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회가 서구열강을 중심으로 세계 지배 구도와 세계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까지도 이른바 ‘여류 작가’들은 자신을 숨기고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여자는 어린아이와 남자의 중간쯤에 있다 하시고, 새뮤얼 존슨 박사는 여자가 글을 쓰는 일은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처럼 모양은 좋지 않아도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칭찬하시는 지경에 어지간한 용기나 배짱이 아니고서야 감히 ‘여류 작가’로 커밍아웃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 한 칸’에 그토록 목을 매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이 투표권을 갖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하고 도발적인 일로 취급되었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한없이 무애한 영혼의 자유,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기만의 삶을 주장하는 일이기에.

 

울프는 여성이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균 열 세 명의 아이를 낳고 평생토록 가사 일을 전담해야 했던 당대 여성들은 그녀들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운명에 놓여있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만약 그녀들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탐험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사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과 모든 조건들이 구비되었더라면 그녀들 개인의 생은 물론이고 인류의 문화나 역사도 훨씬 풍성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함으로써,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그녀들이 잃었던 것은 비단 작가적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독창성과 주체성뿐만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생을 꾸려나갈 수 없는 현실에서 기인하는 무력감, 자신감의 상실, 타인(주로 남성)이 그들에게 부과한 수많은 편견, 왜곡된 인식의 불가피한 수용, 사회적 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갔던 세월들이 있다.

 

 

 

“더욱이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행위와 능력 발휘에 참여할 것입니다. (중략)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 근거를 둔 모든 가정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62쪽)

 

 

울프는 백년 뒤 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생활의 자립을 꾀할 수 있는 ‘돈’과 방해를 받지 않고 사색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여성이 나올 것이라고 가정했다. 소득수준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월등히 높으며 성공한 지위와 명성을 가진 여성들, 소위 골드미스의 등장을 얼추 예언했을지 몰라도 현대의 혼자 사는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혼자만의 자유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집을 꿈꾼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작업실’ 중에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  13쪽)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작업실’은 어느 날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게 된 작가 지망생 주부가 맞닥뜨린 상황을 그려냈다. 작가를 꿈꾸는 ‘나’는 가부장적 남편에 꼼짝 못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하루하루를 보냈던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 일상의 반복은 일견 잔잔해 보이지만 돌멩이 하나가 던져지면서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혼자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바로 작업실을 구해 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한 것이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상가의 빈 사무실을 하나 얻어 통상적인 근무시간에는 사무실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주말이나 평일 야간에 가끔 사용하는 작업실. 그것도 딱히 써야 할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우두커니 앉아 벽만 바라보며 글쓰기를 시도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찾아오는 영감이 하나 있다. 월세집 주인인 영감은 전구를 돌려 빼는 법과 라디에이터와 창문 바깥에 설치된 차양 사용법 따위를 알려주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말을 시킨다. 처음에 독자들은 우호적이거나 어떤 미묘한 관계가 설정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는 엇나간다. 시간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다고 여자가 아무리 옹골지게 굴어도 영감은 무슨 구실로든지 찾아와 자신이 겪은 돼먹지도 않은 별의별 얘기를 늘어놓는다. 날이 갈수록 영감과 주인공은 적대적인 사이가 되고, 건물 사용 등에 관련된 사소한 시비가 자주 빚어지면서 여성은 건물을 떠난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이 되어주지 못하는 작업실, 혼자만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세상과 주변의 눈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간섭을 행하는 작업실은 당시 여성의 현실이자 세상의 얼굴이기도 하다.

