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표정훈 지음 / 궁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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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서주의자 표정훈

예전에 그의 <탐서주의자의 책>(마음산책, http://blog.aladin.co.kr/hendrix/1780997) 을 읽었었던 기억으로, 이 책을 집었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서점에 갔지만, 이래저래 방황하고 있었기에 선택의 시간을 재촉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집었다. 보통 내가 책을 사려할 때 고민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먼저, 그 내용이겠고, 둘째로 저자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하는 건 출판사인데, 이 책의 경우는 내용에 압도되었다기 보다는 저자에 대한 믿음에서 집은 책에 속한다. 번역서의 경우에는 출판사가 두번째에 이르게 되는데, 보통 단단한 번역을 허락하는 몇몇 출판사가 아니면, 한참을 읽어보고야 책을 사게 된다. 정말 그 책의 번역이 오로지 한 출판사에서 나온 한 판본에만 있을 경우가 아니라면야, 쉽게 책을 고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번역자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경우는 물론 제외겠지?

표정훈은 확실히 탐서주의자이다. 그의 장서량에서도 그렇고(대략 5000여권?), 책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렇고, 책을 만날 때의 접근 법이 그렇다.

   
 

 엽기적이라고 받아들일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새로 나온 책을 구입하거나 증정받았을 때, 제일 먼저 책을 펼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책마다 그 나름의 냄새가 있기 마련이다(p.17).

 
   

사실 누구나 그 냄새를 맡고서, 즉각적인 반응을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을 정돈하여 하나의 양상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책의 냄새를 맡는데, 난 좀 오래된 책의 '삭은 냄새'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 그리 고전적이지는 않아서 역시 가장 좋은 건 약간의 '향'을 첨가한 책의 냄새이다.

   
 

 책사냥꾼들이 있다.
 책사냥꾼이 보통의 사냥꾼들과 다른 점은, 사실상 일상 생활의 모든 장면들 속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는 안테나를 접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오랫만에 방문한 친구집 서가라든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서점이라든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라든가, 버리지 않고 쌓아둔 몇 년 전 신문더미라든가....(p.36).

 문자 금단 현상,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문도 들어오지 않고 변변한 책이나 책방 하나 없는 산골에서 사흘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사실상 치유 불능에 가까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 아닌 처방은 아마도,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포기한 시한부 말기 암환자 가족에게 의사가 건네는 이런 말밖에 없을 것 같다. "집에 모시고 가서 드시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게 하십시오."(p.40)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많이 책을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의 충고는 굉장히 실용적인 도움이 된다. 그의 서가 정리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책벌레에게는 추억담이 될 것이고, 그의 책 소비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카드명세서에서 '서점'으로 채워진 부분을 볼 때느끼는 약간의 '지름신'에 대한 망연자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서점 러시'에 대한 '습벽'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책벌레' 계보로 들어오려면 뻔뻔해야 한다. 할 말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 책장은 한약방의 약장과 비슷하다. 이 경우 책은 약장의 약이 된다. 체질과 증세에 따라 어떤 약을 얼마만큼 써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비록 당장은 필요 없다 해도, 언젠가는 그 약효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약 말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우수한 품질의 약재를 고르고 갖추어놓는 감식안이라 하겠다.

 물론 책에 대해서 약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하다'는 식의 표현을 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필요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고 각자의 처지와 취향에 따라서 그 필요한 정도가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가에서 먼지의 무게를 견디며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책이라 할지라도, 그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나는 버릴 수 없다(p.65).

 
   

이런 그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뒷부분의 이야기들(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의 출판계 이야기, 출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도, 마지막 장의, 현대의 디지털 사회에서 '책'이 어떤 가능성으로 '독서'가 어떤 자원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의 문제는 시점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결론이 뻔해서였을까?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정보화' 되기 위한 자질이라는 것이 '기기 사용능력'이 아니라, 그 컨텐츠를 통해서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창조'하는 능력이라는 것. 하지만 5년전이라는 시점을 감안해서 그냥 쉬이 읽고 넘어간다.

