

어른들의 기준에서 보면, 불한당 같은 양아치들의 소굴이었고, 우리가 매일 하릴없이 모여있던 '사가정역'은 우범지역이었으며, 진학률은 바닥을 쳤고, 실업계 진학비중이 40%에 가까운 서울의 지역은 아마 중랑구 특히 면목동이 전형적이었으리라고 본다.

내가 지금 깨나 먹물행세를 하게 된 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고, 그나마 20살에 각성되어서 재수라도 해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가는 녀석들이나 있을까? 내 또래의 상당수는 고졸에 하릴없이 알바나 하고, PC방에서 '레벨업'에 몰두하며, 온전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88만원 세대가 말하는 타겟이 어쩌면 그래도 '대학'은 나오고, '토플 책은 들어본'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되다면,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은 '대학' 언저리에 못가본 경우가 태반이고 '토플'과 '토익'의 구분마저도 명확하게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사교육비 증가가 가계에 압박을 주고 있어서, 물가상승의 원흉으로 일컬어지지만,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과외 한번 못 받고, 학원도 잘 안다니고 졸업하여 그냥 '고졸'로 끝내는 인생도 굉장히 많다. 의외로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시간은 많다.

덕택에 내 동생 역시 '먹물'로 살 수밖에 없는 마인드와 조건들을 갖추었으면서도, 공부의 길라잡이를 12년 교육동안 만나지 못했고(유일하게 만난 사람은 고3때 다닌 학원의 수학선생이었다고 한다), 미달난 지방의 사립대를 다니다가, 군대갔다와서 그나마 정신차리고 몰두하여 이제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처지다. 그에게 중고교의 기억은 끔찍하고, 그는 '의대친구' 하나를 찾을 수 없음에 동네가 '막장'이라며 욕을 하곤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이 너무 속물적인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로지 사회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에서 너무나 멀리 내 주위의 사람들이 떨어져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Trainspotting>, 그리고 영국의 교육

<Trainspotting>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마약에 쩔어서 사는 녀석들, 결국에 한탕을 노리지만, 그들이 살게되는 하루 하루가 심히 '환상적'이긴 해도, 행복하다고 말하기에는 한계를 모두다 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기에 '꼰대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이란 건 너무나 갈길이 멀게 느껴진다.



그들은 그냥 '불평 많은' '구제 불능의 낙오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인데, 내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 자체는 하나의 '실존적 문제'일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방치를 야기하며, 사회에서의 배제를 약속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난 이게 영화적 상황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닉 데이비스의 <위기의 학교>를 보면서 이게 영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잠시 우울했다. 그 우울증은 점차 증폭되고 잇는데, 왜냐면 이게 곧 우리가 직면할 교육의 현실일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위기의 학교>의 시작은 아이들과 실랑이하는 교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수라장인 교실, 반항하는 아이들, 잠시의 수습, 곧바로 이어지는 혼란의 소용돌이. 그게 지금의 영국의 교육의 현 주소다. 공교육은 확실하게 붕괴하고 있고,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재규정을 해야할 만큼 가치관의 혼돈이 자리하고 있다.

쉽게 말하는 이들은, 이게 다 대처리즘Thatcherism의 탓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꼬여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오히려 블레어 정부부터였다.

사회과학을 잠시 공부한 먹물들은 좀 알겠지만, 한동안 <제3의 길>이 엄청나게 히트를 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치 <제3의 길> '전도사'마냥,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새로운 길에 대해서 말을 했고,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새로운 진보'의 길을 예찬했으며 여전히 어떤 정당의 대표는 <제3의 길>이라는 신진보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제3의 길> 노선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장실패(우파의 실패)를 넘고, 국가의 실패-노동의 실패(좌파의 실패)를 넘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든다는 것인데, 사실상은 좌파의 실패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블레어는 노동당의 강령을 변경해야 했다. 여튼 그런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들이 핵심적으로 말하는 곳마다 꼭 빼먹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육'에 대한 강조였다. 예를 들어, 실직자에게 급여를 주는 것을 넘어서서(복지welfare), 실직자에게 재교육을 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평생교육시스템'과의 연계를 통해서 일하는 복지(workfare)를 만들어 냄으로써, 기업에게는 부가가치창출의 기회를 주고, 노동계급에게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을 획득하게 해 낸다는 전술이었다.

