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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평점 :
부끄러워라
더 이상 분노할 수 없다면
내 영혼 죽어 있는 것 아니냐
완장 찬 졸개들이 설쳐대는
더러운 시대에 저항도 못한 채
뭘 더 바랄게 있어 눈치를 보고
비굴한 웃음 흘리는 것 아니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제 그만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차라리 파락호처럼 떠나버리자
아아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좀비들만 지상에 남아 있구나
- 정희성 「부끄러워라」-
♣ 정의 따윈 잊고, 눈 감으며 지내라고?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깔아라. / Don‘t look ’em in the eye 그들과 눈을 맞추지 마라. (…)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 깔아라. / You‘ll always be a slave 너는 언제나 노예일 뿐이니까.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많은 이들이 손꼽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가 거대한 함선을 이끄는 죄수들의 절규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첫 장면이다. 웅장한 멜로디에 비참함과 절망감이 사무치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이 장면을 볼 때면 오늘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정’(不正)과 ‘부패’ 앞에서 ‘정의’를 푹 숙이고 눈을 감는 비겁한 공직자와 대중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법의 상징으로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의 ‘정의의 여신’ 디케(Dike)다. 디케 조각상은 대개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는 칼이나 법전을 쥐고 있다. 저울은 형평성을, 칼은 엄정함을 나타낸다. 디케는 또 눈을 감거나 안대로 가리고 있는데, 이는 판결에서 주관성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서울 세종로의 옛 대한변호사협회 자리에는 지금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집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는 모습의 디케 상이 서 있다. 옛 사법연수원에도 눈을 지그시 감은 디케 상이 있었다. 지금 우리 대법원의 로고 또한 디케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일 뿐, 실제 법집행 과정은 그다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비리와 오류를 덮으려고 자신들이 써야 할 안대로 국민의 눈을 가리려고 한다. 한국의 디케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실체적 진실만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이겠지만 시야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오게 마련이다.
♣ 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무식한 지도층들
법(法)은 순리다. 법은 물 수(水) 변에 갈 거(去)로 이뤄진 글자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치를 담고 있어 모두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상식을 벗어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법적으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물고 늘어지는 갈등만 이어지고 있다.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채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무혐의를 받음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한 파렴치한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들이 법, 곧 순리를 거스르겠다는 의미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검찰은 더하다. 검찰은 ‘정의롭다’는 말을 즐겨 쓴다. 정의는 바른 도리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름은 흑백이 아니다. 바를 정(正)은 하나(一)에 이름(止)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누구나 같은 결론에 이름을 뜻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는 날선 칼을 들이대고 지난 정권의 인사들만 잡아들이는 일은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검찰은 서민들의 범죄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힘센 이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 공직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점, 기업 운영으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 등의 이유로 정치인과 경제인에 대해 솜방망이 구형을 했다. 법은 거미줄과 같아 힘이 없는 이들은 붙잡지만 힘센 자는 찢고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현실이 그 짝이다. 법이 그물이 되어 힘센 자는 꽁꽁 묶고 작고 힘없는 이들은 성긴 구멍으로 빠져나가도록 할 수는 없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법은 그물보다는 거미줄에 가깝다. 또 검찰에는 ‘정의롭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보수주의자로서, 고백하고 요구하고 경고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강단에서 물러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예전에 진행했던 시사 프로그램 제목대로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법을 집행하는 소수 지도층에게 날카로운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나라 지도층들은 너무 무식해요. 그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지와 신뢰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지배 체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장 눈앞의 불이익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죠. 장자연 사건, 김승연 회장 사건, 전경환 사건, 제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그런 사건이거든요.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있고, 오로지 모르고 있는 것은 수사하는 경찰, 검찰, 범원뿐인 것 같아요. (중략) 조금만 똑똑했더라면 바로 그 앞에서 자신의 병든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자신들의 한 부류이자 동료일 수도 있는 해당되는 범법 행위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죠. (중략) 그렇게 우리 제도와 시스템을 믿어달라는 것이 보수의 모습인 건데요. 우리나라는 그게 아니고, 거꾸로예요. (15~16쪽)
결국 범죄에 대한 국가의 인식 부재는 우리 사회 전체에 통용되어야 할 ‘정의’과 ‘도덕’의 의미가 무색해지게 만들며 우리의 상식에 벗어난 거대 국가 범죄를 끊임없이 잉태한다는 것이다.
