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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신간 『굽이치는 강가에서』로 나에게 다가온 작가 온다 리쿠. 그녀에게 굵직한 상을 두개나 안겨준 『밤의 피크닉』까지 읽게 되자 드디어 그녀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도무지 어떤 내용의 책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 붉은 표지의 책 속에서 걸어나오는 남자가 그려진 책 표지를 보고서야 "책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을 어슴프레 짐작할 수 있었다.

구렁이란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매력도 그런 구렁 같은 것이길 바라며, "책에 대한 책"을 향한 무조건적인 지지로 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각 장마다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에서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소설 책을 찾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그 책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라는 것이다. 단지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 속에서 책의 위력이 증폭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제2장 이즈모 야상곡」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작가를 찾아 두 편집자가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제3장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에는 앞으로 소설로 쓸 이야기가 담겨있다.

「제4장 회전목마」에tj는 이 작가가 이 책을 지금 쓰기 시작했으며, 작가가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책을 쓰는지, 그리고 4부작인 책의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히려면 책을 금지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제1장에 등장하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은 익명의 작가가 자비로 200부를 제작해 배포했으나 곧바로 회수되었다는 수수께끼의 책이다. 또 그 책에는 단 한 사람에게 단 하룻밤만 빌려줄 수 있다는 금기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을 소장하고 있거나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상야릇한 환상을 품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느날 우연히 알게 된 책 한권이 절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책을 읽기 위해 온 헌책방을 뒤졌던 기억이 있다. 언제든지 사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아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으리라.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건 여기 있는 우리들과 몇몇 사람들에게 국한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독서란 본래 개인적인 행위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책을 좀 읽는다고 자만하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도 터무니없는 환상이에요.  인간이 한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거든요. 서점에 가면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늘 절망합니다. 내가 읽지 못하는, 천문학적인 수효의 책들 중에 내가 모르는 재미가 넘치는 책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어요. 이야기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만, 그러니까 뭐랄까.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삼월》 또한 독자가 대단히 원하는 작품인가 하면,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 끌어내봤더니 빛을 잃어버리는, 그런 작품일지도 모르죠." <「제1장 기다리는 사람들」 中, p58>

나 또한 아직 읽지 못한 많은 책들을 보며 좌절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열심히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책들은 조조지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근사한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그런 절망감을 희석시켜 버리곤 한다. 책에 대한 갈망, 이것 또한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인 듯하다.

책 속의 책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 또한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이야기들은 『흑(黑)과 다(茶)의 환상』,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의 백합의 뼈』라는 가제로 곧 출간 예정인 책들이다.

온다 리쿠, 그녀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이다. 그녀의 책을 한번 손에 들면 엄청난 흡인력 때문에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고. 비록 그 책을 다 읽었다 하더라도 또다른 책을 찾아 헤매게 된다. 불행인지 아니면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그녀의 책들이 한국에서는 많이 소개되지가 않았다. 그녀의 다음 작품들을 손꼽아 기다려 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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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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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숨가쁘게 몰아치는 이야기보다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읽고 싶어지는 계절이 왔다. 아무래도 가을이 찾아왔는가 보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가 만난 책이 바로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다. 수식이라, 게다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것일텐데 과연 따뜻함이 느껴질까?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문득 『뷰티풀 마인드』의 천재 수학자 존 내쉬가 떠올랐다. 그래, 수식이라고 차갑고 딱딱하라는 법은 없지 싶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박사는 80분 밖에 지속되지 못하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어제의 기억은 20여년 전 그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날의 기억이다. 그는 80분 밖에 지속되지 못하는 자신의 기억력을 돕기 위해 입고 있는 양복 여기저기에 클립으로 메모지를 붙여 놓았다. 죽은 형의 미망인과 함께 살고 있는 그에게는 파출부가 필요했지만, 그는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파출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오직 '수식'뿐이었다. 그는 모든 사물을 수식으로 대했다. 파출부의 생일과 전화번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었고, 머리가 평평한 파출부의 아들에게는 '루트(√)'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 매일을 수식과 보내는 박사에게도 조금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는 한신 타이거스의 왼손 투수 에나쓰 유타카의 열렬한 팬이었다. 박사가 사고를 당한 후에 에나쓰는 다른 팀으로 이적하여 그곳에서 은퇴를 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박사에게 에나쓰는 여전히 영웅이었다. 비록 한번도 야구장을 가거나 중계를 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승률을 계산할 수 있었고, 기록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박사는 어린 아이를 끔찍히 여겼다. 어린 아들을 혼자 집에 두고 온다는 파출부의 말을 듣고, 박사는 아들을 데리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한번도 자식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박사에게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박사는 루트를 사랑했다. 가족이라고는 파출부인 어머니 밖에 없는 루트에게 박사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좋은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박사의 기억력은 점점 짧아져 결국에는 사고를 당한 이후의 것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이 슬픈걸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슬픈걸까? 그건 아마도 후자 쪽일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기억되진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해 질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해 질 수 있는 어떤 기억도 떠올릴 수가 없을테니 말이다. 함께 있으면 행복한 사람들, 그에게 많은 추억들을 선사했던 사람들, 그러나 결코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의 모습이 너무 슬프다.