그리고 본인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칼럼리스트로써 '글을 팔면서' 그 컨텐츠들에 대한 '재발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22세기에도 책이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종이의 냄새를 기억하는 책벌레들이 살아있는 한, 아날로그 방식의 종이책도 여전할 듯 보인다. 촌스러운 게 고풍스러운 것으로 전환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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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정치 풍속사 - 나의 문주 40년
남재희 지음 / 민음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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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풍류랑.

남재희가 권영길에게 썼던 편지(http://news.empas.com/show.tsp/cp_pr/20070921n08907/?kw=%B3%B2%C0%E7%C8%F1%20%3Cb%3E%26%3C%2Fb%3E)를 프레시안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예전에, 우석훈의 블로그(아마 이글루스 시절이었으리라 생각한다)에서 보수주의자 중에서 여전히 디테일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남재희리라는 평을 듣고 그의 이름을 기억했었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산 죄로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를 본 적이 없었기에 그의 글은 굉장히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어설픈 감성적 진보주의자의 한 권의 책보다 더 날카로운 한 편의 글이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유신 이후 10대 의원부터 여권에서(당시의 여권이라면 민정당) 의원도 했고, 전두환에게 신임을 받기도 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도 했던 사람인, 관운이 있고, 이 쯤에서 우리가 추측해보건데 굉장히 꼴통에 TK 출신 정도, 아니면 KS 마크를 달고 있는 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을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술 사랑, 그리고 그의 주위의 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있었고, 진짜 '풍류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들과 그들이 마셨던 술, 그리고 그들이 마셨던 장소에 대한 복원된 기억을 읽어보고, 또한 그 당시에 대한 내 생각들을 되짚어보면서 당대의 '야사 한국 현대사'를 구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들의 '사실성'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삼아볼 수는 있겠지만, 의미상의 '진실'은 오히려 더 크게 와닿았었고, 당대의 지성사나 사상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생활에 대한 평전이나 자서전 류를 더 읽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이 책에 나오는 명사들의 이야기를 구구절절히 말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왔던 종로와 남대문, 세종로와 이태원을 가로지르는 동네들의 맛집들, 멋집들, 그리고 괜찮은 술집들은 한번씩 꼭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난 굉장히 '강남문화'에 대해서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인데, 그렇다고 '강남/강북'의 구도로 날을 세우고 싶은 건 아니고, 오히려 '종로/신촌/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근대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장소들의 역사와 현재성이 얽혀있는 그 느낌 자체를 좋아한다. 남재희가 가는 곳들은 내가 사랑하는 '하동관 곰탕' 집을 비롯하여 그런 구미와 어울리는 곳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와 한 번쯤 호기를 부리면서 한 잔 하고, 그의 분위기대로, 그리고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내 분위기대로 한잔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강남의 메트로폴리탄을 가장하고 댄디함을 입은 척 하는 이들이 벌이는 전형적이고 몰 개성적인 모습이 싫은 거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박학다식'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인물들에 대한 평 그 자체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들이 남재희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상 동향이나, 문화 동향, 그리고 그것들이 총 망라된 유흥가의 동향을 정확하게 꿰 뚫는 힘. 그것이 남재희가 가진 '박학다식함'의 출발 선상인 듯하다.

술 한잔과, 같이 마실 술 친구와,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그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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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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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블랙 아프리카의 상황은 특히 열악하다. 아프리카에서는 현재 전인구의 36퍼센트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p.18).  
   

지구 한 편에서는 비만을 걱정하고, 참살이(웰빙) 열풍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 다른 한 편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그득하고, 아이들의 무덤이 늘어나고 있다.