 

 

 

 

 

 

 

 

 

 

 

 

 

 

 

어쩌면 여성에게 작가로서의 글쓰기란 삶 전체를 대가로 하는 무모한 모험일 수 있겠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처럼 강명숙의 소설 『라이팅 클럽』의 주인공도 작가 지망생 주부(싱글맘)이다. 거기에 그녀의 딸도 작가를 꿈꾼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우리는 여자만 있는 그 집이 소설을 쓰기에 그 누구라도 방해받지 않는 아주 적합할 공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창작과정도 영 순탄치만 않다. 등단도 하지 못한 데다 내세울 만한 이력도 없는 싱글맘 김 작가는 동네에서 글짓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고,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다만 글쓰기를 한다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딸 영인에게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은 유치하고 경박한 장난이며, 동네 아줌마들의 글은 ‘쓰레기’일 뿐이다. 영인이 원하는 것은 ‘진짜 작가’가 되는 것. 영인은 많은 책들을 읽고 일기와 편지, 소설을 쓰지만 여전히 글쓰기의 어려움을 느낀다. 도무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소설은 영인이 글쓰기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그녀의 성장기는 평범하지 않다. 동성애와 열등감, 짝사랑 등으로 점철됐다. 어른이 됐어도 구질구질한 직장 생활, 친구의 죽음, 결혼과 이혼 등으로 인해 나락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영인은 그 가운데서도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 열의는 삶이 혹독해질수록 더욱 뜨거워진다. 그렇게 맹렬하게 이어가던 글쓰기가 어느덧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게 된다. 글을 쓰는 그 자체가 의미가 돼 버린 것이다.

 

영인에게 진정 모자랐던 것은 바로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귀였다. 그녀는 비로소 엄마의 내공과 글짓기 교실의 진가를 알게 된다.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을 통해 진정한 글쓰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짚는다. 그것은 등단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실용적인 희망이 아니라 모두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글쓰기 자체의 순수한 기쁨이다.

 

비록 생전 울프가 살았던 시대의 여성들의 두 발은 현실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울프는 어떤 경우에도 유머와 활력을 잃지 않았다. 그것만이 ‘여성 작가’가 아닌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다. 유년 시절에 겪은 성적 학대로 인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생채기에 병마에 늘 시달리면서도 글을 통해 영혼을 구하려고 발버둥 쳤던 치열한 작가였다. 그것은 ‘삶’을 위한 진정한 글이었다. 울프처럼 먼로의 ‘작업실’의 나 역시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간섭하는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울프는 남성은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지고, 여성은 아이들 말고 가진 것 없다고 푸념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진 지금, 이제 여성도 경제적 활동 참여도 높아지고, 남성처럼 능력이 좋으면 부와 명성을 가질 수 있다. 남성이 닫아버린 문을 이제 여성은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열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물적 토대는 충분하다.

 

하지만 일부 남성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으로 향할 수 있는 열쇠를 건네주면서도 그들의 자유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작업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녀가 혼자서 글을 쓰는 행위를 아니꼽게 보는 남성의 편견적 시선. 아무리 여성이 교육을 잘 받고, 똑똑해도 한 번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 편견이 더욱 견고해질수록 여성의 예술적 활동에 또 다른 벽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여성 작가들이 왕성히 활동하는 시대다. 하지만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로 취급받던 여류 작가들을 생각하면 키에르케고르의 저주가 역설적으로 되새김질된다. “여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무슨 불행인가? 게다가, 여자이면서 자기가 그중의 하나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지독한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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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살림지식총서 417
김문경 지음 / 살림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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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같지만 다른 곡의 해석

 

클래식 애호가들은 흔히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고 말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평가받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예로 들겠다.

 

같은 곡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지휘하는 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게 되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들의 지휘 장면을 시간으로 재면 같은 부분을 연주하는 데 번스타인은 25초, 카라얀은 21초가 걸린다고 한다. 즉 템포가 다르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번스타인이 느릴 때는 느리게 빠를 때는 더 빠르게 하는 스타일이라면 카라얀은 전반적으로 빠르고 박력 있다고 볼 수 있다. 긴 교향곡 전체를 비교해서 듣는다면 이런 차이는 더 명확해질 것이다. 곡에 대한 해석은 물론 지휘자마다 표정도 손짓도 다양하다. 이처럼 직접 콘서트장에 클래식 음악 연주를 듣는다면 음반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 그들의 뛰어난 지휘가 없다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심장을 울리게 만드는 연주가 되지 못했으리라. 