284번째 학장상 기념으로 받은 박사의 시계와 파출부의 생일 2월 20일,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교집합이라는 돈독한 관계를 찾아내는 박사. 그런 박사에게 어느새 나도 중독되어 버렸는지, 책을 덮고나서 내 생일이며, 신발 사이즈, 나이 등을 적기 시작했다. 의미있는 숫자를 발견하기 위해 한참을 적어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서 서운해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문득 나와의 교집합을 찾지 못해 나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들이 떠올랐다. 박사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서툴렀는지도 모른다.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박사처럼 직관적으로 수식을 찾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더이상 이 가을이 외롭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정말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따뜻해진 내 가슴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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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참 독특한 제목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표지도 참 예뻤다. 과연 치바는 어떤 사신(使臣)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들었다. 치바가 사신(死神)이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 보니 '死神'이라는 작은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겁이 났다. 난 저승사자라는 것을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쳐지는데. 그래도 예쁜 표지를 믿으며 한장 한장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신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던 그런 모습의 사신들이 아니다. 우리가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듯이, 그들은 '사신(死神)'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의 일이란,  '죽을 예정인 사람'이 맡겨지면 1주일 동안 그 사람이 죽어도 되는지에 대해 조사를 한 후 '가(可)' 혹은 '보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보고한다. 만약 '가'로 보고가 되면, 그 다음날 그 사람은 죽게 된다. 하지만 '보류'라고 보고하는 사신들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예정대로 죽게 된다.게다가 그들은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틈만 나면 음반매장에 들러 음악을 듣고, 음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대충 일을 마무리 짓기도 한다. 또 더 오랫동안 음악을 듣기 위해서 일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시간 끌기 기술을 사용하여 마감임박을 즐기기도 한다. 치바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가 다른 사신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일을 할 때는 항상 비가 내린다는 것과 다른 사신들과 비교해 좀 더 성실하게 일을 한다는 점이다.무시무시한 저승사자보다는 오히려 영화 <시티오브엔젤>에서의 천사 세스(니콜라스 케이지 역)를 떠올리게 하는 사신들이다. 하지만 인간(맥 라이언 역)을 사랑하고 감정적이었던 천사 세스와는 달리 사신 치바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치바가 조사를 맡았던 6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고객불만 전화를 응대하며 힘들게 살고있던 중 찾아온 가수의 기회를 눈치채지 못한 여자, 의리를 소중히 여겨 복수를 다짐한 야쿠자, 사랑하는 아들의 복수를 하려는 늙은 어머니, 짝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고 싶었던 옷가게 점원,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하면서 또다른 살인을 계획하는 살인 용의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낸 미용실 노파, 그들 앞에 나타난 치바는 어김없이 '가'를 보고 하지만, 단 한명에게만은 '보류'를 보고한다. 치바는 가수가 될 기회를 얻은 가즈에가 그 기회를 잡든지 말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보류'를 보고한다. 결국 가즈에는 그 기회를 잡아 인기많은 가수가 된다.

