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궤도 -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Youtube)

 

 

 

책 한 권의 수명은 얼마일까? 내 서가에 마흔 살을 넘긴 큰형님이 잠을 자고 있다. 1970년대에 나온 세계 단편 문학 전집이다. 국한문 혼용에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 1970년대의 출판 형식을 간직하고 있다. 책은 세월을 먹는다. 플라스틱 디스켓이나 항상 반짝이는 CD와 달리 오래된 책은 누렇게 변한다. 그 누런색의 정도가 책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뜻한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흰머리가 듬성듬성 자라나고, 주름이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종이로 된 큰형님의 몸도 누렇게 변했고,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곰팡이가 슬었다.

 

아버지가 총각 때 책을 파는 일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 이 세계 단편 문학 전집도 원래 팔아야 하는 책인데 주인을 만나지 못해 우리 집 서가에 오랫동안 눌러앉게 되었다. 책을 잘 읽지 않은 아버지에게 외면을 받았다. 그러다가 책을 좋아하는 내가 먼지와 거미들이랑 놀고 있는 큰형님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세계 단편 문학 전집은 총 22권으로 구성되었다. 시중에 나오는 단편 문학 전집을 비교하면 꽤 많은 권수이다. 단순히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세계 유명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유럽, 미국,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 각 대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엄선했다. 비록 나온 지 오래된 헌책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생소한 작가가 쓴 작품들도 꽤 있어서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 전집 덕분에 나는 세계문학의 창을 스스로 열어 눈앞에 펼쳐진 문학의 향연을 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래된 책, 즉 헌책에 대한 애정도 싹 틔우게 되었다.

 

헌책을 찾는 사람들은 책 속에 남은 빛바랜 흔적도 소중하게 여긴다. 전 주인의 심중이 드러난 한 줄의 메모, 밑줄 긋기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 대해 그리움과 안부를 종이책에 띄어 전하는 짧은 편지글까지. 이런 흔적들은 책과 독자들 간의 대화이다. 책의 고유한 고고학적 연대기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오래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손자국 하나 없는 새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묘미다.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 같은 책방은 지식의 보고가 숨겨져 있는 거대한 책의 광맥이다. 헌책 마니아들은 흔히 절판된 책을 구하거나 전집 1질을 모으는 도전을 한다. 크로스 워드 퍼즐을 풀듯 이 책방 저 책방에서 책을 사서 짜 맞추다 보면 대개 마지막 한두 권이 난관이다. 애초에 이 책방에 없었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경쟁자가 선수를 썼을 것이다. 끝내 찾지 못한 책은 영영 만나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가 된다. 그렇지만, 발굴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도 책방이 밀집된 지역에 가면 세상에 잊힌 책을 찾으려는 애서가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속에 담긴 지식은 흐르는 물과 같다. 전시품으로 서가에 꽂혀있을 때는 박제돼 있다가도 필요한 사람들 사이로 흐르면 다시 살아 숨을 쉬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모든 사물 속에 어떤 최고의 생(生)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아케이드 프로젝트』 N 1a, 4). 그가 말하는 ‘어떤 최고의 생’이란 사물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뜻한다. 헌책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 한때 흐르다가 멈추어버린 지식이 옹달샘처럼 고여 있다. 옹달샘이 너무 오래되면 사람이 마실 수 없는 썩은 물만 남는다. 헌책 또한 시대가 변화하면서 쓸모없어진 낡은 지식을 모아놓은 무용한 사물이 된다.

 

그렇지만 진정한 헌책 마니아 또는 헌책을 좋아하는 수집가는 시대가 외면한 지식이 나열된 활자 속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줄 안다. 누군가에게는 쓸모없는 책이 헌책 마니아나 수집가에게는 새 책으로 보인다. 손으로 조심스럽게 오랜 세월동안 방치된 지식의 옹달샘에 적셔본다. 마실 수 있는지 직접 물 한 모금 목을 축인다. 식용이 가능하다면 지식에 목마른 헌책 마니아에게는 좋은 지식의 옹달샘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일은 새것을 갖는 게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다. 새 주인이 된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이 되었다. 내 서랍에 쌓여 있는 수집품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121쪽)

 

 

벤야민은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궁핍한 생활고를 겪어도 수집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모은 수집품은 대부분 장난감, 그림엽서 그리고 책이었다.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만드는 것. 벤야민은 쓸모없는 사물 속에 ‘최고의 생’을 발견할 줄 알았고, 그것들과 진솔한 대화를 시도한다. 그는 수집품을 설명하는 간단한 내용을 캡션 형식으로 써붙이기도 했다. 그가 모은 수집품은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가치에만 중점을 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을 자신의 수집품을 ‘하나의 풍경이나 운명의 무대인양 연구하고 사랑’했다. (《Walter Benjamin's Archive》)

 

 

 

 

 

 

 

 

 

 

 

 

 

 

 

 

그는 수집품을 통해 자신만의 경험과 세계를 상기한다. 그 속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하나의 풍경’이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물 속에 그대로 간직한 지식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벤야민은 자신을 사물 속으로 밀어 넣는 수집가다.

 

 

나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일들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우연과 운명은 바로 이러한 책들의 혼란 속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나의 서재 공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벤야민은 책 속에 자신이 필요한 지식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책과 관련된 과거의 경험들과 추억들을 떠올린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어린 마르셀이 마들렌 한 조각을 입으로 베어 물자 우연하게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빠지는 것처럼. 이렇듯 벤야민의 수집품은 이 고독한 수집가를 과거의 일들이 온통 물들인 하나의 풍경으로 초대해주는 타임머신이 된다.

 

안도현 시인은 손때를 묻힌 사람의 간절함이 묻어 있어 손때 묻은 물건들이 아름답다고 했다. 물건을 소중히 여길수록 손때가 많다. 벤야민이 평생 수집품을 모은 이유는 파편화된 소중한 추억을 모으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한 번에 모으면 세상의 풍경 전체를 완성한다. 자신만의 수집품 세계로 커다란 세계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쓸모없는 물건에 대한 추억이나 향수는 이기심에 찌든 우리에게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감정을 갖게 한다. 잊힌 과거가 되살아나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물 속에 들어있는 최고의 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득 암울한 생각이 찬바람 한 줄기처럼 살짝 내 마음에 스친다. 세월이 흘러가고 내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내 앞에서 살아 숨 쉬던 수집품 속 최고의 생도 끝이 난다. 과연 내가 죽으면 누가 이 쓸모없는 사물들을 알아줄까? 망각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종착점. 자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런 걱정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때까지 나는 책을 사고 모으는 동안 무엇을 찾게 될까? 벤야민처럼 나만의 세계를 찾고 싶다.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어 닳아 산산이 부서져 버린 내 생의 반쪽, 내 과거. 자꾸 무한궤도의 노랫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내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책방에서 지나간 세월 속에 잃어버린 내 생의 반쪽을 찾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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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12-10 0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프로 공감가는 글이네요. 제가 요즘 느끼는 생각들과 비슷해요. 저도 오래되어 빛이 바랜 책을 갖고 싶어요. 가장 궁금한 것은 계몽사와 계림사에서 나왔던 어린이문고요. 그 책들을 다시 한번 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 것 같아 그리워요.

cyrus 2014-12-10 13:05   좋아요 0 | URL
저는 계몽사에 나온 디즈니 만화책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어요. 가끔씩 읽어보면 디즈니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옛날에 읽은 책을 자주 보지 않지만,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창고 같은 방에 따로 보관합니다.

영양갱 2014-12-27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몽사 어린이 문고..아..추억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