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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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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건방진 신문팔이

 

 

 

 

 

 

 

우리는 누구나 녀석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정말 이상한 신문팔이였다. “동아일보요, 서울신문이요, 중앙일보요, 민국일보요, 내일 아침 한국이요, 내일 아침 조선이요, 경향신문 있습니다. 신아일보 있습니다.” (238쪽)

 

 

 

이상한 신문팔이 소년은 매일 저녁 9시쯤 좌석 버스로 서대문을 지날 때면 각종 신문을 외쳐댄다. 비좁은 시내버스를 비집고 올라와서도 정작 신문을 파는 데는 정신을 쓰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는 신문을 파는 일보다는 자신이 외쳐대는 대사를 즐기면서 그것 때문에 웃음을 참지 못해 하는 건방진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잠깐 버스가 서 있는 동안에 신문을 팔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 만만하게 외쳐대는 그 목소리와 느긋하면서도 일정하게 이어졌다 끊어지는 대사가 특이했다. 그 자신 그런 대사를 즐기고 있음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지난 가을 추석날 저녁. 어떤 사내가 밤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날은 걸어서 광화문에서 서대문을 걸어가게 되었다. 문득 버스를 보낸 소년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달이 비친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것을 사내가 엿들었다. 버스에서 외쳐대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추석날 저녁 이후 며칠 뒤부터는 그 소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버스를 놓쳤거나 아니면 감기라도 걸려 못 나오는 것일까? 그런데 10여 일이 지나도 소년의 모습을 목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예의 웃음기를 잃지는 않았으나 무엇인지 허전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신문 뭉치가 들려 있지 않았다. 신문도 팔지 않으면서 왜 버스 정류소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인가.

 

사내 하나가 광화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어서 가다가 그 소년을 만났다. 둘이 대면한 것이다. 사내가 소년에게 신문을 팔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소년은 민국일보라는 신문사가 폐간되어 버리는 바람에 동아, 서울, 중앙, 민국일보라고 외칠 때 리듬에 맞춰 부르는데, 민국 일보가 없어져서 어색해 버린다는 거였다. 그 소년은 민국일보가 폐간되자 신문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신문 파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민국일보를 뺀 채 다시 외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신문을 팔 것이라고 했다.

 

“말하나마나지요. 신문을 팔아야지요. 그렇지만 아직 소리가 그전처럼 신이 나질 않아요. 민국일보가 다시 나와 준다면 좋겠지만......” (247쪽)

 

 

소년이 다시 신문을 파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연습이 잘 안 되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도록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민국일보는 다시 복간되지도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의 앞잡이가 된 신문들

 

이청준의 단편소설 <건방진 신문팔이>가 발표된 해는 1974년. 이때는 한국 언론의 암흑기였다. 유신 정권의 통제 속에 공정한 보도를 해야 할 신문은 강제적으로 폐간되었다. 민국일보처럼 정권에 밉보인 끝에 폐간하는 신문이 많았다. 일부 신문은 시퍼런 권력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권력의 힘을 믿고 폭력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민족 정론지를 자처한다. 자신들이 일제에 항거했으며,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불씨를 지폈고, 민주화 이후에는 권력 감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런 일방적인 주장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들 거대 신문사들이 어떤 치욕스러운 역사를 감추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사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 언론은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폭력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왔다. 강자인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 독재에 언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약자인 민중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자신들이 항일 민족지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1936년 8월 10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서 게재한 곳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아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11일 뒤 동아일보에도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게재된다. 이길용 기자가 경영진 몰래 편집해서 올린 사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길용 기자를 불러다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호통을 쳤다. 이사장 인촌 김성수와 고위 간부들은 사진 한 장 때문에 신문사가 무기정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했다.

 

 

보전(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 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33쪽)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은 동아일보보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정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동아일보가 먼저'라는 생각이 우세하다. 왜냐하면 동아일보가 창간기념일 등을 통해 그동안 '일장기 말소 사건'을 자신들의 최대 업적인 양 대대적으로 미화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2년에 물산장려운동을 홍보했을 정도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글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쓰는 한편,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서는 친일 활동을 하였다.

 

조선일보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아군’이나 ‘황군’으로 불렀다. 그해 12월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1면 머리기사로 ‘아군의 승승장구’를 대서특필했다. 친일신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제 기관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폐간년도인 1940년까지 조선일보의 신년호 1면은 대부분 일본왕의 신년 하례행사와 총독의 연두사로 채웠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놀라운 건 해방 이후 이들의 생존 방식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셌던 1945년 12월,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왜곡 보도를 내보낸다.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고 소련은 시기가 짧을수록 좋다는 의견을 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명백한 오보였지만 그 여파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동아일보의 보도 이후 신탁통치에 찬성한 세력은 좌익으로 몰리고 친일파와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외세의존 세력들이 오히려 지배계층을 재구성했다. 다수 국민들의 반식민지․반외세 감정을 포착해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통치’라는 선전구호 아래 국내의 자주·민주세력을 매도하고 친일파를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다.

 

민족 자주의식을 말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해방 이후에 신문 보도를 통한 이념 갈등을 고착화시켰다. 일제의 앞잡이들이 해방 이후 미군의 앞잡이가 됐던 것처럼 이 신문들은 좌익을 적으로 내몰면서 일제 시절에 쌓은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한 일이다.

