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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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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그림 보는 안목은 예술적 감동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우리는 '그림'이라는 예술작품을 맞대면하면 그림 자체에 압도되어 그림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겨우 빠져나오면 '왜' 이런 그림을 그렸냐는 궁금증에 앞서,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하는 궁금증이 앞선다. 그건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대한 경외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 궁금증까지 해결이 되었다면 작가가 보일 것이고 그의 삶과 사상이 보일 것이다. 그 이후에나 시대적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내려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림밖에 안 보이겠지만, 알고 나면 다른 많은 것들이 보인다.

 

여기서 '시대적인 관점'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당대의 문화·경제·정치·일상 등의 관점으로 또는 관점과 함께 그림을 보는 것일 게다. 즉, 그림이라는 프레임(창)을 통해 당대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하는데, 바로 그 대화의 방법론으로 그림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감상법을 어디 가서도 배우기 힘들기 마련인데 그림의 세상으로 향하게 만들도록 우리들 마음의 문을 열어 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유홍준 명지대 교수다. 그는 고마운 분이다. 우리 것을 대하는 대중의 문화적 눈높이를 한껏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작품을 보는 자신만의 눈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을 안목이라고 한다. 안목을 기르는 방법으로 명작을 많이 대하는 것만큼 좋은 길은 없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안목 높은 사람들의 작품 보는 법을 자신의 시각과 비교해봄으로써 예술 감상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4쪽)

 

이 책 한 권에는 그동안 가치를 몰랐던 명작, 그 명작들에 드리운 아름다움, 새기지 못했던 감흥, 가늠하지 못했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안목을 틔워주는 설명, 길라잡이가 돼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책만 읽는다고 해서 예술 감상의 안목이 한순간에 기를 수 없다. 어떤 사물을 두 눈으로 본다는 건 눈의 숫자만 많아지는 게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뭔가를 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걸 보는 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아는 만큼만 보인다.

 

명작이야 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모르고 보면 그냥 그림이거나 글씨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감탄을 자아낼 서정적 극치의 아름다움과 보석보다도 값진 실물적 가치가 보이게 된다. 그러기에 명작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명작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한다. 특히 그 안목은 실제 작품에서 받은 예술적 감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림 속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그걸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Scene #2  험준한 산 속에서도 인간의 역사는 있었다네

 

 

 

 

이인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부분) 18세기 후반

 

 

사방이 온통 험한 절벽으로 막혀 있는 이곳은 걸어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들어와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였다고도 하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였다고도 하는 걸 보면 꽤 오래전부터 이곳 산 속에 들어와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육대 조 할아버지가 경치 좋은 곳을 찾다 이곳에 반해 눌러 앉았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물론 그 전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외줄에 매달려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도르래밖에 없는 곳이 좋아 눌러 앉을 바보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세상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이곳 사람들을 험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위험하지만 절벽 사이로 난 길을 통해 바깥세상 사람들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낯설어한다.

 

아무리 험준한 지형이라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고 바위가 앞을 막으면 바위를 뚫는다. 계곡 위로는 다리를 짓고 절벽 위로는 잔도를 꽂는다. 비탈길에는 계단을 만들고 언덕위에는 누각을 짓는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는 탑을 쌓고 계곡과 계곡 사이에는 구름다리를 걸친다. 그렇게 자연을 달래고 타협하고 부탁하며 살아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담은 그림이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다. 강산은 끝이 없고 무궁무진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끝이 없고 영원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고송(古松) 이인문이 끝없이 계속된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강산무진도’ 속에 담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산과 바다와 호수가 있듯 그림 속에도 다채로운 자연경관이 펼쳐져 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험준한 기암괴석이 나그네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그 자연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줌의 흙만 있어도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듯 한 치의 땅만 있어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강산무진도’는 8m가 넘는 대작이다. 아무리 좋은 화보집이라 해도 8m 그림이 온전하게 실려 있는 책은 없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화보집을 통해 그림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감상자들은 그림의 일부만 보고 만족해야 한다. 부분도는 전체 그림 중에서 이야기가 가장 풍부한 클라이맥스가 실려 있다. 작가의 필력이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제작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림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를 다 보지 않는 상황에서 그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이 한 페이지에 실린 그림 일부의 아쉬움을 고송의 다른 그림과 고송의 벗인 단원 김홍도의 그림 몇 점으로 달래본다.