 

음악가들 중에서도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 위대한 음악가를 부를 때 마에스트로나 비르투오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 연주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테크닉과 실력을 가진 연주자를 비르투오조(Virtuoso, 명인 名人)라고 부르고, 특별히 지휘자일 경우에 그 사람을 가리켜 마에스트로(Maestro)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Scene #2  개성이 뚜렷한 20인의 지휘자 

 

클래식 음악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유명 지휘자 20명의 예술혼과 일생을 간략하게 조명하고 정리한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에는 그야말로 지휘봉 하나로 청중, 아니 전 세계인의 귀와 마음을 압도했던 명지휘자들이 등장한다.

 

흔히 지휘자라고 하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먼저 떠올릴 것이다.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로 고집불통인데다가 남들 앞에서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기 나오는 몇 몇 지휘자들은 상당히 억울함을 느낄 수 있겠다.

 

그래도 독선적이면서도 자신의 음악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완벽형’ 혹은 ‘독재자형'인 강마에의 스타일과 가까운 지휘자라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일 것이다. 이탈리아판 강마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가 추구한 음악세계는 완벽한 음(音) 자체였다. 그는 음의 멜로디와 세밀한 흐름까지 완벽하게 암기할 정도로 오로지 음악에 충실했다. 연주자 개인의 감정에 따른 군더더기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음과 템포와 리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거부했다. 오직 작곡가의 의도에만 충실했다. 이로써 그의 지휘는 음악을 객관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 같은 지휘를 고집하는 그를 ‘독재자’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 노!’(No! No!)라고 불같이 호령을 토해냈고,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고 불렀다. 그의 ‘No!' 성격은 진짜 독재자도 포기할 정도로 완고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의 찬가 연주를 거부하여 그는 무솔리니의 눈 밖에 나서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실은 무솔리니가 고집을 굽혔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실에 어떻든지 간에 아무리 권력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독재자도 지휘봉 하나로 음악을 호령하는 고집스러운 독재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어쩌면 강마에를 뛰어넘을 정도로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지휘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세르지우 첼리비다케이다. 그의 독설을 겨냥하는 상대는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등장하는 명지휘자들이다. 그의 독설 집중 포격을 맞은 지휘자의 이름을 열거하면 혀를 내두른다. 토스카니니, 카를 뵘, 번스타인 심지어 ‘음악의 황제’ 카라얀까지도. 첼리비다케는 카라얀을 ‘유능한 비즈니스맨 아니면 귀가 먹은 인간’이라고 언급했다.

 

토스카니니, 첼리비다케와 반대로 브루노 발터는 유순한 성격의 지휘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의 명성에 약간 가려진 면이 있지만, 그래도 당대의 여느 지휘자들보다 인간적이고 겸손했으며 이러한 그의 인품이 언제나 음악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적 해석은 상당히 온순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든다.

 

푸르트벵글러는 탁월한 지휘 능력에 지금도 클래식 마니아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훌륭한 녹음의 명반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협력자’라는 낙인 때문에 명성마저도 흠 잡히고 마는 불행한 지휘자다. 그는 나치의 ‘제3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나치 친위대 공연이나 히틀러의 생일 축연을 지휘한 경력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범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 활동이 나치 선전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사실을 알았기에 각종 핑계를 대면서 나치와의 관계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아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로 복귀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지휘 자세는 독특하다. 그의 지휘를 바라본 소프라노 가수는 ‘눈에 보이는 음악의 물결’이라고 표현했지만, 연주할 때 그의 손짓을 주목해야 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지휘자였다. 지휘 자세가 어색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격정적인 동작은 흡사 경련에 가깝다. 그래서 단원들은 어디서 음을 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고 한다.

 

 

 

 Scene #3  강마에가 그리워지는 이유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는 지휘자의 유명한 일화를 통해 그들의 예술성을 접근하고 있어서 지휘자의 세계를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한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 입문서로 적당하다. 그리고 20인의 지휘자별 디스코그래피 중에 들을만한 명반 CD와 연주 현황 녹음 영상과 일부 음반의 미흡한 부분까지 정리하고 있다. 생존해 있는 현역 지휘자들이 좀 더 추가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에 소개된 지휘자들은 꼭 기억해 두면 좋은 마에스트로들이다.

