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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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경을 넘고자 했던 한 사내의 기록. 넘지 못하는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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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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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약간 뒤끝이 심심하긴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빨려들어가듯 읽는 맛이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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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는 누구의 이름인가 당비의생각 1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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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후'를 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레닌의 유명한 발언이 다시금 등장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문제는 전환되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무엇이 이 상황을 만들었고, 무엇이 어떻게 이 상황을 이끌어가고 있으면, 무엇으로 이 상황은 진행될 것인가?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매스미디어에서 쏟아져나오는 기사를 넘어선 사회과학자들의 담론은 여전히 '서론'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최장집의 '정당정치'와 '대중정당론' 테제에 맞서는 좌파들은 소소하다. 그렇다고 뭔가 그 말에 따르는 것은 아니고, '이건 아닌데?' 수준에서 멈춰있는 듯해 보였다. 물론 '직접민주주의론'의 근거를 통해서 버티고 있는 듯하다. 혹은 '아직은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뭐 이 정도 수준의 담론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회적 현상이 있을 때, 발로 뛰는 매스미디어의 기자들과 PD 그리고 시민들과 그 반대편에 있는 정부야 지금의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까, 이 현상을 어떻게 묘사할 까 수준에서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자들은 지금 표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들, 푸코식의 '담론의 세계'의 역동성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하고, 이 것들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전망 혹은 계획들을 위한 예비 작업들을 진행하여야 한다. 그 것은 본인의 입장과 상관없는 지식인의 책무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숲과 나무를 함께 보아야 하는 과정일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본인의 아이디어가 필요할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절실한 순간이 되어버렸다. '~이후'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제 그래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사르트르와 다른 한편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의 68년처럼 인문사회과학의 통찰력과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물론 대중의 상상력은 중요하다).

 

당대비평에 대한 기억, 그리고 당비의 기획

사실 난 당대비평(이하 '당비')이 폐간할 때까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건 오직 한 가지 이유였는데, 강준만이 당비를 '현실과 유리된 지식인의 성'에 비유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마 '그놈의 순결한 태도를 버려라!' 정도의 주장을 강준만은 <인물과 사상>을 통해서 말하곤 했고, 어렸을 때의 각인은 <진보평론>이나 <이론>지, <문화과학> 같은 무크지는 과월호도 찾아 읽으면서도 이상하게 <당비>는 손도 대지 않게 만들었었다.

다시금 당비를 생각한 것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덕택이었는데, 창비에서 나왔던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에 나왔던 담론들이 맘에 안들었을 때,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에 나오는 이야기는 속속 귀에 들어왔다.

사실 한 2년 전만 해도 난 모순 덩어리임에 틀림없었는데. 이를테면, 난 나를 신좌파라고 생각했었지만 여성주의를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재수없음'과 함께 생각했었고, 생태주의에 찬성하는 제스추어를 취하면서도 그들의 운동과 '쁘띠 부르주아' 취향을 함께 떠올리면서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근육성의 노동운동과 강경한 힘의 정치 지향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것들은 이미 수차례 이야기 했었지만, 우석훈의 책들을 통해서 부숴버리고 당비가 폐간한 이후 단행본으로 냈던 기획들을 통해서 다시 섬세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물론 여전히 그런 상상력들의 디자인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이번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는 조망의 기획이 되겠다.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공저자들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기획은 덕택에 다채로움으로 펼쳐질 수 있었다. 물론 항상 그 놈의 다채로움과 '무르익지' 않음에 대한 위로 혹은 희망섞인 태도들의 난사가 좌파들의 성숙을 방해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먼저 그것은 이른바 민주화 체제가 마감되고 난 지금 그 민주화 체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민주화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정치적 변형의 과정은 민주주의에 관한 특정한 정치적 상상력에 바탕하고 있었고, 또 이를 강요하였다.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정치적 근대성의 완성이라 부르는 것이었든 아니면 급진적 사회운동 세력이 말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위한 정치적 기획을 은폐하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었든, 그것은 정치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에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이를 묻지 않은 채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중략)

이 책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글들이 다루려는 바를 굳이 요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사고하기 위해 우리가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쟁점들을 검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쟁점들을 다룸으로써 여기에 실린 글들은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하고 변형하고자 한다. 이젠 시쳇말이 되다시피 한, 그러나 여전히 귀담아들어야 할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란 말처럼 민주주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을 위해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직접적으로 상대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라는 순수하게 증류된 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적 행위와 함께 존재하고 기존의 정치적 제도를 통해 현상하며 또한 사회적 삶의 세계를 상상하는 공간을 통해 작용하기 때문이다(pp.8~9)

 
   

확실히 최근의 최장집과 일군의 제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라는 것과 물려 있다. 의식을 하기는 했나보다.

