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에 ‘새뮤얼 존슨 박사를 회상하며’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장르문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러브크래프트가 어떤 주제의 소설을 썼는지 잘 알 것이다. 그의 소설은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가득한 무시무시한 괴물과 초자연 현상을 묘사하여 우주적 공포를 연출했다.

 

‘회상’은 러브크래프트가 초창기에 쓴 작품에 속한다. 1917년에 ‘Humphrey Littlewit’이라는 가명으로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소설 제목이 긴 관계로 줄여서 ‘회상’이라고 쓰겠다) 그런데 이 소설은 생전에 러브크래프트가 주로 썼던 작품들과 다르다. 일단 무서운 느낌이 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작품을 쓸 때 많이 설정하던 축축한 이끼와 냉기가 감도는 지하 무덤 속 비밀통로와 사람을 공격하는 잔인한 구울 같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18세기 영국 문단을 주름잡았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새뮤얼 존슨과 그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일화 형식으로 썼다. 새뮤얼 존슨은 문학상 업적을 남긴 공로로 '박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독자는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의 나이가 228살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690년 8월 10일에 데번셔의 영지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인지 아니면 실존 인물만 그대로 따와 허구적인 장면을 썼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얼핏 보르헤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같은 느낌이 난다. 이 작품을 잘 모르는 독자가 많고, 이것에 대한 논의로 빠지면 시시콜콜한 잡문을 쓰고 있는 나나 이 잡문을 읽고 있을 분들에게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그냥 제쳐놓기로 한다. 아무튼 ‘회상’은 장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어서 전집 4권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을 설명하는 역자의 글이 실려 있지 않아 작품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다.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공포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회상’을 재미없게 느껴지거나 그렇게 문학성 높은 작품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상’은 러브크래프트의 해박한 지식수준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는 병약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각종 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 이러한 독서는 어둡고 음산한 상상의 날개를 펴주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회상’에서 눈여겨볼 점은 러브크래프트가 존슨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더 클럽’ 라는 문학 그룹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러브크래프트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작품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면 18세기 영국의 역사를 알 수 있고, 그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을 런던에서 보내면서 아이의 눈으로 윌리엄 통치 하의 저명인사들을 많이 보았는데, 많은 시간을 월스 커피 하우스에 앉아서 탄식에 젖어 있던 드라이든 씨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애디슨 씨와 스위프트 박사는 나중에 잘 아는 사이가 되었고, 포프 씨와는 절친한 사이로서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55~56쪽)

 

‘윌리엄’은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왕 윌리엄 3세(빌렘 1세)를 말한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략을 저지시켰고 왕위에 올라 명예혁명을 이루었다. 1650년대는 런던에 커피점이 잇달아 생겨, 약 10년간에 그 수가 30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런던 커피 하우스'로 불렸다. 여기에 문인, 학자, 예술가를 비롯하여 각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일종의 아카데미 클럽이 형성되기도 했다. ‘드라이든’은 명예혁명 이전에 계관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존 드라이든(1631~1700), ‘애디슨’은 수필가 겸 시인인 조지프 애디슨(1672~1719)일 가능성이 있다. 유명한 문학자 단체 Kit-Cat Club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죽마고우 리처드 스틸과 함께 <스펙테이터>)(Spectator) 지를 창간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 ‘포프’는 영국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겸 비평가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으로 추정된다. 스위트프는 커피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커피 하우스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가 스물네 살이었을 때 런던의 커피 하우스에서 자신의 먼 친척뻘 되는 드라이든에게 습작시를 공개했다가 혹평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스위프트는 영국 사회를 움직이는 명사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스펙테이터>의 공동 발행인 애디슨과 스틸과도 한때 친했었다. 

 

 

 

 

 

 

 

 

 

 

 

 

 

 

 

 

스위프트와 포프, 이 두 사람은 ‘스크리블레루스 클럽’에 소속되어 서로 알게 되었다. 『마르티누스 스크리블레루스의 회고록』는 풍자소설을 썼다. 이 작품은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추천도서에 포함되었다. 1713년에 애버스넛 박사의 집에 ‘스크리블레루스 클럽’이 결성되었다. 스크리블레루스는 박식한 지식을 자랑하는 가공인물이다. 클럽 회원들은 스크리블레루스의 입이 되어 속물적이며 부패한 영국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가공인물은 호라티우스, 라블레, 에라스무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클럽 회원들이 쓴 책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스위프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될, 아직 초고에 불과했던 『걸리버 여행기』를, 포프는 『우인 열전』을 인용했다.