 

 

 

 

 

김홍도 「송석원시회도」 1791년

 

 

고송과 단원은 동갑내기 궁중 화원으로서 서로 자웅을 겨룰 정도로 절친한 관계이다. 그렇지만 두 화가의 산수화를 비교해보면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에 확연히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고송은 시각을 넓게 잡아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압축하여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

 

 

 

 

 Scene #2  춘화도 명작이다

 

 

 

 

김홍도 「춘화(운우도첩 중)」 18세기 후반

 

 

엉덩이만 깐 채 맨바닥에 질펀하게 앉은 남자가 여인을 뒤에서 품에 안고 있다. 영화 '취화선'에서, 전통사극에서 패러디되는 도상이기도 하다. 자리도 깔지 않고 옷을 입은채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젊은 양반댁 자제들이 봄 풍류를 나섰다가 눈이 맞은 여인과 은밀한 곳을 찾아든 모양이다.

 

조선 최고의 춘화첩 운우도첩(雲雨圖帖)에서 만난 그림이다. 운우는 성희를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조선시대 에로티시즘의 절정, 춘화의 백미가 담긴 운우도첩과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은 조선후기 춘화 가운데 가장 회화성이 뛰어나고 격조를 갖춘 작품집이다.

 

우리 춘화첩에는 남녀노소와 신분고하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그려 유교의 도덕개념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당대 사회의 성문란을 보여준다. 신분사회에 대한 풍자와 농담이 짙게 깔려 있는데, 춘화가 중세의 유교적 엄격주의를 깨는 일에 더없이 좋은 예술적 소재였음을 시사한다. 때로는 해학적이면서 낭만이 흐르고, 때론 점잖은 듯 하며 가식 없는 에로티시즘의 감칠맛이 우리 춘화의 아름다움이다.

 

춘화는 그 옛날 거의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시집가던 일반 가정의 규수들의 첫날밤 두려움을 좀 덜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활량들이 기방 같은 곳에서 새로운 체위를 섭렵하기 위해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빨리 왕의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어린 왕비나 세자빈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시각교재로 많이 사용됐기 때문에 전문 화가들의 우수한 작품들이 남기도 했다.

 

분명치 않은 춘화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에는 다른 화가의 작품의 모작도 있고 조잡한 것들도 있다. 현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정재 최우석 등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한 두 권씩의 화첩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진위 여부가 계속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작품들의 예술성으로 보아 위작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조에서는 이런 그림들이 일반에게 잘 공개가 되지 않았다. 다락방 깊은 곳 같은 데에 숨겨져 있다가 없어진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유교사상으로 생긴 성에 대한 편협한 생각과 이런 그림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체면의식 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몰래 보고 즐기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 우리네 내숭문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성 높은 춘화 중에는 야한 내용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서정적이다. 그러니까 그림을 볼 때 배경을 꼭 같이 봐야 한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곳이나 물이 한껏 오른 버드나무 옆에서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은밀하게 즐길 수 있는 무대로서(?) '세팅'이 아주 기가 막히다. 주인공과 무대를 같이 보라는 것이다. 자연 풍경의 운치 즐길 줄 아는 선조의 센스 있는 멋을 엿볼 수 있다. 의외로 이런 미적 감각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자 행위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건전한 성(sex)이 아닌가. 물과 버드나무가 없었다면 그저 남녀가 질펀하게 몸을 섞고 있는 ‘야한 행위’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포르노그래피'나 '야사'에 빗댈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춘화를 보고 있자니 운치와 함께 유머가 느껴져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춘화도 떳떳이 명작이 될 수 있다.

 

 

 

 Scene #3  조선 최후 화원의 슬픈 자존심

 

 

 

 

안중식 「백악춘효(가을본)」 1915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바로 앞에는 두 마리해태상이 놓여 있다. 해태는 갑옷처럼 두꺼운 외피와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입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다. 보기에 따라 숫사자 같기도 하나 그와 꼭 닮은 현실의 동물은 찾기 어렵다. 해태는 불을 먹고 산다는 말도 있고, 시비와 선악을 판단한다는 얘기도 있다.

 

광화문에 해태상을 둔 이유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쪽 멀리의 관악산은 엄청난 화기를 머금은 불의 산이다. 도중에 한강이 가로질러 흐르지만 불기운이 워낙 드세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목멱산(木覓山ㆍ남산)을 불쏘시개삼아 도성을 단숨에 불지를 태세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를 궁궐 앞에 파수꾼처럼 세웠다는 것이다.