저자들 각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한국사회의 현재의 민주주의와 민주화라는 것에 대해서 탐색한다. 이는 최장집의 '민주주의의 제도화'라는 관점에서의 민주화라는 정치학적 개념의 탐색을 넘어선 다층적 차원의 것이다.

김원, 김진호, 서동진, 이상길, 이성민, 이영준, 이택광, 임옥희, 조주현, 최예륜, 한보희, 홍기빈, 홍세화.

책을 읽으면서 사실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진 사람은 홍세화였다. 가장 완고한 주장을 피리라 생각했고 역시 그러했다. '사회귀족'으로 한국사회를 읽으려는 관점. <쎄느강은 빠리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고2때 읽었을 때의 느낌이나 지금의 홍세화를 읽는 느낌이나 주사파에 대한 그의 관점을 빼면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여전히 그로 하여금 그런 주장들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 한국사회가 아직 여전히 그 자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장 맘에 들었던 글들은 사법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동진의 글이었다. 사실 문학 전공자들의 지젝, 들뢰즈, 네그리에 대한 이야기들은 좀 내 철학적 기반이라는 것이 약해서 인지 혹은 내가 너무 정치적으로 현안 중심으로 사고하는 인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는데, 서동진의 글은 딱 내가 원하는 깊이와 넓이의 수준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근본을 건들되 표층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현실의 모자이크와 그것들을 통한 담론의 재구성이라고나 할까?

김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진보적 정치학'을 하는 사람이 겪는 문제. 특히 더더욱 미국편향(그나마 영미 편향도 아니다)으로 죽어가는 진보적 정치학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마지막인 김진호(http://blog.aladin.co.kr/hendrix/1852299)의 글은 짐짓 종말론적인 느낌까지 나는데, 굉장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이고, 거의 불가능한 줄거리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학살의 희생자들이 풍기는 악취를 가장 잘 희석하는 향수가 만들어지더라도 그것은 완벽히 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파울 첼란이 <쉬볼렛>에서 말한 것처럼,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학살의 상황이 은폐된 과거의 학살조차 호출해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의 냄새에 맞장구치지 않을 수 없는 이가 그 죽음의 냄새를 폭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히 은폐되는 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틈새를 통해 사회적 학살은 기억의 통로로 비집고 나온다(p.247).

 
   

현실은 뭔가 꿈틀댈 수 있는 에너지를 불러냈고, 이제 거기에 상상력이 필요한 때가 되고 있다. 이런 기획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실의 힘들과 마주쳐 뭔가 의미있는 흐름들을 추동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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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 인권 운동가 오창익의 거침없는 한국 사회 리포트
오창익 지음, 조승연 그림 / 삼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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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말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 감수성

현실 세계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감수성이다. 정치 드라마나 전쟁영화를 보다보면 한 마디씩 악역을 맡은 이가 말을 한다. "싸빠진 감상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는 언제나 '권선징악'의 뻔한 스토리 구조였으나 우리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 이야기가 시큰둥하게 느껴지는 시점은 보통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서 부터이다.

왜 '학교'라는 곳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러한 동화가 재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 세계가 그러한 순수한 곳이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해서일 것이다. 계급 격차라던가 주거 환경의 차이등으로 인해 상이한 조건에서 자라왔던 아이들이 교실이라는 다양성이라고는 존중할 수 없는 공간에 '수용'되었을 때, 그들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성적과 덩치, 싸움의 스킬의 위계화라는 것을 통해서 뭉게지기 시작하는 순간. 동화는 슬슬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남자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대다수의 여자 아이들(이 말에는 내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 지독하게 깔려 있을 수 있다)의 경우 중고등학교 때까지 로맨틱 소설로 이어지는 이른바 '감수성'을 유지하는 책 읽기를 하긴 하지만, 동화적 세계가 주는 '꿈과 모험의 세계' 그리고 선과 악, 좋음과 싫음에 대한 감수성들이라는 것들은 어찌되었건 경향적으로 무뎌지게 된다.

게다가 입시의 현실이라는 것들은 그러한 '감수성'을 정말로 '싸빠진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이다. 내가 빅뱅을 좋아하든지 아니면 쌩뚱맞게 90년대의 얼터너티브를 좋아하는 지 따위의 취향이라는 것들은 대학 입시에 안나오기 때문이다(물론 논술에 그런 것들을 넣어서 쓸 수 있는 '창의적 인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진심이다). 그 보다 내가 봄의 꽃들을 좋아하고 새 소리를 들으면서 물에 발담그고 싶어하는 그 정서라는 것들은, 여행사와 팬션 광고의 아이템은 될 지언정 내 삶의 자양분은 못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감정의 메마름이라는 것들의 연속은 기껏해야 소비욕구로 분출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대학을 입학했을 때, 건국이래 2000년대 전까지 대학이라는 공간은 부숴진 감수성을 다시 조립하고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책임성을 덧입힌 버전의 감수성을 제공하는 토양이 되기도 했지만, '짱돌을 집어던지고 토익책을 든' 88만원 세대(내 생각에는 80년대생 이후)에게 그런 대학은 어렴풋이 듣기만 했던 '전설의 고향'인 셈이다.