 

가끔 우리는 과거의 명장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지금도 카라얀의 흔적을 그리워하고, 그의 명반과 연주 실황 영상을 감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거 명성을 날리던 옛 지휘자들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꼭 옛날 지휘자라서 그런 걸까. 예술의 본령은 개성인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토스카니니, 카라얀, 번스타인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개성이 뚜렷한 지휘자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지휘자의 개성이 사라질수록 그 음악의 개성도 사라진다. 그저 ‘지휘’라는 행위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휘자를 바라보고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진짜 위대한 지휘자는 곡을 철저히 분석하고 오케스트라를 혹독하게 훈련시킬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가 강마에의 모습을 그렇게도 열광했던 것일까. 과연 먼 훗날에 토스카니니나 첼리비다케처럼 강마에 같은 명지휘자가 등장하게 될까. 갑자기 드라마 속 가상의 지휘자인 강마에가 그리워진다. 오히려 그런 괴팍한 모습이 지휘자 본인에게는 오로지 완벽한 음악으로 빚어내기 위해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신만의 역량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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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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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김문경, 살림지식총서 417)

 

 

 

 Scene #1 같지만, 다른 곡의 해석

 

클래식 애호가들은 흔히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고 말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평가받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예로 들겠다.

 

같은 곡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지휘하는 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게 되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들의 지휘 장면을 시간으로 재면 같은 부분을 연주하는 데 번스타인은 25초, 카라얀은 21초가 걸린다고 한다. 즉 템포가 다르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번스타인이 느릴 때는 느리게 빠를 때는 더 빠르게 하는 스타일이라면 카라얀은 전반적으로 빠르고 박력 있다고 볼 수 있다. 긴 교향곡 전체를 비교해서 듣는다면 이런 차이는 더 명확해질 것이다.

 

곡에 대한 해석은 물론 지휘자마다 표정도 손짓도 다양하다. 이처럼 직접 콘서트장에 클래식 음악 연주를 듣는다면 음반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 그들의 뛰어난 지휘가 없다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심장을 울리게 만드는 연주가 되지 못했으리라.

 

 

 

 Scene #2 개성이 뚜렷한 지휘자들

 

음악가들 중에서도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 위대한 음악가를 부를 때 마에스트로나 비르투오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 연주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테크닉과 실력을 가진 연주자를 비르투오조(Virtuoso, 명인 名人)라고 부르고, 특별히 지휘자일 경우에 그 사람을 가리켜 마에스트로(Maestro)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클래식 음악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유명 지휘자 20명의 예술혼과 일생을 간략하게 조명하고 정리한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에는 그야말로 지휘봉 하나로 청중, 아니 전 세계인의 귀와 마음을 압도했던 명지휘자들이 등장한다.

 

흔히 지휘자라고 하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먼저 떠올릴 것이다.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로 고집불통인데다가 남들 앞에서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기 나오는 몇 몇 지휘자들은 상당히 억울함을 느낄 수 있겠다.

 

그래도 독선적이면서도 자신의 음악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완벽형’ 혹은 ‘독재자형'인 강마에의 스타일과 가까운 지휘자라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일 것이다. 이탈리아판 강마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가 추구한 음악세계는 완벽한 음(音) 자체였다. 그는 음의 멜로디와 세밀한 흐름까지 완벽하게 암기할 정도로 오로지 음악에 충실했다. 연주자 개인의 감정에 따른 군더더기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음과 템포와 리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거부했다. 오직 작곡가의 의도에만 충실했다. 이로써 그의 지휘는 음악을 객관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 같은 지휘를 고집하는 그를 ‘독재자’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 노!’(No! No!)라고 불같이 호령을 토해냈고,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고 불렀다. 그의 ‘No!' 성격은 진짜 독재자도 포기할 정도로 완고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의 찬가 연주를 거부하여 그는 무솔리니의 눈 밖에 나서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실은 무솔리니가 고집을 굽혔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실에 어떻든지 간에 아무리 권력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독재자도 지휘봉 하나로 음악을 호령하는 고집스러운 독재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어쩌면 강마에를 뛰어넘을 정도로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지휘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세르지우 첼리비다케이다. 그의 독설을 겨냥하는 상대는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등장하는 명지휘자들이다. 그의 독설 집중 포격을 맞은 지휘자의 이름을 열거하면 혀를 내두른다. 토스카니니, 카를 뵘, 번스타인 심지어 ‘음악의 황제’ 카라얀까지도. 첼리비다케는 카라얀을 ‘유능한 비즈니스맨 아니면 귀가 먹은 인간’이라고 언급했다.

