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493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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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한다. 우리는 삶 속에 항상 죽음이 있음을, 그리고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자신을 죽음에서 지켜내는 정신의 전략을 마련해왔다. 죽음에 대한 망각과 모른 척 잡아떼기 또는 죽음을 사회에서 배제해 삶과 분리했다.

     

황동규 시인의 《연옥의 봄》은 죽음을 관조하여 삶이 굳건해지는 경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이제 곧 여든에 가까운 시인이 죽음을 관조하는 자세는 삶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일인데, 그 과정은 마치 잊은 반쪽을 찾는 것과도 같다. 칠십 넘은 세월을 살면서 잊고 있었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죽음에 다가설수록 더욱 풍부해진다. 내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저 바퀴 바로 앞에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말이다.

    

 

짧은 비 그치자 밝아진 골목길에 달팽이 하나

몸보다 큰 소용돌이를 등에 지고

끝에 눈 달린 두 더듬이 좌우로 헤저으며 기고 있다.

시멘트 조각 하나를 힘들게 피한다.

눈물보다 더 진득한 분비물을 온몸에 두르고

오체투지 하고 있군.

     

슬그머니 승용차 하나가 앞을 막아선다.

바퀴 바로 앞의 오체투지!

달팽이가 더듬이 조심조심 내저으며 침착히 기어 바퀴 폭을 벗어난다.

볼 것 다 봤다는 몸짓을 하며 나도 자리를 뜬다.

볼 것 다 보았다니?

그래, 살아 있는 것들 하나같이 열심히 피고 열고 기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거짓말 없이 어떻게 자리 뜰 수 있겠는가?

     

(『오체투지』 중에서, 44~45쪽)

 

 

한없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도 실은 온 힘을 다해 기어간다. 이 지구상의 존재들은 저마다 오체투지로 굴러가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오체투지의 삶은 실존이며 생존이다. 그렇게 삶이 움직이는 순간이 힘들어도 달팽이를 생각하면 숨 쉬는 사소한 순간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망각은 곧 죽음이다. 다시 말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빨리 지우면서 산다. 심지어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곳조차 잊어버린다. 죽음은 나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간다. 시인은 우리 삶 전체를 거대한 ‘기억의 집’으로 비유했다. 이승의 인간은 기억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음을 앞두면 소중하고 행복했던 집을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여기엔 이름 모를 하얀 꽃 한 무리가 피어 있군.

키 작고 꽃이파리 조금 산만하지만

가을 쑥부쟁이 닮은 봄꽃, 이름 가물가물.

아 저기에도 이름 사라진 노란 꽃.

머릿속이 캄캄해진다.

내가 드디어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보다.

     

이러다간 이 세상에서 같이 산 이름 몇마저

제대로 담지 못한 머리를 들고

저 세상 불 앞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꽃들이여, 새들이여, 저세상에는

기억이 더 아픈 자들도 서성댈 것이다.

그대들, 이름 같은 데 신경 쓰지 말고

제 생김새, 제 색깔, 제 꿈들을 가지고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다들 가시게.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중에서, 92~93쪽)

    

 

우리는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고 있다. 잠은 죽음의 동생이다. 죽음의 본능을 가진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동생이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이다. 잠은 외부로부터 자극이 차단되고 반응이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회복이 가능한 상태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기억의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살고 있었다. 인간은 보통 일생의 30~40%를 잠으로 보낸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뭐가 아쉬워서 수면 부족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노동을 한다. 삶과 죽음이 반반씩 섞인 잠마저 잊으니까 죽음도 같이 잊어버린 걸까. 삶의 여유마저 사라지는 것도 서러운데, 수면의 여유까지 없는 세상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기억의 집’이 아니라 ‘고통의 집’이다. 기분 나쁜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누구나 이 생기 없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혼이 어디 나갔지?

쥐똥나무 쪽에서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혼이라는 거, 그게 어디 따로 있는 거우꽈?

펭생 자기답게 열심히 살면, 그게 그의 혼입주.’

     

(『섬쥐똥나무들의 혼』 중에서, 82쪽)

    

 

정신이 건강한 혼일수록 생기가 싱싱하게 돌고, 삶의 의욕도 넘친다. 꿈, 사랑, 성실로 똘똘 뭉친 오체투지의 생은 특별하다. 즉, 정신이 건강한 혼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주변을 의식해 경쟁 대상으로 삼지 말고,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기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누구는 바른 역사 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 된다고 말했던데, 거짓과 허위 뒤에 비겁하게 숨은 사람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 그는 주변을 의식해서 자신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 사람처럼 열심히 살지 못한 혼이 비정상이다.

   

삶이 하나의 전체로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의 한계’를 떠올릴 때이다. 시인은 시집을 통해 죽음과 친화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시인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연작시의 제목이자 시집 표제어인 ‘연옥의 봄’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간적 공간이다.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는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일찍 죽을 정도는 아닌 어중간한 영혼이 머무는 곳.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죽음의 공포에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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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7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8 08:34   좋아요 0 | URL
죽음은 내곁에 머무는 생존의 그림자.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김이지 2017-04-15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좋은 글입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공포에 떠는 삶이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라는 것이 와닿는 대목이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7-04-15 19:49   좋아요 0 | URL
한 번뿐인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벌써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