 

제임스 보스웰 씨가 나를 존슨 씨에게 소개해 준 1763년까지 나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 (56쪽)

 

작품 속 화자는 보스웰(1740~1795) 덕분에 존슨을 처음 만나게 된다. 보스웰은 존슨을 언급할 때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 인물이다. 1763년에 그동안 사숙하던 존슨 박사와 알게 되어,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박사가 죽을 때까지 가까이 사귀었다. 《존슨 전(傳)》은 전기 문학의 걸작이며, 그 밖에 박사를 수행했을 때의 여행기록을 남겼다.

 

내가 발행하는 주간지 《런더너》에 그의 사전을 좋게 알리고 싶으니 의향이 어떻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57쪽)

 

화자는 자신이 발행한 잡지에 존슨이 만든 사전을 알리고 싶어 한다. 존슨은 1747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자력으로 7년 만에 《영어사전》을 완성했다.

 

그 후로 존슨과 나는 주로 ‘문학 클럽’ 모임에서 자주 만났다. 이듬해 만들어진 문학 클럽의 창립 멤버로는 박사 본인을 비롯하여 정치 연설가인 버크 씨, 사교계의 멋쟁이 뷰클라크 씨, 신앙심이 돈독한 랭턴 씨, 시민군 대장인 J. 레이널스 경, 유명한 화가인 골드스미스 박사, 산문과 시를 쓰는 뉴전트 박사, 버크 씨의 장인인 존 호킨스 경, 그리고 앤서니 샤미에씨와 나였다. (57~58쪽)

 

1763년에는 존슨은 자신이 직접 이끌고 명사들과의 친분 도모를 위해서 문학 그룹 ‘더 클럽’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훗날 ‘문학 클럽’으로 이름이 바뀐다.

 

 

 

 

 

 

 

 

 

 

 

 

 

 

 

 

‘정치 연설가인 버크’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이다. 영국 보수주의의 대표적 정치가로 명성을 떨쳤다. 더 클럽의 창설 회원이었으며 이때 당시 그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저술가로 활동했다. 골드스미스 박사가 화가라고 소개되는데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착각 혹은 역자의 번역 실수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보이다. 존슨과 알고 지냈던 골드스미스라는 실존 인물은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로 활동했던 올리버 골드스미스(1728~1774)로 봐야 한다. 1761년에 존슨을 사귀고 그의 문학 클럽 회원이 되었다. 존슨의 도움에 힘입어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를 발표해 단번에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 역시 피터 박스홀의 추천도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배우이자 존슨 박사의 죽마고우인 데이비드 게릭 씨, 소우와 조, 워튼, 애덤 스미스 박사, 『유적』의 저자인 퍼시 박사,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 씨, 음악가인 버니 박사, 비평가 맬런 씨, 보스웰 씨가 새로 가입했다. (58쪽)

 

데이비드 게릭은 실제로 존슨과 친분이 있었던 배우이다. 존슨의 문학 클럽에 명사들이 하나둘씩 가입하는데 여기서도 익숙한 이름 두 명이 있다.

 

 

 

 

 

 

 

 

 

 

 

 

 

 

 

 

애덤 스미스 박사와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쓴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기번은 1774년에 문학 클럽에 가입했고, 1776년에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을 출간했다. 보스웰과 스미스는 문학 클럽에 가입하기 전에 이미 대면한 적이 있었다. 보스웰은 1753~1758년에 에든버러대학에서 인문학 과정을 밟았다.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1758년 대학에 돌아왔으나 연극에 매료되었고 로마 가톨릭교도인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는 그를 글래스고 대학으로 보내 애덤 스미스의 강의를 받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 도덕철학 담당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10여 년 간 계속된 교수 생활을 스미스는 ‘가장 유익했고 행복했으며 명예로운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200살 넘은 화자가 등장하여 존슨 박사를 회상하는 황당무계한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이 그냥 러브크래프트의 장난기 섞인 위트 넘치는 이야기로 보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게다가 존슨 박사에서 이야기 곳곳에 언급되는 인물들을 잘 모른다면 이 작품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영국사에 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 존슨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알아야 이 작품 속에 재치가 있으면서도 뼈가 있는 날카로운 발언으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슨의 언변술에 감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 역자는 영국사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한 주석을 단 한 개도 달지 않았다. 이 작품 하나 때문에 전공과 무관한 영국사 관련 책을 펼쳐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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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서내공이 상당하시네요^^ 언급해주시는 이름들이 낯설진 않지만 한 작품도 읽어본적 없어 아쉽습니다 ㅎㅎ 영국사까지 호기심을 넓히시는 모습 참 멋지시네요!!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할께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5-01-10 22:1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안 읽어봤어요. 저자 이름만 알고 관심이 있으면 검색해서 저자가 쓴 책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즉시 그것과 관련된 것을 찾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좀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편도 있어요. 사소하지만 하나라도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해피북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