어쨌던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감수성'이라는 것과 단절된 상태로 살게끔 유도된다. 물론 몇 몇의 감수성이 예민한 잘 안팔릴(시장성이 없다는 것) 나 같은 인간들은 그놈의 감수성 때문에 세상을 곱게 볼 수가 없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선택으로 일궈진 잔인한 세계와 그것을 유도하는 잔인한 권력에 대해서 숨이 가쁜 현상을 느낀다.

'인권'이라는 말이 사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한동안 '인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때, 난 그 말이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지배계급의 사치라고 생각했었고, 그 이후에도 '민주주의'라는 말과 '혁명'이라는 말에 더 몰두 했었다.

근데 지금 다시 '인권'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는 데, 그건 내가 '인권'에 대해서 재정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권'을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쳐다보는 지에 대한 궁금이 들어서이다.

아직 '인권'에 대해서는 잘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권'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으려면 '감수성'이 풍부해야 한다는 것.

오창익의 이 책이 주는 장점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이 굉장한 정보를 주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굉장한 양의 정보를 주는 책을 읽기 위해서는 한국의 현대사를 읽는 것이 훨씬 유익할 테고, 동시대의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더 많은 자료를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은 세상을 여전히 굳은살 박히지 않은 맨살로 느끼는 사람의 한국사회 보고서다. 세상에 찌들어 이미 그놈의 망할 놈의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걍팍한 한국인들을 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잠재해 있는 우리 안에서 '정의'라는 것과, '인권'이라는 것을 다시금 소환한다고나 할까?

대학교 교정에 혹여 여전히 사회과학 세미나라는 것이 있다면, 혹은 주부들끼리 책 읽기 모임이라도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일상에서 만났던 바와 겹치는 지점들은 없었는지, 그것에 대해서 본인 생각들을 나눠보는 것도 굉장히 괜찮은 자극과 한 주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말라붙어버렸는 지를 자각하는 순간이 그대들이 다시금 삶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될 것이다.

생활인으로써, 느낄 수 있는, '짜증'이 확 났다가 집에서 자고나면 잊어버리는 그런 이야기들의 모자이크다. 비릿한 현대 한국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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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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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미학의 대한민국 - 직선들의 대한민국

7살이 넘은 이후로 우리집(정확하게는 내 아빠와 엄마의 가계)이 잘 살아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21살 아파트 입주 전까지 우리집 식구들은 단독주택에 거주해왔다. 게다가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 중의 한 군데인 면목동(http://www.cyworld.com/flyinghendrix/262780)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난 그것을 하나의 저주로 인식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체질적으로 몸이 약한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 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석훈의 <아픈아이들의 시대>라는 저작을 읽으면서였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욕망의 공간이고, 어쩌면 도시화된 삶의 양식으로서의 정점(타워팰리스와 來美安 등으로 연상되는)에 위치해있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아토피를 비롯한 생태적 재앙을 동시에 창출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면서 다시금 우리 동네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또 어쩌면, 여전히 3층을 넘는 골목이 동네 중심 상권에도 잘 없고, 또 대부분의 주거형태가 단독주택이라는 것이 굉장히 아름다운 동네임을 반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최소한 우리 동네 애들이 사회에서 영악한 속물로 살지는 못해도 그래도 순박하게 살고는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제(6.19)부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1차 후퇴 발언이 있었다.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 한 켠에서는 시민사회운동의 승리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내심 한편으로 그 주장을 "국민 여론을 다시금 우리편으로 만들면 하겠다는 이야기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살펴보자면, 한반도 대운하를 떠나서 우리 내면에 깔려있는 '건설미학'에 대한 검토가 절실하다는 것. 우석훈이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서 하려는 말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

한강은 원래 여러가지 지류가 겹쳐져서 만들어진 그런 강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한강을 연상할 때 한강을 건너는 다리들과 넓고 깊은 강의 줄기(직선화된)를 떠올린다. 또 고수부지 등을 떠올릴 것이다. 치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강이 구성되었다손 쳐도, 이런 직선화의 경향은 비단 한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남대로를 떠올려보라. 정확하게 사각 바둑판을 연상시키는 도로와 건물의 배치. 인위적으로 배치된 잘계획된 도시. 그것들이 우리가 꿈꾸던 서울의 모습이었을까?