 

 

 

 언론탄압 속 한 줄기 희망, 동아투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파 공화국의 탄생에 주도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5·16 군사 쿠데타를 적극 지지했으며 유신독재를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여기에 중앙일보도 찬양 일색의 기사와 논조를 보내기 시작했다. 정권의 폭압에 눈 감고 인권유린을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매도했고 전두환 정권이 내려 보낸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다.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가장 반민주적인 통치행위는 언론의 비판에 재갈을 물린 공작이었다. 유신독재 아래서는 수시로 긴급조치를 선포해 특정 이슈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금지했다. 언론 공작 중 가장 심한 것은 비판적 언론인의 강제해직과 광고탄압이었다. 특정 언론사가 눈 밖에 나면 그 광고주들을 겁박해서 수입원을 틀어막았다. 국가안보를 위해 설치한 중앙정보부 같은 국가정보기관이 광고주인 기업인을 겁박하는 야만적 공작을 담당했다.

 

1974년 젊은 동아일보 기자들 중심으로 10.24 자유언론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는 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해 온 기업들을 압박했다. 동아일보는 곧바로 광고 해약사태에 직면했다. 신문은 광고면을 백지로 둔 채 인쇄됐다. 정권 측의 광고탄압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성원광고들이 답지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성원광고는 지속적으로 장기화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신문사의 광고 수입을 대체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사의 총수입은 대체로 구독료와 광고료가 반반 정도여서 지금에 비하면 광고 수입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상 광고료 수입은 매우 중요했다. 광고 수입의 숨통을 조이는 공작으로 신문사 사주 측은 결국 비판적 기자들을 해직시키면서 중앙정보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130여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언론 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사회문화, 학계 및 교육 분야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77~78년 엄혹하던 유신독재 말기에도 이들은 ‘동아투위소식’이라는 제3의 언론을 만들어 배포했다.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반독재 시위와 인권탄압 사건들을 게재했다. 정권 측이 가만 둘리 없었고 동아투위는 위원장과 총무 상임위원 전원이 불법 연행, 구속, 기소당했다. 동아투위의 등장은 한국의 언론사와 민주화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도언론에 맞서 언론의 사명을 일깨워주었다.

 

 

 

 진보 신문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전직 기자였으며 현재 통아투위 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원로 언론인 김종철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 신문사들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공개한다. 그러나 진보 진영에 위치하는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역시 연륜이 느껴지는 원로 언론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들 역시 공정한 언론의 사명과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 시절 조선일보, 동아일보보다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한 중도 노선 신문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많이 내다가 잠시 폐간되기도 했다. 4월 혁명 이후 출범한 장면 내각 정권 시절에 복간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권력의 대세 앞에서 공정성과 중립성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경향신문도 5.16 군사 쿠데타를 찬양하고 한때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장면 내각을 비판하는 논조를 펼쳤다.

 

한국 언론 보도의 가장 큰 문제점을 두 가지를 꼽자면 이념에 치우친 편향적인 논조를 펼친다거나 특정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수 있는 자극적인 상업주의적 보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조중동 보수 언론과 경향, 한겨레 등 진보 언론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인신공격성 보도를 내놓았다. 그랬다가 노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보수, 진보 언론은 추모 보도를 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추모 열기에 보수, 진보 언론이 합세했다. 노 전 대통령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노무현 죽이기’에 나섰던 언론이 ‘노무현 살리기’로 돌변한 것이다.

 

 

 

 

 ♣ 힘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신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최근 종편채널 JTBC는 가장 영향력 있고 신뢰도 높은 손석희 보도담당 사장을 앵커로 내세워 사실·공정·균형·품위를 강조하는 뉴스의 시작을 알렸다. 종편채널에 재벌 기업들이 주주로 참여한 사실을 본다면 방송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힘든 구조다. 과연 ‘언론-기업’으로 연결된 침묵의 카르텔을 JTBC가 깰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뉴스’뿐만 아니라 신문도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과 대자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공정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자유언론의 가치가 확립되어야 한다.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천관우 선생은 권력 앞에서 공정의 정도를 상실하고 무기력해지는 언론계를 ‘연탄가스 중독’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연탄, 그리고 대놓고 기사 검열에 나서는 중앙정보부 기관원이 사라진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한국 신문은 왜 ‘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신문’이 되지 못하는가?

 

힘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폭력의 자유를 누리던 시대는 지났다. 한국 언론이 ‘보이지 않는 힘’을 무서워한다면 균형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 매체는 종합적인 시각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언론 보도가 위축된다면 공론의 장이 축소될 수 있다. 수용자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진실성이 있는 보도를 위해 검증의 저널리즘을 실천한다면 언론 보도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했던 언론의 옹졸한 행보가 남긴 흔적을 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조중동에 대한 분노에만 그쳤다면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신문’은 있어도 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훌륭한 언론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업적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역사 앞에서 대하는 우리들의 올바른 자세이다. 특히 언론인을 꿈꾸는 젊은이라면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의 책은 필독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의 원수 샤를 드골은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은 독일 나치 협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장 먼저 법의 심판을 받은 피고인들은 언론인들이었다고 한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기 때 독일을 찬양하고 연합군과 드골 세력을 비난했던 기록의 증거들 때문에 ‘히틀러의 나팔수’들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문장의 힘은 무력(武力)을 무력(無力)화시킨다. 하지만 펜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진짜 언론인은 힘 있는 사람을 찬양하는 건방진 ‘나팔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정론직필의 ‘명사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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