어떻게 보면, 긴 내 인생에서 고작 1주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될 수도 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게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고작 1주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 1주일 후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1주일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 하나로 치바의 마음을 돌려 놓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가즈에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치바보다 먼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멋진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괴로워하며 죽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가즈에가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괴로워하며 치바를 실망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 것 같지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래서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우리 삶에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잊지 말자. 화이팅~!


[기억에 남는 구절]

"죽는 것은 두렵지 않나요? 내 역할은 눈치 채고 있겠죠?"

"당신은 내가 죽는 것을 지켜보러 왔지요? 그야, 죽는 것은 두렵지만 말이죠.

더욱 괴로운 것은... 주위 사람들이 죽는 일이죠. 그에 비하면 자신이 죽는 것은 그나마 낫다니까요. 자신의 경우에는 슬퍼할 겨를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가장 최악인 것은..."

"최악인 것은?"

"죽지 않는 것. 오래 살면 살수록 주위 사람들이 죽어가요. 당연한 일이지만."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자신이 죽는 것은 크게 두렵지 않아요. 아픈 건 싫지만. 미련이 남는 일도 없고."

"정말 없나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까지 포함한 납득일지도 모르죠."

 

<치바미용실 노파의 대화,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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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오사키 요시오, 낯선 이름의 그는 전작 『파일럿 피쉬』를 통해 호수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내 감성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준 작가이다. 요즘 같은 가을 날에는 그의 책이 딱일거라는 설레임으로 이 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투명한 느낌의 표지에 부드럽게 프린트 된 아디안텀의 사진, 지나다니면서 마냥 이름모를 잡초로만 여기고 보았던 그 식물이 "아디안텀"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트 모양의 잎을 가진 아디안텀은, 한번 시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잎이 말라가는 특징이 있어 그 때를 "아디안텀 블루"라고 한단다.


 
기치죠지 도큐 백화점의 옥상.

<월간 발기>라는 잡지사에서 편집일을 하는 야마자키 류지는 3개월 전에 암으로 죽은 연인 요코를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은 요코가 쇼핑을 할 때 류지가 항상 기다리고 있던 곳이고, 요코가 좋아하는 인디안텀 화분이 놓여 있는 곳이다.

그런 류지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우연히도 며칠째 함께 류지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히로미, 그녀는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바람을 폈던 히로미의 남편은 동반자살을 선택했는데, 히로미의 집과 반대 방향의 전차로 뛰어 들었다. 히로미는 자신의 집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든 것이 분하다고 했다.

그것이 병이든 자살이든, 사랑이든 배신감이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여전히 죽은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디안텀 블루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똑같은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들, 그들은 왜 옥상을 선택했을까? 어쩌면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하늘에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우울로 그들은 아디안텀 블루를 온전히 겪어내고 있었다.

(류지) "우울 속에서 태어나는 따뜻함."

(히로미) "우울 속에서요?"

(류지) "그래요. 그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몸을 비틀듯, 몸의 일부분이 비틀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따뜻함."

(히로미) "나도요?"

(류지) "그래요, 당신도. 그것을 얻기 위해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만약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이 괴로움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렇죠?

아디안텀 블루를 극복하는 줄기만이 겨울을 나고, 왕성히 살아가죠. 그렇게 되면 비로소 내 것이 되고,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아디안텀 블루는 찾아오지 않아요."

<본문, p205> 


<월간 발기>의 모델 사진을 찍으면서 만난 류지와 요코, 그들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조류도감과 식물도감을 함께 보면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찾아온 그녀의 사형선고,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1달 밖에 되지 않았다. 지난번 유럽 촬영에서 니스에서 죽고 싶다던 그녀의 말을 기억해 낸 류지는 그녀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온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또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 편안하게 눈감을 수 있게 해준다. 함께 떠난 일본으로 쓸쓸히 혼자서 돌아온 류지는 요코를 잊지 못한채 옥상으로 향했던 것이다.