 

토스카니니, 첼리비다케와 반대로 브루노 발터는 유순한 성격의 지휘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의 명성에 약간 가려진 면이 있지만, 그래도 당대의 여느 지휘자들보다 인간적이고 겸손했으며 이러한 그의 인품이 언제나 음악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적 해석은 상당히 온순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든다.

 

푸르트벵글러는 탁월한 지휘 능력에 지금도 클래식 마니아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훌륭한 녹음의 명반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협력자’라는 낙인 때문에 명성마저도 흠 잡히고 마는 불행한 지휘자다. 그는 나치의 ‘제3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나치 친위대 공연이나 히틀러의 생일 축연을 지휘한 경력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범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 활동이 나치 선전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사실을 알았기에 각종 핑계를 대면서 나치와의 관계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아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로 복귀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지휘 자세는 독특하다. 그의 지휘를 바라본 소프라노 가수는 ‘눈에 보이는 음악의 물결’이라고 표현했지만, 연주할 때 그의 손짓을 주목해야 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지휘자였다. 지휘 자세가 어색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격정적인 동작은 흡사 경련에 가깝다. 그래서 단원들은 어디서 음을 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고 한다.

 

 

 

 Scene #3 과거의 지휘자들이 그리운 이유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는 지휘자의 유명한 일화를 통해 그들의 예술성을 접근하고 있어서 지휘자의 세계를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한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 입문서로 적당하다. 그리고 20인의 지휘자별 디스코그래피 중에 들을만한 명반 CD와 연주 현황 녹음 영상과 일부 음반의 미흡한 부분까지 정리하고 있다. 생존해 있는 현역 지휘자들이 좀 더 추가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에 소개된 지휘자들은 꼭 기억해 두면 좋은 마에스트로들이다.

 

가끔 우리는 과거의 명장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지금도 카라얀의 흔적을 그리워하고, 그의 명반과 연주 실황 영상을 감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거 명성을 날리던 옛 지휘자들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꼭 옛날 지휘자라서 그런 걸까. 예술의 본령은 개성인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토스카니니, 카라얀, 번스타인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개성이 뚜렷한 지휘자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지휘자의 개성이 사라질수록 그 음악의 개성도 사라진다. 그저 ‘지휘’라는 행위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휘자를 바라보고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진짜 위대한 지휘자는 곡을 철저히 분석하고 오케스트라를 혹독하게 훈련시킬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가 강마에의 모습을 그렇게도 열광했던 것일까. 과연 먼 훗날에 토스카니니나 첼리비다케처럼 강마에 같은 명지휘자가 등장하게 될까.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강마메와 지휘자의 관계는 잘못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런 괴팍한 모습이 지휘자 본인에게는 오로지 완벽한 음악으로 빚어내기 위해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신만의 역량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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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예술 살림지식총서 382
전완경 지음 / 살림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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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아라베스크, 이슬람 미술의 정수     

 

길을 걷다 보면 보도블록을 새로 교체하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모래와 블록을 까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았다면 블록의 모양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면 금방 길거리가 새단장을 한다. 건물의 바닥이나 화장실 안쪽 벽 등도 보도블록과 같이 타일 조각들이 규칙적이면서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게 붙어 있다.