TV에서 김혜자 아줌마가 나와서 소말리아에 구호의 손길을 바라는 광고를 하고 있을 때, 북반부의 그나마 살만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는 채널을 돌리며, 피튀기는 액션이 난무하는 미드를 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한비야가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들은, 기행기로, 어드벤쳐로만 기억될 뿐, 그 실상에 대해서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기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40~50년전의 대한민국에 대한 기억이 있는 50대 이상에게 가난과 굶주림의 기억은 선명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자식들인 40대 이후(386 이후)의 세대는 그런 가난의 추억담을 노인내의 철지난 유행가처럼 들으면서 무시하곤 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에 편입했던 대한민국. 생활비가 없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잘라서 보험금을 타내려 했던 어떤 아빠의 이야기는 이미 잊혀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그냥 바쁘게 살고, 주위를 돌아보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숱한 사람들이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고, 생활보조금 몇 십만원으로 겨우 라면만 먹으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정도는 양반이다. 지구 반대쪽의 남반구의 아이들은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에 노출되어 죽어가고 있고, 최소한의 비타민 A가 공급되지 않아서 실명으로 치닫고 있다.

먼저, 식민지에서 독립된 이후 끊임없이 계속된 내전, 사실상 그것을 추동한 서방 선진국들의 제국주의적 태도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일상적인 경제활동과 생산활동은 불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리저리 내몰려져 피난만을 다녔던 난민들의 빈곤을 불러왔다.

또한, 식민지에서 자신의 국가를 제대로 세워보겠다고 '자주관리체제'를 도입하여 농업을 세우고, 자신들의 수요에 걸맞는 시도를 했던 나라들에게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무장 쿠데타라는 폭탄이 떨어졌다.

게다가, 21세기에 즈음해서 더욱더 고도화된 발전은 끊임없는 생태질서를 교란하고 있고, 선진국들의 자본은, 그나마 환경을 팔아먹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국가들의 토호들과 자본들에게 돈을 쥐어줌으로써 그 오염을 '묵인'받고 있고, 그 결과로 사막화등이 이어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죽어나가는 건, 농민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되었다.

비참한 세계를 정확하게 이 책은 보여준다. 읽으면 읽을 수록 문제는 간단하지만, 해결이 쉽지 않아보이는 난국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분유를 공급하겠다던 아옌데의 '사회주의 국가' 칠레는 "네슬레"와, 미국의 무기를 등에 업은 쿠데타로 인해 전복되었고, 자주관리를 도입하려던 상카라의 부르키나파소는 프랑스의 힘을 업은 쿠데타로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전복되었다.

이런 구조적 난맥이 있는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의 구호활동도 예전의 선진국의 잉여생산물을 무상으로 지원받던 방식에서, 시카고의 곡물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을 지불하고 사오는 방식으로 변화함에 따라서 국제 곡물가가 폭등할 때마다 여러 아이들에게 돌아갈 양식은 줄어드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 '하이브리드' 연료와 곡류를 태워서 생산하는 '에탄올' 연료에 대한 개발이 촉진됨에 따라서 사람 먹을 것도 없는 곡류는 졸지에 연료로 활용되는 판국이 되었다. 'agflation'이 도래한 것이다. 원래도 소가 먹을 곡류가 사람이 먹을 곡류보다 풍성했는 데 말이다. 소 팔자가 상팔자다. 또한 광우병 파동이 일어나자, 묻어버리는 소가 많은데, 쇠고기 소비량이 줄어들자, 유럽연합은 덩달아서 광우병과 상관없는 쇠고기도 땅에 묻어서 가격을 보존하고 계시다.

'경제적 기아'는 어쩌면, 자연환경의 일시적 변화와 일시적 전쟁 등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구조적 기아'는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폐부를 찌르고 후벼판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지구에 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공민이 될 수 있을까?