우파와 좌파가 공히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혁신적인 정책적 방향이라 할 수 있었고, 앤서니 기든스는 덕택에 '현자'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노동당의 정책의 중심에는 '교육'이 있다는 것인데, 평생교육(재교육)을 포함하여 교육을 통한 기회 구조의 제공은 제대로 형성되고 있는가?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손을 그대로 들고, 제스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서 저자는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는 '막장학교', '배틀로얄'이 펼쳐지고 있는 학교 현장을 발견한다. 공교육에는 더 이상 희망이 발견되지 않는다. 내버려 두면 곧 망한다. 그것이 그의 논지가 될 수 없는 현실이 기다린다.

 

영국의 교육, 막장까지 가는 길.

영국의 교육은 대처시절 교육부 장관이었던 베이커에 의해서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이 추인되며, 절대적인 재정의 보조가 축소된다. 그 이후의 노동당 정권에서도 실제적이 재정의 보조는 늘어나지 않았다. 문제를 바라보는 지형자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가난은 변명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통해서 인데, 사실은 이러한 명제는 잘 살펴보고 실제적으로 그것이 전제가 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살펴봐야 하나, 영국의 정권들은 이 말자체를 신봉해야할 절대적 언명으로 여겼다. 그러한 전제에서 영국의 교육의 문제를 살펴본 그들이 내놓은 혁파과제는 '교사들의 잘못된 교육법'으로 설정되게 된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학교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는 방법으로, '열정'이 부족하거나 '학생들을 계도하지 못하는' 선생들을 해고하는 방향으로 학교는 '개혁'되어갔다. 점차 열악한 조건들의 공립학교들은 학생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지원금을 작게 받게 되었고, 교육 여건은 점차 열악하게 되었으며, '학교 선택권'을 받은 학부모들은 좀 더 '괜찮은 학교'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열정적인 선생들 몇몇도 지쳤으며, 나머지 선생들은 다른 학교로 옮기거나 교사직을 그만두거나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학교들은 망해갔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학교 간의 성적격차는 언제나 '부의 격차'와 비례했고, 학습능력이라는 것 또한 가정에서의 '소득수준'에 따라서 편차를 대체적으로 보여왔다. 중요한 문제는 예산확보를 통해서 그러한 계급적 격차를 학교가 줄여나가고 교육적 여건을 열악한 지역에 더욱더 집중적으로 작동하게끔 제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 반대방향으로 '잘 나가는 학교'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고, 그들의 모범을 칭송하는 방향으로 정책방향을 잡았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빈민들이 다수 사는 구역의 학업 성취도라는 것은 마치 강남구와 중랑구를 비교하는 것과 같이 엄청난 차이를 수반하게 되었고, 그들의 학교는 제대로 된 기자재 하나 없이 학업 유인을 끌어내지 못하는 방향으로 미끄러져갔고, 학생들은 제대로 된 상담교사도 없이 폭력과 탈선의 길로 방치되기 시작했다.

교육은 '계급 격차'를 완화시키고 사회통합을 만들어내야했지만, 오히려 '계급 격차'를 벌려놓고, 사회적인 이반을 양산하는 기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교육은 그렇게 무너져 버린다.

반면 '자선사업'형태라는 초기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면세와 학생유치를 통한 지원금 확보를 같이 확보한 사립학교들은 풍부한 재력을 통해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으며, 중산층의 넉넉한 학비 지출을 통해서 높은 학업성취도를 성취했고, 모두가 가고 싶은 선망의 학교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의 지위와 같이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드디어 막장에 이르게 되었다. 빈민층의 지역의 학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에서의 '부랑아'들의 집단적 은신처가 되었으며, 여론은 그것을 '선생들의 잘못'으로만 만들어서 비판하기 시작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치려는 선생들의 노력이라는 것은 수포로 가게 되고, 이제 더 이상 아무도 희망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되며, 그나마의 노력을 할 교사들의 유인도 점차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학교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원이 부족하여 유능한 전문 치료사들의 과로가 누적된다면, '부적응 학생을 학교에 정착시키는' 전략이 먹혀들지 않으면, 그리고 학교 간 성적 순위표나 교사 성과급 제도같이 이 목표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인해 그나마 흔들리던 출렁다리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무단결석하던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학교 중퇴자들이 교문 밖으로 쫓겨 나왔을 때 예전보다 더 열악한 사회 안전망밖에 없다면, 더욱 많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청소년 범죄가 증가하고, 매춘은 늘어날 것이며, 노상강도도 많아질 것이다. 빈민가 아파트촌에서 맥없이 빈둥거리며 목적도 없이 절망에 차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도 늘어날 것이다(p.218).

 
   

 

탐사보도에 찬사를 보내면서, 다시금 묻는 질문 "희망은 어디에?"