히로미마저 더이상 옥상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을 때, 류지는 고독을 확인하고 "우울 속에서 다시 일어선 아디안텀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던 요코의 말을 되내이며 보통의 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류지) "잘, 말은 못하겠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야. 내가 요코를 기억하고 있는 한, 너는 내 마음속에서 살아 있을 거야. 그거 믿지?"

(요코) "응."

(류지) "믿을 수 있지?"

(요코) "응."

(류지) "그럼 요코는 내 안으로 이사하는 거야. 그뿐이야."

<본문, p337>


어쩌면 <파일럿 피쉬>와 이 책은 연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월간 발기>의 편집장이라는 것과 방향치 등의 인물 설정이 같기 때문이다. 대신 <파일럿 피쉬>에서는 40대의 류지를, 그리고 이 책에서는 30대의 류지를 그리고 있다는게 다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두 작품 모두 상실과 기억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작가가 한명 있다. 바로 『상실의 시대』의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다루고 있는 그것은 무겁고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면, 오사키 요시오가 말하는 상실과 기억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해보면 상실과 기억은 정반대의 말 같지만, 알고보면 이음동의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상실한 후에는 반드시 기억이 뒤따른다. 상실감은 금방 잊혀지지만 기억은 오래 남는다.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상실의 아픔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사랑에 대한 상실감은 잊은지 오래인 것 같은데, 그 기억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자신은 잊더라도 자신과 함께 바라본 바다의 색깔은 잊지 말아달라고 했던 요코의 말도 그런 뜻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자신을 오래동안 기억해 달라는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이런 계절이면, 그런 기억들이 떠올라 괜히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정말 가을이랑 잘 어울리는 책이다. 덕분에 책을 핑계로 우울한 마음을 털어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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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
피터 드러커 지음, 권영설.전미옥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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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 "혁신"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라
고 정의되어 있다.

현재 우리는 혁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사업에는 혁신이라는 말이 곧잘 붙곤 한
다. 그러나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저런 류의 혁신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게 사실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철학과 미래사회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으로 널리 알려진 피터 드러커, 그는 혁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혁신은 목적과 초점을 갖고 조직의 경제적, 사회적 잠재력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노력이다. (p14)

20세기에 창출된 가장 위대한 혁신은 바로 '경영'이다. 경영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 개인이 서로 다른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에 모으고, 그들을 함께 작업시키는 과업을 가능하게 해준 '실용적
지식'이다. 경영은 현대 사회를 정치 이론이나 사회 이론에도 없던 완전히 새로운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경영 덕분에 우리 사회는 조직 사회(society of organization)가 되었다. (p23)

그래서 혁신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가장 위대한 혁신이 '경영'이라니, 이제 갓
신입사원 딱지를 뗀 나와는 정말 거리가 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이 참 쉽게 읽혀졌다.

사실 책을 손에 들었지만 첫 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다. 경영에는 영 문외한인데다, 게다가 그의 저서를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용기내어 한장 한장 넘기면서, 책이 어찌나 쉽게 쓰여져 있던지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그렇다고 절대 가벼운 내용의 책도 아니었다. 덕분에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읽게 되었다.

 읽다보니, 혁신과 경영이라는게 꼭 대기업 총수나 간부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나같은 말단 사원도 마인드만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는게 혁신이다. 항상 뭔가를
배우려는 자세로 임하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며, 또 그 변화를 위협이
아닌 기회로 볼 수 있는 안목만 가진다면 누구나 위대한 혁신을 할 수 있다는 것. 굳이 직장이나 사회
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나 자신, 한 개인에게도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다.

아무리 피터 드러커의 지식을 주입하고, 책을 몇 번씩 읽는다고 해서 위대한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혁신하고, 스스로의 경영자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류의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도 쉽게 그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나도 처음보다 더 정독하며 한번더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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