 

이처럼 주변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벽이나 바닥 등 평면을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는 도형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빈틈없고 겹치지 않게 평면을 덮는 것’을 수학에서는 테셀레이션(Tesselation)이라 한다. 테셀레이션은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퀼트, 옷, 깔개, 가구의 타일, 건축물 등 세계 각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왼쪽)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문양 / (오른쪽) M.C. 에셔  「해방」  1955년

 

 

테셀레이션으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단연 알함브라 궁전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의 마루, 벽, 천장에 테셀레이션되어 있는 반복적인 문양들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테셀레이션 작품을 남긴 M.C. 에셔에게는 작품의 원천이자 일생을 바친 테마이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가보지 못한 곳. 알함브라 궁전은 1238년 이슬람 나르스 왕조에 의해 세워져서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의 스페인 왕국에 함락될 때까지 250여 년간 황금기의 왕실 영화와 권력을 보여 준다. 22명의 왕들은 치세하는 동안 궁전을 부분적으로 완성해 갔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스페인에서의 무어 건축양식 절정기에 조성된 섬세한 이슬람 미술의 기품이 돋보이는 조각과 아기자기한 정원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꽃과 식물의 문양이 추상적으로 어우러진 아라베스크(Arabesque)는 디자인의 원조이며 이슬람 미술의 정수다.

 

아라베스크는 양식화된 식물 모티브와 줄기 등을 뜻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어 아라베스코(arabesco)에서 유래했다. 아라베스크 무늬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중해적 유산이다. 이슬람 예술가들은 자연을 양식화해 표현했다. 무한한 창조력을 가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끊임없는 흐름을 가지며 아라베스크가 이러한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은 코란의 강력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미학적으로 통일된 예술적 문명이다. 이슬람은 신만이 영원하고, 다른 모든 것은 바뀔 수 있으며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하다고 믿는다. 전능한 신 알라의 창조적 행위 없이는 세상에 어떠한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창조 이외에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은 없다. 모방할 수 없는 신의 작업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려는 시도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창조물 위에 서 있는, 이름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무엇과도 닮지 않은 그러한 초월적이고 무한한 신 앞에서 인간의 자리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으며 예술에서의 표현 또한 지극히 한정적이다.

 

인물과 동물 문양을 금지한 이슬람 미술에서는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표현이 발달했다. 이러한 미학적 감각은 아라베스크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라베스크는 자연에서 가져왔지만 너무나 단순화시켜서 그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장식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현실적 무늬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신의 무한한 완전성에 비해 일시적이고 변하는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장식 무늬의 무형적인 성격은 이슬람 건축에 쓰이는 재료인 치장 벽토, 벽돌, 타일, 마른 진흙과 잘 어울린다. 이로써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드는데, 이런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느낌이 든다.

 

 

 

 Scene #2  종교가 빚어낸 화려한 이슬람 예술    

 

이슬람 미술의 역사는 식물의 형상을 기하학적 형상으로 변화시킨 역사다. 기하학적, 수학적 사색을 문양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이슬람의 미학적 가치에 적용해 비율과 형태를 확실히 했다. 무엇을 표현하느냐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는 이슬람 문화에서 서체는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려졌다. 글은 신의 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서체를 사용한다. 아랍어와 문자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슬람 서체는 코란의 보급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됐고, 서체는 이슬람 미술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서체에 조예가 깊었으며, 코란의 필사 작업에 참여한 서예가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

 

무슬림도 기독교인만큼이나 자신의 종교에 헌신적이었지만 그들이 이룬 미술은 기독교 교회가 후원자 노릇을 하며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서양미술과는 분명 다르다. 서양미술의 주된 형식은 회화와 조각이었다.

 

이 둘은 예배에 필요한 종교적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슬람 미술에는 거창한 그림이나 조각이 거의 없다. 대신 서양 미술에서 부차적이고 장식적인 것, 예를 들어 책이나 직물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책에는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이 삽화로 들어갔다. 직물은 종이, 그림이 폭 넓게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예술적 감각을 전파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사용됐다.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 세계의 변화도 반영한다. 이슬람 건축의 전통은 모스크가 출발점이다. 모스크는 무하마드가 무슬림 공동체의 중심이자 기도실로 지었다는 집에서 유래한다. 모스크에는 예루살렘의 바위 돔, 이스파한의 마스지디 샤 등이 있고 궁전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문헌에 존재하나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 세빌의 알-카자르 궁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슬람 건축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아그라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5대 황제인 샤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운 무덤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한 이야기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기울어질 만큼 공사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어마어마하고 많은 사람이 공사 도중에 숨을 거둔 아픈 사연도 담고 있다. 공사에는 매일 2만 명이 넘는 일꾼들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22년 만에 무덤이 완성되었다. 네 귀퉁이에는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40m 높이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각각 약 7도 정도 바깥으로 기울어져 있다. 탑을 일부러 기울이게 만든 이유는 강가의 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내려앉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공존의 문화가 깃든 이슬람 예술   