한학수PD가 3년 전, 황우석 신화를 벗겨낼 때 드는 묘한 불안감과 허망함처럼, 닉 데이비스의 저작은 그의 '탐사보도'가 보여주는 엄밀함에 감탄하게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더 뭔가 안 좋은 것이 드러날 까 두려운 불안감과 희망 따위는 버려야할 것 같은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은 영국의 경우와 좀 다를까? 좀 다르긴 하다. 여전히 한국의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학구열' 하나는 끝내주게 갖고 있고, 그건 전쟁의 경험과 유교적 분위기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이 제공하는 폐허에서 싹을 틔웠던 '입지전적 경험'이라는 것은 경제적 규모의 성장과 함께 봉쇄되고 있고, 잠시 DJ의 '벤처기업' 붐을 타고서 창업 열풍이 불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 가능성이 많이 없어진 상태다. 사회는 규모의 성장만큼이나 고착화되기 시작했고, 계급이라는 것이 점차 '세습'되는 경향은 한국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명품소비에 열올리는 강남과 신도시의 '졸부'들의 부는 별 탈 없이 여러가지 '회계적 기법'을 통해서 상속되고 있고, 반대로 '가난'이라는 변명으로 인해서 교육의 기회에서 박탈되는 것은 '사교육 붐'의 이면에서 양산되고 있다.

한동안은, 학부모들의 열의와 희생을 통해서 '사교육' 기제는 작동할 테고, 서민층의 많은 수가 교육을 포기하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한세대 뒤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쉽게 기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미 '등록금 1000만원 세대'가 개막의 서장이 펼쳐졌고, 이제 학부모의 '쥐꼬리 월급'과 '불안정한 고용구조'는 그것을 충당시키기에 슬슬 힘이 부칠 테세다. 이미 교육에서의 '학비' 문제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교육계의 이해당사자들은 그 비용을 이미 '만만한' 학부모에게 전가시키기로 암묵적 동의가 형성된 상태다. '가난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언명은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만연해 있지만, 동시에 그 가난 덕택에 교육의 기회는 점차 포기되는 사례가 속출할 것이다.

더 문제는 그나마의 '4년제 대학' 티켓을 끊은 이들도 곧, '해외파'에게 잠식당할 것이며, 사회는 약육강식의 구도를 그대로 교육과 그에 이어지는 '구직'에서 펼쳐낼 것이다.

이제 희망을 말하자고 우석훈은 이야기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은, 도대체 이러한 사회적 안정성의 붕괴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만 다시금 꿈꿀 수 있는 것인가? 이제 정말 꿈꾸고, 그것을 만들어야 할 만큼 위기가 온 것은 아닐까?? 파국을 막기 위해 우리 다시 꿈을 꿔야 하는 것 아닌가?

서기상의 '착한 사람들에게'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착한 사람들에게 - 서기상 

 
1.왜 우린 우리 스스로 만든 권력이 필요하다는건
알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똑같은 놈 똑같은 권력이 싫고 염증이 난다
하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2.돌아봐요 아니 돌아볼 필요도 없지
지금 저들이 만든 저들만의 화려한 축제뒤에서
누가 직장을 잃고 거리를 떠돌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 나갈지 막막해 눈물 짓는지

3.지금은 우리가 스스로를 믿어야 할 때
부족하더라도 잡은손 놓치지 말아야 할 때
그러다 너무 힘들댄 같은 날에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로 욕이라도 실컷해봐요

#아직 부족해서라는 말은 말아요
아직 때가 아니라서라는말은 말아요
그건 완벽한 부모가 되기 전에
아기는 갖지도 낳지도 말란 말과 똑같잖아요 똑같잖아요.오-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8-03-3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일빳다..

양승훈 2008-04-01 00:33   좋아요 0 | URL
^^; 이 책 너무 좋더군요.. 쉽게 읽히고, 또 꼼꼼하기는 이를 데 없었고, 옮긴이의 상세한 설명 덕택에,, 내용이 꽂히더이다.

근데, 책의 내용은 너무나 암울한... 세상에 해야할 일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를 깨닫게 하는 책이죠..
 
싸우는 저널리스트들 - 국경 없는 기자회의 도전과 모험
로베르 메나르 지음, 성욱제 옮김 / 바오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난독증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기란 참 힘들었다. 아니, 내 자신이 책 읽을 때의 자세가 애지간히 산만했다고 치더라도, 문맥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뭐 오역을 탓할 생각은 없는데(몇 군데에서 오탈자가 발견되는 데, 그건 그냥 참을 만 했다.). 저자의 주장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에 대한 연대기 같은 느낌은 있었으나 내용 자체에 대해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다 읽고나서 생각하니 이 책은 뭔가를 주장한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그냥 자신과 '국경없는 기자회'가 살아온 궤적에 대한 회고 정도가 되겠다. 혹여 이 책을 읽고나서 '국경없는 기자회'의 핵심 입장에 대한 구조적인 논평을 하려한다면 그건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이 책은 별로 짜임새 있게 쓰여진 책이 아니다.