유럽에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거리문화이다. 길거리 장터, 길거리 음악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철학책을 보고 있었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쉽게 듣고, 또 그렇게 쓰여진 여행에세이를 읽으면서 유럽을 상상하고 다시금 환상적인 그 거리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 같은 시간에 동대문 시장에서는 풍물시장을 애초 만들어주겠다는 전임 시장의 결정을 번복하고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겠다는 현 시장의 주장과, 그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소규모 자영업자들-노점상을 발견한다. 난 이 두 주장 중 누가 더 온당한지의 여부를 가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문제들을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심상에 대해서다. 노점상들을 떠올릴 때, 구질구질하고 좀 촌스럽고, 좀 냄새날 듯한 심상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는가?
반대로, 그곳에 들어서게 될, 새로운 건물과 잘 정돈된 쇼윈도우등을 떠올리면서 좀 세련된 듯한 심상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인식이 모순되면서도 유지되는 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거리문화를 부러워하면서 높은 건물과, 백화점식의 배치, 뉴요커식의 생활패턴을 동시에 욕망하고 있는 사람들의 나라. 세입자의 처지이면서도 자신의 동네가 '멋진' 뉴타운이 되기를 기대하다, 실제로 뉴타운이 집행되어 폭등한 전세값 덕택에 쫓겨나는 영광을 누리는 나라.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어있는 것일까?

 

이성과, 상식, 그리고 미학

표준적인 경제학이 상정하는 전제가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며, 자신에게 최적의 결정을 한다는 것. 물론 정보경제학등을 통해서 반박되고 있지만, 그 주장의 '주관적 속성' 그 자체는 쉽게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최소한 하고는 싶어한다는 것 말이다. 즉 '이성'에 기반을 둔 판단을 최대한 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그 '이성'이 작동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경우에서 이성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면,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구축된 믿음 체계, 이를테면 한국에서 돈이 되는 것은 주식보다는 부동산이다. 뭐 이 정도만 되어도 이해할 만하다. '상식'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식이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식을 뛰어넘은 이상한 기대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2008년 총선에서 서민들의 지구였던 노원병에서 뉴타운 심리로,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망했던 진보정당의 노회찬 후보를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가 꺾고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때의 그 뉴타운 심리라는 것을 추동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집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뭔가 희망하고 있다는 역설.

그 한편에서 우석훈은 '건설미학'을 발견해 낸다. 무엇인가 계속 건설을 통해서 지어야 하고, 낡으면 때려부숴야하고, 왠지 모르게 새로운 건설사업이 시작되면 경기가 살아날테고, 그러면 자신의 삶의 조건들 역시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과, 그렇게 지어진 건물의 전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일종의 '아름다움'의 환유. 조감도 한방이면 움직이는 민심까지. 이건 일종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우석훈은 이야기한다.

우석훈이 말하는 것은 대운하에 대한 기술적 논의가 아니라, 대운하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공범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의 구상을 위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좌파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구상은 구체적 정책을 향해서 진행된 적도 없지만, 동시에 대안담론(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을 형상하는 쪽으로는 더 크게 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의 한켠에 다시금 개발주의, 개발미학의 껍질을 벗겨내지 못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태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있었겠지만, 그건 '정치적인 것'이 아닌 그냥 '환경문제' 자체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한국의 좌파들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도그마들이 쳐놓은 격자 안에서만 춤을 추면서 '전복'을 노래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변환은, 가장 섬세하게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바라봄부터 시작을 해야하며, 자신의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그것이 사회적 흐름이 되었을 때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정치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다.

우석훈은 그러한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의 중점에 항상 문화를 갖다 놓는다. 문학이 숨쉬면서 세상에 대한 펜을 들고, 예술가들의 예민함이 세상에서 무뎌지고 있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다시금 본질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순간. 그 순간이 어쩌면 새로운 세상으로 한걸음 내디딜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좌파는 세상과 부딪히면서 꿈을 꾸고, 그 꿈을 가지고 다시금 세상에서 벼릴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내며,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차근차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까지 우석훈의 저작들은, 보통 우울한 현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지속불가능성', 그리고 정책적 대안의 순이었는데,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오히려 거시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궁극적인 세상을 말해야 하는 지에 대한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저작들과 다르고, 또 최근의 '한국경제 대안찾기' 시리즈와도 차별화 된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자그마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소망이 한껏 들어있는 저작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우리들의 세계는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가? 상상을 멈추지 말아야지. '지속가능한'이라는 말이 지워지지 않을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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