♣ 범죄자, 괴물이 아닌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병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는 한국적 범죄의 특성과 연쇄살인의 사회적 배경부터 시작해 불법 도박과 스포츠 승부 조작, 공소시효, 오원춘 사건, 국가 범죄에 가담한 경찰 등 범죄와 관련된 수많은 소재를 제시한다. 현직 경찰관으로도 일했던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이자, 연쇄살인 등 다양한 범죄를 분석해온 표창원 전 교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돌직구 질문의 표적지는 독자에게 향한다. 이웃집에서 벌어진 단순 강도에서부터 거대한 국가기관의 부정까지, 범죄를 애써 외면하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혹시 당신도 공범이 아니냐고.
그는 범죄자가 늘 우리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나와 상관없는 '괴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표 전 교수는 프로파일러로 활동했을 때 연쇄살인범, 영아살해범 등 다양한 범죄자를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기가 꺾인 상태였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애정을 못 받아본 사람들이라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마음을 열었다.
표 전 교수는 연쇄살인의 사회적 징후가 뚜렷하면 지진ㆍ태풍 대비에 맞먹는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연쇄살인은 태풍 한번 부는 것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다. 2000년대 들어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별도의 괴물이라기보다 사회병리 현상이 돌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빈부격차, 낮은 취업률, 학교 폭력 등이 그 징후다. 태풍에 대비하는 것처럼 대응할 필요가 있다. 성장보다는 복지와 분배에 집중하고,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이상 성격자를 찾아 치료하는 등의 예방책이 있다.
♣ 범죄 앞에서 부인하는 대중의 침묵
‘과연 당신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습니까?’ 표 전 교수가 독자들에게 향하는 묵직한 돌직구 같은 질문에 용기 있게 받아 칠 수 있는 독자가 있을까?
한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3.8%가 ‘공정하지 않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는 44%가 ‘10억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짓을 저지를 수 있다’라고도 응답했다. 모두가 퍽퍽하고 삭막한 불신과 의심, 경계, 피해 의식의 악순환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이런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들이 사람들에게 잠재된 분노를 만들고 다시 이것이 왜곡된 방향으로 무서운 범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가령 당신은 직장에서 당신의 인사고과 책임자가 한 직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걸 언뜻 들었다. 또는 마을에서 나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다. ‘눈감아 버린다/못본 체한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모르는 게 약이다/그건 나와 무관해/침묵의 음모/괜한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전체 사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차라리 몰랐다면/외면해 버렸지/심지어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어.’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스탠리 코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경험의 밑바탕에는 '부인'(不認)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인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개념화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아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거나 인지한 관찰자, 심지어는 피해자조차도 때로는 사실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제쳐두거나 재해석하게 된다.
인권을 해치는 범죄와 이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가해자와 관찰자(방관자)의 완고한 ‘부인’에 가까운 침묵이 자리 잡고 있다. 가해 권력의 인권침해 부인은 이를 방관하는 일반대중의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며, 일반대중의 부인은 가해 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상태, 곧 ‘부인’과 ‘침묵’은 또 다른 국가 범죄에 냉소하고, 제2의 신창원, 오원춘을 등장하게 만든다.
♣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를 위한 표 전 교수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의를 제대로 세우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단다. 이건 초등학생 때도 배웠는데도 이상하게 우리는 실전에서는 써먹지를 못한다. 오히려 나쁜 짓은 자기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한다.
표 전 교수는 또 보수와 진보의 좌우 갈등도 폭력을 키우는 요인으로 본다. 극단적인 대립이 폭력을 낳는다는 의견이다. 진보와 보수가 조금씩 자기 견해를 양보하고 범죄에 대한 균형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해소된다면 국가 공권력· 강자 등의 도덕 윤리 회복이 원활해진다. 권력과 정부가 솔선수범하고 엄정한 법규를 세워야 폭력에 대한 근본적 치료가 가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부정과 불의에 우리는 둔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덮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고 싶어 하며,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외치는 나라다. 불의에 침묵하고 부인하는 국가의 전형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대표 정치이론가이자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선한 자의 침묵은 악의 승리를 도와준다. 침묵은 곧 동조고 방관이며 우리 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조그마한 관심과 배려에 대해 침묵과 외면으로 두 눈을 내리 깔고, 한 발 물러 서있을 때가 많다.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에 대해 주변에 대해 관심과 행동보다 침묵과 방관으로 악의 승리를 도와주고 있는 공범 역할을 하고 있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