젊은 시절, 우리나라의 386처럼, 프랑스에는 68세대가 좌파 이념의 세례를 받았고, 역시 저자인 로베르 메나르도 그런 이념의 세례를 받아 트로츠키 사상과 상황주의(자주 언급되는 프랑스 68혁명 당시의 이념으로 일상성에서 벗어난 '국면'-즉 상황을 통한 문화적 운동이 주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에 탐닉했다가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날리다가, 처음에는 "제3세계의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현실을 세상에 전함으로써 여론의 주의를 환기시키"(p.63)위해 '국경없는 기자회'를 창설했고, 전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언론의 자유를 말하면서 활동했다.

초창기의 국경없는 기자회는 언론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언론에 대한 억압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공격하면서 싸워왔으나, 점차 언론의 자율성에 대한 내부 비판이라는 모토는 사라지게 되고,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나라에 대한 선전전이 주된 그들의 활동이 된다.

알제리, 르완다, 이라크, 세르비아 사태 등등에서 지역Local 단위의 언론인들에 대한 탄압에 대한 선전전을 하면서 환기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건 '기자의 자유'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들릴 뿐, 크게 '언론의 자유'에 수렴되는 지는 도대체 장담을 못하겠다.

그리고 그의 이념과 저널리스트의 삶이 어떻게 어우러졌었고, 어떻게 이념을 버렸는 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다. 그냥 '실용주의자'가 된 것일까?

그들도 인정하지만 스타 저널리즘(스타 저널리스트의 맹활약을 통한 홍보와 그를 통한 자금 확보Funding) 덕택에 국경없는 기자회가 성장했지만, 언론 자체가 클 수 없는 토양에서의 자생 미디어의 생성 조건 따위에 대한 언급(위에서 이야기했던 내부적 요소들)을 생략한 한에서는, 외부의 억압 정권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기자들을 구출을 할 수 있을 지언정, 새로운 대안 언론의 '창출'을 돕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것도 내가 볼 때는 그들이 가장 안전한 NGO 이기 때문이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들은 어떤 나라에도 실제적인 위협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 국가들의 '품위'를 장식하는 효과를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프랑스적 '허영'이 절정에 이르면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테러리즘'으로 상징되는 중심없는 게릴라들의 성장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루트인 언론-국가 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현 상황이 위기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위기는 언론-여론의 관계에 대해서 자신들이 눈을 감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옛적, 운동권의 팸플릿이 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국가와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민중들이 울었기 때문이었다는 뻔한 대답을 다시금 해야하는 시점이 되어버렸다.

그는 프랑스 대사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비판하는 데, 내가 볼 때는 이 말이야 말로 중요한 외부인의 제3세계를 볼 때의 유의점 같다.

   
  메나르 씨, 아프리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지요. 내가 아프리카를 다닌 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다른 사람들, 반대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정도까지 오는 데 200년이나 걸렸어요. 저들에게 시간을 좀더 줘야 합니다(p.192).  
   

이런 태도조차 갖추지 않고, 단순히 언론 자유의 침해라고 본인들이 규정짓고 모험을 하듯이 침투해서 선전전만을 펼치는 그들 기자들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기자들이야말로 그들의 사회에 더욱더 내밀하게 침투해서 그들 삶의 '결'을 더 엄밀하게 표현해야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이면 자신들의 가치관의 주입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순수하더라도 말이다.

진실어리진 못해도, 세상을 좀 환히 바라보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메시지를 만들어 나아가는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생각한 지 좀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느낀 바라는 것은 '기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같은 것으로 환원하는 순간에 무감각해져버리는 언론인의 둔함이다. 그 둔함을 피해가기 위해서 12000원의 돈을 지불했다는 생각에 본전 생각이 난다.

그는 여전히 볼테르의 주장(난 당신의 주장에 반대한다. 하지만 난 당신이 당신의 주장 때문에 억압당하는 것에 반대한다.)에 근거한 애매한 똘레랑스를 근거로 자신들의 활동-기자질-을 정당화하고 또 그럴 계획일 테지만, 난 좀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한다고 바라보고 있다.

지금 생각컨데 내가 그릴, 또 그리고 싶은 저널리스트의 상은 이런 게 아닐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