 

아직까지도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듯하다. 중동 건설 붐과 석유자원, ‘세계의 화약고’로 대변되는 정세불안 등 경제·정치적 측면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로 이슬람 세계를 조명하는 책들이 나오긴 했지만 종교나 사회, 국제정치 분야 등으로 한정됐다.

 

그러나 널리 분포된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교의 포용성으로 인해 조화와 균형을 기본으로 하되 토착민족의 전통과 융화되어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냈으며 기독교 문화와도 교호하며 공존하였다. 그래서 이슬람 문명이 거대한 문명의 용광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예술』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오는 귀한 책이다. 제목과 달리 미술 분야뿐 아니라 이슬람의 예술 전반, 나아가 건축, 음악까지도 두루 소개된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대표되는 기하학적 장식문양부터, 종교와 예술이 어우러진 웅장한 모스크 건축, 이슬람 예술의 독창성을 대변하는 서예, 유럽 중세 음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 등이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예술을 발전시켰고, 동서양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 이슬람 세계의 또 다른 면이 잘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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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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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이슬람 예술 (전완경 저, 살림지식총서 382)

 

 

 

 Scene #1  아라베스크, 이슬람 미술의 정수     

 

길을 걷다 보면 보도블록을 새로 교체하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모래와 블록을 까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았다면 블록의 모양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면 금방 길거리가 새단장을 한다. 건물의 바닥이나 화장실 안쪽 벽 등도 보도블록과 같이 타일 조각들이 규칙적이면서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게 붙어 있다.

 

이처럼 주변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벽이나 바닥 등 평면을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는 도형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빈틈없고 겹치지 않게 평면을 덮는 것’을 수학에서는 테셀레이션(Tesselation)이라 한다. 테셀레이션은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퀼트, 옷, 깔개, 가구의 타일, 건축물 등 세계 각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왼쪽)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문양 / (오른쪽) M.C. 에셔  「해방」  1955년

 

 

테셀레이션으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단연 알함브라 궁전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의 마루, 벽, 천장에 테셀레이션되어 있는 반복적인 문양들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테셀레이션 작품을 남긴 M.C. 에셔에게는 작품의 원천이자 일생을 바친 테마이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가보지 못한 곳. 알함브라 궁전은 1238년 이슬람 나르스 왕조에 의해 세워져서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의 스페인 왕국에 함락될 때까지 250여 년간 황금기의 왕실 영화와 권력을 보여 준다. 22명의 왕들은 치세하는 동안 궁전을 부분적으로 완성해 갔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스페인에서의 무어 건축양식 절정기에 조성된 섬세한 이슬람 미술의 기품이 돋보이는 조각과 아기자기한 정원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꽃과 식물의 문양이 추상적으로 어우러진 아라베스크(Arabesque)는 디자인의 원조이며 이슬람 미술의 정수다.

 

아라베스크는 양식화된 식물 모티브와 줄기 등을 뜻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어 아라베스코(arabesco)에서 유래했다. 아라베스크 무늬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중해적 유산이다. 이슬람 예술가들은 자연을 양식화해 표현했다. 무한한 창조력을 가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끊임없는 흐름을 가지며 아라베스크가 이러한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은 코란의 강력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미학적으로 통일된 예술적 문명이다. 이슬람은 신만이 영원하고, 다른 모든 것은 바뀔 수 있으며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하다고 믿는다. 전능한 신 알라의 창조적 행위 없이는 세상에 어떠한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창조 이외에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은 없다. 모방할 수 없는 신의 작업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려는 시도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창조물 위에 서 있는, 이름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무엇과도 닮지 않은 그러한 초월적이고 무한한 신 앞에서 인간의 자리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으며 예술에서의 표현 또한 지극히 한정적이다.