지글러의 대안은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혁파, 그리고 구호보다는 그 사회의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간단하지만 어려운 이 대안들에 대해서 이제 숙고만 할 시간이 지나가고,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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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과 오른손 - 좌우 상징, 억압과 금기의 문화사
주강현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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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면 아무런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보리라 선택한 책이었다. 주강현은 언젠가 TV에서 보았었는데,, 도올에는 못 미쳐도 상소리 잘 쓰면서 강의하는 민속학자다. 그의 강의는 차분하면서 씨니컬하고, 갑자기 격정적이 될 때가 있다.

이 책은 문화사적인 좌우 대칭, 그리고 지리의 배치 등을 보여준다. 그를 위해서 엄청난 자료를 동원해 이를 입증한다.

공간이라는 것의 정치경제학~ 그것에 대한 문화사적 분석이다..

사실 이 책은 단순한 이론 사회학을 뛰어넘어서 문화인류학이나 복식학의 범주를 질주하고 있기에,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같은 책 처럼.. 한번 눈에서 감을 일으면,, 쭈욱 그냥 지나치게 된다. 따라서 어느정도의 '문화인류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일반 교양서는 아닌 셈이다. 다만 오랫동안 천천히 따져가면서 읽고 '옳거니' 하면서 읽으면 음미할만한 책이다.

따라서 나에게 남는 것은 '다량의 정보가 홍수처럼 왔다가 갔다가 한' 기억이고.. 몇가지 문구가 기억 남는다.

왼손과 오른속은 선천적으로 '우열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듯,, '특정한 관계'(사회적 관계)한에서만 차별받거나 배제될 따름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 왼손에 대한 붐이라는 것도 사실은,, 왼손에 대한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으며, 그 왼손의 유용성의 척도를 강조하는 사람들 조차 사실은 '경제성'에만 주안점을 둘 뿐 왼손과 오른손의 대등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대칭을 추구하나 사실은 비대칭 적이며, 자연은 비대칭적이나 오히려 그러한 대칭에 대해서 비차별적이다..


난 왼손잡이야... 나나난나난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

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내 유치원 선생이 말한 것 처럼 왼손이 저주받은 손으로 거듭나지 않는 것은,, 결국 '유전자'를 갖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달려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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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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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서 다 읽은 것 처럼 지껄이는 책들이 있다. 예를 들면, 칼 맑스의 "자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존 스튜어트밀의 "자유론" 등등.... 사회과학에 대해서 소이연 쯤 하는 작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사실 그러한 책들을 읽은 사람은 5% 안짝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 5%도 후할지 모르지...

이 책도 정말 그러한 책 중에 하나다. 우리는 국정교과서 6차 과정부터 랑케와 이책의 저자 E. H. 카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역사란 무엇인지를 탐구하지만, 내가 볼 때, 국정교과서를 집필한 작자들도 카의 입장을 열심히 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흔히 우리가 그의 입장이라고 하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 데, 그 말뜻을 단순하게 자신의 주관이 살아있는 역사관으로 국정교과서는 "해석" 수준의 차원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경우, 에피쿠로스의 상대주의나, 니체의 상대주의와 카의 '해석'의 차원에서의 역사 인식은 어떤 차이를 갖게되는 가?

카는 국제 정치학의 패러다임으로 볼 때, 고전적 "현실주의자"로 분류한다. 현실주의자와 상대주의자....... 어폐가 있지 않는가?

그러한 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이 책을 탐독해야 한다.

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개인, 그리고 역사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에서의 "끊임없는 대화"는 변동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역사가, 그리고 그 둘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단순한 차원의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 해석들의 충돌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의 반영. 그것들의 상호작용의 앙상블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의 프랑스철학과도 쉽게 닿을 수 있다(물론 이 책에서 내내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의 이빨에 희생당한다.)

따라서 그러한 인식에서 포퍼, 랑케 같은 실증주의자들은 기껏해야 '사료를 모으는 수집가' 정도로 보일 따름이고, 못하면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책의 모든 부분에서 포퍼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가 거침없이 지껄이는 '사회주의'...

그런 맥락 상관없이 읽히는 국정교과서의 '역사란 무엇인가?'...

그 차이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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