 

화가 안중식이 그린 '백악춘효(白岳春曉)'는 해태상의 과거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광화문, 경회루, 근정전 등 경복궁의 주요 전각은 물론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선 북악산과 북한산의 봉우리들을 부감법으로 고스란히 묘사했다. 안중식은 해태상을 맨 앞에 두고 경복궁 일대를 작품화해 해태상의 비중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는 해태상과 경복궁의 불행한 운명을 예감했을까? 풍성했던 존재들이 시들고, 저물어가는 가을 분위기와 맞게 문 닫힌 광화문 등의 묘사에서 망국의 설움이 느껴진다.

 

안중식은 근대화가의 아버지로 알고 있지만, 그는 전통 기법을 지키기 위해 애쓴 조선 최후의 화원이기도 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도화서가 폐지되면서 생업을 잃자 1911년 조선서화미술회를 설립해 제자를 키웠다. 그가 고수한 기법은 한국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장승업으로부터 비롯된 중국 장식화풍이었다. 비록 전통 계승의 의지와 항일의식까지 뚜렷이 갖고 있었지만 기법상으로는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안중식의 회화는 단순히 화원으로서의 고고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기법의 정체라고 보기 어렵다. 그 시대 화원이 가져야했던 망국의 근심이 자기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최고의 실력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1915년, 이미 경술국치(1910년)가 지난 시기에 그려진 '백악춘효'는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와 새로운 기법 모색의 한계 사이에서 갈등했고 고뇌와 절망, 참여와 은둔의 복잡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화원의 고고한 예술적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점점 외세로 인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슬픔을 심키고 있는 자존심이다.

 

작품의 완성도만 높다고 해서 '명작'인가. 그림은 때로 관객에게 어떤 삶의 자세를 갖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림을 제작할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망국의 슬픔을 달래고자 했던 화가의 정서가 관람객의 마음에 온전하게 전달되고 느껴진다면 두고두고 봐야할 명작이다.

 

 

 

 Scene #4   그림 감상에도 미메시스가 필요하다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는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이나 재현을 의미한다. 예술은 자연이나 위대한 작품 같은 훌륭한 대상을 모방함으로써 시작된다는 뜻이다. 서양의 미메시스에 해당되는 행위를 동양화에서는 ‘방작(倣作)’이라 부른다. 옛 대가의 그림을 본 떠 그리는 것이 방작이다.

 

비슷한 단어로 ‘임모(臨模)’가 있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놓고 보고 그리는 것이고, ‘모(模)’는 투명한 종이를 사용해 윤곽을 본뜨는 것이다. 임모의 목적은 앞 시대 사람들이 그림 그릴 때의 경험을 배우는 것이다. 본뜬다는 점에서는 방작이나 임모나 오십보백보지만, 방작은 겉모습만 비슷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정신이나 뜻을 살리는 점이 임모보다 창작에 더 가깝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처음 그림을 배울 때 뿐 임모와 방작을 거듭했다. 대가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미메시스 그리고 임모와 방작는 일종의 선별과 선택의 작업이다. 그림의 형태만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있는 예술적 본질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기법으로 만들 수 있도록 체득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 뭔가를 배워나가기 위한 인간 고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여기서도 미메시스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림을 보면서 명작으로서의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유홍준 교수, 저자가 선별한 그림 설명으로 이루어진 글의 순례길에만 쫓아간다면 정작 독자(또는 그림을 보는 관객)는 저자가 설명하는 그림의 내용만 이해하는데 그친다. 반면 저자의 순례길을 따라가면서도 가끔 정해진 방향과 반대로 가보거나 순례길에 볼 수 없는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 본다. 결국, 전문가가 만든 순례길은 그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이런 순례의 경험과 그 느낌을 살려서 순례길을 만든다면 자기만의 명작순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쓰는 서평으로 기록한다면 순례의 감동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

 

이번에 쓴 글도 그런 맥락에서 작성한 것이다.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쓴 서평에서 벗어나 명작순례를 통해서 느낀 감동과 정서를 최대한 드러내어 나만의 글길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나 스스로 명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을 쓰고자 했던 저자 유홍준 교수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목적과 의도가 빗나가거나 저자가 명작을 보는 안목이 다르더라도 독자로서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꼈다면 나만의 명작순례가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명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조건은 작품의 객관적 아름다움에 있지만, 우리는 그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조건은 주관적인 감동이다. 전문가가 제공하는 그림의 기본 정보를 이해하고, 그걸 암기하듯이 알려고 한다면 절대로 그림 속에 숨어있는 본질인 예술적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전문가의 감상을 관람객 자신의 감상과 비교한다면 그동안 자세히 보지 못했던 세밀한 묘사마저도 아름답게 보이는 예술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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