 

인물과 동물 문양을 금지한 이슬람 미술에서는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표현이 발달했다. 이러한 미학적 감각은 아라베스크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라베스크는 자연에서 가져왔지만 너무나 단순화시켜서 그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장식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현실적 무늬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신의 무한한 완전성에 비해 일시적이고 변하는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장식 무늬의 무형적인 성격은 이슬람 건축에 쓰이는 재료인 치장 벽토, 벽돌, 타일, 마른 진흙과 잘 어울린다. 이로써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드는데, 이런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느낌이 든다.

 

 

 

 Scene #2  종교가 빚어낸 화려한 이슬람 예술    

 

이슬람 미술의 역사는 식물의 형상을 기하학적 형상으로 변화시킨 역사다. 기하학적, 수학적 사색을 문양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이슬람의 미학적 가치에 적용해 비율과 형태를 확실히 했다. 무엇을 표현하느냐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는 이슬람 문화에서 서체는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려졌다. 글은 신의 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서체를 사용한다. 아랍어와 문자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슬람 서체는 코란의 보급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됐고, 서체는 이슬람 미술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서체에 조예가 깊었으며, 코란의 필사 작업에 참여한 서예가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

 

무슬림도 기독교인만큼이나 자신의 종교에 헌신적이었지만 그들이 이룬 미술은 기독교 교회가 후원자 노릇을 하며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서양미술과는 분명 다르다. 서양미술의 주된 형식은 회화와 조각이었다.

 

이 둘은 예배에 필요한 종교적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슬람 미술에는 거창한 그림이나 조각이 거의 없다. 대신 서양 미술에서 부차적이고 장식적인 것, 예를 들어 책이나 직물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책에는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이 삽화로 들어갔다. 직물은 종이, 그림이 폭 넓게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예술적 감각을 전파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사용됐다.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 세계의 변화도 반영한다. 이슬람 건축의 전통은 모스크가 출발점이다. 모스크는 무하마드가 무슬림 공동체의 중심이자 기도실로 지었다는 집에서 유래한다. 모스크에는 예루살렘의 바위 돔, 이스파한의 마스지디 샤 등이 있고 궁전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문헌에 존재하나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 세빌의 알-카자르 궁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슬람 건축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아그라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5대 황제인 샤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운 무덤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한 이야기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기울어질 만큼 공사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어마어마하고 많은 사람이 공사 도중에 숨을 거둔 아픈 사연도 담고 있다. 공사에는 매일 2만 명이 넘는 일꾼들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22년 만에 무덤이 완성되었다. 네 귀퉁이에는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40m 높이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각각 약 7도 정도 바깥으로 기울어져 있다. 탑을 일부러 기울이게 만든 이유는 강가의 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내려앉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공존의 문화가 깃든 이슬람 예술   

 

아직까지도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듯하다. 중동 건설 붐과 석유자원, ‘세계의 화약고’로 대변되는 정세불안 등 경제·정치적 측면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로 이슬람 세계를 조명하는 책들이 나오긴 했지만 종교나 사회, 국제정치 분야 등으로 한정됐다.

 

그러나 널리 분포된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교의 포용성으로 인해 조화와 균형을 기본으로 하되 토착민족의 전통과 융화되어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냈으며 기독교 문화와도 교호하며 공존하였다. 그래서 이슬람 문명이 거대한 문명의 용광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예술』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오는 귀한 책이다. 제목과 달리 미술 분야뿐 아니라 이슬람의 예술 전반, 나아가 건축, 음악까지도 두루 소개된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대표되는 기하학적 장식문양부터, 종교와 예술이 어우러진 웅장한 모스크 건축, 이슬람 예술의 독창성을 대변하는 서예, 유럽 중세 음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 등이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예술을 발전시켰고, 동서양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 이슬람 세계의 또 다른 면이 잘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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