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편지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치지 못한 채 서랍 한쪽 구석에 보관된 편지도 있을 것이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부치는 편지도 있다. 편지라고 해서 꼭 편지지에 쓰라는 법은 없다. 가끔 누군가에게 책 선물을 할 때 하얀 속종이가 편지지가 되기도 한다.

 

감성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사랑하는 이성에게 주는 책에 편지를 쓰는 것은 무척 낭만적이다. 책을 받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때 책에 편지 쓰는 것은 좋지만,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책을 깨끗하게 읽고 보관하는 성격의 사람이라면 선물 받은 책에 누군가의 글씨체가 있으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책 편지를 쓰기 전에 상대방이 책을 다루는 습성은 알고 있어야 한다. 편지를 쓰고 싶다면 차라리 속종이에 쓰는 것보다는 작은 엽서나 편지지에 써서 책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이 낫다. 

 

중요한 편지가 아닌 이상 오래 보관하기 힘들다.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정성껏 쓴 편지도 슬프게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경우도 있다. 책 편지는 책 속에 적힌 글이기 때문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가능성은 없지만, 문제는 책이 오래 보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책은 헌책방에 팔 수 있다. 헌책방에 가면 속종이에 편지가 적힌 책을 가끔 발견한다. 책을 팔기 전에 편지를 확인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서 책 속에 적힌 편지를 기억 못한 채 팔 수 있다. 그리고 책 선물을 준 사람을 잊기 위해서 일부러 헌책방에 파는 것일 수도... 그래서 헌책방에 이런 책 편지를 보게 되면 꼼꼼하게 읽어본다. 편지 속에 숨겨진 사연이 무척 궁금하다. 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속에 편지를 쓴 사람이, 그리고 그 편지를 읽은 사람이 누군지를.

 

만약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자신이 쓴 편지가 적힌 책을 발견하면 어떤 심정일까? 과거에 썼던 편지가 오랜만에 보게 되면 감회가 새로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씁쓸할 것이다. 아무리 책을 보관하기 힘들고, 안 읽는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받은 책 선물을 쉽게 파는 것은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 될 수 있다. 작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홍준표 의원에게 선물했던 책이 헌책방이 발견돼 홍 의원이 사과한 적이 있었다. 그 문제의 책이 하필 도올 선생이 쓴 『동경대전』이었다. 속표지에 도올 선생의 친필 사인과 ‘홍준표 의원님께’라는 글씨가 있어서 딱 걸리고 만 것이다.

 

책의 전 주인에 관한 기록이 편지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아무리 책의 내용이 좋아도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 도올 선생의 책처럼 유명 인사의 사인이 있다거나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을법한 유명 인사의 편지가 적혀 있다면 몰라도 남이 쓴 편지가 내가 읽어야 할 책에 있다는 것은 영 탐탁치가 않다.

 

나는 편지가 적힌 책이 보존 상태가 만족스러우면 사는 편이다. 원래 책을 사기 전에 편지가 적혀 있는지 확인하는데 가끔 그걸 미처 확인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도 책의 전 주인의 흔적이 있다고 해도 괜히 편지가 적힌 부분을 오려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책은 한 사람의 주인 곁에 오래 있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헌책방에 전전하는 운명, 그 둘 중 하나이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있어서 책 편지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편지 속 내용을 보면 감탄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감성이 느껴지는 시적 문장은 빛난다. 왜 이런 좋은 내용의 편지가 적힌 책을 파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괜히 내가 그 편지를 쓴 무명인의 심정처럼 씁쓸하고 약간의 슬픈 감정도 느낀다.  내가 발견한 책 편지들은 사랑하는 이성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같다. 

 

올해 초에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구입했는데 뜻밖에도 속표지에 짧지 않은 편지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승희’라는 이름의 여자에게 보낸 편지다. 문장으로 봐서는 필체가 상당한 걸로 보인다. 글씨도 무척 잘 쓴다. 내용으로 봐서는 승희는 어느 남자에게 음악 CD를 선물로 줬다. 승희는 솔로 가수가 아닌 여성 그룹의 멤버이며 2004년에 정식 데뷔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남자는 이 책을 선물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는데 가수가 되어서 상경했을 것이다. 남자 입장에서는 그녀의 성공이 기쁘고 자랑스럽겠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삶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인가 보다’라는 문장에서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어느 남자의 슬픈 비극이 연상된다. 결국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사랑해’ 대신에 ‘행복해라’ 밖에 없다.


남성은 승희에게 고독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전한다. 무슨 의미일까? 참으로 역설적인 표현이다. 고독과 행복은 함께 공존한다...?  이 편지 속 사연이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10년이 지난 책 편지는 지나간 추억이 되어 망각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걸 또 내가 영영 오랫동안 잊힐 뻔했던 망각의 감옥에서 구출한 것이다. 과연 승희는 어떤 가수였을까? 아마도 승희는 본명일 수도 있겠다.

 

지난주에 내가 자주 다니는 헌책방에서 책 편지가 있는 책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정현종 시인의 시집 『나는 별 아저씨』다. 이 시집이 출간된 지 꽤 오래됐고, 편지 또한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시집에 걸맞은 한 편의 시 같은 편지다. 편지를 쓴 사람은 평소에 시집을 많이 읽고, 좋아했다. 그래도 자신은 시를 잘 알지 못한다고 겸손의 표현을 썼다. 생일선물로 시집을 줬는데 시를 읽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느낄 것을 권한다. 참으로 좋은 편지 내용이다. 문장 속에 삶의 여유가 살짝 묻어있다. 1993년에 편지를 쓴 사람은 지금도 어디선가 변함없이 시를 즐겨 읽고, 그 시간을 통해 여유를 느끼면서 잘 지내고 있을까? 누군지 몰라도 이런 편지가 무척 고맙다. ‘객관적 상황이 열악하더라도 가슴 속에도 많은 여유가 찾아들기를 바란다’ 남이 쓴 편지는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사람에게 삶에 힘을 불어넣는 좋은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시집에 있는 편지 덕분에 삶의 여유의 가치를 느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1년 전에 쓴 편지가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읽게 되는 이 운명적인 만남. 이런 편지 한 통이 과거와 현재를 ‘감성적 공감’이라는 무언의 감정으로 연결될 때가 있다. 이래서 사는 게 참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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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28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어떻게 도올 선생은 자기 책이 헌책방에서 딱걸렸을까?ㅎ
이 페이퍼 승희라는 가수한테 딱 걸리는 거 아닐까?
이맛에 헌책방을 다니기도 하겠지?
그런데 바로 이점 때문에 책에 자기 서명이나 인삿말이 들어가는 게 조심스러워져.
책선물에 밋밋하게 그냥 주기도 뭐하고.
나도 요즘 헌책방에 책을 내다 팔곤하는데
저자 사인본은 차마 못 팔겠더라.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팔자니 그렇고, 안 팔자니 그렇고...
그래도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간직하고 있다만.ㅠ
그런데 진짜 저 준호라는 사람 글 잘 쓴다. ㅎ

cyrus 2014-05-28 22:43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가수 중에 '승희'라는 이름은 없는 것 같아요. 설마 이런 조용한 블로그를 보겠어요? ㅎㅎㅎ 저는 사인본은 절대로 팔지 않아요. 저자의 사인이 있는 책은 보통 책보다 가치가 높고, 특별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