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을 읽다가 사진을 소개하는 내용에 오류를 발견했다. 오류가 있는 장수는 21쪽이다. 책 초반부에 시기별로 비너스를 그린 그림들이 정렬된 비교표 중에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4월」과 파올로 우첼로의 「성 조르조와 용」이라는 두 점의 그림 제목이 서로 뒤바뀐 채 소개되었다. 왼쪽 그림을 잘 살펴보면 여인 앞에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괴물의 뒷다리가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첼로의 그림에 나오는 용의 뒷다리다.

 

 

 

 

 

파올로 우첼로  「성 조르조와 용」 1456년 

 

 

성 조르조는 영어로는 ‘성 조지’(St. George)로 알려졌으며 라틴어로 ‘성 게오르기우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 조지는 기독교 성인으로, 서양미술에서는 용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 우첼로의 그림도 성 조지의 전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그린 것이다.

 

 

 

 

 

 

 

 

 

 

 

 

 

 

 

 

 

호수가 있는 시레나라는 작은 도시에 무시무시한 용이 살았다. 처음에 용은 도시 사람들이 제물로 바치는 두 마리의 양을 잡아먹고 살았으나 잔인한 욕심은 멈출 줄 몰랐다. 도시에 있는 모든 양이 줄어들자 젊은 사람들은 용의 제물이 되었다. 용에게 바칠 젊은 사람이 줄어들게 되자, 하는 수없이 시레나를 다스리는 왕의 외동딸인 공주도 용의 제물이 되어야 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말을 타고 온 기사가 나타나 용을 무찌르겠다고 나섰는데 그가 바로 성 조지였다. 용감한 성 조지는 기다란 창으로 일격에 용의 급소를 찌르는 데 성공했다. 그런 다음에 공주의 허리띠로 용을 묶어버렸다. 포악한 용은 힘이 쭉 빠진 짐승으로 변했다. 성 조지는 생포한 용과 공주를 시레나로 데려오면서 도시 사람들을 안심시켰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종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확인한 성 조지는 단칼에 용의 머리를 베었고 시레나를 떠났다.

 

성 조지 전설은 중세 시대에 유행한 영웅 전설로 알려지게 된다. 원래 게오르기우스는 ‘신성한 전사’,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 전설로 인해 성 조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악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신성한 전사’가 된다. 반면에 용은 기사들이 퇴치해야 할 적(악, 적그리스도)으로 간주한다. 후에 기독교에서 악마를 일컫는 말 중의 하나로 용을 칭하여 악의 화신으로 쓰이게 된다. 천사장 미카엘은 용과 싸우고, 중세의 기사들은 어둠의 기운인 그와 맞섰다고 표현했다. 용의 피를 바르면 불사의 힘을 얻고, 비늘로 갑옷을 만들면 어떠한 창과 검으로도 뚫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야기에 따라 불멸을 향한 인간의 사악한 의지를 용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용에 대한 신비는 종종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 주로 판타지 작품 속에서 나타나 인간과는 애증의 관계로 묘사된다. 우첼로의 그림에 나오는 용의 모습은 흡사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재버워키(Jabberwocky)와 흡사하다.

 

 

 

 

 

실제로 테니얼의 재버워키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 우첼로의 그림에 나오는 용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다. 재버워키가 등장하는 난센스 시는 캐럴이 직접 조합하거나 새롭게 만든 무의미한 단어들로 구성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기사가 재버워키를 무찌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테니얼의 재버워키 삽화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제일 첫 장에 실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캐럴은 그로테스크한 재버워키가 끔찍하게 느껴졌고, 어린이들이 보는 동화의 첫 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캐럴은 서른 명의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재버워키 삽화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 캐럴은 어머니들에게 세 가지 제안을 제시하여 제일 나은 방법을 고르도록 했다. 첫 번째 제안은 재버워키 삽화를 첫 장에 싣는 것, 두 번째 제안은 재버워키 삽화를 적당한 자리에 옮기고 첫 장에 새로운 삽화를 넣는 것, 마지막 대안은 재버워키 삽화를 삭제하는 것. 여론조사 결과 어머니들은 두 번째 대안을 선택했고, 지금의 편집 방식으로 결정했다. 재버워키 삽화와 난센스 시는 이야기 중반부로 옮겼고, 대신 첫 장에는 말을 탄 하얀 기사가 그려진 삽화가 실렸다.

 

 

 

 

 

재버워키는 생긴 건 흉측해도, 이상한 난센스 시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되었다(Jabberwocky는 영어사전에 등재되어 ‘무의미한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팀 버튼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재버워키는 의미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앨리스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끝판왕’이 된다. 앨리스는 여전사가 되어 이상한 나라의 질서를 해치는 재버워키를 무찌른다. 원작을 바탕으로 내러티브를 이끌어 내면서도 최대한 답습하지 않고 그 이야기 특유의 재미를 살려 새로운 앨리스를 만들고 싶었던 팀 버튼의 의도는 좋았으나 여전사 앨리스가 재비워키를 물리치는 결말은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기사가 앨리스로 바뀌었을 뿐이지 선이 악을 물리쳐 승리하는 중세 영웅담 내러티브를 답습하고 있다. 이처럼 용과 맞서 싸웠던 용사들의 이름은 잊혀도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살아남는다. 방랑하는 성 조지가 떠나간 자리에 (뜬금없지만) 여전사 앨리스가 등장하여 새로운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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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2-12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 역시 ㅎ 잘못된 그림두 알아보시는 센스! 그시절에도 여론조사가 있었다는것두 신기하구요 ㅎ

cyrus 2015-02-13 09:30   좋아요 0 | URL
앨리스 이야기 탄생 과정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뒷이야기가 많습니다. 원래 앨리스의 실제 모델이 작가가 좋아했던 동명의 소녀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